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호] 과학정책과정에서 대중참여를 증가시키기 위한 다섯가지 근거*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0/07/15 00:00
필자는 이 논문에서 현재 과학정책과정의 기술관료주의적인 성질들을 묘사한 후에 참여를 늘여야하는 다섯 가지 주장을 제시한다. 다섯 주장 모두는 STS가 발전시킨 상이한 영역 ― 엄밀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 에서 얻어진 것으로 대중참여의 증가가 과학에도 이로운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과학기반기술(science-based technology)의 잠재적 해로움이 보다 큰 책임을 요구한다는 주장이다. 둘째는 구매자가 생산물에 대해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다. 셋째는 과학의 사회구성적 본질로부터 연유되었다. 넷째는 페미니스트적, 맑스주의적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칸트적인 믿음에 따른 것이다. 필자는 참여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들에 대한 짤막한 전망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 중요한 것은 최종적인 절차가 아니라 결과까지 도달하는 데 함께 하는 과정이다.
STS분야에 있는 여러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과학-기술적 결정에 있어 대중들의 참여가 증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한다. 이 입장에 대한 근거는 간단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 대중들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결정들에 대해 의미있는 방법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통제력을 가져야만 한다.
사회 내의 여러 제도들로 인해 시민들이 통치과정에 적절하게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불행한 일이다. 과학자 공동체는 사회 내의 여러 제도들 중에서 가장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정책이 형성되는 데에는 대중들의 참여가 그리 많지 않았다(Peteren, 1984). 그러나 일상생활에 연구시스템의 결과가 점차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참여의 확대가 긴급하게 요구된다. 얼마 되지 않는 전문가들이 현재 미국의 연구정책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대중들을 보다 잘 대표할 수 있는 행위자들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할 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잘 대응할 수 있는 과학을 만들 수 있다(Shapley &. Roy, 1985).
과학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지만, 생의학연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과학에서 성공적인 참여에 관한 주목할 사례이다1. 암연구, AIDS연구, 대안의료에 대해 관심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요구 등은 모두 대중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기에 의회의 지지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의학분야를 넘어서면 과학분야에서 연구의제에 대중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거의 찾을 수 없다2.
많은 사람들은 대중들이 과학에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현재 시스템이 작동하는 데에에 대해 "아직도 작동하는 걸 왜 고치려고 하냐"며 문제삼지 않는다.
이 논문에서는 참여의 증대가 이롭다는 다섯가지 근거를 STS의 각 분야에서의 논의를 통해 끌어내고 참여가 늘어난다는 데에 대한 필자의 의도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기술관료주의적인 현재의 의사결정체계
필자는 박사학위논문(Foltz, 1996)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과학연구에 관련된 결정에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답을 제시하려 했다. 나는 현상태(status quo)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 연구를 수행하면서 나는 "전문가들" ― 정치가나 과학자들인 ― 이 과학정책에 대중들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는 데에 대해 갖는 입장들이 대략 세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디를 가던지 정책결정자들은 대중들은 과학정책에 연루된 기술적 이슈들이 매우 복잡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데에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1995년 열렸던 기술 해석능력(literacy)회의에서 어느 청중이 당시 상원 과학위원회 의장이었던 밥 워커(Bob Walker, 펜실베니나의 공화당 의원)에게 보다 민주적인 과학을 만드는 데에 대해 질문했다. 워커의 답은 '불가능하다'였다. 대중들의 참여로 형성된(public-moderated) 과학정책은 영구운동장치들에 대한 끊이지 않는 지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말에는 대중들은 과학적 가능성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산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상원 과학위원회의 또다른 위원은 같은 해 봄에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과학기술 심포지엄에서 상원과학위원회를 대표한 발언에서 이런 감정을 다시 표현했다. 이런 사례들은 국가 과학기술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인들인 상원 과학위원회의 위원들 대다수가 대중들은 고도의 기술적 결정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런 입장을 공유하지 않고 상이한 두가지 견해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어느 그룹은 과학에 대해 대중들이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공동체가 대중들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공동체는 대중들이 과학을 보다 잘 알도록 가르쳐야 하며 이를 통해 대중들은 과학의 진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지지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적절한 수준의 과학 리터러시가 있다면 과학자가 대중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초전도수퍼가속기(SSC, 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가 실패한 이유를 초전도수퍼가속기의 장·단점이 아니라 식견을 가진 대중(informed public)들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프로젝트에 대한 어떠한 재정지원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대중참여는 대중들이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해 백지수표를 건네주는 과학후원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다 많은 대중참여를 진정으로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후원을 늘려주는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가진 대중들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그룹은 대중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떠한 대중참여에도 반대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고 여기고 이를 지속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합리적 지성이 필요한 과학에 대중들 ― 통상 "감정적"이라 여겨지는 ― 이 참여함에 따라 과학의 합리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한다3. 이들은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대중들은 감정적이어서 감정적인 이슈로 과학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학은 더이상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순수한" 헌신이 감정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중참여를 막아야만 한다고 여긴다.
이들 중 어느 집단도 대중에 의한 순수한 참여를 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대중들이 너무 무지하다고 여기고 또 다른 이들은 감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어떠한 책임도 없이 무제한적인 지원을 바라는 이들이 있다. 이런 집단들은 현재의 대중들이 기술적 사안에 대해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대중들은 국가과학정책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권력을 가진 이들은 지금은 대중들에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대중들이 제대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중요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태도로 인해 연방정부의 제도적 구조 내에서 기술관료주의의 보루로서 과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공동체는 합리적 지식의 수호자로서 연방정부 수준에서, 학계에서, 산업계에서 과학제도를 통제하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미국은 기술관료주의적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과학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기술관료주의는 기술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지배하는 정부체계를 말한다. 민주주의의 기술관료주의적 형태는 과학에 대한 정치적 선택을 하는 전문가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Petersen, 1984). 기술관료주의는 전문성이 민주적 과정을 위해 조직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전문성에 그치는 게 아니다. 기술관료주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이 기술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위해 고안된 정부의 정책결정[메커니즘]이다. 기술관료주의에서 기술지식은 권력의 기초다. 정책결정자들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할 때에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종종 정책결정자들은 전문가들의 지식을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으로 보는 것을 넘어 곧바로 정책으로 이용한다.
참여를 강조하는 또다른 민주주의의 형태와는 달리 기술관료주의적 정책결정과정은 참여를 전문지식을 가진 이들에 한정한다. 개인들의 지식의 질과 유용성이 상이한 만큼 개인들은 평등하지 않다. 전문지식으로서의 과학의 본질은 기술관료주의적 통제를 조장한다. 선진기술사회에서 기술계급은 공식적으로 선출된 공무원들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실질적인 정책결정자 역할을 함으로서 은폐된 기술관료주의를 형성한다는 주장도 있다(Hamlett, 1992). 기술관료주의는 갈등들을 고립시키거나 국지화시킴으로서 몇가지 기계적 규칙이나 정책결정과정 ― 극단적으로는 비용-편익 분석 ― 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기술관료들은 대중들을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서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생각한다.
참여가 의미있는 일이 되려면 시민들이 정부에 행사하는 역할을 이해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정책의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Sclove, 1995). 민주주의는 선거에 있어 자유와 보통의 원칙과 형식적 평등원칙을 가정하고 있다. 환경집단에서 기업계에 이르기 까지의 이해집단들을 포함하여 정책결정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무리 정책결정과정에 대중들의 직접참여가 더욱 바람직하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관료주의적 시스템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한 다섯가지 주장
정말 민주적이려면 사회를 구성하는 기관들이 참여적이어야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관들이 닫혀있는 사회는 진정으로 열린 사회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조금이라도 참여의 수준을 높이면 그만큼 이런 기구들은 좋아질 수 있다. 과학에 관련된 연방기관들은 모든 정부기관 중에서 가장 참여적이지 않은 쪽이다. 정부 과학기구 내에 정부의 위계 외부에 있는 모든 시민들의 참여를 증진시키는 것은 정부의 모든 수준에서의 참여를 늘릴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가 과학의 결과에 대해 해로운 영향을 미칠 거라고 주장해왔다(Greenberg, 1967; Longino, 1990; Merton, 1938/1973; Price, 1967). 그러나 이들은 연구개발(R&D) 내부 결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부가 설정한 구체적 목표에 대한 선택에 대한 도덕적·정치적 물음은 무시한다.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을 통해 연구의제를 결정하는 데에 보다 많은 참여를 하는 일이다. 이 얘기가 대중들이 과학 분과 내의 자원배분에 대한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 분과 내'의 의미는 구체적인 정부 프로그램에서 개별 프로젝트 간의 자원배분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에는 전문가 평가(peer review)가 적절하며 현재의 대중들은 다양한 연구자 집단들을 구별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Chubin & Hacket, 1990). 대중들은 국가연구개발에 대한 자원배분에서 참여를 통해 보다 큰 수준에서 과학정책에 대해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핵발전 개발이냐 태양에너지 개발이냐 사이의 자원배분처럼 구체적인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예산투입의 문제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예산이 연구개발에 투입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등이 있다. 전문가 평가는 어떤 연구 공동체 내에서 우위를 결정하기만 할 따름이지 다양한 영역 간의 연구자원의 배분에서는 무력하다(Chubin, 1989).
연구에 대한 자원배분을 둘러싼 결정들은 반드시 기술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미국과학재단(NSF)의 연구프로그램 선택에서처럼 구체적인 과학분야 내에서의 자원배분에 관한 결정은 한층 많은 기술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과학 엘리트들이 기술적 지식을 통제하기 때문에 과학 내의 자원배분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능력을 더 많이 갖고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Dahl, 1985),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에 대해 통제할 수 있는 주체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일반대중들은 선택에 책임이 있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도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대중들이 과학적 성과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안에 대해 연방연구개발비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대중들 ― 내가 말하는 대중이란, 미국의 모든 시민을 말한다 ― 은 정부가 전지구적 기후변화나 유해폐기물을 처리하는 방법 등 일반적인 연구분야에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전문가] 동료들 사이의 평가는 특정 분야의 과학 내에서 프로젝트를 선택할 때에만 사용될 수 있다.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에서 민주적 참여의 확대를 정당화하는 다섯 가지 논리들이 있다. 아래의 정당화 주장들은 그리 상세하지는 않고 각각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을 제공한다.
사회에 대한 영향의 정도
우선 대규모 과학기반 기술프로젝트들의 잠재적 영향력에 주목하여 과학정책에 [시민]참여를 확대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4. 과학이 직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과학에서 기인한 기술이 직간접적으로 사회 내에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5. 핵무기, 유전자조작생명체(GMOs), 유해폐기물의 잠재적 영향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이러한 영향때문에 기술로부터 영향을 받는 대중들이 자신의 미래를 형성하는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과학측에서는 과학은 중립적인 노력이며 그것을 자신의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핵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물리학자가 아닌 다른 이들은 원자에 관한 이론으로 폭탄을 만드는 데 이용한다. 일단 지니가 병에서 나오게 되면 사회가 그로 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지원 연구개발 프로젝트들은 다양한 기술들을 창출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기술들은 사회를 통제하거나 심각한 해를 끼칠 우려도 있다. 정부가 만들어낸 기술로부터 초래된 사회적 악영향을 지적하는 여러 문헌들도 있다6. 예를 들어 핵전쟁, 생명공학으로 인한 위해(危害), 유해폐기물, 산성비, 오존층 파괴, 발암물질이 함유된 식품, 전세계적인 기후변화 등이 이러한 악영향들이다. 이러한 잠재적 영향들은 지역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데에서부터 지구적인 파괴를 초래할 가능성까지 다양하다. 물론 과학으로부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기술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대규모 악영향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아무도 이런 잠재력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여러 기술들은 대중들의 생활을 통제할 수도 있다. 이런 기술들은 사회의 발전방향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Ellul, 1964; Winner, 1993). 예를 들어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바램은 사회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동시에 공동체와 여러 사회관계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코완(1983)은 시간절약적 가사도구들이 도입되어도 실제로 여성들(과 남성들)의 가사노동을 줄이지는 못했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랭던 위너(1994)도 정보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 사회구조가 파괴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은 대중들의 소비능력을 재정의하고 대중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도 있으며 공동체, 지역, 지구를 재정의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전지구적 기후변화를 화석연료 ― 특히 수송수단으로 내연기관을 이용함에 따라 이용되는 ― 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와 연결짓는다. 대부분의 대기과학자들이 어떤 현상이 발생하고 이로 인한 결과가 태풍, 홍수, 가뭄 등 극심한 기상현상의 증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동의되고 있는 바이지만, 인간이 대기에 미친 영향이 가져올 정확한 결과가 어떠할 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이런 잠재력때문에 쿄토 COP3회의에서 행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요구를 하기도 했고 여러 과학자들은 전세계 국가들이 재앙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술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재앙을 처리하는 대신 연구자들은 현재 어떠한 문제가 존재하는 지를 입증하는 데에만 수십억 달러를 이용해왔다. 여전히 대중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술정책은 종종 특정한 사회-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고되지만 지금의 과학기술의 사용을 살펴보면 대중들이 기술에 대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없는 현재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권력구조를 창조해오고 있다(Brown, 1994). 과학기술이 대중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들은 이에 대해 거의 ―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는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오랜 믿음이다(Petersen, 1984, p.7). 사회가 과학의 결과나 과학에 의해 만들어진 기술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가 의사결정과정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이 미국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Hamlett, 1992).
과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과학기술을 요구하고 있다. 전지구적 기후변화나 대기의 오존층의 파괴같은 대규모의 잠재적 위해가 직접적으로 과학기술 문명과 연결지어졌다. 사회는 과학-기반 기술의 부산물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현재는 긍정적, 부정적 결과에 대해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참여를 늘임으로써 정부지원연구에서 만들어진 기술로부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대중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통제력을 갖도록 할 수 있다.
납세자들은 발언할 권리가 있다
과학의 민주적 통제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두번째 이유로는 첫번째 이유로부터 직접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 정부는 과학을 지원할 때에 연구기관의 내부 운영은 기관에 맡겨두고 계약과 보조금만 이용한다. 1945년 과학공동체는 연방정부가 필요한 자원을 계속 제공해주고 자신들에 대한 통제를 스스로에게 맡겨주기만 하면 질병을 없애고 건전한 경제를 만들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세계평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Bush, 1945). 수 조달러가 투자되었지만 아직도 [약속했던]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사용한 돈은 세금으로부터, 즉 대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중들이 과학에 투자했기때문에 대중들이 자신들의 돈을 통해 얻어진 것에 대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두번째 주장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과학공동체와 연방정부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의 계약을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계약은 지적 자율성과 과학에 대한 재정지원 대신 사회와 경제에 고른 혜택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과학이 이러한 거래를 지속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계약을 둘러싼 어려움들은 1990년대 초에 의회에서 과학공동체에게 국가가 경제적으로는 어려우면서 과학적으로는 우수해야 하는 이유를 질문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노벨상 최다 수상국이지만 기술혁신은 그리 우수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 환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적 으로 성공한 국가들과 경쟁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사회는 기초과학이 기술혁신을 낳는다는 바네바 부시의 주장(1945)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Chubin & Hackett, 1990, pp. 9-11). 과학은 성장했지만 정작 과학이 약속했던 사회적·경제적 혜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과학공동체는 거래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사회는 설명하기를 요구했다.
정책분석가들은 바네바 부시의 계약에 내재된 선형기술혁신모델에 깔려있는 가정에 대해 반박하면서 계약을 재협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Sharpley & Roy, 1985). 선형모델은 신기술과 건전한 경제를 창조하는 방법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로 가능하다고 했지만 기술의 역사는 기초과학이 기술이 창조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보여주었다. 과학지식은 기술혁신의 여러 구성요소들 중 단지 하나일 따름이다. 자본, 대중들의 지원, 잠재시장, 미디어 광고, 생산능력, 자연자원, 공공정책 등 여러 다양한 요인들이 기술개발을 결정한다. 몇몇 개인들은 과학이 기술혁신을 직접 지원하는 게 사회에는 더욱 좋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기 시작했다(Brown, 1992). 다른 이들은 과학이 60, 70년대의 사회적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이미 [바네바 부시의] 사회 계약을 재계약했고 거대기업과 군부에 통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Dickson, 1988). 새로운 사회계약은 과학의 자유로운 흐름에 저해가 될 뿐 아니라 사회는 다시금 패배하게 된다.
민주적 통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사회, 즉 대중이 과학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사회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의 구매자는 그들이 실제로 구입한 상품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과학은 문제를 나쁘게 만들어도 책임을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기도 한다. 혁신모델은 기초과학이 기술혁신에 해를 입힌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자신들의 기금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해 더많은 권리를 가진다면 대중의 영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에 대한 결정과정에 대중들의 참여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과학의 사회적 구성
우리는 과학의 사회적 구성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과학에서의 민주적 참여를 늘여야 한다는 세번째 논거로 이용할 수 있다7. 완전한 자율성을 요구하는 과학공동체의 요구는 합리성과 객관성 때문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과학의 인식론적 상태에 근거한 규범적인 주장을 끌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Cozzens, 1990, p.181). 사회구성주의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과학 자체는 정치적 과정이다. 과학구성체는 다양한 "사실들"의 정당성을 놓고 구성원들 간에 협상을 한다. 사실과 이론은 영원한 진리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문화된 사회 조건의 산물이다(Latour & Woolgar, 1979/1986).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을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수사학적이고 사회적인 그물망의 일부로 사고한다(Latour, 1987). 과학자들은 실험실 내부와 다양한 과학공동체 사이의 협상과정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생산한다(Knorr-Cetina & Mulkay, 1983; Latour, 1987). 사실은 과학공동체의 수용에 좌우된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권력과 과학의 연계를 폭로하고 [과학이 갖고 있다는] 객관성과 중립성을 소거한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자원들을 조직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실험실 연구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상징적 초-경험적(trans-epistemic) 관계라는, 과학공동체의 경계을 초월하는 실험실에서의 추론과 참여에 얽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초-경험적 관계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의 결정을 내리게 되는 까닭이다. 실험실 외부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적 사실들을 자연세계라기 보다는 현재의 패러다임에 비교해서 평가하게 된다(Fleck, 1935/1979; Kuhn, 1970). 현재의 패러다임에 반하는 사례보다는 지지하는 사례가 보다 빨리 수용된다. 사회 구조 역시 과학문화를 생산/재생산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사고와 행위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Restivo, 1988).
과학은 구체적인 정치적 틀 내에 자리잡고 있다. 과학을 단지 중립적 노력으로 볼 수만은 없다. 과학공동체 내의 정치역학을 통해서 이러한 정치적 과정은 초전도수퍼가속기(SSC)에 대한 지원중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극적인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의회에서 이러저러한 증언들이 이루어질 때 존경받는 과학자들은 SSC에 대해 지지하기도 했고 반대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SSC가 과학의 진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단지 시간과 돈만 많이 들 뿐 쓸모없는 일이라며 반대하기도 했다. 정책결정자들은 어느 한편도 더 옳지 않을 때, 누구의 입장을 지지해야 할까?
과학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Jasanoff, 1990, pp.12-14). 인간의 탐구에 대한 협상의 결과물로 과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학의 내용이 사회 내 협상기구들의 분포에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Cozzens & Woodhouse, 1995, p.534). 정책결정자가 과학지식을 확실한 것으로 인지하고 다양한 과학자 집단들이 같은 사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 차이를 보인다면 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준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정책영역에서 과학과 가치를 분리하는 게 불가능함을 보여서 과학의 권위를 훼손시킨다(Cozzens & Woodhouse, 1995, p.541). 결국 이 논쟁은 정치적 사안을 처리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미국인들이 현존하는 최선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도 어떠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할 때에서 민주적 방법으로 수행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Dickson, 1988). 따라서 민주적인 방식이 정치적 총체로서 과학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최선의 방책이다.
다양한 관점의 증진
과학에 민주적 참여를 늘여야 하는 네번째 이유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비판에서 기인한 것으로 근대 과학의 본질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과학은 백인, 프로테스탄트, 상류계급, 유럽,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져왔다. 초기 과학자들이 지원을 받은 이유는 서유럽의 초기 자본가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데에 사용했던 지식과 권력을 제공해주는, 경제적인 유용성 때문이었다(Hessen, 1931/1971; Jacob, 1988; Karp & Restivo, 1974). 처음부터 비즈니스계에서 보면 과학은 유용한 동반자였고 과학으로서는 연구를 지속해나갈 자원의 원천으로 비즈니스계를 사고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은 매우 광범위하게 지속되고 있다(Dickson, 1988).
초기의 유럽-프로테스탄트-백인-남성-자본가 지배는 과학의 초기 발전을 위한 특정한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과학은 이 집단의 개인들을 반영하게 되었고 다른 민족의 남성 뿐 아니라 여성적 지식형태과는 적대적 관계를 갖게 되었다(Merchant, 1980; Schiebinger, 1989; Tuana, 1989). 과학은 만들어질 때부터 지배자의 지위를 누렸고 유럽 백인의 시각을 전세계에 강제하는 "자객"(thugs) 역할을 하게 했다(Feyerabend, 1987). 이런 시각이 지나치게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과학때문에 다른 형식과 방식의 지식[탐구]들 ― 백인, 프로테스탄트-상류계급-유럽-남성이 아닌 지식[탐구]들 ― 이 대체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Restivo, 1988; Restivo & Zenzen, 1978).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은 순수한 이성적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성적, 인종적 편견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과학사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반드시 맑스주의자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과학이라는 역사적 기획에 내재하는 편견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수리과학을 격찬하면서 매거릿 버트하임(Magaret Wertheim, 1997)은 결론에서 과학 내의 성적 충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를 과학이 갖고 있는 정숙한 성직자적 전통의 유산에서 기인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버트하임은 성적 편견만 극복할 수 있다면 과학은 지금과는 여러모로 다른, 더 좋은 제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백인-유럽-남성 지배가 남북문제, 특히 환경문제에서 여전히 여러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Bullard, 1993; Mies & Shiva, 1993; Sachs, 1992, 1993). 선진국의 기술전문가들은 과학을 이용해서 개발도상국에게는 장벽을 만들면서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 이런 선진국 편향은 오존층 파괴를 둘러싼 협상과정과 최근의 기후협약과 관련된 국제협상위원회(INC, International Negotiating Commitee)의 회합에서 잘 드러난다. 저개발 국가들은 현재의 체계가 자신들의 관심을 무시하고 있다 ― 전문가들이 논쟁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처음부터 선진국의 결과들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 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은 남북관계에만 제한되는 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소수민족과 여성들이 겪는 환경문제를 평가절하하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수민족들은 과학으로부터 이득을 보기는 커녕 환경비용을 감내해야만 했다(Bullard, 1993). 여성들의 독특한 형태의 지식들이 무시됨에 따라 지역환경에 심각한 피해가 초래된 사례들도 종종 있다(Longino, 1990; Merchant, 1980; Mies & Shiva, 1993; Tuana, 1989). 최근 미국 전역에 걸친 환경정의운동이 일어나게 된 기초가 이런 바로 불공정한 행위들 때문이다.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발언권을 갖게 됨에 따라 정책과정은 보다 풍부해진다는 게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민주적 참여의 증진이란 바로 이런 이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설령 과학이 궁극적인 형태의 지식이고 다른 집단들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지 못한다고는 하더라도 민주화는 과학에 대해 전혀 해롭지 않다. 민주적 참여가 증진된다면 아무리 나빠도 과학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고 최선의 경우에는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유익한 형태의 지식을 만들어낼 것이기에 민주적 통제의 증진은 과학에 해롭기는 커녕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다
참여를 늘여야 한다는 마지막 근거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잔 코젠스(Susan Cozzens, 1993)는 모든 사람이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고 이러한 고유성이 결정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인민주의적(populist) 입장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과학에서 다양성을 늘여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성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한층 강력한 주장이다. 의사결정과정에서 고유성을 반영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라는 것은 보편적인 자연법이"라는 칸트(Immanuel Kant, 1929/1957)의 정언명법에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생각으로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Copleston, 1964/1969, p.112). 만약 어떤 개인이 사회를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칸트는 자유와 정의의 기초를 자율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주체인 개인들의 평등에 두었다. 개인의 자유는 모두가 자유로울 때에만 가능하다. 칸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p.310). 타인을 원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시스템의 톱니바퀴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해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따라서 자신의 통치과정에 대해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런 주장은 참여에 대한 다섯가지 정당화 중에서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격조높은 것이다. 현재의 연방정부의 의사결정체계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으며 여전히 정부 내의 엘리트들이 독차지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야 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회 전영역에 걸쳐 민주적 참여를 증가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과학정책에 대한 대중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당신이 과학정책에서 대중들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과연 그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기 원할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 이론가들과는 달리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즉각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좋은 공식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몇몇 안목을 제시하겠다.
민주주의의 확대는 정책결정과정을 대중들에게 보다 많이 개방하는 것같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치학의 초점이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 우선권이 놓여질 경우 보다 심층적인 문제들을 간과하게 된다. 민주화는 이상이나 수단이나 역사적인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한 번에 한 걸음씩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과학의 민주화를 위해 처음 해야 하는 작업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정부를 의미한다(Dahl, 1989). 민주주의 하에서의 시민들은 선택가능한 다양한 정책들에 대해 숙고하여 공공선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은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철학적인 결과인, 공공선을 끌어낸다. 민주주의가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띄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창출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할 수 없다.
여러 수준의 참여가 존재하고 모든 참여가 동등한 정도로 민주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정부를 민주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문제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인구 대다수에 의한 완전한 참여를 포함하는 의사결정방식으로는 참여민주주의(Miller, 1987; Pateman, 1970), 직접민주주의(Cronin, 1989), 강한민주주의(Barber, 1984) 등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이해집단의 자유주의(Walker, 1991; Wilson, 1990)는 참여가 다소 제한되는 데, 정치이론가들은 자발적으로 조직된 이해집단의 행위에 기초를 둔 주류 민주주의 이론인 이를 다원주의(pluralism) 또는 다두제(polyarchy)라고 한다(Dahl, 1982, 1989). 미국 과학정책에서 사용되는 기술관료주의적 방식은 엘리트 갈등 모델 범주로 분류된다(Bachrach, 1971).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지난 200년 동안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고든 우드(Gordon, 1991)에 따르면 미국의 건국자들은 애초에 다소 귀족적이었던 민주주의를 구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있지 않은 모호한 용어이며,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도 대의제나 직접행동을 설명할 때 모두 명확한 제한없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모호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여러 문제들이 야기된다(Barber, 1984). 제임스 밀러(James Miller, 1987)는 1960년대 참여민주주의운동의 태동기에 근본적으로 다양한 목표와 믿음을 가진 집단들이 나름의 목적에 따라 참여의 이상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사고와 실천에는 기본적인 세 가지 형태 ― 엘리트 민주주의, 다원주의 민주주의, 참여적 민주주의― 의 민주주의가 사용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다른 변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이들 세 가지 형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세가지 이상을 이해하게 되면 참여지향적인 과학이 어떠할 지에 대한 숙고를 할 수 있게될 것이다.
민주주의적 연속체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과학에서의 참여의 확대를 생물학자들이 물리학자들과 함께 대화하는 것 정도로 정의하는 여러 회의와 심포지엄에 여러번 참여해봤다8. 그들이 생각하는 참여적 과학이란 간학문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은 미국학술원(NAS, 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과학, 기술, 연방정부}(Science, Technology and Federal Government)(1993)라는 보고서에서 찾을 수있다. 학술원은 [이 보고서에서] 연방정부가 미국의 과학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나라의 연구자와 미국의 연구자들을 비교하기 위해 과학 내외의 전문가 패널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엘리트들의 참여를 증가시키기 위해 전문가 패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카네기 위원회(1992)는 과학기술을 사회적 목표를 연결시키기 위한 전국 포럼을 제안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NGO를 다양한 대중과 일반인들의 이해의 대표로 상정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다원주의적이니 해법을 구상하고 있다.
게리 챕맨과 요엘 유드켄(Gary Chapman and Joel Yudken, 1993)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모든 대중들의 개별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전국 포럼에서 과학기술의 목표를 결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모두가 국가과학기술정책의 목표를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 포럼은 참여민주주의적인 형태로 이들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과학이 대중들에게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세가지 제안들은 각기 상이한 민주적 참여를 지지하는 것으로 세가지 형태의 참여가 우리의 현재 정부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각 제안들은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관심은 어떤 형태가 연방정부가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을 하는 데에 최선의 방법인가에 있다. 주요한 세가지 형태가 규범적인 기준에 따라 표 1에 요약되어 있다.
표 1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정치제도들을 분류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연속체를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기술관료주의적이거나 엘리트 갈등 모델은 연속체의 한쪽 끝에 있고 다른 끝에는 완전히 참여적인 강한 민주주의 형태가 있다. 다원주의 또는 다두제는 이들 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이 연속체에 완전히 맞지 않기 때문에 참여의 확대를 선형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그림 1을 참고할 것). 여러 형태들은 다소 흐릿하며 다양한 제도적인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의 각 이론들에 대해 다양한 사례들을 상상해왔다. 이들 중 다두제의 어떤 형태, 심지어는 특정한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보다 본질적으로는 더욱 민주적인 엘리트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도 있다.
세가지 형태의 제도들 모두 하나의 정부 내에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의 과학이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보건같은 미국 정부의 다른 영역은 매우 다두제적인 모습을 갖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참여가 다른 형태의 참여보다 더 나은가가 아니다. 앞서 정의한 것처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참여의 확대가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 과학정책의 모델인 엘리트 갈등 모델은 참여가 가장 적은 형태이다. 내가 비록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과정에 보다 많은 대중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의 세 형태의 어떤 것에도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위의 연속체의 참여민주주의적 끝으로의 이동을 바라고 있다.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기 위해서는 완전히 참여적인 제도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참여에 관한 기본적인 믿음을 기억하자. 기술적인 결정을 통제하는 권위와 권력이 이용되는 양상은 대중들이 사회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에서 얼마나 배제되었는 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대중들이 실질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제도들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참여수준을 높임으로써 이런 제도들이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참여는 이상이지만 이해집단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게 참여의 수준을 높이고 옳은 방향으로의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조금이나마 참여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전혀 높이지 않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
결론
과학정책을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려는 바램은 허무맹랑한 공상만은 아니다. 지난 해 하원과학위원회에서 정책결정과정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 체계를 향상시키는 대신, 매우 완고한 과학의 자율성때문에 지지를 받던 바네바 부시(1945)의 선형모델을 다시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Sclove, 1998). 위원회는 이러한 체계를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옹호하는 증거들을 무시한 것같다. 아마도 체계를 바꾸려는 관심이 없는 이유는 대중참여가 드문 현 상황의 반영일테다. 일단 대중들이 보다 참여적인 체계를 옹호하기만 하면 바뀔 수 있을 수도있다.
참여의 확대 ― 의사결정과정에 대중들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 ―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가치있는 것이라면 참여의 연속체에서 한 쪽 끝[참여민주주의]에 있는 제도들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과학에 관한 결정과정이 현재 엘리트 갈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첫번째 움직임은 보다 다원주의적인 통제형태로의 이동이 될 것이다. 진정한 참여는 다원주의적이거나 참여민주주의적인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보다 많은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상을 초월한 민주주의이다. 아직 사회가 필요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수준에 있기 때문에 이론가들도 이런 형태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구상하고 있지 못하다. 자유가 없는 국가의 학자가 민주주의에서의 삶을 상상하기 위해 기본적 자유를 위해 투쟁하듯이 지금 수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대중들은 진정으로 참여적인 정부에 대해서는 보다 참여지향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보다 다원주의적인 과학정책을 경험해볼 때까지는 참여민주주의적 과학정책으로 나가는 수단조차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과학에서의 대중참여를 확대하는 다음 단계는 다원주의적 의사결정과정을 창출하고 이해집단들이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또한 참여민주주의에서는 의사결정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Barber, 1984; Pateman, 1970). 그러므로 보다 민주적인 통치체제로의 이행과정은 결과적으로 어떤 통치체제가 만들어지는 지보다 실제로는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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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외에도 여러 참고문헌들이 있으나 분량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주(註)
* Franz Foltz, Five Argument for Increasing Public Participation in Making Science Policy, Bulletin of Science, Technology & Society, Vol.19, No.2, April 1999, pp.117-127
** 프란츠 폴츠는 버지니아 공대(Virginia Tech.)와 RPI STS과에서 강의했고 현재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Penn State University) STS 프로그램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1. 잘 조직된 시민집단과 연구의제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개인들을 함께 다루고 있는 사례연구는 Strickland(1972)과 Rettig(1977)을 참고할 것.
2. 실제 과학정책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예로는 NASA의 낭만적이다 못해 광신적이기까지 한 우주개발이다. 비판적인 지침도 없이 재정지원을 늘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3. 1994년 12월에 열린 제2차 "민간기업-정부 협력사업그룹"(PEGI, Private Enterprise-Government Interactions Working Group) 회의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대중들이 대체로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그들에게 "진리"를 보여줘야 한다는 게 공통의 합의였다.
4. 이러한 주장은 기술적 이슈에 관심을 갖는 "실용적"(low church) STS분야에서 주로 발견된다.
5. 어떤 이들은 과학이 세상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기술이다. 레오 맑스(Leo Marx)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 진보와 동일한가를 물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 사례를 알고 싶으면 Morone and Woodhouse(1989), Coolingridge(1992), Dickson(1988), Rifkin(1983)을 참고할 것.
7. 첫번째 주장이 실용적인 견지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주장은 주류 "이론적" STS계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
8. 3회에 걸친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과학기술정책심포지엄, 제 2차 연례 PEGI회의, 수 차례에 걸친 전국STS협회(NASTS, National Association for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연례회의 등이 대표적이다.
STS분야에 있는 여러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과학-기술적 결정에 있어 대중들의 참여가 증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한다. 이 입장에 대한 근거는 간단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 대중들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결정들에 대해 의미있는 방법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통제력을 가져야만 한다.
사회 내의 여러 제도들로 인해 시민들이 통치과정에 적절하게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불행한 일이다. 과학자 공동체는 사회 내의 여러 제도들 중에서 가장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 중 하나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정책이 형성되는 데에는 대중들의 참여가 그리 많지 않았다(Peteren, 1984). 그러나 일상생활에 연구시스템의 결과가 점차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참여의 확대가 긴급하게 요구된다. 얼마 되지 않는 전문가들이 현재 미국의 연구정책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대중들을 보다 잘 대표할 수 있는 행위자들의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할 뿐 아니라 사회문제에 잘 대응할 수 있는 과학을 만들 수 있다(Shapley &. Roy, 1985).
과학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지만, 생의학연구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의 참여는 과학에서 성공적인 참여에 관한 주목할 사례이다1. 암연구, AIDS연구, 대안의료에 대해 관심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요구 등은 모두 대중들이 지지를 보내고 있기에 의회의 지지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의학분야를 넘어서면 과학분야에서 연구의제에 대중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거의 찾을 수 없다2.
많은 사람들은 대중들이 과학에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현재 시스템이 작동하는 데에에 대해 "아직도 작동하는 걸 왜 고치려고 하냐"며 문제삼지 않는다.
이 논문에서는 참여의 증대가 이롭다는 다섯가지 근거를 STS의 각 분야에서의 논의를 통해 끌어내고 참여가 늘어난다는 데에 대한 필자의 의도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겠다.
기술관료주의적인 현재의 의사결정체계
필자는 박사학위논문(Foltz, 1996)에서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과학연구에 관련된 결정에 보다 많이 참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답을 제시하려 했다. 나는 현상태(status quo)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 연구를 수행하면서 나는 "전문가들" ― 정치가나 과학자들인 ― 이 과학정책에 대중들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는 데에 대해 갖는 입장들이 대략 세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디를 가던지 정책결정자들은 대중들은 과학정책에 연루된 기술적 이슈들이 매우 복잡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데에 공통적으로 합의하는 모습이 반복되었다. 1995년 열렸던 기술 해석능력(literacy)회의에서 어느 청중이 당시 상원 과학위원회 의장이었던 밥 워커(Bob Walker, 펜실베니나의 공화당 의원)에게 보다 민주적인 과학을 만드는 데에 대해 질문했다. 워커의 답은 '불가능하다'였다. 대중들의 참여로 형성된(public-moderated) 과학정책은 영구운동장치들에 대한 끊이지 않는 지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말에는 대중들은 과학적 가능성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산을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상원 과학위원회의 또다른 위원은 같은 해 봄에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과학기술 심포지엄에서 상원과학위원회를 대표한 발언에서 이런 감정을 다시 표현했다. 이런 사례들은 국가 과학기술정책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인들인 상원 과학위원회의 위원들 대다수가 대중들은 고도의 기술적 결정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런 입장을 공유하지 않고 상이한 두가지 견해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어느 그룹은 과학에 대해 대중들이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공동체가 대중들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공동체는 대중들이 과학을 보다 잘 알도록 가르쳐야 하며 이를 통해 대중들은 과학의 진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지지하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적절한 수준의 과학 리터러시가 있다면 과학자가 대중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초전도수퍼가속기(SSC, 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가 실패한 이유를 초전도수퍼가속기의 장·단점이 아니라 식견을 가진 대중(informed public)들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학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프로젝트에 대한 어떠한 재정지원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대중참여는 대중들이 보다 많은 연구를 위해 백지수표를 건네주는 과학후원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다 많은 대중참여를 진정으로 바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후원을 늘려주는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가진 대중들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그룹은 대중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떠한 대중참여에도 반대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고 여기고 이를 지속하기를 바란다. 이들은 합리적 지성이 필요한 과학에 대중들 ― 통상 "감정적"이라 여겨지는 ― 이 참여함에 따라 과학의 합리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한다3. 이들은 대중들이 과학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대중들은 감정적이어서 감정적인 이슈로 과학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과학은 더이상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순수한" 헌신이 감정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중참여를 막아야만 한다고 여긴다.
이들 중 어느 집단도 대중에 의한 순수한 참여를 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대중들이 너무 무지하다고 여기고 또 다른 이들은 감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어떠한 책임도 없이 무제한적인 지원을 바라는 이들이 있다. 이런 집단들은 현재의 대중들이 기술적 사안에 대해 이성적인 결정을 내릴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대중들은 국가과학정책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권력을 가진 이들은 지금은 대중들에게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대중들이 제대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중요한 지위에 있는 이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태도로 인해 연방정부의 제도적 구조 내에서 기술관료주의의 보루로서 과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과학공동체는 합리적 지식의 수호자로서 연방정부 수준에서, 학계에서, 산업계에서 과학제도를 통제하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미국은 기술관료주의적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는데, 과학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기술관료주의는 기술적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여 지배하는 정부체계를 말한다. 민주주의의 기술관료주의적 형태는 과학에 대한 정치적 선택을 하는 전문가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Petersen, 1984). 기술관료주의는 전문성이 민주적 과정을 위해 조직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전문성에 그치는 게 아니다. 기술관료주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이 기술적으로 해결하려 하기 위해 고안된 정부의 정책결정[메커니즘]이다. 기술관료주의에서 기술지식은 권력의 기초다. 정책결정자들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할 때에는 전문적인 기술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에게 의지하게 된다. 종종 정책결정자들은 전문가들의 지식을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으로 보는 것을 넘어 곧바로 정책으로 이용한다.
참여를 강조하는 또다른 민주주의의 형태와는 달리 기술관료주의적 정책결정과정은 참여를 전문지식을 가진 이들에 한정한다. 개인들의 지식의 질과 유용성이 상이한 만큼 개인들은 평등하지 않다. 전문지식으로서의 과학의 본질은 기술관료주의적 통제를 조장한다. 선진기술사회에서 기술계급은 공식적으로 선출된 공무원들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실질적인 정책결정자 역할을 함으로서 은폐된 기술관료주의를 형성한다는 주장도 있다(Hamlett, 1992). 기술관료주의는 갈등들을 고립시키거나 국지화시킴으로서 몇가지 기계적 규칙이나 정책결정과정 ― 극단적으로는 비용-편익 분석 ― 을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기술관료들은 대중들을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서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생각한다.
참여가 의미있는 일이 되려면 시민들이 정부에 행사하는 역할을 이해하고 시민들로 하여금 정책의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Sclove, 1995). 민주주의는 선거에 있어 자유와 보통의 원칙과 형식적 평등원칙을 가정하고 있다. 환경집단에서 기업계에 이르기 까지의 이해집단들을 포함하여 정책결정과정에서 참여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아무리 정책결정과정에 대중들의 직접참여가 더욱 바람직하다고 해도 현재의 기술관료주의적 시스템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한 다섯가지 주장
정말 민주적이려면 사회를 구성하는 기관들이 참여적이어야 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관들이 닫혀있는 사회는 진정으로 열린 사회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조금이라도 참여의 수준을 높이면 그만큼 이런 기구들은 좋아질 수 있다. 과학에 관련된 연방기관들은 모든 정부기관 중에서 가장 참여적이지 않은 쪽이다. 정부 과학기구 내에 정부의 위계 외부에 있는 모든 시민들의 참여를 증진시키는 것은 정부의 모든 수준에서의 참여를 늘릴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지난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가 과학의 결과에 대해 해로운 영향을 미칠 거라고 주장해왔다(Greenberg, 1967; Longino, 1990; Merton, 1938/1973; Price, 1967). 그러나 이들은 연구개발(R&D) 내부 결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부가 설정한 구체적 목표에 대한 선택에 대한 도덕적·정치적 물음은 무시한다.
대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을 통해 연구의제를 결정하는 데에 보다 많은 참여를 하는 일이다. 이 얘기가 대중들이 과학 분과 내의 자원배분에 대한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 분과 내'의 의미는 구체적인 정부 프로그램에서 개별 프로젝트 간의 자원배분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런 일에는 전문가 평가(peer review)가 적절하며 현재의 대중들은 다양한 연구자 집단들을 구별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Chubin & Hacket, 1990). 대중들은 국가연구개발에 대한 자원배분에서 참여를 통해 보다 큰 수준에서 과학정책에 대해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핵발전 개발이냐 태양에너지 개발이냐 사이의 자원배분처럼 구체적인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예산투입의 문제와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예산이 연구개발에 투입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 등이 있다. 전문가 평가는 어떤 연구 공동체 내에서 우위를 결정하기만 할 따름이지 다양한 영역 간의 연구자원의 배분에서는 무력하다(Chubin, 1989).
연구에 대한 자원배분을 둘러싼 결정들은 반드시 기술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정치적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미국과학재단(NSF)의 연구프로그램 선택에서처럼 구체적인 과학분야 내에서의 자원배분에 관한 결정은 한층 많은 기술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 과학 엘리트들이 기술적 지식을 통제하기 때문에 과학 내의 자원배분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능력을 더 많이 갖고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Dahl, 1985),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에 대해 통제할 수 있는 주체라는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일반대중들은 선택에 책임이 있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도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대중들이 과학적 성과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안에 대해 연방연구개발비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대중들 ― 내가 말하는 대중이란, 미국의 모든 시민을 말한다 ― 은 정부가 전지구적 기후변화나 유해폐기물을 처리하는 방법 등 일반적인 연구분야에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전문가] 동료들 사이의 평가는 특정 분야의 과학 내에서 프로젝트를 선택할 때에만 사용될 수 있다.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에서 민주적 참여의 확대를 정당화하는 다섯 가지 논리들이 있다. 아래의 정당화 주장들은 그리 상세하지는 않고 각각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을 제공한다.
사회에 대한 영향의 정도
우선 대규모 과학기반 기술프로젝트들의 잠재적 영향력에 주목하여 과학정책에 [시민]참여를 확대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4. 과학이 직접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과학에서 기인한 기술이 직간접적으로 사회 내에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5. 핵무기, 유전자조작생명체(GMOs), 유해폐기물의 잠재적 영향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이러한 영향때문에 기술로부터 영향을 받는 대중들이 자신의 미래를 형성하는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과학측에서는 과학은 중립적인 노력이며 그것을 자신의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핵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물리학자가 아닌 다른 이들은 원자에 관한 이론으로 폭탄을 만드는 데 이용한다. 일단 지니가 병에서 나오게 되면 사회가 그로 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지원 연구개발 프로젝트들은 다양한 기술들을 창출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기술들은 사회를 통제하거나 심각한 해를 끼칠 우려도 있다. 정부가 만들어낸 기술로부터 초래된 사회적 악영향을 지적하는 여러 문헌들도 있다6. 예를 들어 핵전쟁, 생명공학으로 인한 위해(危害), 유해폐기물, 산성비, 오존층 파괴, 발암물질이 함유된 식품, 전세계적인 기후변화 등이 이러한 악영향들이다. 이러한 잠재적 영향들은 지역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데에서부터 지구적인 파괴를 초래할 가능성까지 다양하다. 물론 과학으로부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기술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대규모 악영향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아무도 이런 잠재력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여러 기술들은 대중들의 생활을 통제할 수도 있다. 이런 기술들은 사회의 발전방향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Ellul, 1964; Winner, 1993). 예를 들어 자동차에 대한 미국인들의 바램은 사회를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동시에 공동체와 여러 사회관계들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코완(1983)은 시간절약적 가사도구들이 도입되어도 실제로 여성들(과 남성들)의 가사노동을 줄이지는 못했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랭던 위너(1994)도 정보고속도로가 만들어지면 사회구조가 파괴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인터넷은 대중들의 소비능력을 재정의하고 대중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도 있으며 공동체, 지역, 지구를 재정의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전지구적 기후변화를 화석연료 ― 특히 수송수단으로 내연기관을 이용함에 따라 이용되는 ― 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와 연결짓는다. 대부분의 대기과학자들이 어떤 현상이 발생하고 이로 인한 결과가 태풍, 홍수, 가뭄 등 극심한 기상현상의 증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동의되고 있는 바이지만, 인간이 대기에 미친 영향이 가져올 정확한 결과가 어떠할 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이런 잠재력때문에 쿄토 COP3회의에서 행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요구를 하기도 했고 여러 과학자들은 전세계 국가들이 재앙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술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재앙을 처리하는 대신 연구자들은 현재 어떠한 문제가 존재하는 지를 입증하는 데에만 수십억 달러를 이용해왔다. 여전히 대중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기술정책은 종종 특정한 사회-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고되지만 지금의 과학기술의 사용을 살펴보면 대중들이 기술에 대해 선택권을 행사할 수 없는 현재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권력구조를 창조해오고 있다(Brown, 1994). 과학기술이 대중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중들은 이에 대해 거의 ―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는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미국인들의 오랜 믿음이다(Petersen, 1984, p.7). 사회가 과학의 결과나 과학에 의해 만들어진 기술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가 의사결정과정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이 미국인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Hamlett, 1992).
과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과학기술을 요구하고 있다. 전지구적 기후변화나 대기의 오존층의 파괴같은 대규모의 잠재적 위해가 직접적으로 과학기술 문명과 연결지어졌다. 사회는 과학-기반 기술의 부산물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현재는 긍정적, 부정적 결과에 대해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참여를 늘임으로써 정부지원연구에서 만들어진 기술로부터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대중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통제력을 갖도록 할 수 있다.
납세자들은 발언할 권리가 있다
과학의 민주적 통제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두번째 이유로는 첫번째 이유로부터 직접적으로 끌어낼 수 있다. 정부는 과학을 지원할 때에 연구기관의 내부 운영은 기관에 맡겨두고 계약과 보조금만 이용한다. 1945년 과학공동체는 연방정부가 필요한 자원을 계속 제공해주고 자신들에 대한 통제를 스스로에게 맡겨주기만 하면 질병을 없애고 건전한 경제를 만들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세계평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다(Bush, 1945). 수 조달러가 투자되었지만 아직도 [약속했던] 유토피아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사용한 돈은 세금으로부터, 즉 대중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중들이 과학에 투자했기때문에 대중들이 자신들의 돈을 통해 얻어진 것에 대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두번째 주장이다.
현재의 시스템은 과학공동체와 연방정부로 대표되는 미국 대중의 계약을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계약은 지적 자율성과 과학에 대한 재정지원 대신 사회와 경제에 고른 혜택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과학이 이러한 거래를 지속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계약을 둘러싼 어려움들은 1990년대 초에 의회에서 과학공동체에게 국가가 경제적으로는 어려우면서 과학적으로는 우수해야 하는 이유를 질문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노벨상 최다 수상국이지만 기술혁신은 그리 우수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과 환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적 으로 성공한 국가들과 경쟁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사회는 기초과학이 기술혁신을 낳는다는 바네바 부시의 주장(1945)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Chubin & Hackett, 1990, pp. 9-11). 과학은 성장했지만 정작 과학이 약속했던 사회적·경제적 혜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과학공동체는 거래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사회는 설명하기를 요구했다.
정책분석가들은 바네바 부시의 계약에 내재된 선형기술혁신모델에 깔려있는 가정에 대해 반박하면서 계약을 재협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Sharpley & Roy, 1985). 선형모델은 신기술과 건전한 경제를 창조하는 방법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로 가능하다고 했지만 기술의 역사는 기초과학이 기술이 창조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보여주었다. 과학지식은 기술혁신의 여러 구성요소들 중 단지 하나일 따름이다. 자본, 대중들의 지원, 잠재시장, 미디어 광고, 생산능력, 자연자원, 공공정책 등 여러 다양한 요인들이 기술개발을 결정한다. 몇몇 개인들은 과학이 기술혁신을 직접 지원하는 게 사회에는 더욱 좋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기 시작했다(Brown, 1992). 다른 이들은 과학이 60, 70년대의 사회적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이미 [바네바 부시의] 사회 계약을 재계약했고 거대기업과 군부에 통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Dickson, 1988). 새로운 사회계약은 과학의 자유로운 흐름에 저해가 될 뿐 아니라 사회는 다시금 패배하게 된다.
민주적 통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사회, 즉 대중이 과학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은 사회에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의 구매자는 그들이 실제로 구입한 상품에 대해서 발언권을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과학은 문제를 나쁘게 만들어도 책임을 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시장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기도 한다. 혁신모델은 기초과학이 기술혁신에 해를 입힌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자신들의 기금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해 더많은 권리를 가진다면 대중의 영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에 대한 결정과정에 대중들의 참여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과학의 사회적 구성
우리는 과학의 사회적 구성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과학에서의 민주적 참여를 늘여야 한다는 세번째 논거로 이용할 수 있다7. 완전한 자율성을 요구하는 과학공동체의 요구는 합리성과 객관성 때문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과학의 인식론적 상태에 근거한 규범적인 주장을 끌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Cozzens, 1990, p.181). 사회구성주의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과학 자체는 정치적 과정이다. 과학구성체는 다양한 "사실들"의 정당성을 놓고 구성원들 간에 협상을 한다. 사실과 이론은 영원한 진리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문화된 사회 조건의 산물이다(Latour & Woolgar, 1979/1986).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을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수사학적이고 사회적인 그물망의 일부로 사고한다(Latour, 1987). 과학자들은 실험실 내부와 다양한 과학공동체 사이의 협상과정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생산한다(Knorr-Cetina & Mulkay, 1983; Latour, 1987). 사실은 과학공동체의 수용에 좌우된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권력과 과학의 연계를 폭로하고 [과학이 갖고 있다는] 객관성과 중립성을 소거한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자원들을 조직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실험실 연구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상징적 초-경험적(trans-epistemic) 관계라는, 과학공동체의 경계을 초월하는 실험실에서의 추론과 참여에 얽혀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초-경험적 관계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의 결정을 내리게 되는 까닭이다. 실험실 외부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적 사실들을 자연세계라기 보다는 현재의 패러다임에 비교해서 평가하게 된다(Fleck, 1935/1979; Kuhn, 1970). 현재의 패러다임에 반하는 사례보다는 지지하는 사례가 보다 빨리 수용된다. 사회 구조 역시 과학문화를 생산/재생산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사고와 행위를 만들어내는 원인이라 할 수 있다(Restivo, 1988).
과학은 구체적인 정치적 틀 내에 자리잡고 있다. 과학을 단지 중립적 노력으로 볼 수만은 없다. 과학공동체 내의 정치역학을 통해서 이러한 정치적 과정은 초전도수퍼가속기(SSC)에 대한 지원중지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극적인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의회에서 이러저러한 증언들이 이루어질 때 존경받는 과학자들은 SSC에 대해 지지하기도 했고 반대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SSC가 과학의 진보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이들은 단지 시간과 돈만 많이 들 뿐 쓸모없는 일이라며 반대하기도 했다. 정책결정자들은 어느 한편도 더 옳지 않을 때, 누구의 입장을 지지해야 할까?
과학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Jasanoff, 1990, pp.12-14). 인간의 탐구에 대한 협상의 결과물로 과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학의 내용이 사회 내 협상기구들의 분포에 따른다는 것을 말한다(Cozzens & Woodhouse, 1995, p.534). 정책결정자가 과학지식을 확실한 것으로 인지하고 다양한 과학자 집단들이 같은 사실을 해석하는 데 있어 차이를 보인다면 사회적 요인이 영향을 준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정책영역에서 과학과 가치를 분리하는 게 불가능함을 보여서 과학의 권위를 훼손시킨다(Cozzens & Woodhouse, 1995, p.541). 결국 이 논쟁은 정치적 사안을 처리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미국인들이 현존하는 최선의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도 어떠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할 때에서 민주적 방법으로 수행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Dickson, 1988). 따라서 민주적인 방식이 정치적 총체로서 과학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최선의 방책이다.
다양한 관점의 증진
과학에 민주적 참여를 늘여야 하는 네번째 이유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비판에서 기인한 것으로 근대 과학의 본질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과학은 백인, 프로테스탄트, 상류계급, 유럽,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져왔다. 초기 과학자들이 지원을 받은 이유는 서유럽의 초기 자본가들이 시장을 지배하는 데에 사용했던 지식과 권력을 제공해주는, 경제적인 유용성 때문이었다(Hessen, 1931/1971; Jacob, 1988; Karp & Restivo, 1974). 처음부터 비즈니스계에서 보면 과학은 유용한 동반자였고 과학으로서는 연구를 지속해나갈 자원의 원천으로 비즈니스계를 사고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은 매우 광범위하게 지속되고 있다(Dickson, 1988).
초기의 유럽-프로테스탄트-백인-남성-자본가 지배는 과학의 초기 발전을 위한 특정한 환경을 조성했다. 따라서 과학은 이 집단의 개인들을 반영하게 되었고 다른 민족의 남성 뿐 아니라 여성적 지식형태과는 적대적 관계를 갖게 되었다(Merchant, 1980; Schiebinger, 1989; Tuana, 1989). 과학은 만들어질 때부터 지배자의 지위를 누렸고 유럽 백인의 시각을 전세계에 강제하는 "자객"(thugs) 역할을 하게 했다(Feyerabend, 1987). 이런 시각이 지나치게 근본적이기는 하지만 과학때문에 다른 형식과 방식의 지식[탐구]들 ― 백인, 프로테스탄트-상류계급-유럽-남성이 아닌 지식[탐구]들 ― 이 대체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Restivo, 1988; Restivo & Zenzen, 1978).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은 순수한 이성적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에 성적, 인종적 편견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나 과학사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반드시 맑스주의자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과학이라는 역사적 기획에 내재하는 편견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수리과학을 격찬하면서 매거릿 버트하임(Magaret Wertheim, 1997)은 결론에서 과학 내의 성적 충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를 과학이 갖고 있는 정숙한 성직자적 전통의 유산에서 기인했다고 결론짓고 있다. 버트하임은 성적 편견만 극복할 수 있다면 과학은 지금과는 여러모로 다른, 더 좋은 제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백인-유럽-남성 지배가 남북문제, 특히 환경문제에서 여전히 여러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Bullard, 1993; Mies & Shiva, 1993; Sachs, 1992, 1993). 선진국의 기술전문가들은 과학을 이용해서 개발도상국에게는 장벽을 만들면서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 이런 선진국 편향은 오존층 파괴를 둘러싼 협상과정과 최근의 기후협약과 관련된 국제협상위원회(INC, International Negotiating Commitee)의 회합에서 잘 드러난다. 저개발 국가들은 현재의 체계가 자신들의 관심을 무시하고 있다 ― 전문가들이 논쟁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처음부터 선진국의 결과들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 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은 남북관계에만 제한되는 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소수민족과 여성들이 겪는 환경문제를 평가절하하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수민족들은 과학으로부터 이득을 보기는 커녕 환경비용을 감내해야만 했다(Bullard, 1993). 여성들의 독특한 형태의 지식들이 무시됨에 따라 지역환경에 심각한 피해가 초래된 사례들도 종종 있다(Longino, 1990; Merchant, 1980; Mies & Shiva, 1993; Tuana, 1989). 최근 미국 전역에 걸친 환경정의운동이 일어나게 된 기초가 이런 바로 불공정한 행위들 때문이다.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발언권을 갖게 됨에 따라 정책과정은 보다 풍부해진다는 게 정당성의 근거가 된다. 민주적 참여의 증진이란 바로 이런 이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설령 과학이 궁극적인 형태의 지식이고 다른 집단들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지 못한다고는 하더라도 민주화는 과학에 대해 전혀 해롭지 않다. 민주적 참여가 증진된다면 아무리 나빠도 과학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고 최선의 경우에는 보다 나은, 그리고 보다 유익한 형태의 지식을 만들어낼 것이기에 민주적 통제의 증진은 과학에 해롭기는 커녕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다
참여를 늘여야 한다는 마지막 근거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잔 코젠스(Susan Cozzens, 1993)는 모든 사람이 고유한 성질을 갖고 있고 이러한 고유성이 결정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인민주의적(populist) 입장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과학에서 다양성을 늘여야 한다는 것 이상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성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한층 강력한 주장이다. 의사결정과정에서 고유성을 반영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에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라는 것은 보편적인 자연법이"라는 칸트(Immanuel Kant, 1929/1957)의 정언명법에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생각으로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Copleston, 1964/1969, p.112). 만약 어떤 개인이 사회를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통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칸트는 자유와 정의의 기초를 자율적이고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주체인 개인들의 평등에 두었다. 개인의 자유는 모두가 자유로울 때에만 가능하다. 칸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p.310). 타인을 원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시스템의 톱니바퀴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해 통제력을 가져야 한다.따라서 자신의 통치과정에 대해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런 주장은 참여에 대한 다섯가지 정당화 중에서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격조높은 것이다. 현재의 연방정부의 의사결정체계에서 일반 대중을 위한 자리는 전혀 없으며 여전히 정부 내의 엘리트들이 독차지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야 하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회 전영역에 걸쳐 민주적 참여를 증가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과학정책에 대한 대중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당신이 과학정책에서 대중들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과연 그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기 원할 것이다. 다른 민주주의 이론가들과는 달리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즉각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좋은 공식은 없는 게 사실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는데 출발점이 될 수 있는 몇몇 안목을 제시하겠다.
민주주의의 확대는 정책결정과정을 대중들에게 보다 많이 개방하는 것같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정치학의 초점이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에 우선권이 놓여질 경우 보다 심층적인 문제들을 간과하게 된다. 민주화는 이상이나 수단이나 역사적인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 과제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한 번에 한 걸음씩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
과학의 민주화를 위해 처음 해야 하는 작업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음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이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정부를 의미한다(Dahl, 1989). 민주주의 하에서의 시민들은 선택가능한 다양한 정책들에 대해 숙고하여 공공선을 위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은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철학적인 결과인, 공공선을 끌어낸다. 민주주의가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띄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을 창출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할 수 없다.
여러 수준의 참여가 존재하고 모든 참여가 동등한 정도로 민주적일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정부를 민주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문제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인구 대다수에 의한 완전한 참여를 포함하는 의사결정방식으로는 참여민주주의(Miller, 1987; Pateman, 1970), 직접민주주의(Cronin, 1989), 강한민주주의(Barber, 1984) 등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이해집단의 자유주의(Walker, 1991; Wilson, 1990)는 참여가 다소 제한되는 데, 정치이론가들은 자발적으로 조직된 이해집단의 행위에 기초를 둔 주류 민주주의 이론인 이를 다원주의(pluralism) 또는 다두제(polyarchy)라고 한다(Dahl, 1982, 1989). 미국 과학정책에서 사용되는 기술관료주의적 방식은 엘리트 갈등 모델 범주로 분류된다(Bachrach, 1971).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지난 200년 동안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고든 우드(Gordon, 1991)에 따르면 미국의 건국자들은 애초에 다소 귀족적이었던 민주주의를 구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어떤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있지 않은 모호한 용어이며,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도 대의제나 직접행동을 설명할 때 모두 명확한 제한없이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모호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여러 문제들이 야기된다(Barber, 1984). 제임스 밀러(James Miller, 1987)는 1960년대 참여민주주의운동의 태동기에 근본적으로 다양한 목표와 믿음을 가진 집단들이 나름의 목적에 따라 참여의 이상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사고와 실천에는 기본적인 세 가지 형태 ― 엘리트 민주주의, 다원주의 민주주의, 참여적 민주주의― 의 민주주의가 사용된다. 이는 민주주의의 다른 변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이들 세 가지 형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세가지 이상을 이해하게 되면 참여지향적인 과학이 어떠할 지에 대한 숙고를 할 수 있게될 것이다.
민주주의적 연속체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과학에서의 참여의 확대를 생물학자들이 물리학자들과 함께 대화하는 것 정도로 정의하는 여러 회의와 심포지엄에 여러번 참여해봤다8. 그들이 생각하는 참여적 과학이란 간학문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은 미국학술원(NAS, 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과학, 기술, 연방정부}(Science, Technology and Federal Government)(1993)라는 보고서에서 찾을 수있다. 학술원은 [이 보고서에서] 연방정부가 미국의 과학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나라의 연구자와 미국의 연구자들을 비교하기 위해 과학 내외의 전문가 패널을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엘리트들의 참여를 증가시키기 위해 전문가 패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카네기 위원회(1992)는 과학기술을 사회적 목표를 연결시키기 위한 전국 포럼을 제안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NGO를 다양한 대중과 일반인들의 이해의 대표로 상정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다원주의적이니 해법을 구상하고 있다.
게리 챕맨과 요엘 유드켄(Gary Chapman and Joel Yudken, 1993)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모든 대중들의 개별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전국 포럼에서 과학기술의 목표를 결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모두가 국가과학기술정책의 목표를 결정하는 데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 포럼은 참여민주주의적인 형태로 이들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과학이 대중들에게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세가지 제안들은 각기 상이한 민주적 참여를 지지하는 것으로 세가지 형태의 참여가 우리의 현재 정부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각 제안들은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관심은 어떤 형태가 연방정부가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을 하는 데에 최선의 방법인가에 있다. 주요한 세가지 형태가 규범적인 기준에 따라 표 1에 요약되어 있다.
표 1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정치제도들을 분류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연속체를 보여주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기술관료주의적이거나 엘리트 갈등 모델은 연속체의 한쪽 끝에 있고 다른 끝에는 완전히 참여적인 강한 민주주의 형태가 있다. 다원주의 또는 다두제는 이들 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이 연속체에 완전히 맞지 않기 때문에 참여의 확대를 선형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그림 1을 참고할 것). 여러 형태들은 다소 흐릿하며 다양한 제도적인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의 각 이론들에 대해 다양한 사례들을 상상해왔다. 이들 중 다두제의 어떤 형태, 심지어는 특정한 형태의 참여민주주의보다 본질적으로는 더욱 민주적인 엘리트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도 있다.
세가지 형태의 제도들 모두 하나의 정부 내에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의 과학이 엘리트주의적인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보건같은 미국 정부의 다른 영역은 매우 다두제적인 모습을 갖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형태의 참여가 다른 형태의 참여보다 더 나은가가 아니다. 앞서 정의한 것처럼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의 참여의 확대가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 과학정책의 모델인 엘리트 갈등 모델은 참여가 가장 적은 형태이다. 내가 비록 과학에 대한 자원배분과정에 보다 많은 대중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의 세 형태의 어떤 것에도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위의 연속체의 참여민주주의적 끝으로의 이동을 바라고 있다.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기 위해서는 완전히 참여적인 제도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참여에 관한 기본적인 믿음을 기억하자. 기술적인 결정을 통제하는 권위와 권력이 이용되는 양상은 대중들이 사회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정에서 얼마나 배제되었는 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대중들이 실질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제도들의 의사결정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참여수준을 높임으로써 이런 제도들이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참여는 이상이지만 이해집단들이 더 많이 참여하는 게 참여의 수준을 높이고 옳은 방향으로의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조금이나마 참여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전혀 높이지 않는 것보다는 바람직하다.
결론
과학정책을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려는 바램은 허무맹랑한 공상만은 아니다. 지난 해 하원과학위원회에서 정책결정과정을 획기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했다. 체계를 향상시키는 대신, 매우 완고한 과학의 자율성때문에 지지를 받던 바네바 부시(1945)의 선형모델을 다시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Sclove, 1998). 위원회는 이러한 체계를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옹호하는 증거들을 무시한 것같다. 아마도 체계를 바꾸려는 관심이 없는 이유는 대중참여가 드문 현 상황의 반영일테다. 일단 대중들이 보다 참여적인 체계를 옹호하기만 하면 바뀔 수 있을 수도있다.
참여의 확대 ― 의사결정과정에 대중들이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 ―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가치있는 것이라면 참여의 연속체에서 한 쪽 끝[참여민주주의]에 있는 제도들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과학에 관한 결정과정이 현재 엘리트 갈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첫번째 움직임은 보다 다원주의적인 통제형태로의 이동이 될 것이다. 진정한 참여는 다원주의적이거나 참여민주주의적인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보다 많은 경험을 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상을 초월한 민주주의이다. 아직 사회가 필요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수준에 있기 때문에 이론가들도 이런 형태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구상하고 있지 못하다. 자유가 없는 국가의 학자가 민주주의에서의 삶을 상상하기 위해 기본적 자유를 위해 투쟁하듯이 지금 수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대중들은 진정으로 참여적인 정부에 대해서는 보다 참여지향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보다 다원주의적인 과학정책을 경험해볼 때까지는 참여민주주의적 과학정책으로 나가는 수단조차 생각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과학에서의 대중참여를 확대하는 다음 단계는 다원주의적 의사결정과정을 창출하고 이해집단들이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또한 참여민주주의에서는 의사결정과정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Barber, 1984; Pateman, 1970). 그러므로 보다 민주적인 통치체제로의 이행과정은 결과적으로 어떤 통치체제가 만들어지는 지보다 실제로는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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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외에도 여러 참고문헌들이 있으나 분량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주(註)
* Franz Foltz, Five Argument for Increasing Public Participation in Making Science Policy, Bulletin of Science, Technology & Society, Vol.19, No.2, April 1999, pp.117-127
** 프란츠 폴츠는 버지니아 공대(Virginia Tech.)와 RPI STS과에서 강의했고 현재는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Penn State University) STS 프로그램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1. 잘 조직된 시민집단과 연구의제를 형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개인들을 함께 다루고 있는 사례연구는 Strickland(1972)과 Rettig(1977)을 참고할 것.
2. 실제 과학정책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는 예로는 NASA의 낭만적이다 못해 광신적이기까지 한 우주개발이다. 비판적인 지침도 없이 재정지원을 늘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3. 1994년 12월에 열린 제2차 "민간기업-정부 협력사업그룹"(PEGI, Private Enterprise-Government Interactions Working Group) 회의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들었다. 대중들이 대체로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그들에게 "진리"를 보여줘야 한다는 게 공통의 합의였다.
4. 이러한 주장은 기술적 이슈에 관심을 갖는 "실용적"(low church) STS분야에서 주로 발견된다.
5. 어떤 이들은 과학이 세상에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기술이다. 레오 맑스(Leo Marx)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이 진보와 동일한가를 물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 사례를 알고 싶으면 Morone and Woodhouse(1989), Coolingridge(1992), Dickson(1988), Rifkin(1983)을 참고할 것.
7. 첫번째 주장이 실용적인 견지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주장은 주류 "이론적" STS계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다.
8. 3회에 걸친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과학기술정책심포지엄, 제 2차 연례 PEGI회의, 수 차례에 걸친 전국STS협회(NASTS, National Association for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연례회의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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