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0년 2월에 발행된 {과학의 사회적 연구 Social Studies of Science}의 <기록(For the record)>란에 수록된 글이다. 과학전쟁으로 유명한 소칼과 더불어 쓴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지적사기}(민음사, 1999)의 저자인 장 브리크몽(Jean Bricmont)이 {피직스월드 Physics World} 1997년 12월호에 쓴 [과학학의 오류](Jean Bricmont, 'Science Studies ― What's Wrong?', Physics World, Vol. 12, No. 12 (December 1997), 15-16)에 대한 반론으로 같은 잡지 1998년 3월호에 실린 글이다. {과학의 사회적 연구}의 편집자들은 "이 글이 자주 인용이 되지만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다시 게재한다"고 하니, {시민과학}의 '지성파' 독자들이라면 같이 한 번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문학과사회} 2000년 여름호에 실린 홍성욱 토론토대 과학기술사철학과 교수의 {지적사기} 서평인 [상대주의 과학관을 변호함]와 함께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라면 누구나 과학의 진보가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을 의심하거나 상식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과학지식사회학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무용함을 밝혀낸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라는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미리 가정해 놓은 장 브리크몽의 논의는 매우 실망스럽다.

브리크몽은 원인에 대해 상호배타적인 두가지 범주를 가정한다: 신념(belief)은 인지적이거나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기인하고 결국은 제로섬게임에 불과하다. 브리크몽은 과학이론에서 신념이 얻어지는 인과적 원인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요인이 '어떤 설명에 도입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런 사회적 요인의 역할을 증거자료의 역할과 대비시킨다: '그러나 또한 설명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론이 증거자료에 의해 지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브리크몽만이 이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도 지난 해 캔사스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사한 발언을 했다(Newsweek US 1997. 4. 21. pp.54-57). 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사실보다 가치가 연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과학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될 수 있고 주관적인 요소, 사회적·정치적 가치로 인해 비뚤어질 수 있'고 이러한 치우침(bias)은 '인지되어야 하며 중립화시켜야 한다'며 사회적인 것을 단지 치우침의 요인으로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과학자들에게 사회학은 브리크몽이 물리학자들의 '일상적인 옷입는 습관'이라고 지적한, 변덕이나 유행의 영역을 다루는 학문처럼 여겨진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약점을 갖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의 영향은 오류이다. 캔사스에서 어떤 물리학자는 이러한 도덕적 결함을 고백하면서 '하지만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사회적 구성물이 아닌, 현실의 무언가를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상식처럼 들리지만 진정한 과학지식사회학적 분석으로는 부적합하다. 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사회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왜곡시키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와 실재 사이에 사회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는 가능하게 하는 무엇(enabling)이다: 우리는 사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사회를 통해서 실재를 알게 된다. 사회와 문화는 안경과도 같다: 사회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집합적으로 이해하고 볼 수 있게 된다. 사회가 없으면 어떠한 것도 보거나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과학자들에게 유의미한 '사회'는 '과학자공동체'일 것이다.)

브리크몽은 이러한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회학적 접근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또는 '사실'이나 '유효한 경험적 이유')라는 문제를 매우 잘못된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는 사회학자들이 과학자들이 갖고 있는 증거를 고려하지도 않고 과학적 신념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물론 우리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무엇이 '증거'가 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동의된 이론적 이해의 틀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동의가 이루어진 방식과 유지되는 방식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과정은 '증거'에 대한 논의가 의미를 갖기 이전에 이미 가정되어야만 한다. 모든 믿음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설명 ― 우리의 표현대로라면 '대칭적으로' ― 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을 보고, 만져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맥락을 주시해야만 한다. 어떤 경험을 의미있는 증거로 변화시켜서 설명의 자원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협동, 상호작용, 조정의 맥락에서 가능하다. 이것은 바로 사회적 성취(social achievement)이다.

사회적 요인만으로 모든 증거와 신념들의 특징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지만 어떤 신념을 설명하려 하면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구성물'과 '현실의 무엇'을 대조시키려는 비판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제로섬 게임적 관점대신에 우리는 '둘다/모두' 관점을 채택한다. 증거는 공상적 세계에서 우리의 머리에서 불쑥 출현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인 동시에 실재에 대한 참조물(reference)이다. 신뢰할 수 있는 인식은 사회적 구성을 미리 가정하고 있어야 한다.

사회학적 접근법의 일반적 형태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도 전까지는 그들의 비판은 쓸모없는 것일 뿐 아니라 생산적인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은 {과학적 지식}(Barry Barnes, David Bloor, and John Henry(1995), Scientific Knowledge, Athlone, Chicago)를 읽기 바란다. 이 책을 통해 여러 해동안에 걸쳐 일관성있게 발전해온 우리의 프로그램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브리크몽이 말한 바와는 달리 최근들어 주장의 '어조를 낮추지' 않았다.

과학지식사회학은 자신의 과학과 그들이 연구하는 과학 양자 모두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분야이다. 과학지식사회학은 브리크몽이 말한, 그리고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바로 그 '합리성의 정전(正典)'(canon of rationality) [과학: 역주]을 기록하고 해명하고 예증하려고 한다. 브리크몽은 '우리의 문화적 편견이 갖고 있는 영구적인 근시안성에 대한 치료'를 추구했지만 우리는 브리크몽의 상식적(taken-for-granted) 사회적 모델을 탈구시키고 치료의 핵심적 속성에 사회적인 것이 증거가 되는 것을 품어안을(the social includes the evidential) 수 있도록 해야한다.

* David Bloor and David Edge, 'Knowing Reality Through Society', Physics World, Vol. 11, No.3(March 1998), 23; reprinted Social Studies of Science 30/1(February 2000) 158-60

데이빗 블루어·데이빗 에지
2000/08/15 00:00 2000/08/15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PSPD/trackback/3808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