DNA 재조합 연구와 그 응용에 대한 규제* (3)

셸든 크림스키

연방 의회의 활동

DNA 재조합 연구를 다룬 최초의 연방 의회 청문회는 아실로마 회의가 끝난 지 불과 2개월 후에 개최되었다. 상원 보건소위원회 주최로 1975년 4월 22일에 열린 청문회는 "자유 사회와 그 속의 과학자 공동체간의 관계에 대한 검토"를 주제로 내걸었다. 소위원회 의장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은 관련된 쟁점들이 기술적인 생물위험의 범위를 넘어 보다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특히 DNA 재조합 연구가 가져올 수 있는 광범한 사회적 함의들에 비추어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논쟁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케네디를 의장으로 하는 소위원회는 또한 국립보건원(NIH)의 규제지침이 NIH와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에 의해 재정지원을 받는 연구에만 적용된다는 점에서 그 적용가능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응해] 프레드릭슨은 1976년 11월, 연방 자금을 써서 개발된 연구 기법이나 새로운 유기체들에 대해 특허권을 승인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정책을 검토하는 연방기구간 위원회(interagency committee)를 소집하였다.1 이곳에서의 초기 회합들은 나중에 연방 정부가 rDNA 개발과 산업정책을 연계시키는 과정에서 수행하게 되는 역할을 위한 틀 구조를 확립하였다.

케임브리지 시가 DNA 재조합 연구를 규제하는 조례를 통과시켰을 때(1977년 2월 7일), 연방 하원과 상원의 소위원회들은 이미 이 쟁점을 다룬 배경 문서들을 확보하고 있었다.2 1월 19일에 하원에서 채택한 한 결의안에서는 DNA 재조합 연구가 "미국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파괴할 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3 케임브리지 시의 결정에 곧바로 뒤이어 의회의 활동이 가속되기 시작했고, DNA 관련 입법에 대한 고려는 의회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고민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7년 3월까지 DNA 재조합 연구의 규제를 위한 다섯 개의 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어 이 법안들에 관한 의회 청문회가 진행되었다. 한편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연방기구간 위원회는 보건교육후생성(HEW) 장관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재조합 DNA 분자의 이용과 생산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안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4

이 보고서에서 연방기구간 위원회는 "본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모든 DNA 재조합 연구에 명확한 영향을 행사할 단일한 법적 기구, 혹은 기구들의 연합체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판단에 근거해, 위원회는 이 분야의 연구자들의 자격에 대한 인가와 프로젝트의 등록을 HEW 장관에 대해 의무화하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권고하였다. 이는 모든 형태의 지역 입법을 차단하는 한편, HEW 장관의 손에 상당한 재량권을 남겨두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일단의 과학자들이 재조합 DNA 실험에 대해 처음 우려를 표명한 때부터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제 생물의학 연구자 공동체는 엄혹한 정치적 현실에 의해 문제가 복잡해진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미국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의 기초연구 프로그램이 그토록 철저한 조사와 평가의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의회는 기초연구에 대한 규제라는 발상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게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정책상의 쟁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행정적 통제권은 어느 기구에 두어야 하는가? 지침의 시행은 어떤 방식으로 강제되어야 하는가? 연방 차원의 입법은 주나 지역 차원의 [독자적] 조치를 차단해야만 하는가? 그러한 입법은 DNA 재조합 연구에 의해 촉발된 사회적·윤리적 질문들에 대해서도 다소간의 대응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가?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공공기구에서 규제지침의 시행을 책임질 것인지가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였다; 그들에게는 정책결정이 가능한 한 NIH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엄청난 중요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NIH는 자체적인 생물의학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DNA 재조합 연구를 육성하고 여기에 자금을 대는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NIH가 규제지침의 시행 역할을 맡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도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동안의 경험들은 연구 및 기술의 규제와 육성 기능을 하나의 기구에서 모두 담당하는 것이 실패로 귀결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상정된 다섯 개의 법안들 중 하나는 규제를 시행하는 행정단위가 될 별도의 독립 위원회 ― 핵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의 경우와 같은 ― 를 설립하는 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안(案)은 정부 관료 구조를 간소화하는 것이 의회의 일차적인 우선순위로 부각되어 있는 시점에서 제안되었다. 반면 HEW 장관에게 규제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새로운 기구를 만드는 대신 기존의 정부 부처의 권한을 확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의회에 상정되었던 법안들은 또한, 지침을 강제하기 위한 절차들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반영하였다. 지침을 위반하는 것은 곧 연구비의 지급 중단을 의미할 수 있었다. 이는 과연 충분히 강력한 제재조치인가? 그리고 민간기업이 자금을 대는 연구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일부 법안들은 연구를 하는 개인들이나 연구가 수행되는 시설에 대한 인가제를 강조했다. 이에 대해 비판자들은 HEW가 규제를 담당할 기구로서는 준비도 미비하고 경험도 일천하며, 따라서 현장 점검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효과적인 모니터링을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연구자들과 감독기구(HEW) 사이에 신뢰에 근거한 합의를 이뤄내기를 희망한 반면, 다른 이들은 직업안전보건청(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Administration, OSHA)에서 담당하는 것과 유사한 기구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인 규제 절차의 도입을 요구했다. 그들은 연구자들에게 자신들의 실험실 안전 기준을 공표하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보호 조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던 정책 쟁점은 연방 입법이 과연 지역 차원의 조치를 못하게 막을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과학자들은 지역적 조치의 차단을 위해 맹렬한 로비를 벌였고, 과학자들이 연방 입법에 반대했던 애초의 입장을 180도 선회하여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 문제 때문이었다. DNA 재조합 관련 입법에 지역적 조치의 차단에 관한 구절을 넣자는 주장을 뒷받침했던 가장 그럴싸한 근거는, 그것이 국가 전체에 일관된 기준이 적용되는 것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지지자들은 만약 지역마다 서로 다른 기준이 적용되면 규제가 최소로 적용되는 지역으로 연구의 중심이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대학들은 [그렇게 되었을 때] 성가신 규칙들에 넌더리가 난 우수한 연구자들이 자기 학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봐 전전긍긍했다. 하버드대는 의회 소속 위원회에서 발의되는 모든 법안에 지역적 조치의 차단을 명시하는 구절이 포함되도록 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맹렬한 로비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으로, 지역적 조치의 차단을 반대하는 집단에 맞서 전국적인 차원의 역공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5

반면 지역 차원의 조치를 못하게 막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에는 주, 시, 소도시 등의 지역자치체들이 대중의 건강과 복지를 보호할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었다. 연구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사회와 지역 정치체들은, 불확실한 위험에 맞서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가를 선택할 권리와 함께 그러한 연구가 사회에 가져올 잠재적 혜택과 이러한 위험을 서로 비교해 따져 볼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 의사, 인문학자, 환경운동가 등을 포함한 600명의 회원을 거느린 책임있는 유전학 연구를 위한 연합(Coalition for Responsible Genetics Research) ― 현재 책임있는 유전학을 위한 회의(Council for Responsible Genetics, CRG)로 이름을 바꿔 활동중인 ― 은 지역적 조치의 차단이 HEW 장관 이라는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에 반대하는 로비를 펼쳤다.

의회에서 벌어진 또하나의 정책 논쟁은 DNA 재조합 연구를 감독할 위원회의 설립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발의한 법안(S.945, 95th Congress)은 DNA 재조합 연구 및 기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국가위원회(National Commission for the Study of Recombinant DNA Research and Technology)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케네디가 발의한 법안은 위원회의 구성이 "의학, 법학, 윤리학, 신학, 생물학, 물리학, 환경과학, 철학, 인문학, 보건행정, 정부, 공공업무"의 영역에 속한 개인들을 포함하도록 규정하였다. 위원회의 임무는 DNA 재조합 연구 및 기술의 발전이 내포하는 윤리적, 사회적, 법적 함의들을 연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의회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제안된 위원회는 DNA 재조합 연구가 내포하는 보다 광범하고 심대한 함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시작할 것인지, 아니면 단지 보다 긴급한 기술적 우려들 ― 전염성 생물원이나 독소 확산이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의 문제 ― 에 충실할 것인지의 문제를 연방 정부에 제기하는 것이었다.

케네디가 제안한 위원회 개념에 비판적인 이들은 위원회의 설치가 가져올 수 있는 장기적인 사회적 함의를 고려할 때, 이는 곧 특정한 유형의 과학 연구를 제한, 통제 혹은 금지하기 위한 1단계 포석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6 당시 HEW 장관이었던 칼리파노는 HEW에 자문을 제공하는 외부 기구가 이미 너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러한 위원회 개념에 반대했다. 칼리파노가 보기에, 또다른 위원회를 추가로 설치하는 것은 규제에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7

1977년 내내 많은 청문회가 열리고 법안들이 상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안 통과를 결정하기 위한 투표 단계에까지 도달한 법안은 한 건도 없었다. 과학자들은 두 가지 새로운 정보를 인용하여 입법을 연기시키는 데 기여했다. 먼저 이 분야의 핵심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스탠리 코헨(Stanley Cohen)은 DNA 재조합 기법을 쓰지 않고도 고등 유기체의 세포(진핵 세포)로부터 나온 DNA가 박테리아(원핵 세포)로 옮겨질 수 있음을 실험으로 보여 주었다.8 그동안 비판자들은 만약 자연상에 존재하는 [종간의] 장벽이 우회된다면 이는 진화 과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이에 대해 코헨의 실험은 고등 유기체와 하등 유기체 사이에 자연적인 장벽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 실험 결과의 미출판 원고는 의회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돌려 읽혀졌다.

의회의 관심이 강력한 규제법안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데 일조한 두번째 정보는 터프츠 의과대학의 전염병학과장인 셔우드 고르바크(Sherwood Gorbach)로부터 나왔다. 고르바크는 매사추세츠 주 팔무스에서 열린 한 회의의 의장을 맡았는데, 여기서 DNA 재조합 실험의 잠재적 위험을 평가하는 워크샵들이 개최되었다. 모임 회의록의 공개와 워크샵의 결과 발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고르바크는 프레드릭슨에게 편지를 써서 "대장균 K12는 실험실에서의 DNA 삽입 조작에 의해 전염성 병원체로 전환될 수 없다"고 보고했다.9

고르바크의 진술은 특히 큰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왜냐하면 팔무스에 초청된 50명의 참가자들은 그동안 DNA 재조합 연구의 위험 문제에 관해 가진 지식을 제공할 기회가 없었던 여러 분야들을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임상전염병학, 장내 세균학, 면역학, 역학(疫學)과 같은 영역의 전문가들이 포함되었다. DNA 재조합에 관한 핵심적인 위험성 평가 회의에서 분자생물학자가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978년에 개회된 95차 연방의회에서도 로비는 계속되었다. 책임있는 유전학 연구를 위한 연합, 민중을 위한 과학, 그리고 소수의 환경운동집단들을 제외하고 나면, 다른 과학관련 집단들은 침묵을 지키거나 NIH의 규제지침을 지지했다. 의회가 보여 주었던 열정적인 입법 움직임에 대한 지지는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10 지역사회 차원의 행동이 잦아들고 지역에서의 강력한 로비 덕으로 시민들의 움직임이 추가적인 규제조치를 부과하지 못하는 듯 보이게 되자, 과학자들은 이제 연방 입법에 대해 보냈던 지지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연방 입법 대신 공공보건서비스법 361조에 의거해 HEW의 권한을 확장하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한편 그동안 NIH는 대부분의 DNA 재조합 실험들에 대해 봉쇄 요구조건을 대폭 낮추는 방향으로 지침을 수정하였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이제 설사 연방 입법이 통과되더라도 대다수 등급의 유전자접합 실험을 하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연방 차원에서 법률 제정을 위한 마지막 시도는 아들라이 스티븐슨(Adlai Stevenson) 상원의원(민주당, 일리노이 주)으로부터 나왔다. 1980년 봄, 스티븐슨은 모든 연구기관들 ― 일차적으로는 민간 부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 이 HEW 장관에게 rDNA 연구를 등록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S.2234)을 상정했다. 그러나 이 시기쯤에 이르면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지지세력이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연방 입법을 통해 rDNA 실험을 규제하려는 3년여에 걸친 의회의 노력은 중단되고 말았다. 유전자접합 실험에 대한 감독은 전적으로 NIH의 관리하에 남게 되었다.

DNA 재조합 연구에서 유전공학으로

1980년이 되자 이제 과학자들은 rDNA 연구에 대해 그간 과도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행정적 요구사항들과 실험실 봉쇄의 조건들을 대폭 완화시키기 위해 NIH에 로비를 벌였다. 비록 그 수는 적었지만 규제지침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자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1981년 9월에 RAC는 투표를 통해 규제지침을 과학자들의 자발적인 실행상의 규정으로 전환할 것을 의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권고안은 보다 점진적인 규제 완화 쪽을 선호한 NIH 원장에 의해 거부되었다.

실험실 연구의 안전성에 대해 과학자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rDNA 기술의 상업적 이용에 대해서까지 유사한 합의가 곧바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NIH는 규제지침의 적용대상이 제한적이라는 우려에 대응해, 민간자금을 지원받는 rDNA 연구를 자발적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이를 인증해 주는 프로그램을 설치하였다. 등록과 인증 절차를 규정한 조건들 ― 대규모(10리터 이상)의 rDNA 조직배양은 RAC에서 건별로 검토를 하는 것을 포함하는 ― 은 1980년 1월에 NIH 규제지침의 공식적인 일부분이 되었다.

NIH는 규제의 초점을 대규모 프로젝트의 검토, 더 큰 상업적 유용성을 지닌 새로운 숙주-벡터 시스템의 인증, 그리고 유전자조작된 유기체(genetically engineered organisms, GEOs)와 유전자조작 식물의 환경 확산 문제 쪽으로 옮겨갔다. 1983년에 의회 소속 위원회들로부터 권고안이 강력하게 제시된 이후,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 EPA)은 민간자금의 지원을 받는 rDNA 야외 실험을 감독하던 NIH의 역할을 대신하여 GEOs 환경 방출에 대한 규제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EPA는 또한 대학에서 지원하는 GEOs 방출 실험도 자신의 관할권에 놓이게 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론적으로는 EPA가 모든 야외 실험들뿐 아니라 생물 폐기물에 대해서도 관할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다른 연방 기구들이 유전자 접합의 새로운 산물을 감독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기 시작함에 따라, 전반적인 규제의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 행정부(Executive Office of the President, 대통령 또는 대통령 보좌관 직할 연방 기관의 총칭 ― 역주) 소속의 과학기술정책국(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 Policy)에서는 1986년 "생명공학규제조정체제(Coordinated Framework for the Regulation of Biotechnology)"를 공포했다. 이 체제하에서 생명공학과학조정위원회(Biotechnology Science Coordinating Committee)라는 이름의 기구간 위원회가 설치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관련된 규제 기구들 사이에 규제 관할권, 규제 대상, 그리고 분자유전학의 기법들을 분류할 일관된 용어에 대한 합의를 이뤄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체제는 4년 동안 운영되었는데, 4년이 지난 후에도 생명공학의 감독과 관련된 몇몇 핵심 쟁점들 ― 예컨대 새로운 유기체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성요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 에 대해서는 주요 연방 기구들간에 여전히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규제의 원칙들을 결정하는 보다 강력하고 직접적인 역할을 백악관 직속 경쟁력위원회(White House Council on Competitiveness)가 맡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 위원회에 생명공학 정책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응용유전학의 연구와 상업화에 있어서의 미국 주도권 확보를 [생명공학 정책수립시 고려해야 할] 우선순위로 설정했다. 공화당이 내건 의제에서는 새로운 전지구적 시장의 추구와 함께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생명공학의 산물들을 수출하는 데 유리하도록 하는 국제적인 규제의 통일이 높은 우선순위를 점하고 있었다. 공익집단들은 부시 행정부의 조치가 신중한 규제 과정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말뿐이고 실제로는 관심이 없다고 보았다.

1970년대에 널리 퍼져 있었던 실험실 생물위험에 대한 우려들은 70년대 말이 되면서 급격하게 쇠퇴하였지만, 그 대신 새로운 일련의 쟁점들이 부상하였다. 정치적 관심의 초점은 rDNA 기술의 산물 및 부산물들과 유전학 연구의 사회적 맥락에 맞추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논쟁들은 여러 층위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가진 압력단체들과 지역 공동체들은 생명공학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생명공학의 경우에는 과학과 기술이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생명공학의 산물들에 대한 반대는 과학연구의 자율성에 대한 위협으로 종종 해석되었다. 그 결과 [생명공학의 산물들에 대한] 반대 운동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조건을 통제할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과 사회가 과학 영역에 대해 안전 조치를 부과하고 대외적 책임성의 증대를 요구할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 사이의 견해차이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어질 내용은 응용 분자유전학의 2세대 논쟁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몇몇 쟁점들을 요약한 것이다.

1. GEOs의 의도적 방출

생명공학의 규제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쟁점은 형질전환된 식물, 미생물, 동물들을 환경에 방출할 때의 적절한 안전 기준을 정하는 문제였다. 연방 정부에서 승인한 최초의 환경 방출 실험은 1987년 아이스 마이너스(ice minus)라는 이름의 미생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 실험은 역사상 가장 안전한 야외 실험들 중 하나라는 식으로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이 실험에서 사용된 아이스 마이너스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토양 미생물 종으로부터 하나의 유전자를 제거한 것으로, 기온이 0℃ 이하로 떨어졌을 때 얼음 결정이 생기는 것을 더 어렵게 함으로써 작물이 입는 냉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다. 과학자들은 두 개의 연방 기구와 법정 소송을 포함해 5년간에 걸친 규제의 장벽을 거친 끝에 캘리포니아대학에 있는 농업 야외 시험소에서 아이스 마이너스를 시험해 볼 수 있었다.11 농업과학자들은 온실과 야외 시험장이 자신들의 실험실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형질전환 유기체의 야외 시험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연방과 주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이는 시간의 지체와 함께 연구비용의 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소규모의 GEOs 야외 시험의 경우에는 통제된 조건하의 실험이라는 근거를 들어 대학을 규제로부터 면제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관점은 생산물을 특정한 제조 과정에 의해 평가해서는 안되며 최종산물이 지닌 관련된 성질들만을 근거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에게 반향되어 있다. 몬타나 주립대학의 한 식물병리학자는 자신의 분야를 규제하기 위해 새로 도입된 무분별한 관료적 절차에 맞서는 시민불복종 행동의 일환으로 EPA의 야외 실험 규칙을 고의로 위반하기도 했다.12

2. 생명공학 연구시설의 부지선정

1980년대에는 님비(NIMBY, not-in-my-backyard) 현상이 생명공학의 덜미를 잡았다. 한때 인근 지역공동체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대학의 연구시설들은 이제 대학에서 실험실 시설을 확장하거나 개조할 때마다 의심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이 모든 사태의 시작은 1976년 케임브리지 시에서 rDNA 연구를 위해 새로운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설계·개조한 하버드대의 생물학 실험실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사추세츠 주의 다른 지역들도 케임브리지 시의 선례를 좇아 rDNA 연구개발과 연관된 안전성 문제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조례를 통과시켰다. 샌프란시스코 소재 캘리포니아대학(UCSF)은 UCSF 약대에 연구소를 새로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상류층이 주로 사는 인근의 로렐 하이츠 지역공동체의 반대에 직면했다. 반대의 대체적인 근거는 rDNA 유기체와 독성 폐기물의 방출이 인근 지역공동체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물보호 운동가들이 동물 해부 반대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성 폐기물 반대 운동가들과 손을 잡게 되자, 이들간의 연합은 대학의 로비에 맞서는 무시못할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87년 스탠포드대학이 메디컬 센터 자리에 실험 동물 시설(Research Animal Facility)을 새로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이를 계기로 동물보호 운동가들은 환경운동가들과 다시한번 제휴하였다. 대학측에 따르면, 이 시설은 실험 동물에 대해 보다 나은 중앙집중적 보호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스탠포드대의 다른 시설에 존재하는 물리적 결함을 보완한 것이었다. 실리콘 밸리 독성폐기물 반대 연합(Silicon Valley Toxics Coalition)은 팰로 앨토 동물애호 협회(Palo Alto Humane Society)와 연대하여, 이 시설은 위험물질들을 처리하게 될 것이고 또한 전염성 생물원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퍼져나가 인근 지역공동체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릴지 모른다고 주장하며 프로젝트에 반대하였다. 지역 집단들로부터의 격렬한 압력에 직면한 스탠포드대학측은 건물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보고서 작성에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데 동의했다. 이 때문에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건물의 건설이 연기되었고 따라서 그 기간 동안 연구도 수행되지 못했다.13

3. 대학-산업체 연계

산업체와 대학간의 적절한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놓고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시기가 유전공학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 그 세력을 넓혀갔던 시기와 서로 겹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만은 아니다. 생물의학 연구는 사회에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가치 때문에 연구의제의 순수성과 결과의 질에 대해 엄청난 사회적 관심이 뒤따르게 된다. 새로운 생명공학 산업의 발전은 대학과 산업체간의 협력관계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입장은 둘로 나뉘었다. 그러한 협력관계를 선호하는 입장은 그 근거로 기술이전이 향상되고, 과학적 혁신의 중심과 산업 발전의 중심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며, 대학에서의 과학연구를 위한 자원이 증가한다는 점 등을 들었다. 반면 그러한 협력관계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근거로 학문 문화(academic culture)와 사실상 동의어가 되어 온 여러 가치들이 침식될 것이고, 학문 연구 공동체의 독립성이 상실되며,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이에게 지식을 팔아먹는 풍조가 생겨날 것이고, 전반적으로 보아 순수과학(academic science)의 에토스가 보다 도구적이고 실용적인 기능 쪽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점 등을 제시했다.14

대학-산업체간 협력관계에 대한 정치적 우려는 이해관계상의 갈등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의회에서는 뉴스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던 몇몇 사례들에 주목했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재정적 이해관계가 걸린 생산품을 평가하기 위해 공공자금을 받은 한 과학자의 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의회가 연구 승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반면, 과학자들은 새로운 법률이 통과되면 연구승인 신청을 제출할 때 그 일부로 재정상황에 대한 공개를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과학자사회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이는 또하나의 성가신 관료적 절차를 한 겹 추가하는 것처럼 보였고, 성실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연구자의 창의성을 키우는 활동으로서의 과학연구 행위에 뭔가 문제가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과학에서의 사기행위, 대학의 연구자금 유용, 만연하는 교수들의 창업 열기 등을 다룬 언론 보도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연구자금의 이용에 관한 정부의 책임 강화가 진작에 이미 이루어졌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4. 인간 유전공학

DNA 분자 재조합 기술은 인간, 태아, 배아, 수정란의 유전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두 종간에 유전자를 전이시키는 작업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사실은 형질전환 동물 실험에서 충분히 입증된 바 있었다. 특정한 기능을 가진 인간 유전자가 생쥐의 게놈 속에 통합되기도 했고, 쥐의 유전자를 이식해서 쥐만한 크기의 생쥐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rDNA 기술의 배후에는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행위가 제기하는 윤리적, 사회적 쟁점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만약 선이 그어지게 된다면 어디쯤에 그어져야 할 것인가? 과학자들은 인간의 난자와 태아 조직을 가지고 자유롭게 실험을 해도 되는 것인가? 인간 유전자의 조작을 목표로 하는 연구 프로그램의 정당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연구 의제의 선정에 영향을 미쳐 온 일련의 복잡한 사회적 쟁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태아 연구는 지난 20여년 동안 과학이 손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 이는 "생명권을 옹호하는(Pro-life)" 낙태 반대 로비가 직접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인간 유전자치료는 NIH 산하의 RAC를 경유하여 보건복지성(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에 의해 건별로 규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인간의 유전자를 동물에 전이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사회적으로 가장 민감한 종류의 실험은 인간의 수정란에 대한 유전자조작을 포함하는 것인데,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곧 우생학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영역이 앞으로 대중적 감시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굳이 이 영역에서가 아니더라도] 새로 이루어지고 있는 발견들 하나하나가 모두 인간 유전자를 탐구하고 변형시키는 데 있어 과학의 적절한 역할이 내포하는 딜레마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보인다.15

5. 생물학무기 연구

1972년 생물학무기의 제조, 사용, 저장을 금지하는 국제 협약이 체결되어 100여개 국이 여기에 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약의 유효성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계속 존재해 왔다. 미국과 여타의 협약 서명 국가들이 자국의 생물학무기 비축분을 파기했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명 국가들이 협약의 조항들을 확실히 준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전자접합 기법의 발견은 현대전에서 생물학무기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불안감을 자아내었다.16 군대가 내세운 목표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 몇몇 관측자들은 공격용 연구와 방어용 연구 사이의 경계는 획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백신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모든 악성 병원체는 또한 언제든지 잠재적인 무기로도 연구될 수 있었다.17

생물학 연구의 군사화를 우려한 많은 과학자들이 생물학무기 연구에 종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반면 다른 과학자들은 국방성(Department of Defense, DOD)에 의해 지원받는 과학 연구와 NIH에 의해 지원받는 과학 연구를 구분하지 않으려 했고, "생물학무기 연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서약서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1990년까지는 생물학무기 협약의 조항들은 국제법상에서 인정받는 국가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개인이나 기업, 테러조직 등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해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생물학무기 반(反)테러 법(Biological Weapons Anti-Terrorism Act)에 서명했는데, 이로써 협약의 조건들을 위반하는 것은 국내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간주되게 되었다. 개별 과학자가 국방성이 후원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관여함으로써 법을 어기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한 듯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법률은 생명공학의 발전에 따라 생물학자들이 직면하게 된 점증하는 책임의 네트워크의 또 하나의 예를 과학자 공동체에 제기했다.

결론

DNA 재조합 분자 연구의 이용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과학과 사회간의 관계에 내재한 많은 문제들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이었던 쟁점들 중 하나는 과학의 자율성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는 신념을 둘러싼 것이었다. 가장 격렬했던 논쟁은 규제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어떤 연구가 그 본성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때 과학자들 자신이 이를 규제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DNA 재조합 논쟁의 사례에서 나타났던 [과학자사회] 외부로부터의 통제의 위협은 과학을 둘러싼 미래의 정책 논쟁의 성격을 예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DNA 재조합 사건이 하나의 반동적인 흐름을 촉진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특정한 연구 프로그램의 잠재적 위험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과학자들은 동료들로부터 DNA 재조합 연구와 관련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되새겨 보라는 식의 충고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따져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시민집단들은 연구를 금지시키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의회도 분자생물학의 목을 조르지 않았다. 교회조직들은 신의 뜻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유전자조작을 비난하거나 하지 않았으며, 책들이 불태워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일부 시민들은 그 이전보다 과학에 대해 더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서 과학자들의 우려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연구 프로그램의 목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연구비를 배분하고 위험을 평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있어 과학이 과학자들만의 일(internal affair)로 남아있지 않게 되면, 과학의 내용을 포함한 과학활동이 정치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2차대전 이후의 과학이 정부를 주요한 후원자로 하면서 이로부터 점점 더 많은 혜택을 입어 왔다는 사실이다.18 대학에서 민간지원 연구에 대한 공공지원 연구의 비율이 지난 30여년 동안 엄청나게 증가해 왔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대중적 감시의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대다수 과학자들의 입장에 따르면, 지원은 필요불가결한 것이지만 과학을 대중이 감시하는 것은 결국 나쁜 과학으로의 귀결을 의미할 뿐이다. 예를 들어 MIT의 생물학자 데이빗 볼티모어의 말을 들어 보자:

생물학자들은 기초연구의 규제를 맡게 될 최초의 위원회의 설립을 막기 위해 의회 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미국이 과학의 문제에 이어 연구의 자유라는 전통을 계속 유지해 갈 것인가 아니면 정통 교의의 철권 아래 놓일 것인가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믿는다.19

과학연구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라는 우려는 과학에 대한 감독권이 전문과학 영역으로부터 과학자들과 대중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보다 넓은 영역으로 옮겨질 때마다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DNA 논쟁에서 이용되었던 "과학연구의 자유"라는 표현을 잘 살펴보면, 이는 "과학의 자율성" 혹은 "과학자들 스스로 규제할 자유(freedom of self-regulation)"를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되고 있는 듯하다. 뿐만 아니라 이 논쟁에 관여한 과학자들은 DNA를 탐구하는 물리적 행위와 인식적 탐구를 서로 혼동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물리적 탐구에 대한 규제"가 곧 "과학연구에 대한 제한"이라는 식으로 손쉽게 의미를 바꿔치면서, 유전자접합 기법의 이용에 대한 대중적 감시에 반대하는 데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은유로 후자를 이용했다.

DNA 재조합 연구를 둘러싼 대중적 정책 논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과학연구가 경쟁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한 저명한 생화학자가 논평했듯이, "과학연구 자금이 극도로 부족했던 시기에, 오직 분자생물학만이 유행을 따르는 프로젝트에 주어지는 손쉽고 풍족한 지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20 통제 및 기준을 정하는 것이나 사회로부터의 규제책임기구를 설립해 연구를 지체시키는 것은 모두 연구자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야기했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대중이 검토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내부적 논쟁을 잊고 일치단결해서 의사결정 과정을 개방하라는 사회적 압력에 맞서 움직였다. DNA 논쟁은 또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자금 지원에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고 느낄 때에는 효과적인 로비스트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둘째로, DNA 재조합의 사례는 공공기구가 기초연구의 위험을 평가하는 기회를 가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과학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시민들은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점증하는 영향에 종종 놀라기도 하지만, 과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도 또한 이해하고 있다.

셋째로, 과학은 오늘날 거대한 사업이 되었으며, DNA 재조합 연구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연구를 규제하는 영구지침이 발령되기도 전부터 많은 액수의 자금이 새로운 연구소를 짓는 데 투자되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DNA 연구의 산업적 응용가능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기법이나 유전자조작된 생물종에 대해 특허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다른 과학자들은 민간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하거나 자신이 직접 자금을 출자해 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DNA 재조합 연구의 규제를 둘러싼 싸움은 과학을 지식의 생산과정으로, 그리고 기술을 상품의 생산과정으로 각각 간주하는 오래된, 그러나 의심스러운 구분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과학과 기술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 성취와 그 기술적 응용간의 간격이 좁혀지고, 과학연구가 공공자금과 기업자금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지원을 받으며, 과학연구의 방법이 사회에 위험을 가져오는 기술을 포함하게 됨에 따라 설득력이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술을 통제하는 건전한 정책들 ― 기술영향평가와 대중적 책임 등을 포함해 ― 은 과학에 대해서는 부적합한 것으로 여전히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과학 기관들은 사회에서 지원하는 과학연구의 본성, 목표,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영향 등에 대해 대중이 가질 수 있는 우려들에 대처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못하다.

* 출전: Sheldon Krimsky, "Regulating Recombinant DNA Research and Its Applications," Dorothy Nelkin (ed.), Controversy: Politics of Technical Decisions, 3rd ed. (London: Sage, 1992), pp. 219-248. (번역: 김명진)

1. Director,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The Patenting of Recombinant DNA Research Inventions Developed under DHEW Support (November 1977)을 보라.

2. 상원 노동복지위원회 산하 보건소위원회와 사법위원회 산하 행정관행절차소위원회가 NIH 규제지침에 관해 공동으로 개최한 청문회의 보고서가 1976년 말에 발간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해 하원 과학기술위원회 산하 과학, 연구, 기술 소위원회를 위해 준비된 DNA Recomninant Molecule Research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나왔다.

3. Science 199 (January 20, 1978), p. 274.

4. 연방기구간 위원회의 권고안은 HEW에서 DNA 재조합 연구에 관해 낸 1977년 3월 16일자 보도자료에 실렸다. Recombinant DNA Research 2 (DHEW Pub. No. [NIH] 78-1139) (March 1978), pp. 276-289를 보라.

5. {하버드 크림슨 Harvard Crimson} 1978년 3월 2일자 보도에 따르면, 하버드대는 공인 로비스트를 고용해 "법안 초안에 하버드대와 여타 기관들이 지지하는 지역적 조치 차단 조항이 포함되도록 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 Science 199 (March 24, 1978), p. 1320도 보라.

6. 케네디 법안에 대한 생물학자 데이빗 볼티모어(David Baltimore)의 발언을 인용하자면, 이 법안은 "어떤 연구가 허용되어야 하고 어떤 연구는 금지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명백한 첫걸음"이었다. Science 199 (January 20, 1978), p. 274.

7. Science 196 (April 22, 1977), p. 405.

8. Shing Chang and Stanley Cohen, "In Vitro Site-Specific Genetic Recombination Promoted by the Eco. RI Restriction Endoclease," Proc.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74 (November 1977), pp. 4811-4815.

9. Letter concerning the Falmouth workshop, from S. L. Gorbach to D. S. Fredrickson, July 14, 1977; 이 편지는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Environmental Impact Statement on NIH Guidelines for Research Involving Recombinant DNA Molecules (October 1977), Appendix M에 실려 있다.

10. Science 198 (October 28, 1977)에 실린 할버슨(H. O. Halvorson)의 논설을 보라; 그리고 Barbara J. Culliton, "Recombinant DNA Bills Derailed: Congress Still Trying to Pass a Law," Science 199 (January 20, 1978), pp. 274-277도 보라.

11. 아이스 마이너스 사건을 다룬 사례연구로는 Sheldon Krimsky and Alonzo Plough, Environmental Hazards: Communicating Risk as a Social Process (Dover, MA: Auburn House, 1988)을 보라. [아이스 마이너스를 둘러싼 쟁점과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는, 제레미 리프킨, {바이오테크 시대}(민음사, 1999), pp. 145-148을 참조할 수 있다 ― 역주]

12. Sheldon Krimsky, Biotechnics and Society: The Rise of Industrial Genetics (New York: Praeger, 1991), Chapter 10을 보라.

13. Thomas G. Keane, "The Proposed Animal Labs at Stanford Delayed," San Francisco Chronicle (August 19, 1987), p. 3.

14. Martin Kenney, Biotechnology: The University/Industry Complex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Paul E. Gray, "Advantageous Liaisons," Issues on Science and Technology (Spring 1990), pp. 40-46.

15. Sheldon Krimsky, "Human Gene Therapy: Must We Know Where to Stop Before We Begin," Human Gene Therapy 1(2) (1990), pp. 71-73.

16. Susan Wright, Preventing a Biological Arms Race (Cambridge: The MIT Press, 1990).

17. Charles Piller and Keith Yammamoto, Gene Wars (New York: William Morrow, 1988).

18. Susan Wright, "Molecular Politics in Britain and the United States: The Development of Policy for Recombinant DNA Technology," Southern California Law Review 51(6) (September 1978), pp. 1383-1434.

19. 이 인용문은 Science 199 (January 20, 1978), p. 274에서 가져온 것이다.

20. Erwin Chargoff, "A Forum on Recombinant DNA," Chemical and Engineering News (May 30, 1977), p. 41.

셸든 크림스키
2000/02/15 00:00 2000/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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