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무기는 어떻게 등장했는가 ―


앞 장에서는 기술 변화가 전쟁의 수행에 가져온 몇몇 결과들과 그것이 다른 영역들에 미친 영향에 대해 개괄해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군사 영역에서의 그러한 기술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은 무엇인가? 왜 지난 수십 년 동안 그토록 무시무시한 속도로 무기의 발전이 이루어졌는가? 왜 어떤 무기들은 받아들여진 반면 다른 무기들은 사라졌는가? 특정한 무기의 발전과 사용을 조장함에 있어 사회적·문화적 조건들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이 장의 첫번째 파트에서는 이러한 질문들 중 몇몇에 답하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두번째 파트를 위한 배경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이어 두번째 파트에서는 새로운 무기의 사용을 제한하려는 과거와 현재의 노력들에 대해 다룰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

새로운 무기가 발전하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전쟁국 혹은 잠재적인 전쟁국이 우수한 무기를 통해 적에 대한 우위를 점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쟁국들 중 한쪽이 이에 성공했을 경우, 그에 맞선 적국은 이 새로운 위협을 중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려는 쪽으로 강한 동기부여를 갖게 된다. 새로운 공격 무기의 등장에 대해 새로운 방어 무기가 맞서고, 이는 다시 더 나은 공격 무기의 개발을 자극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경쟁국들이 각각 적국의 능력을 중화함과 동시에 자국의 능력을 강화하려 노력하면서 서로 공격을 가하고 피하는 지속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과정이다. 따라서 군사 기술의 발전은 각각의 새로운 무기가 다른 무기의 발명을 자극하고, 그에 따라 죽이고 파괴하는 능력이 끝없이 확장되는 무한순환이 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숱한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우리는 말탄 기사의 공격력이 어떻게 미늘창과 장궁에 의해 저지되었는지를 보았다. 대포는 중세 성의 안전을 위협했지만, 대포의 파괴력은 성채의 개량에 의해 일시적으로 저지되었다. 1차 대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기관총은 교착 상태를 만들어냈지만 장갑으로 무장한 탱크는 기관총을 훨씬 덜 유효한 무기로 만들었고 균형을 다시 공격군 쪽으로 기울여 놓았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세대의 정밀 무기들이 탱크를 대단히 취약한 존재로 만들었고, 전장의 상황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것이 되었다.1)

그러나 이런 작용­반작용의 도식이 비록 유용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선 군사 전술을 공격 아니면 방어라는 식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항상 용이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치러지고 있을 때, 전쟁국들은 공격과 방어라는 관점에서 깔끔하게 사고하지 않는다. 전쟁은 적을 쳐부숨으로써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이고 이는 곧 공격을 해야 함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공격 작전의 수행 능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 조치도 필요하다. 그리고 심지어 한 국가가 침략국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공격에 나서는 것은 여전히 필요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오래된 경구가 말해 주듯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기 때문이다.2)

마찬가지로, 많은 무기들이 공격 혹은 방어 목적 모두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보다 정확하고 빠른 속도로 발사가능한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이는 군대가 적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고, 적의 공격에 맞서 현재의 위치를 좀더 쉽게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쓰일 수도 있다. 또한 강력한 방어력은 성공적인 공격 작전을 수행하는 능력을 강화시킨다. 19세기의 제국주의 세력들은 기술적으로 덜 진보된 지역들을 정복할 수 있었는데 ― 이는 명백히 공격적인 목적이다 ―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의 우수한 화력 덕택에 원주민 군대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격력과 방어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오늘날 특히 중요한 문제인데, 현재 수십억 달러를 들여 탄도미사일 요격 방어 체제인 전략방위계획(Strategic Defense Initiative) ― "스타 워즈(Star Wars)"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 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작동되는 시스템이 장비된다면 ― 현재 극복해야 하는 엄청난 기술적 장애들을 고려할 때 이것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 이 방어 체제는 적국의 보복 능력을 무력화시킴으로써 미국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결국 방어 체제는 압도적인 공격상의 우위의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사회 구조와 군사 기술의 발전

공격적인 것이건 방어적인 것이건 간에, 전쟁무기는 그것이 단지 본성상 우수하다는 이유로 개발되어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는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언급했던 바와 같이, 기술의 창출과 이용은 그것이 일어날 당시의 사회 유형, 문화적 지향, 그리고 개개인들의 동기부여 등을 포괄하는 더 큰 과정의 일부이다. 군사 기술의 발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는 등자가 중세의 군대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대해 린 화이트(Lynn White)가 쓴 내용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기구는 단지 문을 열어줄 뿐이며, 그 안으로 누군가를 들어오도록 강제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발명이 받아들여지느냐 혹은 거부되느냐, 그리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을 경우 그것이 지닌 함의가 얼마만큼 인식되느냐 하는 문제는 기술적 아이템 그 자체의 성격에도 의존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 상황이나 그 지도자들의 상상력에도 크게 의존한다. . . . 앵글로-색슨족은 등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이 지닌 가능성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무시무시한 댓가를 치렀다. . . . 반면, 등자에 내재된 가능성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써서 우리가 봉건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사회구조에 의해 지탱되는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프랑크족뿐이었다.3)

하나의 군사 기술은 더 큰 시스템의 일부이며, 따라서 전쟁무기의 이용은 필연적으로 그 시스템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포함하는 시스템의 기본적 특징들을 반영한다. 이는 장궁 대신 총기가 보병의 기본 무기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4) 만약 효율성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장궁은 결코 초기의 화승총이나 머스켓총에 뒤지지 않았다. 유능한 궁수들이 쏘았을 때, 화살은 탄환처럼 갑옷을 쉽게 꿰뚫을 수 있었다. 장궁은 사거리도 더 길었고 더 빠른 속도로 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장궁은 값도 쌌고 초기의 총기들을 괴롭혔던 연이은 불발탄의 문제도 없었으며, 초기의 화승식 발사 장치처럼 습기찬 날씨에 효율이 떨어진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총기는 왜 그 모든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장궁을 대체했을까?

활의 장점에 대해 위에서 기술한 내용은 그 목록 앞에 "유능한 궁수들이 쏘았을 때"라는 단서가 달려 있는 경우에만 성립했다. 궁수들이 중세의 궁술이라는 기술시스템에서 핵심적인 요소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여기서 활의 효율성을 결정한 것은 궁수들의 숙달(skill) 정도였다. 이러한 숙달은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활에 숙달되는 것은 다소의 천부적 재능과 함께 대단히 많은 연습을 필요로 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는 남자들과 소년들이 궁술 연습에 상당한 시간을 쏟을 것이라는 강한 기대가 있었다; 실로 그것은 잉글랜드의 국민 스포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따라서 장궁은 자유인들로 구성된 임시적인[즉, 상비군이 아닌] 군대의 무기로 적격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엄격한 궁술 연습을 기꺼이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은 여가 시간을 카드놀이, 볼링, 주사위던지기, 풋볼의 중세적 버전 등에 쓰는 것을 더 선호했다. 수 차례에 걸쳐 이러한 행위들을 금지하는 국왕의 칙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의 한 법령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궁술이 다시 활기를 띠어 연습이 이루어지고, 그에 의해 과거에 우리 나라가 큰 영예를 얻었던 고대의 무기가 계속 사용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취지에서 내려진 것이었다.5)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이러한 법령들은 강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잉글랜드 궁술의 수준은 점차적으로 하락하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문제가 좀 다른 경로로 진행되었다. 14세기 후반 동안 프랑스 왕 역시 다른 오락을 금지함으로써 궁술을 장려했다. 그 결과 프랑스 궁술의 수준은 잉글랜드의 그것을 앞지르게 되었는데, 그 정도가 커지자 지배 엘리트들은 이제 자국의 궁수들이 자신들의 지배에 도전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궁술을 대중적으로 장려하는 대신 제한된 수의 궁수들만을 각 도시 및 지역에서 양성하도록 방침이 바뀌었고 대중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오락으로 되돌아갔다.6) 통치자들은 일반적으로 시민들의 군사적 무용(武勇)을 장려하지 않는 경향을 갖는데, 왜냐하면 이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손쉽게 자원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제 국가들은 그 대신 높은 수준의 개인적 기량을 갖추지 못한 병사들로 구성된 전문직업적 상비군을 창설하는 것을 선호한다.

총기는 이러한 시스템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왜냐하면 총기를 도입함으로써 사회 하층부에서 끌어모은 저임금 용병들을 쓰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궁술과는 달리 총기의 사용은 높은 수준의 숙달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상당히 쓸만한 회승총병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데는 며칠간의 시간과 훌륭한 훈련 조교만 있으면 되었던 반면, 유능한 궁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년간의 기간과 삶의 방식 전체가 필요했다."7) 분명히 초기의 총기들을 다루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으며 많은 동작들을 정확한 순서로 해낼 것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작들 중에서 대단한 숙달 정도를 요구하는 것은 없었으며, 심지어 총을 겨누고 쏘는 동작까지도 그러했다.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러한 숙달이 바람직한 것이라 하더라도 높은 숙달 수준을 불어넣기 위한 기회가 충분치 않았다; 화약과 총알은 값이 비쌌고, 그 결과 훈련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1년에 수십 차례 정도 총을 발사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쨌든 무기를 다룸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숙달 정도는 집중적인 포화를 유지하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덜 중요했다. 전투의 승리는 각 개인의 정확한 사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을 위축시키는 일제 사격에 의해 얻어졌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철의 규율이었다. 화승총과 머스켓총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해 주로 요구되었던 것은 병사들이 엄격한 훈련을 통해 적절한 절차들을 주입받는 것, 그리고 전투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도 병사들이 이 절차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적을 향해 전진하며 대열을 유지하도록 요구받았다. 설사 그들 중 최소한 1/3이 적의 포화로 인해 희생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조차도 말이다.9)

이런 류의 용병들은 전투에서 특히 효과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대제가 원했던 것처럼 적보다는 자기편 장교를 더욱 두려워하는 로봇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9) 따라서 총기는 자유나 개인의 능력보다는 규율에 훨씬 더 높은 가치를 두는 중앙집권화된 관료제적 국가에 의해 양성된 군대에 특히 잘 부합했다. 독립적인 자유민(yeoman)들로 구성된 궁수 부대가 중세 말 잉글랜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부합했다면, 총을 휘두르는 용병 군대는 16세기 이후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배적이었던 상황에 부합했다.

또하나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총기가 가진 장점이 특정한 정치조직 유형에 잘 들어맞는다는 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술은 종종 그것이 충족시키는 심리적 필요 때문에 수용되기도 한다. 초기의 총기가 활에 비해 많은 결함들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총기는 대단히 큰 소음을 발생시킨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부정확하고 사용하기 거추장스럽긴 했지만 초기의 총기들은 그것이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무기라는 인상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또한 오랫동안 총과 결부되어 온 성적인 함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권총과 대포가 남성의 정력과 권력의 상징으로 쉽게 자리잡을 수 있음을 인식하기 위해 굳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까지 끌어올 필요는 없을 것이다.10)

총기 도입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의 무기를 다른 무기 대신 사용하게 되는 동기가 무기의 객관적 능력에 전적으로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군사 기술이 기존의 이해관계나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부합하는지의 여부도 그것의 도입에 막대한 중요성을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어리석음과 근시안적 사고는 무기의 도입을 지연시키고 나중에 그 무기가 결국 도입되었을 때 그것의 효과적인 사용을 방해할 수 있다.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대체로 특정한 이점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군사 기술을 이용하려는 경향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긴 하지만, 어떤 무기들은 그 무기가 지닌 잠재력이 잘못 이해됨으로써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이런 류의 실패는 19세기 군대에서 기관총이 느리게 수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특히 미국에서 역설적인 상황이 되는데, 왜냐하면 최초의 실용적인 기관총인 개틀링 기관총과 맥심 기관총은 미국에서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도 기관총의 잠재력을 알아차리는 데 뒤늦었던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초기의 기관총들이 지닌 문제는 그것이 커다란 포차(砲車)에 실어 날라야 할 정도로 무겁고 다루기 거추장스러운 기구였다는 점에 있었다. 기관총은 통상적인 대포와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와 같이 취급되었다. 19세기 말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군대 지도자들은 기관총이 지닌 독특한 성능을 이해하지 못했고, 기관총의 빠른 발사 속도를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11)

반면 독일군 참모부에서는 기관총의 도입에 강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군의 군사 작전은 예비 병력의 광범한 이용을 그 핵심에 두고 있었는데, 예비 병력은 자연히 사격술이 형편없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당시의 독일 군대는 규모가 작고 전문직업적이었던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군대와 상당히 달랐다. 이런 근본적 차이가 전제된 상황에서 기관총은 특히 독일군에게 매력적인 존재였다. 기관총의 막강한 화력이 그것을 조작하는 병사들의 미숙함을 보완해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12)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기관총이 지닌 잠재력은 1차 세계대전 시기의 초기 전투들에서 이내 드러났다. 전투는 쌍방 어느 쪽도 기관총 포화에 맞서 진격할 수 없는 참호전 양상으로 교착되었다. 결정적인 돌파구는 장갑으로 무장해 기관총 포화에 대체로 뚫리지 않게 만든 탱크를 배치하게 된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도 역시 군사 전략가들은 새로운 기술이 어떻게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놓았는지를 뒤늦게서야 이해했다. 기관총이 1차 대전 때의 군사 지도자들의 허를 찔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응해 개발되었던 탱크 역시 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그 잠재력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군사 장교들이 전통적 엘리트층 ― 비유적인 의미에서, 몇몇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봉건 시대 기사의 후손인 ― 으로부터 충원되는 경향이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장교들의 생활 중 많은 부분은 여전히 말 위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고, 말 위에서의 용맹은 귀족적인 남자다움의 핵심적 요구조건이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시끄럽고 냄새나는 기계는 고상한 군마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 결과 191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장갑차의 성공적인 실연(實演)은 장갑차가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장군들이 올라탄 말을 놀라게 했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끝났다; 최악이었던 것은 황제가 올라탄 말이 놀라 거의 날뛰기 일보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이었다.13)

기존의 군사 전략가들은 보병, 심지어는 기병이 전투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병력이며, 탱크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라는 믿음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 방어선 앞으로 가망없는 공격을 계속하도록 함으로써 수만에 이르는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영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하이그(Douglas Haig)는 이 점에 있어 특히 명확했다: "나는 비행기와 탱크를 도입하는 데 전적으로 찬성이지만, 그것들은 사람과 말에 대한 보조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14) 이런 류의 사고의 결과로 1935년 영국에서는 탱크에 쓴 예산의 두 배만큼 많은 예산이 기병대에 소요되었다.15)

프랑스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군의 공식 {탱크 이용 교본 Directive on the Use of Tanks}에 따르면, "전투에서 탱크는 한 대건 여러 대건 간에 보병의 틀 내에서 행동한다. 탱크는 단지 보조적인 무기일 뿐이며, 제한된 시간 동안 보병 부대에 배속될 수 있다; 탱크는 보병 부대의 공격력을 상당한 정도로 강화시켜 주지만 탱크가 보병 부대를 대체할 수는 없다."16) 이에 따라 탱크는 보병 부대 장교의 지휘를 받았고, 독립적인 공격 무기로서 작전을 펼치도록 의도되지는 않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통틀어 탱크는 보병이 걷는 속도에 맞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탱크는 가시 철조망을 찢어 통과하고 보병의 진격을 위협하는 적 무기를 상쇄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전투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았다.17)

반면 러시아혁명 때 새로 구성되어 완전히 다른 출신의 장교들에 의해 통솔된 소련 군대는 이러한 무기들에 의해 제공된 새로운 기회를 이용하는 데 훨씬 더 빨랐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찌 독일의 군사력은 새로운 세대의 장교들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 1918년 독일의 패전을 기화로 구세대 군사 지도자들은 불신임되었고, 전후의 무장 해제로 인해 새로운 무기와 전술적 개념들을 거부하는 뿌리박힌 군사적 구조 역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930년대 독일의 재무장을 지휘한 군사 지도부는 새로운 무기의 이용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탱크를 이용한 작전에 대해 쓴 풀러(J. F. C. Fuller) 장군의 선구적인 저서의 번역본이 30,000부나 유통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풀러의 본국인 영국에서는 같은 책이 고작 500부밖에 인쇄되지 않았다.18) 풀러가 남긴 교훈은 독일군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독일군은 2차 대전 초기의 2년간 유럽 대부분의 지역들을 정복한 전격전(blitzkrieg) 공격 때 탱크를 요긴하게 이용했다.

조직적 이해관계와 항공 무기

새로운 무기의 이용에 영향을 주는 모든 갈등이 세대나 사회 계급에 있어서의 차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군대 조직의 서로 다른 분파들간의 경쟁관계 역시 군사 기술의 발전을 형성하는 요인이다. 이는 특히 비행기가 공격 무기로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막 생겨난 항공 부대 출신의 군사 작전가들은 비행기가 전쟁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자신들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러한 "항공 전력(air power)"의 주창자들 ― 미 육군 항공대(U.S. Army Air Corps)의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장군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에 따르면, 비행기는 통상적인 전쟁 수행 방식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방침에 따르면, 이제 폭격기는 자기 자신은 거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채 지상군을 쓸어버리고 해군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다. 비록 그 함의가 끔찍하긴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은, 폭격기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채 적국의 도시나 산업체들을 공격해 경제를 마비시키고 저항하려는 적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이미 앞 장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이러한 항공 전력의 예언자들의 예측은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을 뿐이었다. 공중 폭격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대규모의 파괴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폭격기가 자기 혼자의 힘으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폭격기가 전시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대부분 검증되지 않았던 많은 가정들에 기반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략 폭격의 방침(doctrine)은 특정한 개인적, 조직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정당화 근거로 기능하는 어두운 측면 역시 지니고 있었다.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미 육군 항공대 소속 성원들은 자신들의 조직이 육군이나 해군과 적어도 동등한 독립적인 군의 한 부문으로 자리잡기를 열망했다. 이를 위해서는 "항공 전력"에 기반한 새로운 전쟁 이론과, 그 이론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육군 항공대는 B-17 비행 요새가 바로 그 무기라고 생각했다. 4개의 엔진이 달린 B-17은 1935년에 처녀 비행을 했는데, 애초에는 전략 폭격기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의 고립주의적 분위기 속에서는 멀리 떨어진 국가들과 분쟁에 휘말린다는 생각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B-17은 오히려 바다 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무기로 상정되어 있었다. B-17은 먼바다 쪽에 있는 적 함대를 찾아낼 수 있도록 대단히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면서 긴 항속 거리를 갖도록 설계되었다. 당시의 호위용 전투기는 항속 거리가 B-17에 필적하는 수준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 폭격기가 적 비행기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는 다소 의문시되었지만, B-17의 밀집 편대가 기관총 사격을 집중적으로 퍼부으면 모든 공격기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예측들 중 어느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2차 대전 중의 전투 경험들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B-17은 대(對)해상 무기로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고, 대공 포화에 약점이 있으며 전투기의 결연한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등 심각한 작전상의 결함들을 지니고 있었다. B-17은 여러 차례 임무를 띠고 출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이는 항공 전력이 얼마나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재래식(비핵) 폭탄을 탑재한 다른 어떤 비행기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의미에서 빌리 미첼의 사고방식은 영국 육군 원수 하이그의 그것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공군력은 보병이나 기병과는 달리 과거가 아닌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무기를 그다지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대신 특정한 군 부문에 대한 개인적 이해관계 및 집착이 특정 무기 기술의 유용성을 바라보는 방식에 강하게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 군대는 새로운 무기의 도입에 저항하고 기존에 확립된 임무 수행 방식에 집착함으로써 종종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공군력, 특히 전략 폭격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무기가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평가한 점에서는 옳았지만, 자신들의 개인적, 조직적 이해관계가 곧 자국의 군사적 필요와 일치한다고 믿었던 점에서는 전통의 수호자들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사회 혁명과 전쟁의 확장

우리는 방금 개인적·조직적 이해관계가 기술 변화의 경로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는 이 책에서 반복해서 제기되었던 주제를 상기시켜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기술은 그것을 둘러싼 사회에 의해 형성되며 그 때문에 기술은 문화, 권력 배분, 경제적·조직적·사회적 관계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대규모의 사회·정치적 변화가 어떻게 무기뿐 아니라 전쟁의 성격마저도 변화시켰는지를 생각해 봄으로써 이 주제를 확장하는 것이 가능할 듯하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일련의 사회·정치적 혁명은 전쟁의 성격과 범위를 심대하게 변화시켰다. 이러한 혁명들이 미친 영향은 이 시기 직전에 일어났던 전쟁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8세기를 통해 유럽에서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들은 다분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전쟁은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보다는 통치자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치러지는 "국왕들의 경기(sport of kings)"였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이러한 분쟁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고, 손을 더럽히는 일은 전문직업적 병사들 ― 대체로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역시 사회로부터 추방된 임관되지 않은 장교들에 의해 완벽에 이를 때까지 훈련을 받은 이들 ― 로 구성된 소규모의 군대에 의해 행해졌다. 임관 장교들은 사회의 상류 계급 출신으로 자신이 거느린 병사들과는 거의 아무런 정서적 연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교들과 통치자들은 병사들을 소중한 존재로 여겼는데, 이는 잘 훈련된 효율적 전투 인력은 다른 사람으로 쉽사리 대체할 수 없음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병사들은 극히 조심스럽게 운용되었다. 대규모의 전투가 치러졌을 때, 이는 병사들의 수가 격감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수의 사상자를 낳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 국가를 치명적으로 쇠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군사 및 정치 지도자들은 그러한 대결을 피하는 쪽을 선호했고,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하는 군사 작전에 관여하는 대신 절충을 통해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다.19)

이와 동시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역시 전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전쟁들은 거대한 원칙들을 놓고 전쟁을 벌일 경우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소름끼치는 사례들이었다. 18세기의 정치 사상가들은 열광이 가득 메웠던 자리에 이성 혹은 최소한 사리분별에 바탕을 둔 규약을 대신 설파했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 내지는 정치상의 정책이 빚어낸 불행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의 나쁜 영향들은 전쟁국들이 적절한 행위 규칙들을 준수할 것에 상호 동의함으로써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민간인들에게는 애꿎은 불똥이 튀지 않도록 해야 했고, 적의 증오는 억제되어야 했으며, 평화를 위한 조건은 지나치지 않은 것이어야 했다.20)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거대한 물결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버렸다. 그 이전 시기에 스위스인들은 이미 자국을 위해 싸우려는 맹렬한 욕구에 의해 일으켜진 규율잡힌 무장 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을 여실히 보여 준 바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역시 많은 수의 전투원들이 민족 자결과 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지배 형태를 위해 무기를 들었을 때 발산될 수 있는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원칙들,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군사적 결과들은 프랑스혁명에 의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다. 이 운동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지배 계급을 무너뜨리고 민주적 지배로 이를 대체하려는 욕망에 의해 원동력이 부여된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의해 생겨난 권리들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랐다. 프랑스 민중은 더이상 국왕의 수동적인 백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전통적인 방식으로 통치되고 있는 주변 국가들의 적대적 태도에 직면한 자국의 시민이 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국경 너머로 새로운 질서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열의를 낳았다. 이에 따라 전 유럽에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의 영토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제 전쟁은 새로이 등장한 시민 계층을 포함하였고, 그들은 전통적인 군주들의 개인적 야심을 훨씬 넘어서는 대의를 위해 싸웠다. 용병 군대는 "무기를 든 전체 인민(nation in arms)"으로 대체되었고, 여기서는 1789년의 프랑스 국민 의회 보고서에 나온 표현을 빌면 "모든 시민이 병사가 되어야 했고, 모든 병사가 시민이 되어야 했다."21)

모든 이들이 이런 고상한 원칙들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항상 징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분적인 징병은 이미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제한적인 노력들은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일반 국민 징병제도(universal conscription)를 선포함으로써 완전히 무색해졌다. 징병 결과 프랑스군의 수는 750,000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증가한 병사 숫자는 다시 전쟁이 수행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전쟁에서의 절제와 실질적인 제약은 사라져 버렸고 군사 작전은 그 범위에 있어 훨씬 더 막대한 규모가 되었다. 18세기에 있었던 주요 전투들에서는 싸운 군대의 규모가 80,000명을 넘는 경우는 드물었던 반면, 1812년에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 600,000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22)

이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었다. 군대 규모의 엄청난 팽창은 필연적으로 적지 않은 정도의 과세 증가로 귀결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각국 정부들은 항상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세금을 징수해 왔고, 세입 중 많은 부분을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나타난 개인과 국가의 밀접한 제휴의 결과로 자국의 시민들에게 과세하려는 정부의 의지와 능력은 확장되었고 대규모의 군사 작전으로 인해 과세 규모를 늘여야 할 필요도 긴급하게 제기되었다.

대규모 군대는 엄청난 수량의 총기와 함께 여타의 물자들을 필요로 했다. 혁명기 프랑스에서 이런 필요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무기와 장비를 생산함으로써 충족되었다. 정부는 모든 직종의 장인들뿐 아니라 무기 제작 경험이 전혀 없는 다수의 노동자들까지 동원했다. 그 결과 많은 양의 쓰레기가 양산되었고 질이 떨어지는 머스켓총들도 많이 만들어졌지만, 결국 작업은 완수되었다. 파리는 유럽 전역을 통틀어 매일 1,000정의 총도 생산되지 못하던 시기에 매일 750정의 총을 생산하는 무기 생산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23)

억제된 제한적 전쟁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은 그와 함께 대중에 기반한 전쟁을 불러왔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새로운 전쟁 형태는 과거에 비해 전쟁을 훨씬 더 파괴적이고 무시무시한 것으로 만든 새로운 무기들의 개발을 포용하는 환경을 창출했다.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은 엄청나게 확장된 전쟁의 범위가 이러한 무기들의 대규모 생산을 가능케 한 새로운 생산 기술의 발전을 자극했다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이 점에 대해 다룬다.

전쟁에 기여하는 산업 기술

19세기까지 군사 기술은 느린 속도로 발전했다. 과학은 발명에 거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작업은 시행착오에 기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포는 부정확했고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다. 금속학이 아직 걸음마 단계였고 화학은 이제 막 연금술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19세기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기술 변화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천천히 타는 무연(無煙) 화약은 보다 정확한 포격을 가능하게 했고 포병대원들은 포연으로 인해 시야가 가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화약 덕택에 구경이 더 작은 대포나 총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무기들은 더 가벼워졌고 병사들은 더 많은 탄약을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뇌산염(雷酸鹽)의 발견에 힘입어 뇌관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부싯돌식 발화 장치는 쓸모없게 되었다. 발전된 기계 가공 기술은 후장식 대포나 소총기와 같은 향상된 무기의 생산을 자극했다. 정확한 공작 기계와 새로운 합금강을 이용함으로써 총신 안쪽에 강선이 패인 총기류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총기류의 정확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런 새로운 기술들은 실제 작동하는 반복 무기들의 생산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기관총의 발명에서 정점에 달했다.

19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이런 발전 중 대다수는 중앙 정부로부터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 이루어졌다. 발명은 개인과 기업들의 일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구를 자국의 육군이나 해군에 판매하려 시도했는데 혹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아무에게나 팔았다. 19세기 말이 되면 이런 기업들 중 몇몇은 규모가 상당히 커지고 힘을 갖게 되었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점차로 확대되었다. 영국의 암스트롱-비커스(Armstrong-Vickers) 사나 독일의 크룹(Krupp) 사와 같은 기업들은 새로운 무기의 개발을 담당하는 전임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을 고용했다. "죽음을 파는 상인"으로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 기업들은 전쟁의 파괴적 성격을 더욱 증가시킨 새로운 군사 기술의 발명과 확산에 강한 추진력을 제공했다.

20세기가 되자 이제 국가는 사기업들에 의해 개발된 군사 기술의 수동적인 소비자 역할을 그만두었다. 군사 영역에서의 기술혁신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은 전쟁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1차 대전 동안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는데 이 시기에 미국 정부는 전쟁 관련 연구에 30,000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동원했다.24) 오늘날, 군대는 과학 및 공학의 연구 성과들에 대단한 열성을 보이며 이를 사들이는 소비자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연방 연구개발 자금의 70퍼센트가 군사 연구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있었고,25) 국가 전체의 R&D 지출에서 1/3 가까이 되는 자금이 국방 부문으로 빨려들어갔다.26)

지난 150년간 일어난 기술상의 진보는 무기들을 바꿔 놓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만큼 혹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기 생산의 급격한 증가를 가능하게 했던 산업 기술의 발전이다. 전통적인 동업 조합으로 조직되어 있는 총포 장인들이 계속 무기 생산을 담당했다면 19세기 후반기 동안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수량의 무기를 결코 생산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군복, 군화, 식품 따위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했다면 이는 결코 근대적 군대의 엄청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확장일로였던 군대의 수요들은 대량 생산의 발전을 통해 충족되었다. 대량 생산의 핵심은 표준화된 부품들을 써서 생산품을 조립함으로써 개별적인 최종 마무리(fitting)를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밀 도구, 조립에 쓰는 지그(jig)와 고정 장치, 정확한 표준자와 여타의 측정 기구들이 있어야 했으며, 작업에서 일반적으로 높은 정확도를 유지해야 했다. 대량 생산은 또한 그 산물을 판매할 대규모의 시장을 필요로 했다; 바꿔 말하자면 대량 생산은 대량 소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군대는 대량 생산으로 가능해진 산출량 증가분에 대한 이상적인 소비자였고, 군대의 수요는 새로운 생산 기술의 발전에 강한 유인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책의 앞부분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영국 해군 전함에 장착할 활차 장치(pulley block)의 제조는 대량 생산의 최초의 사례들 중 하나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량 생산 기법은 다른 군사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도 응용되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총의 생산이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엘리 휘트니(Eli Whitney)가 19세기 초에 대량 생산 기법을 최초로 이용해서 코넥티컷 밀 록에 있는 자신의 공장에서 머스켓총의 대규모 제조를 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휘트니는 자신이 의도했던 바를 결코 성취하지 못했으며, 총의 대량 생산을 처음 해낸 공은 다른 기업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온당할 듯싶다.27) 그러나 제일 처음 해낸 것이 누구이건 간에, 19세기 중엽이 되면 무기들은 대량 생산의 원리에 따라 제조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전투에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와 동시에 산업 기술의 발전은 깡통에 든 배급 식량과 같은 대량 생산된 식료품들을 병사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이제 군대가 진군하고 전투를 벌이는 주위 지역으로부터 먹을것을 조달하던 시대 ― 종종 실제 전장에서보다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파괴하곤 했던 ― 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대규모 군대는 막대한 병참상의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아무리 좋은 군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전장으로 재빨리 이동될 수 없거나 무기와 식량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이 되면 철도와 증기선을 이용해 군대와 그들이 먹을 식량의 수송을 보다 정규적이고 빠르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군대는 이제 더이상 장거리 행군으로 녹초가 되지 않아도 되었으며, 작전 중에 필요한 물품들을 더 잘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부상당하거나 탈진한 병사들은 재빨리 후방으로 보내졌고 새로운 부대가 그 자리에 충원되었다. 이는 다시 전쟁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 철도 덕택에 군사 지도자들이 부대와 보급품을 여러 번에 나누어 쉼없이 투입하는 전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까지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결국 발전된 운송 기술은 세계를 총력전의 시대로 좀더 몰고간 셈이었다. 이제 전선 후방의 "국내 전선(home front)"에서 가동중인 산업체의 움직임이 적어도 전장에서의 병사들의 움직임만큼이나 중요해지게 되었던 것이다.28)

의료 기술의 발전은 질병 때문에 전투에서 탈락하는 병사들의 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군대의 대형화 경향을 강화했다. 전쟁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죽은 병사들의 수보다 질병에 걸려 죽은 병사들의 수가 항상 더 많았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말부터 두드러지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1870년 이전에는 부상으로 숨지는 병사 하나당 질병으로 숨지는 병사 다섯이 있었던 반면, 1918년이 되면 이 비율은 정반대가 된다.29)

결국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기술적 성취들은 전쟁 범위의 엄청난 확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술의 발전은 교전국에 맞서 대규모 군대를 투입할 수 있게 한 사회·정치적 변화들과 완벽한 보완 관계를 이루었다. 이 모든 사실은 유럽이 1차 세계 대전이라는 대학살극 속에 삼켜졌을 때 뼈아프게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규모의 군대들이 수백 마일 이상 뻗은 전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대치한 가운데, 18세기의 많은 전쟁들에서 전쟁 기간을 통틀어 죽은 수보다 더 많은 수의 병사들이 불과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죽어나갔다. 기술 진보는 필연적으로 더 나은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19세기의 낙관적 믿음은 1910년대에 접어들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다음 호에 계속)


* 출전: Rudi Volti, Society and Technological Change, 3rd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5), pp. 209-249. (번역: 김명진)

1. Paul F. Walker, "Precision-guided Weapons," Scientific American 245, 2 (August 1981): 37-45.

2. Jack S. Levy, "The Offensive/Defensive Balance of Military Technology and the Incidence of War," paper presented at the Annual Meeting of the 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 Mexico City, April 1983을 보라.

3. Lynn White, Jr., Medieval Technology and Social Chang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6), p. 28.

4. 아래에서의 서술은 Thomas Esper, "The Replacement of the Longbow by Firearms in the English Army," Technology and Culture 6, 3 (Summer 1965): 382-393에 의존하고 있다.

5. Ibid., pp. 392-393.

6. Phillipe Contamine, War in the Middle Ages (Oxford: Basil Blackwell, 1984), p. 217.

7. John Francis Guilmartin, Jr., Gunpowder and Galleys: Changing Technology and Mediterranean Warfare at Sea in the Sixteenth Centur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p. 152.

8. Richard A. Preston, Sydney F. Wise, and Herman O. Werner, A History of Warfare and Its Interrelationships with Western Society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56), p. 138.

9. Ibid., p. 137.

10. William H. McNeill, The Pursuit of Power: Technology, Armed Force, and Society since A.D. 100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p. 83.

11. David A. Armstrong, Bullets and Bureaucrats: The Machine Gun and the United States Army, 1861-1916 (Westport, Conn.: Greenwood Press, 1982).

12. Ibid., p. 173.

13. Armin Hall, Tanks: An Illustrated History of Fighting Vehicles (New York: Crescent Books, 1971), p. 28.

14. Witold Rybczynski, Taming the Tiger: The Struggle to Control Technology (New York: Viking/Penguin, 1985), p. 171.

15. Preston, Wise, and Werner, op. cit., p. 281.

16. Hall, op. cit., p. 79에서 재인용.

17. Arch Whitehouse, Tank: The Story of Their Battles and the Men Who Drove Them from the First World War to Korea (Garden City, N.Y.: Doubleday, 1960), p. 127.

18. Preston, Wise, and Werner, op. cit., p. 281.

19. Walter Millis, Arms and Men: A Study of American Military History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56), p. 16.

20. B. H. Liddell Hart, The Revolution in Warfare (London: Faber and Faber, 1946), pp. 40-45.

21. Millis, op. cit., p. 48.

22. Michael Howard, War in European History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p. 99.

23. Theodore Ropp, War in the Modern World (New York: Collier Books, 1962), p. 111.

24. Preston, Wise, and Werner, op. cit., p. 320.

25. Seymour Melman, "Swords into Plowshares: Converting from Military to Civilian Production," Technology Review 89, 1 (January 1986): 64.

26.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 Yearbook, 1984 (Stockholm, 1984), p. 170.

27. Robert S. Woodbury, "The 'American System' of Manufacturing," in Edwin T. Layton, Jr. (ed.), Technology and Social Change in America (New York: Harper & Row, 1973), pp. 47-63.

28. Maurice Pearton, Diplomacy, War, and Technology since 1830 (Lawrence: University Press of Kansas, 1984), pp. 64-76.

29. Howard, op. cit., p. 116.

루디 볼티
2000/08/15 00:00 2000/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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