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무기의 발전과 그 결과들 ―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성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은 이용할 수 있는 무기의 제약에 의해 억제되어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몽둥이와 돌칼을 사용하고, 수십 미터 정도의 거리에 떨어진 대상에 대해서는 돌멩이와 같은 물체들을 던져 공격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수천년 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 지구상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류의 기술적 재능이 항상 우리의 삶을 더 낫도록 만드는 행위에만 쏟아부어진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발명의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다른 인간들에게 파괴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데 이용했다. 전쟁은 기술 진보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 보였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 생활의 많은 측면들을 더 낫게 만들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살상과 파괴의 능력에 있어서 가공할 정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고대 세계의 군사기술

문명 발전의 여명기를 특징짓는 기술 변화들은 처음부터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금속의 생산 ― 처음에는 청동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철로 바뀐 ― 은 보다 치명적인 무기뿐 아니라 그러한 무기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갑옷을 만들어내었다. 금속의 이용이 전쟁무기를 향상시킨 유일한 원천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4천년 전경에는 활의 한쪽에 힘줄을 덧대고 다른 한쪽에는 각재(角材)를 얇게 붙임으로써 더욱 강력한 활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압축과 신장의 조합을 통해 적을 쏘아 맞출 수 있는 범위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궁수들이 종종 말이 끄는 전차(戰車)에 타서 화살을 쏘곤 했는데, 전차 역시 비슷한 시기에 발명된 것으로 침략군에게 엄청난 이동성과 놀라운 전력을 제공해 주었다. 앗시리아군과 페르시아군은 이러한 무기들로 무장하고 이웃 나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전차와 활에 기반한 군사력이 비록 효과적이기는 했지만, 진군하는 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말과 전차는 중앙 아시아와 중동 지방의 넓은 평원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으로 작동했지만, 페르시아군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훨씬 덜 효과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은 말이 먹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는데, 주변에서 말먹이를 구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많은 수의 말을 이용하는 군대가 보급선을 앞질러 진군하게 됨으로써 그 기동력이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바뀌었다. 고대 그리스의 군대 역시 말을 이용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들은 창과 방패, 투구, 그리고 아마도 가슴받이로 무장한 보병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군사 기술은 페르시아의 그것보다 덜 인상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함은 엄격한 조직과 규율에 의해 벌충되었다. 그리스의 전사들은 8열에 이르는 밀집 대형인 방진 형태로 정렬하여 동방으로부터 온 기병 위주의 침략자들에 저항할 수 있었으며, 페르시아군은 장비와 기술에서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병사들을 더 작은 규모로(120명 단위) 운용함으로써 보병 전투에 더 큰 이동성을 부여했다. 그리스 시대 이래로 사용되는 무기는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로마인들은 보다 뛰어난 전술을 이용했고 무엇보다도 더욱 엄격한 군단의 규율과 상호조정에 의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광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동성의 증가가 부대의 분산과 통일된 작전의 결여로 귀결되는 경우에는 이로부터 아무런 이점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천재성은 기술적인 것인 것만큼 조직적인 것이기도 했고, 이런 점은 이후 수세기 동안 로마인들에게 군사적 우월함을 안겨 주었다.

보병의 무기는 고대 세계를 통틀어 거의 변화하지 않았지만, 성곽 포위공격용 기계에서는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 고대에 가장 두려움을 자아낸 무기는 기원전 4세기에 시실리에서 처음 사용된 노포(弩砲, catapult)였다. 이후 노포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인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에 의해 성공리에 운용되었고 그리스와 로마인들뿐 아니라 그 적들이 벌인 많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가지 중요한 것은 성벽 포위공격용 기계가 기술 영역에서 나타난 최초의 전문가집단 중 일부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는 점이다; "엔지니어(engineer)"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의 ingenium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성벽 포위전에서 이용된 정교한 기구들을 이르는 말이다.

노포는 동물 힘줄이나 사람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비틀림 스프링에 축적된 에너지를 이용함으로써 돌덩어리나 큰 화살을 발사했다. 당시 머리카락은 군사 보급용으로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는데, 한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선물로 수천 킬로그램에 이르는 머리카락을 보냈다는 고대의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가장 강력한 노포는 큰 화살이나 작은 돌멩이를 700미터 거리만큼 던질 수 있었고(보통의 사거리는 350미터 가량이었다), 성벽을 공격할 때는 13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30킬로그램 가량의 바위덩어리를 날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로마군이 전장에서 이용했던 소형 노포(onager라고 불린)는 4킬로그램 가량의 투사체를 450미터 거리만큼 날릴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노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단점은 머리카락과 힘줄이 젖으면 늘어나는 성질이 있어 습기가 많은 날씨에는 스프링이 탄성을 잃어버려 힘이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기구들은 성벽 포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각각의 로마 군단들은 55대의 노포에 의해 지원을 받았으며,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포위전에서는 300대의 노포가 사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나중에 화약과 대포가 발명된 이후에도 그것이 노포의 파괴력을 능가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더 흘러야만 했다.

그러한 포위공격용 기계의 이용은 로마인들과 같이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제국 건설자들에게 대단한 힘을 부여했다. "야만족들"이 축조한 조악한 성벽은 보통 이와 같은 초기의 투사체 발사기로 무장한 침략군에게 맞서는 방어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로마의 군사적 우월함은 나중에 야만족의 침략 때 로마 그 자체가 수비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자 훨씬 덜 분명해졌다. 로마의 방어 기술은 당대의 공격 무기에 비해 열세였고, 여기서의 무력함은 로마를 괴롭혔던 숱한 내부 문제들과 어울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제국들 중 하나인 로마 제국의 점차적인 붕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군사기술과 봉건적 질서

군사 기술은 로마의 함락 이래 수세기 동안 거의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6세기경 전쟁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음과 동시에 유럽의 사회 구조에까지 영향을 끼친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 이 혁신은 그 자체가 무기는 아니었지만 기존의 무기들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기구는 등자(stirrup)였다. 중동 혹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는 등자는 전투에 새로운 차원을 보태었다. 말은 오랫동안 전투에서 이용되어 왔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그 위에서 활을 쏘거나 창을 던짐으로써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전사가 말 위에 직접 올라탈 경우에는 자세가 대단히 불안정했다. 간혹 기병의 공격이 전투에서 이용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전투의 시간이 되면 전사는 말에서 내려 보병과 함께 싸웠다.

등자는 전사를 그가 탄 말에 단단히 고정시킴으로써 파괴력을 엄청나게 증폭시켰다. 말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말이 가진 힘은 이제 보통 창(spear)이나 창기병용 창(lance)의 찌르는 힘을 강화시키는 데 쓰일 수 있었다. 앞으로 보게 될 바와 같이 말에 올라탄 기사가 결코 무적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결연한 공격을 펼치게 되면 이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다. 등자 덕택에 말에 올라탄 기사는 이제 전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중세 사람들은 기사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극히 취약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말탄 기사가 지닌 중심적 중요성 때문에 많은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야기되었다. 말은 값비싼 물품이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출이 소요되었다. 동시에 말탄 기사는 수년간의 전문적인 훈련을 거쳐야만 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생산 활동에 종사할 수 없었다. 말과 기사, 그의 종자(從者), 그리고 그들의 훈련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는 3-4백 에이커의 토지가 필요했다. 심지어 국왕조차도 자기 휘하에 기사단을 두어 유지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 수단과 행정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기사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하사하고 그 댓가로 그들의 군사적 조력을 얻어냈다. 이것이야말로 중세를 통틀어 정치조직의 지배적인 형태를 이루었던 봉건적 질서의 근간이었다.

봉건제는 본질적으로 분권화된 체계였고 군대는 일시적이고 무질서한 집단이었다. 기사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기량과 용기에 의지했고 중앙집중화된 규율이나 전략 계획에 복종하는 것을 꺼려했다. 전투는 종종 일대일 대결이 수없이 일어나는 형태의 무질서한 사건이었고 주의깊은 전술 계획이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종 서로 적대하는 군대들은 전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를 찾아헤매는 데만도 며칠씩을 허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세의 군사 기술은 로마의 군대를 그토록 강건하게 만들었던 규율과 정확한 조직의 원칙으로부터 후퇴한 셈이었다.

말탄 기사들끼리의 전투는 또한 기사도(chivalry)의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기사도라는 단어 자체의 어원이 불어의 chaval, 즉 말이라는 단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말탄 기사는 그의 고귀한 혈통이나 전투에서의 기량을 배양하기 위해 요구되는 오랜 기간의 수련으로 인해 일반 병사들과 구분되었다. 기사도적인 기사는 전쟁의 특정한 측면들을 통제하는 규범에 따른 삶을 살았다. 이에 따르면 비전투원들은 ― 그들이 기독교인이기만 하다면 ― 평화롭게 살도록 내버려두어야 했고, 전투원들은 전투에서의 특정한 규칙들을 준수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전쟁은 일차적으로 차별화된 전사 계급의 구성원들간의 겨룸(contest)으로 이해되었고, 여기서 개별적인 영예는 적어도 전쟁의 목적의 달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전쟁은 여전히 소름끼치는 일이긴 했지만, 전쟁이 공통된 문화에 속한 참여자들(즉, 기사들)끼리의 겨룸으로 여겨지는 한 전쟁이 수행되는 방식에는 어떤 제약이 존재했고 토지는 대체로 근대 이후의 전쟁을 특징짓는 전면적 파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새로운 무기의 등장과 봉건제의 몰락

기사끼리 전투를 하던 시대는 새로운 기술이 전쟁의 성격을 다시한번 바꿔놓음에 따라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다. 중세 초기에는 말탄 기사가 보병의 밀집 대형 속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한 번의 궤멸적인 공격으로 이를 쑥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14세기가 되자 극히 간단한 무기인 미늘창(pike)이 기사들의 공격을 분쇄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스위스인들이 이용해 특히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6미터 길이의 미늘창은 굳건한 보병 대열 맨 앞에 창병(槍兵)들이 네 줄로 서서 앞쪽으로 창을 겨누는 대형으로 이용되었다.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자유인이 된 데서 나오는 철의 규율과 높은 사기로 뭉쳐진 스위스 창병들은 중세 말 유럽에서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병사들이었다. 중무장한 기사들은 창병들에 의해 흩어져서 긴 전투용 도끼인 도끼창(halberd)을 휘두르는 다른 병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보병들이 기사를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을 얻었을 때 그들은 이제 진정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런 우위를 부여한 최초의 무기는 장궁(longbow)이었다. 궁수들은 수천년 동안이나 항상 전투의 일부를 이루어 왔지만 ― 활은 약 17000년 전경부터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자신들이 사용하는 무기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활이 결정적인 무기로 탈바꿈한 것은 그것을 더 길게 만들어 위력을 배가시키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장궁은 제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무기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장궁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힘과 기술이 필요했고 이는 오랜 기간에 걸친 수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웨일즈인들이 잉글랜드의 침략에 저항한 기간 동안 처음 쓰였던 장궁은 14세기 초 잉글랜드 국왕인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채택되었다. 숙달된 궁수가 사용할 경우, 길이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이 활은 십여 개의 화살을 연이어 200미터 거리까지 쏘아보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작은 활이 가슴까지 당겨 쏘는 데 비해 귀 옆까지 당겨 쏘는 장궁은 화살이 수 인치 두께의 떡갈나무판을 꿰뚫을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고, 비록 가장 좋은 판금 갑옷을 뚫을 수는 없었지만 사슬 갑옷이나 판금 갑옷의 접합부는 쉽게 꿰뚫을 수 있었다. 방호구가 좀더 약한 말은 특히 장궁으로 공략하기 용이했고, 일단 말이 쓰러지고 나면 말에 탔던 기사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잉글랜드 궁수들의 무용(武勇)은 1346년의 크레시 전투에서 잘 드러났다. 2:1이라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이 프랑스 기사들의 사슬 갑옷을 꿰뚫었고 그들이 탄 말에 대해서는 더욱 파괴적인 위력을 과시했다.

여기에 더해 말탄 기사는 11세기경의 발명품인 석궁(crossbow)에 의해서도 위협을 받았다. 기계적으로 정교한 기구인 석궁은 활시위를 당기기 위해 레버를 쓰거나 크랭크와 깔쭉톱니바퀴 장치를 사용하였다. 석궁은 화살을 정지시키는 힘이 강해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게가 200그램 이상 나가는 큰 화살을 발사하는 것이 가능했다. 석궁의 사거리와 정확도는 장궁을 능가하였으나 활시위를 당기기 위해 크랭크를 감는 성가신 과정 때문에 발사 속도는 1분에 두 발 정도밖에 못되었다. 따라서 석궁은 궁수가 안전하게 화살을 재장전할 수 있는 차폐물을 찾을 수 있는 경우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석궁은 기사의 생명을 더욱 위태롭게 만드는 무시못할 무기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공격 무기들에 대한 하나의 대처방안은 사슬 갑옷을 판금 갑옷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판금 갑옷은 점차로 더욱 두꺼워졌고, 16세기 말이 되면 말탄 기사는 무게가 5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갑옷을 걸쳐야만 했다. 그가 탄 말 역시 장갑을 필요로 했는데, 왜냐하면 말이 쓰러지는 것은 곧 말에서 떨어진 기사에게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기사와 그가 탄 말의 기동성은 크게 손상을 입었다. 당시까지 말탄 전사의 커다란 강점이었던 자유자재의 기동성과 스피드는 상실되었고, 기사는 유럽 전장에서의 중심 기둥으로서 지녔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말에 탄 병사들은 전투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제는 창을 휘두르는 기사로서가 아니라 피스톨과 검으로 무장한 기병대로서였다. 기병이 포병대의 일제 사격과 미리 잘 조율하여 움직이는 경우 기병대는 적을 몰아세워 밀집 대형을 유지하도록 만들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기 편 포병대에게 맞추기 쉬운 목표물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사는 이제 더 이상 판세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행위자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기사는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렀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공격받기 쉬운 목표물일 뿐이었다.

중세를 특징짓는 또하나의 커다란 상징이었던 성곽 역시 새로운 군사 기술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중세 초기의 성채는 나무 벽으로 둘러싸인 흙무더기에 불과했을 따름으로, 로마인들이 축조했던 정교한 방어용 성곽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 기간 동안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적인 이슬람교도들이 축조한 성곽을 관찰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지식을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 결과, 중세 초기를 통틀어 성곽은 당시와 같은 어지러운 시대에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안전성을 부여해 주는 사실상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성을 쌓아 만든 요새를 정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로부터의 식량 보급을 막아 굶겨서 항복시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공격군은 로마 시기로부터 거의 달라지지 않은 무기들을 써서 성곽이나 여타 요새의 성벽을 공략하려 시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가 12세기가 되자 성을 포위한 공격군은 새로운 기구인 투석기(trebuchet)를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투석기는 지레 받침점 위에 지렛대를 불균등하게 ― 한쪽은 길게, 다른 한쪽은 짧게 ― 올려놓아 만들었다. 긴쪽 끝에는 투사체를 올려놓고 고리를 써서 고정시켜 놓았으며, 짧은쪽 끝에는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았다. 이 상태에서 고리를 풀면 긴쪽 끝이 들어올려지면서 투사체를 적의 방향으로 날려보냈다. 투석기는 150킬로그램 가량의 투사체를 300미터 가까이 날려보낼 정도로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사거리는 고대의 노포에 미치지 못했지만 더 무거운 투사체를 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곽 포위용 무기로서는 투석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또한 이전의 투사체 발사기들처럼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비틀림 스프링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투석기는 어떤 종류의 날씨에도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상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성곽 포위공격용 기계들은 성벽의 일부를 쳐부수는 데까지는 거의 이르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이 기계들은 성내 주민들을 혼란시키고 민심을 흉흉하게 하려는 의도로 방화물질이나 살아 있는 뱀, 혹은 죽은 말 따위를 성벽 너머로 던져넣는 데 사용되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고 종종 이 기계는 포로를 원래 있던 성벽 반대쪽으로 재빨리 돌려보내는 데 쓰이기도 했다.

화약 혁명

장궁, 석궁, 미늘창, 투석기 등은 기사와 그의 지위를 유지시켜 주는 봉건제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여기에 화약에 기반해 새로 등장한 무기들은 기사의 몰락을 더욱 확연하게 만들었다. 방화를 목적으로 한 무기들은 오래 전부터 전투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다. 불화살, 역청 물질·황·끓는 기름의 혼합물을 넣은 항아리, 나프타로 채워넣은 원시적인 수류탄 등이 모두 전쟁에서 사용되었다. 고대에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무기들 중 하나는 그리스 화약(Greek fire)이라는 것이었다. 그 성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있지만, 그것이 효과적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 화약은 마치 요즈음의 네이팜탄처럼 그것이 접촉하는 모든 것에 달라붙어 맹렬하게 불태웠으며 심지어 물 위에서도 불이 붙었다. 7세기의 비잔티움 제국에서 처음 사용된 이 무기는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무기로, 또 성곽 포위공격용 무기로 쓰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력에도 불구, 그리스 화약은 간헐적으로만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것이 공격용 무기로서보다는 방어용 무기로 더욱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적의 손에 넘어갈까 두려워한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자들이 광범한 이용을 꺼렸다는 점 역시 중요했다. 이러한 우려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많은 다른 "비밀 무기"들의 이용을 제한했던 요인이기도 했다.

초기의 방화 도구들은 여전히 검이나 창, 활을 주로 가지고 싸우는 군대에서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화약의 발명과 함께 전쟁의 성격은 이제 심대한 변형을 겪게 되었다. 중세 유럽 사회를 바꿔놓은 많은 발명들과 마찬가지로, 화약 역시 동방에서 유래했다. 화약은 처음에 중국의 발명가들에 의해 의료 목적으로 쓰이다가, 당나라 때인 8세기에 화약을 간단한 로켓 장치의 추진제로 이용하는 실험이 수행되었다. 14세기 초 유럽에서 처음 이용되었을 때, 화약은 큰 화살을 쏘거나 돌로 된 포탄을 발사하는 데 이용되었다. 초기의 대포는 성가신 물건 이상은 되지 못했다. 대포는 좋은 투석기에 비했을 때 파괴력이 떨어졌고, 주된 장점이라고 한다면 보다 값싸게 만들 수 있고 기계적인 투사체 발사기보다 이동시키기가 용이하다는 정도였다. 포신은 종종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포신을 만드는 데 철이 사용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긴 쇳조각들을 나란히 놓고 용접해서 붙여 만들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반복해서 포를 쏘면 포신이 견뎌나지 못했고, 돌로 만들어진 포탄은 발사할 때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포병은 점차 그 위력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1453년 이슬람교도 침략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때 성벽을 부수는 데 대포가 성공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이후 시기에 일어난 여러 기술적 발전들은 보다 크고 정확하며 신뢰도가 높은 무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철이나 청동으로 된 포신이 교회 종을 만드는 데 이용되어 온 기법을 써서 주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평화적 용도의 기술이 전쟁 기술에 응용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그리고 철로 된 포탄이 돌 포탄을 대체했다. "굵은 알갱이 형태로 만들어진(corned)" 화약은 매 번의 충전량이 좀더 균일하게 빨리 탈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기술혁신들의 결과로,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오랜 기간 동안 직접 공격에는 끄떡없었던 요새화된 성곽들이 이제 공략가능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곽의 시대는 아직 종말을 고한 것이 아니었다. 군사 엔지니어들은 푸석푸석한 진흙으로 성벽을 보강하여 포탄의 충격을 흡수하도록 함으로써 성곽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성에서도 대포를 발사할 수 있는 보루를 건설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곽들은 상당한 정도의 안전성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한번 포위 공격군 쪽으로 균형이 기울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경에 포병대가 등장하여 집중 포화를 퍼붓는 것이 가능해진 이후부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전까지 성곽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맞서는 보호 장치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었고 소규모 국가들의 독립을 유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가로막는 구실을 했다.

보다 크기가 작고 더 큰 이동성을 지닌 대포는 군대가 서로 맞붙는 전장에서도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여기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30년 전쟁(1618-1648) 기간 동안 스웨덴 사람인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이뤄낸 혁신이었다. 구스타부스는 크기가 큰 야포를 쓰는 대신 4킬로그램 내지는 2킬로그램짜리 포탄을 발사하는 소형 포에 의존했다. 이 포들은 무게가 가벼웠으므로 몇 안되는 포대원들에 의해서도 다루어질 수 있었고 전투 도중에 재빨리 운용될 수 있었다. 이로써 포병대는 전투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고전적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즉 기병과 보병의 공격에 앞서 적군의 대열을 흩어놓는 역할이 그것이다.

우리가 보아 온 바와 같이, 기술의 발전은 크기가 작은 기구나 과정의 규모를 확장하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총기류의 경우에는 그 과정이 반대로 되어 있다. 휴대할 수 있는 총의 경우 처음에는 심지어 개머리판도 없는, 크기가 작은 대포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대포가 도입된 후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쓸만한 개인휴대용 소(小)화기가 전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휴대용 소화기는 여전히 많은 단점들을 갖고 있었다. 큰 대포들은 고정된 목표물을 향해 조준한 후 점화구를 통해 장전된 화약에 불을 붙이는 방식으로 발사되었다. 반면, 소형 화기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목표물을 맞추어야만 했다. 따라서 총을 쏘는 병사가 시선을 점화구로 옮기게 되면 정확한 조준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화승식 발사 장치(matchlock)였는데, 이 장치는 방아쇠에 연결된 죔쇠에 물려 있는 연기 심지를 써서 화약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이 화승총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총을 장전하고 발사하고 소제하는 수십 가지의 상호분리된 절차를 필요로 하는 극히 성가신 과정을 거쳐야 했다. 화승총을 장전해 한 발 쏘는 데는 적어도 15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16세기의 첫 사분기가 되면 소형 화기는 전장에서의 보조물 정도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투의 필수적 품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기술적 개량은 휴대용 소화기를 더욱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굼뜬 화승식 발사 장치는 점차로 바퀴식 방아쇠(wheellock)에 자리를 내주었고, 이어 부싯돌식 발화 장치(flintlock)가 달린 머스켓총이 등장했다. 이 총은 1분에 3발을 쏠 수 있었다.

이러한 무기들의 화력과 정확도 덕택에 군대의 공격력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는데, 이는 이 무기들을 전장에서 적절한 절차에 맞추어 사용했을 때 특히 그러했다. 군대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여러 줄로 정렬시켜 작전을 펼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이 때 병사들은 총을 발사한 후 뒷줄로 후퇴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총을 재장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가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항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머스켓총은 총알을 수백 미터 거리까지 쏘아보낼 수 있었지만, 정확도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것은 대략 70미터 이내에서만 가능했다. "적병의 눈자위를 볼 수 있을 때까지는 발사하지 말라"는 귀에 익은 명령은 현명한 훈계였지만, 전투 상황에서 이를 따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전투 상황에 막상 돌입하면 병사들은 섣부르게 총을 발사하기 일쑤였고, 많은 병사들은 얼이 빠진 나머지 정해진 필수적 절차들을 완전히 잊고 엉뚱한 짓을 하곤 했다. 미국 남북전쟁기의 한 보고서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게티스버그 전투가 끝난 후 전장에서 수거한 총기들을 검사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수거된 27,574정의 전체 총기 중에서 적어도 24,000정은 장전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중 절반 가량은 두 발씩 장전이 되어 있었고 1/4 가량은 3발에서 10발까지 장전되어 있었으며 나머지는 한 발씩 장전되어 있었다. 두 발에서 여섯 발까지 장전되어 있던 총기들 중 많은 수에서 화약은 한 발분밖에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몇몇 총기들은 총알이 총구멍 안쪽에 들어 있었고 화약은 그 위에 장전되어 있었다. 다른 몇몇 경우에는 58구경 종이 탄약통 여섯 개가 발견되었는데, 탄약통을 찢거나 뜯지 않은 채로 총에 집어넣은 상태였다(이렇게 되면 뇌관이 탄약을 폭발시키지 못하게 된다). 스프링필드 병기창에서 만든 한 정의 라이플-머스켓총에는 23발의 총알이 가지런히 장전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정의 격발식 활강 머스켓총에서는 22발의 총알과 62발의 사슴사냥용 총알이 그에 해당하는 양만큼의 화약과 함께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섞인 채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런 류의 서투른 솜씨는 전투에서 병사들이 종종 경험하는 공포나 무기력함에 비추어 충분히 예상가능한 수 있는 일이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유능한 군대 지휘관들은 전장에서 지켜야 하는 엄격한 절차를 제정하여 연병장에서의 무수한 연습을 통해 병사들에게 이를 깊이 각인시켰다. 총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요구되는 많은 단계들은 병사들이 적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극도로 위축된 상태에서도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주입되었다. 기사들끼리의 전투에서 볼 수 있었던 제멋대로의 자기중심성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전쟁은 판에 박은 기계적 절차가 되었고 그 속에서 병사들은 "마치 그들이 지닌 무기처럼 군대라는 거대한 기계의 교체가능한 부품이 되어 갔다."

앞선 장(章)들에서 우리는 조직 변화와 기술 변화의 상보성에 대해 강조한 바 있는데, 이 점은 군사 영역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다. 잘 훈련된 군대는 규율이 느슨한 군대와 맞섰을 때 항상 우위를 점하기 마련이고 전쟁무기의 기술적 발전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총기류를 다루기 위해서는 정확한 일련의 동작들이 요구되었는데, 병사들이 전투 도중에 완전히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이 필수적이었다. 18세기의 유럽 군대는 지속적인 훈련에 의해 만들어진 철의 규율을 따르고 엄격한 지휘계통에 절대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세계 역사상 가장 엄격하고 효율적인 조직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군대의 창설은 군사 영역에서의 중요성을 뛰어넘는 함의를 지녔다. 왜냐하면 군대는 민간 영역의 새로운 조직 형태 ― 기계적 절차, 엄격한 통제, 위계적 구조를 중시하는 ― 에 원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인간 사회에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어린이들이 배우는 가장 중요한 교훈들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류의 권위는 특정한 개인 ― 처음에는 부모, 나중에는 권위를 지닌 다른 인물 ― 에게 체화된 것인 반면, 이 시기의 병사들은 왕과 그 대리인들의 권위에 복종하긴 했지만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주입된 표준화된 절차들에도 마찬가지로 복종해야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학교, 공장에서도 이런 원리들을 광범하게 이용하게 되었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지금 현재에도 이런 조직 유형은 많은 생활 영역에서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전쟁과 중앙집권화된 국가

대포와 소화기는 전쟁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야외에서의) 전투는 보다 더 복잡하고 조직화된 사건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포위 공격은 보다 정교해졌다. 이 두 가지 전쟁 형태 모두가 병참(兵站)의 문제를 더욱 부각시켰다; 한 계산에 따르면, 50,000명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병사들과 말에게 매일 475톤의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총탄과 탄약 역시 필요할 때 바로 보급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 때문에 군대는 긴 보급선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이러한 보급선의 유지와 관련된 전략상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고 군사 작전을 위한 지역 범위는 상당한 정도로 확장되었다.

새로운 전쟁 형태는 군사 작전의 비용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봉건 귀족은 자기 자신의 무기와 갑옷 비용을 지불할 수단을 갖추고 있었고, 장궁은 커다란 재정 지출을 수반하지 않았다. 반면, 머스켓 총병과 포병의 대부대를 제대로 훈련시키고 장비를 갖추어 주려면 엄청난 재정 지출이 요구되었다. 많은 경우에 일국의 군주만이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총기류는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영토 내에서 통제권을 증가시키는 데 결정적인 이점을 제공했다. 그 결과 새로운 무기 기술은 16세기 이후 유럽사를 특징지은 민족주의, 중앙집권화, 절대주의 왕정의 흐름을 강화시켰다.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은 무기류의 표준화에서도 역시 분명하게 나타났다. 17세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병사들이 군복을 입지 않았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들 역시 극히 다양했다. 성공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와 올리버 크롬웰은 무기류와 다른 전쟁용 장비들을 표준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표준화는 종종 기술 진보에 대한 제동 장치로서 작동하였다. 일단 총이나 대포가 군대의 표준적 무기로 자리잡게 되자,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거나 상당한 정도로 변용하는 것은 그와 병행하는 많은 변화를 요구하였다. 총탄과 같은 무기의 보조물들도 변화해야 할 뿐 아니라 일련의 절차들과 이를 둘러싸고 성장해 온 문화까지도 변화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방식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상당한 집착을 가질 수 있으며, 특히 전쟁과 같이 그 본질상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경우에는 일을 하는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는 경향을 더 크게 가질 것이다.

그 결과 화약의 사용에 의해 촉발된 혁명적 변화는 그 추동력을 잃어버렸다. 18세기와 19세기 초의 기간 동안 무기의 개량은 극히 드물었다. 안쪽에 강선이 패인 총신의 발명은 소화기의 정확도와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지만, 전통적인 머스켓총을 대체하지는 못했다. "브라운 베스"라 불렸던 부싯돌식 머스켓총은 무려 160년 동안이나 영국 보병의 표준적인 무기의 자리를 지켰으며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후장식 라이플총 ― 총탄을 총구를 통해 장전하지 않고 총신 뒤쪽으로부터 장전하는 ― 으로 대체되었다. 대포 역시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역사학자 홀(A. Rupert Hall)의 말을 빌면,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기의 목선(木船)에 탑재된 대포는 16세기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했던 드레이크 제독의 선단에서 사용했던 것에 비해 정확도 면에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군사 기술은 극적으로 변화하였다. 발사시에 팽창하는 총탄의 발명은 총탄을 총의 구경 속으로 힘들여 쑤셔넣지 않아도 되게 해 줌으로써 강선이 패인 총의 장전을 훨씬 쉽게 만들어 주었다. 후장식 총의 개발은 총의 장전을 더욱 빠르게 해 주었고, 병사들이 총을 재장전할 때 똑바로 서는 대신(이 때 병사들은 적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엎드린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추가적인 혜택도 제공해 주었다. 화약의 개량으로 포구 속력(muzzle velocity)이 빨라졌고 이는 더 작은 총탄과 더 가벼운 총을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새로운 화약은 또한 연기가 나지 않는 장점도 지니고 있어 병사가 총을 쏠 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이 나타난 원인을 무기 생산의 영역 내에서의 발전의 결과로 완전히 돌릴 수는 없다; 이는 새로 등장한 산업적 질서의 산물이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전함 시대의 기술 변화와 해군 문화

19세기의 육전(陸戰)이 새로운 무기의 이용에 의해 변형되고 있을 때, 바다 위에서도 유사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혁명의 핵심적 요소들 중 하나는 대양 항해용 선박의 추진력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함으로써 배가 더이상 바람의 변덕에 의해 영향받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에 더해 증기 동력은 철선의 건조와 완벽한 보완 관계를 이루었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에너지원 덕택에 더 크고 무거운 선박의 건조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영국의 넬슨 제독이 거느렸던 배들은 배수량 2,000톤 정도가 고작이었던 반면, 1860년대가 되면 이는 9,000톤으로 뛰어올랐고 19세기 말에는 20,000톤이 되었다.

이런 규모의 선박들은 많은 수의 대포를 탑재할 수 있었는데, 이 포들은 안쪽에 강선을 파고 후장식을 채용했으며 개량된 화약과 포탄을 사용함으로써 정확도와 발사 스피드가 향상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발전들은 대포가 처음 배에 탑재되기 시작했을 때 시작된 하나의 경향을 강화시켰다. 이전 시기에는 해상 전투의 전통적인 유형은 적선 가까이 배를 붙여(가능한 경우에는 부딪치면서) 그 위에 올라탄 후 육전에서와 유사한 전투를 통해 승무원들을 항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에 대포를 탑재하게 되면서 이런 전술은 낡은 것이 되었다; 서로 교전하는 배들은 이제 원거리에서의 대포 사격을 통해 적선을 가라앉히거나 무력화하려 시도하였다.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 집착하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같은 나라들은 크게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해상의 주도권은 배에 대포를 탑재하여 작전에 이용한 영국이나 다른 나라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 초가 되자 많은 포를 탑재한 증기기관 동력 전함은 현대적 무기류의 체현이자 세계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군사적 산물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하나의 무기 체계 이상으로 한 나라의 무장력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는데, 이는 영국과 같이 전통적인 해상 강국이나 미국, 일본과 같이 새로 부상중인 강국들 모두에게 있어 그러했다.

심대한 기술적 변화가 무릇 그렇듯, 전함의 발전은 새로이 해결해야만 하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현대의 해군은 그들의 작전 지역을 따라 위치한 석탄 공급 기지의 존재여부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는 제국주의적 팽창 ― 그 자체가 해군력의 증가에 의해 조장된 ― 에 강한 동인을 제공했다. 해군 장교들은 현대적 전함의 빛나는 영예에 의해 힘입은 측면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현대적 해군 선박들은 군사적 절차들에 있어서의 변화를 강제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데는 커다란 저항이 존재했다. 범선의 시대에는 수병의 생활이 독특한 일련의 일과들을 둘러싸고 이루어졌고 이는 장병들에게 해군 특유의 문화를 불어넣어 주었다. 증기기관의 도입은 이 중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다; 많은 수병들은 이제 물 위에 떠다니는 공장 노동자 이상은 아니게 되었다 ― 석탄을 때고, 계기를 들여다보고, 기계의 상태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치들은 심각하게 침식되었으며, 전통의 수호를 지지하던 장교들은 보다 기술적인 마인드를 지닌 장교들로 점차 교체되었다. 장궁과 대포가 중세의 기사와 기사도 문화를 파괴했던 것처럼, 해군 기술의 발전은 여러 세대 동안 수병들이 공유해 왔던 하나의 삶의 방식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쟁무기와 근대세계의 형성

육상과 해상에서의 이러한 모든 변화의 결과, 전쟁의 수행은 현저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군사 계획가들이 새로운 군사 기술들에 내포된 완전한 잠재력을 항상 재빨리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기들은 해외에서 유럽의 육군과 해군에 의해 사용되어 놀라울 정도의 위력을 과시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제국주의 지배하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서구 군사력의 기술적 우월성은 1차 아편전쟁(1839-1842) 기간 동안 분명하게 드러났다. 영국 포함의 대포는 중국의 성채들을 파괴했고, 영국 병사들의 우수한 화력은 숫적으로 우세한 중국 군대를 패주시켰다. 15킬로그램짜리 포탄을 쓰는 대포 두 문으로 무장한 영국 군함 한 척이 아홉 척의 군용 평저선과 다섯 곳의 요새와 한 곳의 포대와 두 곳의 군항을 단 하루만에 파괴했을 정도였다. 화약과 함께 많은 다른 앞선 군사기술들의 기원이었던 중국은 [이후의 군사 기술 개발에 있어] 서구 세계에 비참할 정도로 뒤떨어졌으며 서구에 의해 정복되는 과정 속에서 그 대가를 치렀다.

19세기 후반기에는 서구 열강들과 세계의 다른 지역들 사이의 기술적 격차가 더욱 벌어졌다. 불균형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여기서는 후장식 연발 라이플로 무장한 작은 부대들이 기껏해야 부싯돌식 머스켓총으로 무장했거나 종종 창과 방패만을 가졌을 뿐인 토착 군대를 압도했다. 수백 명의 유럽 병사들이 수천 명에 달하는 토착 군대들을 완전히 패주시킨 사례들이 숱하게 존재했다. 하나의 예만 들자면, 수단의 옴두르만 전투에서 한 영국군 부대는 인근의 강에 위치한 포함 한 척의 지원을 받으면서 40,000명의 더비시인 군대에 맞섰다. 다섯 시간의 전투가 끝난 후 영국 병사 20명과 같은 수의 유럽 동맹군 병사들이 전사한 반면, 더비시인들의 경우에는 희생이 훨씬 커서 1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화력에서의 우위에 더해, 유럽인들은 19세기의 생활을 변화시킨 모든 다른 기술혁신들 ― 증기선, 전신, 철도, 그리고 열대 질병으로부터 군대를 보호해 준 새로 개발된 약품들 ― 에도 힘입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의 많은 지역들은 빠른 속도로 정복되었고, 1914년에 이르면 세계 육지 면적의 84%가 유럽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유럽의 제국주의적 확장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무기는 기관총이었다. 미국 남북전쟁기에 처음 사용된 기관총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제국주의적 침략 과정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는데, 한 정의 기관총을 앞세운 부대가 이를 공격해 오는 어리석은 토착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색 인종을 지도해야 할 백인의 책무(white man's burden)"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들 중 서구 발명력의 산물인 기관총이 머지않아 자신들에 대해서도 겨눠질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관총이 "열등한 인종(lesser breeds of men)"을 향할 때만 치명적인 인명 살상을 가져올 거라는 믿음에 도취되어 있던 유럽인들은 기관총이 이미 전쟁의 조건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1차 대전 초반에 교전 양측의 장군들이 자군 부대를 기관총 참호로 요새화된 적군의 방어선 앞으로 계속해서 몰아냈을 때 경악과 함께 다가왔다. 이는 소름끼칠 정도의 대살륙으로 귀결되었는데, 솜므 전투의 첫날에만 영국군 사상자가 60,000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기관총이 육전의 규칙을 다시 쓰고 있었다면, 바다에서는 잠수함이 마찬가지의 결과를 해전에 가져오고 있었다. 잠수함은 대양의 표면 아래를 미끄러져 다니다가 그 존재를 모르고 있는 적 선박에 대해 어뢰를 발사해 격침시켰다. 그런 점에서 잠수함은 민간 상선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국제법뿐만 아니라 해상 전투의 모든 관행까지도 무시했다. 잠수함은 배를 격침시키기 전에 그 승객과 승무원들이 구명선에 옮겨타는 것을 허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기존의 존중받던 규칙을 따르는 대신, 수면 아래쪽에 계속 있다가 그 존재를 꿈에도 모르고 있는 대상 선박을 일거에 가라앉혀 버렸다. 잠수함은 독일 해군 전략에서 주춧돌 역할을 하였으며, 1차 대전 동안 독일의 U-보트는 연합군 선박들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독일의 성공은 잠시 동안뿐이었다; 무차별적인 잠수함 공격은 결국 1917년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쪽에 합류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결정적으로 전세를 연합군 쪽으로 기울여 놓았다.

개량된 대포와 기관총이 전장에 새로운 공포를 가져오고 있을 무렵, 비행기는 현대 기술이 전시의 민간인들에게 줄 수 있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비행기는 처음에 감시와 정찰 목적으로 제한되었다가 1차 대전이 3년째에 접어들면서 공격 무기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독일군 비행기와 쩨펠린 비행선이 영국에 투하한 폭탄으로 1,300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0명이 부상당했으며 물질적 손상도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

이후의 전쟁들은 이 수치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하였다. 최초의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2차 대전기 동안 일본 도시들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260,000명의 사망자와 412,000명의 부상자를 낳았으며 66개 도시에서 건물이 지어진 구역의 40%를 파괴하였다. 도쿄에 가해진 단 한 차례의 소이탄 폭격이 25만 채의 건물을 파괴하고 84,000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40,000명의 부상자와 백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최초의 원자폭탄은 50,000명 이상의 사망자와 그만큼 많은 수의 부상자를 낳았으며 도시의 절반을 파괴하였다. 나가사키 상공에서 폭발한 두번째 원자폭탄 역시 유사한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의 많은 지역들 역시 공중 폭격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수만 개에 이르는 폭탄이 도시의 산업 중심지들에 떨어져 수천 명의 사망자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재민들을 남겼다. 2차 대전 말기에 베를린에 대해 행해진 단 한 차례의 폭격에서만도 25,0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중에 많은 민간인들이 사는 산업 중심지들을 집중 폭격한 것이 유럽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는 부분적으로 전략 폭격의 부정확성 때문이었다. 연합군에 의해 투하된 240만 톤에 이르는 폭탄 중 불과 20퍼센트만이 애초에 의도했던 목표로부터 300미터 반경 이내에 떨어졌다. 도시의 많은 지역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많은 공장들이 손상을 입거나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산업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외관상으로는 파괴된 듯했던 많은 공장들은 재빨리 재가동에 들어갔고, 더이상 생산해낼 수 없는 구성요소들에 대해서는 대체물이 개발되었다. 독일의 산업 생산은 1944년까지 매년 증가하였는데, 연합군의 폭격이 최고조에 달했던 바로 그 해에 생산량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1944년에는 엄청난 폭격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산업은 1941년에 비해 세 배나 많은 군용 비행기, 다섯 배나 많은 장갑차, 여덟 배나 많은 대포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사기가 계속되는 공습에 맞선 상황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공중 폭격이 오히려 전쟁을 계속하고자 하는 독일인들과 일본인들의 의지를 더욱 굳게 만들어준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전략 폭격이 가져온 효과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그것이 연합군의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전쟁 직후에 수행된 미국의 공식적 전략 폭격 조사(Strategic Bombing Survey) 역시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월터 밀리스(Walter Millis)에 따르자면, "최종 결론을 이렇게 요약하면 아마 공평할 듯하다: 즉, TNT와 소이탄을 이용한 전략 폭격은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사상자는 더 많이 낸 반면 군사적인 성과는 훨씬 적게 거두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장기간에 걸친 공중 폭격이 지니는 성격에서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다. 리델 하트(B. H. Liddell Hart)의 분석에 따르면 재래식(비핵) 무기를 사용하는 전략 폭격은 적에게 압박을 가하긴 하지만 갑작스런 충격과 함께 찾아오는 결정적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전략 폭격은 빠르고 광범한 결과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설사 상당한 파괴를 수반한다 하더라도 단지 압박을 서서히 증가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리델 하트가 언급했듯이, "인간은 그 과정이 점진적이기만 하다면 생활 조건의 하락에 대해 적응하는 능력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은 전쟁의 규칙들을 다시한번 더 바꿔 놓았다. 핵탄두를 장비한 미사일은 엄청난 파괴력과 함께 충격을 안겨주는 무기였다. 핵전쟁은 과거의 그 어떤 전쟁과도 다르며, 만약 실제로 일어난다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죽음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었다. 1메가톤짜리 폭탄 하나면 깊이가 60미터에 폭이 300미터나 되는 구덩이를 하나 팔 수 있을 정도였다.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구조물은 아무것도 버티지 못할 것이며, 이 구역 바깥에서도 상당한 거리까지 손상이 심하게 가해질 것이었다. 만약 그 지역이 보통 도시에서의 인구 밀집도를 가진 곳이라면 최소한 200,000명이 즉사할 것이고 500,000명이 부상을 입을 것이었다. 불길이 도시 전역에 퍼지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 사망할 것이고. 이런 최초의 충격 이후에는 이 지역에 방사선이 퍼지면서 수 주 혹은 수 개월 후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공격은 한 번 있고 말 일은 아닐 터였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군비 경쟁의 결과로 두 나라 합쳐서 4,000기가 넘는 핵탄두 장착 탄도 미사일이 만들어져 무기고 속에 쌓여 있고 그와 함께 수백 기의 유인 폭격기와 핵장착 능력을 갖춘 순항 미사일들이 있었다. 만약 상호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 중 작은 수라도 실제로 사용된다면 파괴의 정도는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사회의 기간 구조는 긴장 속에서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하며, 문명은 야만주의의 문턱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인류가 이룩한 기술 진보의 기나긴 역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현대 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군인과 민간인 사이의 구분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과거의 전쟁들은 그것이 제아무리 무서운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개인의 용맹을 떨칠 약간의 공간은 남겨두고 있었다; 반면 핵전쟁은 거대한 규모의 비인격화된 버튼누르기식 파괴를 만들어냈다. 이런 점에서 핵전쟁은 군사 기술의 중요한 흐름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다. 점차로 정교해져 온 무기들은 전사와 그 희생자 사이에 심리적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과거에는 한 마을의 주민들이 검과 도끼를 휘두르는 군대에 의해 살륙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12,000미터 고도에서 소이탄을 투하함으로써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결과만 보면 똑같지만(더 나빠진 것일 수도 있다), 오늘날 무기를 설계한 엔지니어들, 병사들을 전장에 보낸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실제 참전한 육·해·공군 병사들은 희생자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gberg)는 2차 대전 때 공습을 위해 출격한 후 돌아와 이렇게 회고했다: "당신이 버튼을 누르면 죽음이 떨어져 내린다 . . . 거기에 어떻게 괴로와 몸부림치는 엉망이 된 몸뚱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신 주위의 이 공기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발사 무기에 의해 채워질 수 있겠는가? 그건 마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에 대해 라디오로 전해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나 분리되어 있어 실재감을 느낄 수가 없다. . . . 현대의 전쟁에서 병사들은 먼 거리에서 상대방을 죽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자기가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모든 군인들이 이러한 분리의 도덕적 함의를 두고 괴로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개량된 무기의 발전으로 인해 전쟁에서의 덕목들이 침식받는 것에 대해서는 종종 우려를 표시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의 한 왕은 초기 노포의 시범을 보았을 때 이렇게 탄식했다 한다: "오 헤라클라스여, 인간의 용맹이란 이제 끝이 났군요!" 중세 시대에 군사 지휘관들은 석궁수와 머스켓 총병들이 멀리서 자기 휘하의 병사들을 한 사람씩 겨눠 쏘는 교활한 방식을 쓰는 데 대해 종종 격렬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의 분노는 이러한 무기들을 사용하는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받은 가혹한 처분 ― 그들은 종종 손이 잘리고 눈이 파내어졌다 ― 에 잘 반영되어 있다.

물론 형벌 조치들이나 간혹 새로운 무기에 대해 표출되었던 경멸감이 군사 기술의 진보를 저지하지 못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도 군사 기술 변화의 결과들을 제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 중 몇몇은 다음 장에서 탐구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전쟁무기에서의 기술 진보를 가져온 원인들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이는 다음 장의 첫번째 파트의 주제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출전: Rudi Volti, Society and Technological Change, 3rd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5), pp. 209-249. (번역: 김명진)

루디 볼티
2000/06/15 00:00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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