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호] 외국 운동단체 소개 ⑧ 과학과 환경보건 네트워크, SEHN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0/02/15 00:00
70년대 초 독일 환경법의 기본원칙에서 유래한 '사전예방 원칙(precautionary science)'은 80년대에 이르러 유럽국가들의 환경관련 법안과 국제협약들에 포함되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는 리우선언(의제 21)의 내용으로 공식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 리우선언과 기타 국제협약들을 비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사전예방 원칙은 선언적으로만 존재할 뿐 환경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번번이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는 다시 다른 국가들에서 사전예방 원칙의 폐기를 주장하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기에 이르렀다.
[과학과 환경보건 네트워크(Science and Environmental Health Network, SEHN)]는 바로 그와 같은 미국의 상황을 개혁하고자 설립된 운동단체이다. SEHN은 리우회의가 열린 1992년 공공정책 의사결정에서 과학의 바람직한 역할을 고민하던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이들은 특히 위험성평가와 비용-편익 분석이 기술관료주의 환경정책, 사후대책 위주 환경정책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오용되는 현실에 대해 깊이 우려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사전예방 원칙의 확산을 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전예방원칙에 관한 SEHN 활동의 대표적 예로는 W. 알튼 존슨 재단 등의 후원 하에 조직한 윙스프레드(Wingspread) 회의를 들 수 있다. 1998년 1월 위스콘신 주 윙스프레드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많은 수의 환경운동가, 정책전문가, 법률전문가, 과학자들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3일간의 회의를 종료하면서 보건 및 환경정책 의사결정에서 사전예방 원칙이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는 윙스프레드 선언을 발표하였다. "어떠한 활동이 환경과 인간건강에 해악을 끼칠 우려가 존재할 때에는 이에 대한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예방적 대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선언의 요지였다. 이들은 사전예방 원칙의 필수적 요건들도 정교화하여 제시하였다. 위험을 수반할 것으로 예상되는 활동에 대해서는 그 대안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고, 위험성에 대한 거증책임(burden of proof)이 잠재적 피해자가 아닌 개발자에게 부과되어야 하며, 대중들이 사전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정책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public right to informed consent) 등 민주적 절차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EHN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또 하나의 활동은 '공익을 위한 과학(Public Interest Science)'의 실현이다. 과학기술의 활용은 거대기업 등 소수 기득권 세력이 아닌 다수 대중들의 이익에 부합되어야 하며, 이는 연구개발의 목표설정에서부터 연구개발의 실제 과정에 이르기까지 대중참여를 보장하고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며 또한 연구개발의 결과도 공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모임의 '시민과학'과 유사한 개념이라 하겠다. 이를 위해 SEHN은 1998년 11월 [공익을 위한 과학 협회(Association for Science in the Public Interest, ASIPI)]라는 조직의 결성을 주도한다. ASIPI는 올 2월 '대학원 연구와 공익 연구: 경험과 기회'라는 회의를 개최하여 보다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공익을 위한 과학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향후 로카연구소 등과 함께 공동체 연구개발을 확산시키는 미국 내 주요 단체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들어 SEHN는 사전예방 원칙과 공익을 위한 과학의 관점을 유전자조작 식품을 비롯한 생명공학 이슈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농업 분야에서 진보적 사회활동을 벌여 온 농업 및 무역정책 연구소(Institute for Agriculture and Trade Policy) 등과 함께 '농업, 공익과 사전예방 원칙: 유전공학의 식품 응용에 관한 사례연구'라는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 중에 있다.
SEHN에 대해 한가지 더 주목할만한 점은 조직 운영방식이다. SEHN은 영향력이 상당한 조직이다. 백악관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유전자변형 유기체의 환경방출과 사전예방 원칙에 관해 브리핑을 계획하면서 미국의 환경/시민운동 단체를 대변하는 인사로 초청한 사람도 SEHN의 대표 캐롤린 라펜스퍼거(Carolyn Raffensperger) 박사였다(그녀는 법학 전공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SEHN이 사무실에 많은 수의 상근활동가들이 근무하고 있는 대규모 단체인 것은 아니다. SEHN은 이름 그대로 네트워크 조직이다. 대표를 제외하고는 단 3명이 반상근으로, 그것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42개에 이르는 미국 환경단체들이 단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으며, 100여 명의 과학자들이 자원하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상근 및 반상근 활동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곤 하는 우리모임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SEHN의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sehn.org. SEHN의 전자소식지 Networker 최근호를 읽어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전예방 원칙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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