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참여적 기술영향평가(Technology Assessment, TA)와 대중들의 과학, 공학, 기술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 PUSET)에 대한 논의들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다. 참여적 TA는 일반적인 의미의 과학기술정책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고, 특히 TA라는 특정 분야에 대한 연구와 관련을 맺고 있다(Joss, 1998).

TA에서 대중참여가 갖는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0년대 미국에서의 TA운동이 시작되던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최근 서유럽에서 다시 유사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데 나는 이를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socially sustainable)' 과학기술정책이라고 부른다. 이는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과학, 기술, 산업변화에 대한 대중들의 태도가 점차 회의적으로 되어가는 데에 직면해서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한 정책이다(Durant et al, 언론보도).

이와는 대조적으로 PUSET운동은 영어권 국가에서 지난 10∼15년 동안 벌어졌고 과학과 과학자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 따른 대응이다. 특히 영국에서 과학기술정책결정과정에서 대중참여와 관련된 논의는 고도로 전문화되고, 협소한 TA영역뿐 아니라 PUSET의 맥락에서도 제기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쟁점들이 발생한 이유를 설명하고, 참여적 TA를 이러한 독특한 방식으로 틀지우는 일이 갖는 의미를 탐구하려할 것이다.

우선, '대중의 과학이해'라는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전후시기 내내 간헐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1980년대 초반 영국에서야 처음으로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Lewenstein, 1992). 당시 과학동동체 일각에서는 과학과 사회의 나머지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극 ―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쩔 수 없는 ― 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우려를 갖게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도] 많이 논의되었지만 이 글에서 필요한 정도로만 말하면 이타주의적인 동기(대중들과 호흡하려는)와 이기적인 동기(과학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의 혼합이었다(Durant, 1990).

1985년 런던의 왕립학회는 대중의 과학이해에 대한 보고서(Royal Society, 1985)를 발표했는 데, 이 보고서는 즉각적인 행동을 시행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어서 이 보고서에 의해 새로이 설립된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한 위원회(Committee on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COPUS)>의 지원을 받아 일련의 실질적인 실험들이 이뤄졌다. 게다가 영국 경제사회연구위원회(ESRC)가 이 분야에 대한 중요 연구들에 대해 재정지원을 하기도 했다(Ziman, 1991).

이후 몇 년동안 PUSET를 향상시키려는 실천적인 노력은 소규모의 십자군적인 노력으로부터 대중운동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1990년대 중반에는 PUSET룰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공식적으로 영국정부의 과학정책의 일부가 되었고 수십 가지의 여러 실험들이 시행되고 있다. 동시에 과학과 대중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도 늘어가고 있으며 관련 분야의 장학금도 점차 증가하고있다. 다른 산업국가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향이 관찰되고 있다(Schiele, 1994).

PUSET분야가 시작될 때부터 연구자들은 '대중의 과학이해'라는 표현을 비판적 논의맥락에 자리매김했다. '대중의 과학이해'라는 용어 자체는 다층적일 뿐아니라 모호하다. '대중', '이해', '과학'이라는 세 단어 모두 상이한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이들을 밀접하게 병치시킴에 따라 보다 흥미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1992년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라는 국제학술지 첫 번째 호가 나왔고 여기에 실린 일련의 "초기 전망1)"에서는 PUS라는 표현 자체와 실천적인 노력의 확대를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제시된 전망 중의 일부는 과학을 대중에게 보다 많이, 보다 잘 전달해야하는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과학과 사회의 나머지와의 상호관계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쟁점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초기 전망에 비춰볼 때, 적어도 1990년대 초에는 대중의 과학이해에 대한 단일한 연구나 실천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PUSET는 본질적으로 여러 전문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불편한 결합이고 실제로도 PUSET를 위해 방송인, 교육가, 기업가, 저널리스트, 정책결정가, 정치인, 그리고 사회과학자들까지도 함께 모였다. 이런 상이한 집단들이 PUSET에 대해 각기 상이한 목표와 가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여러 상이한 행위자와 이해관계를 수용할 수 있고, 단일한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후에 PUSET의 여러 가지 특징적인 접근법들이 발전되었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는 결핍모델과 민주주의모델이다.

결핍과 민주주의

대중들이 과학, 공학, 기술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믿음은 초기의 PUSET 논의를 지배했던 단일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나 대중, 모두가 관심이 있었다. PUSET의 핵심축을 지식과 무지로 생각하는 이러한 시각은 '결핍 모델'로 알려져 있다.

결핍모델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이고 대중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지한 일반인이며 따라서 전문가들의 지식을 여러 공동체에 널리, 그리고 보다 잘 알리는 것이 PUSET의 중요 과업이 된다. 일부 연구자들은 과학연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관심을 갖지만, 보다 단순한 형태의 결핍모델에서는 과학연구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물인 사실, 이론 등에 초점을 맞춘다2).

두 경우 모두에서 지식의 확산이 관건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한편 과학과 대중간의 관계가 탈구되는 것 ― 예를 들어 위험에 대한 전문가와 대중들의 평가가 서로 충돌하거나 특정한 과학이나 과학에 기초를 둔 기술에 대해 대중적인 반대운동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 은 지식의 확산이 불충분하거나 적절하지 못해서 발생한 결과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여러 연구자들이나 논평자들이 결핍모델의 약점들을 비판해왔다. 가장 소박한 약점은 결핍모델이 과학을 확실하고 분명한, 문제가 전혀없는 실체로 바라보는 즉, 과학에 대한 극도로 단순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여러 과학지식들 ― 특히 대중공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사회적인 연관이 많은 과학지식이거나 새로운 지식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이 편파적이며, 잠정적이고 때로는 매우 논쟁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든다.

두 번째 약점은 결핍모델이 대중들을 너무나 부정적으로, 즉 전문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경향이다. 이에 대해서는 비록 대중들이 과학을 알고 있다는 인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에서 대중들이 과학과 접하게 될 때에는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에 적실성이 있는 다수의 비공식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세 번째 약점으로는 결핍모델이 과학과 대중사이의 관계가 탈구되는 이유를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무지나 오해 때문이라고 미리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여러 요인들 ― 가치들의 충돌에서 비롯된 지식 주장들의 경합에서부터 상업적, 사회적,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 ― 이 이러한 탈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비판에서는 지식의 분포뿐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제도적, 정치적 요소같은 다른 맥락적 요인들이 과학과 대중 사이의 접점에서 어려움을 야기한다는 점을 들고있다3).

결핍모델형 PUSET을 극복할 수 있는 잘 정리된 단일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결핍모델 자체도 과학자나 과학커뮤니케이션 종사자의 저작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것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민주적 모델'이라는 대안에 대해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민주적 대안은 과학과 대중 사이의 관계를 다원민주주의의 용어로 이해해보려는(assimilate) 노력이다.

결핍모델은 과학자를 특권화하고 전문가로부터 일반인으로의 일방향적 의사소통을 강조하는 데에 비해, 민주적 모델은 과학자들과 비과학자들이 평등한 관계를 이루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의견충돌을 만족스럽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결핍모델이 다른 형태의 전문성보다 과학적 전문성을 우위에 두는 반면, 민주적 모델은 복수적 ― 종종 충돌하는 ― 전문성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으며, 건설적이고 개방된 대중적 논쟁을 통해 다양한 전문성들을 조정하려 한다. 또한 결핍모델은 공식적 지식을 과학과 대중 사이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지만 민주적 모델은 지식, 가치, 권력과 신뢰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들이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용한다.

민주적 모델의 PUSET가 과학기술발전의 중요한 부분집합으로 이해되면, 공공정책에 심대한 함의를 갖게 된다. 과학기술이 정책결정이라는 문제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전문가들의 지식은 정책과정에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전문가의 판단을 효율적으로 공공정책으로 번역해내기 위한 기제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데, 기술관료주의적 TA의 다양한 변종들이 가장 두드러진다.

반면, 민주적인 정책결정과정을 위한 기초로 지식에 기반한 대중적 논쟁을 촉진하기 위한 기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안으로 제기된다. 기술관료주의적 모델이 특정한 사회집단(기술전문가)이 '합리적' 정책을 만들어내는 데에 기여하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 비해 민주적 모델은 다양한 사회집단의 참여를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정책, 일반 대중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내기 위한 중요 요소로 간주한다.

PUSET의 민주적 모델과 참여적 TA 양자가 20세기 후반의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구조변동의 대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다음 장에서는 세계화의 맥락에서 이러한 변화의 본질을 탐구하겠다.

세계화와 민주주의

1999년 봄, 런던경제대학(LSE) 학장인 앤소니 기든스는 세계화에 대한 주제로 "질주하는 세계(Runaway World)"라는 이름의 BBC 라이쓰(Reith) 강의를 했다4). 기든스가 직접 런던, 델리, 홍콩, 워싱턴, 다시 런던을 순회하며 강의를 했고 이를 다시 방송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매 번의 강의가 방송된 후에는 웹에 올려져서 세계화에 대한 세계적 토론을 위한 기초로 이용되었다. 마지막 강의에서 기든스는 "민주주의의 역설"에 대해 논의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하는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하지만, 이미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그리 좋아하는 것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5)

"민주주의의 역설은 이것이다. 민주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모방하려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적 과정에 대한 환멸(disillusionment)은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서구의 국가들에서는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수준은 지난 수년 동안 감소해왔고 투표율은 점점 감소하고있다 ― 미국에서 특히. 점점 더 많은 대중들이 의회정치에 대해 관심을 잃고 있는 데, 이는 젊은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성]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시민들이 이렇게 민주정부에 대해 환멸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들의 의심

민주주의에 대한 기든스의 관찰은 과학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든스가 주장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20세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사상"이라면 과학도 그리 다르지 않다. 20세기 동안, 과학과 과학에 기반을 둔 기술들은 전 세계에 걸쳐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변혁시켜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과학도 고르게 분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많은 과학을[민주주의를] 가졌다. 기든스가 말한 민주주의의 역설은 과학에도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적 수준이 높지 않은 국가는 더 많은 과학을 원하지만, 과학적 수준이 매우 높은 국가에서는 오히려 의심과 종종 환멸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든스에 따르면,

"서구의 여러 국가들에서 실시한 과학공동체[정부]에 대한 신뢰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 얻어졌다. 대중들은 과학자[정치인]들과 전통적인 과학정책결정과정[민주적 절차]에 대해 보였주었던 높은 수준의 신뢰를 버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과학 그 자체[민주적 과정]에 대한 신념까지 버리고 있지는 않다. 미국과 서유럽 주요국에서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인구의 90% 이상이 과학적 방법[민주정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이 가정하는 것과 달리, 대중들 대다수가 과학[정치] 그 자체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니라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대중들은 과거보다 더 많이 과학[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과학에 관련된 단어들 ― 고딕으로 표시된 ― 은 기든스가 민주주의에 대해 쓴 단어 ― 사각괄호안에 있는 ― 와 바꾸어 넣어본 것이다. 물론 기든스가 처음 말했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최근에 대중들이 과학과 과학자에 대해 보이고 있는 태도 변화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는 점은 흥미롭다. 서구 사회에서 두 세대 전까지 과학자들은 권위있는 인물로 존경받았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복잡한 기술적 사안에 대한 공식적인 판결을 내리는 '흰 옷을 입은 남성'이었다. 대체로 대중들은 전문가들의 판단을 따르는 데에 불만을 갖지 않았고 매우 만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이 매우 달라졌다. 산업화된 국가들에서는 과학자와 과학제도에 대한 신뢰가 감소하고 있다. 흰 옷을 입은 남녀들이 여전히 여러 종류의 복잡한 기술적 사안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이들 간에도 불일치가 존재하며 전문가적 시각에 대해 도전하는 비과학자들도 있다.

이제는 에너지 문제, 환경문제, 유전자조작식품, 유전자복제 등 기타 대중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과학전문가들의 동의가 있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는 충분조건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는 대중들이 점점 단지 전문가의 판단이라고 해서 수용하기만 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대중들이 여러가지 형태의 전문성 사이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갖기를 원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최근 몇 년동안 새로운 유전자조작 기술에 대한 유럽에서의 논쟁은 이러한 대중들의 의심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수 년에 걸쳐 대다수의 유럽인들은 이 기술이 약속했던 편익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특히 이 기술이 농업이나 가축에 적용되는 경우에는 더욱 의심쩍어했다(Gaskell et al., 1997; Durant et al, 1998; Gaskell et al, 1999). 국가수준 또는 유럽수준에서 시행했던 일련의 규제정책은 유전자조작식품에 대한 전문가들의 거듭 신뢰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두려움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영국에서는 1999년 초, 대중들의 거부가 매우 강력해지자 산업계와 정부는 유전자조작식품을 영국 시장에 조기에 도입하려는 정책을 당분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의 과학적 판단에 대해 대중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됨에 따라 여러 과학자들은 노골적인 반과학에 직면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표명했다6). 그러나 이는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을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否定)의 징후로 간주하는 것과 동일하다. 기든스가 지적한 것처럼, 정치지도자들을 불신하는 바로 그 대중들이 민주주의적 이상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신뢰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과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고양된 반과학을 옹호하는 고립된 집단 ― 서양이나 동양의 근본주의자들에서 발견되는 ― 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근대의 특정한 과학적 판단에 반대하는 대중들은 대안과학이나 준(quasi)-과학이라는 이름으로 ― 반과학적 세계관이 아니라 ―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유전자조작기술에 대한 논쟁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업분야에 유전자 관련 기술을 적용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 유럽인들의 대부분은 의학의 여러 분야 ― 유전자 테스트, 신약이나 백신 개발 등에서 ― 에서는 동일한 유전자 관련 기술이 적용되는 것에 지지를 표명하기도 한다.

게다가 농업에 유전자 관련 기술을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논의 ― 유전자조작식품이 생물다양성이나 인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 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과학적이기도 하다. 특정 유전자 관련 기술에 대한 하는 전세계의 NGO들은 다양한 방식, 다양한 수준의 과학적 기초에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의심의 이유

반과학이 아니라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지금, 왜 과학적 전문성에 대한 대중들의 의심이 증가하는가? 몇가지 명백한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20세기 동안 상당한 정도의 좋고 나쁜 과학기술발전을 경험했다. 20세기는 항생물질과 원자폭탄의 세기이기도 했고, 개복(開腹)수술과 체르노빌의 세기이기도 했으며, DNA와 다이옥신의 세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20세기가 끝나가는 이 때, 대중들에게 과학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 순수하게 축복만 보내도록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신뢰를 주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과학기술이 가차없이 팽창하고 세계 여러 곳에서의 생활수준이 급속하게 향상됨에 따라 종종 미처 예견하지 못하고, 원인도 불명확하고 제대로 정의되지 못한 '위험들'이 지구환경이나 인류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위험들은 과학이 전 사회를 대상으로 통제불능의 실험을 시행한 것과도 같았다. 따라서 독일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1992)은 이러한 후기산업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셋째, 과학기술이 세계의 일부에는 막대한 이익을 주기도 했지만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20세기 내내 커져만 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는 과학-기술적 '부자(haves)'와 '빈자(have-nots)' 사이의 간극이 되어갔다. 이 격차는 과학이 인간의 [생활]조건을 개선할 수있을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요소들도 중요하지만 과학적 전문성에 대한 대중들의 의심이 커져가는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이는 민주주의 정치학과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을 증가시키는 원인과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는데, 기든스는 세계화라는 과정, 특히 전통의 잠식과 전지구적 의사소통의 성장을 민주주의의 역설의 핵심원인으로 삼고 있다. 기든스는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으로 인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보다 활동적이고, 성찰적인 시민성이 형성되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성의 영향으로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에게 말하는 것에 대해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기를 거부하는 추세가 증가하고 있다. 아버지 세대나 할아버지 세대와 비교할 때 현대의 시민들은 자신의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책임을 갖고 있는 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바로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책임을 갖고 있는 지에 대해 [과거보다]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과학에 대한 정보에 접근이 용이해졌다는 점과, 과학과 과학적 사안에 대한 이해가 증가했다는 사실이 과학적 전문성에 대한 대중들의 의심이 증가하고 있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생활의 다른 경우에서처럼 과학적 사안에 대해 경멸을 할 수 있는 것은 [대중들이 과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숙하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약?

어떤 과학자들은 기든스의 결론을 과학과 대중의 문제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약이라며, 자신들이 보다 겸손해져야 하고 대중들과 의사소통을 하기를 멈추는 핑계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전략적 오류이다. 우선 정보사회의 지니[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오는 램프의 요정의 이름 ― 역주]가 이미 병 밖으로 나왔다는 점이다. 세계화된 근대 세계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아무도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판단에 대해 문제제기하지 않는, 조용하고, 의사소통이 없고, 공손한 사회로 되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정보사회에서는,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기를 꺼리는 과학자는 결백하다기 보다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평을 받기 십상이다. 위험한 의사소통과 안전한 침묵의 선택이 아니라 안전한, 공개적이고 정직한 대화와 위험한, 구식의 '대중과의 관계' 사이의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과학과 대중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단순한 바램을 갖는 것이 그리 실용적이지 않다는 또다른 논리도 가능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출직 정치인들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하려는 태도가 전적으로 건전한 일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분야의 전문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문제제기를 하려는 태도 역시 건전한 일이다.

도덕적·정치적 견지에서, 과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자신의 작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요구를 하는 경향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개탄해야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과학자들이 대중들 앞에서 다른 경쟁적 주장에 대해 자신들의 지식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전받지 않기를 원해야 하는 어떠한 도덕적, 정치적 이유도 없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유명한 말처럼, 아는 것은 힘이다. 오늘날의 막대한 힘인 막대한 과학적 지식이 민주적인 힘을 얻기만 하면 대중들의 진지하고 신중한 탐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필수적이기도 하다.

이제 PUSET의 민주적 모델이 행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자와 비과학자들 사이의 평등이라는 이상(理想), 정보를 가진 대중들의 논쟁이자 사회적으로 지속가능한 공공정책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이상은 심의민주주의의 새로운 과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에 비춰볼 때, 과학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 대중들의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특히, 과학과 대중매체는 종종 극도로 불편한 관계를 갖는 경우도 있다. 과학적 연구의 시간지평때문에, 뉴스 미디어가 요구하는 짧은, 압축된 시간지평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 과학연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복잡성과 불확실성은 언론이 [과학연구에] 부여하는 슬로건과 스테레오타입에 항상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영국 생명공학자들과 생명공학 정책결정자들은 최근 몇 년동안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이를 배웠지만 여러 과학기술적 쟁점들이 치뤄야할 논쟁에도 도움이 되는 공론영역을 창출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이런 영역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열기가 계속되고 언론의 경영자들이 대중적 의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일 때에는 공론영역이 쉬이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과학(public science)의 민주화를 위하여

현재 작동중인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이 매력을 잃어가는 데에 대해 기든스가 제시하는 대안은 민주주의의 포기가 아니라 강화다. 기든스는 이를 "민주주의의 민주화" ― 의도적인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표현인 ― 라고 부른다. 기든스는 민주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구체적 협력관계를 포용할 수 있도록 확대되고 지역적, 지방적, 국가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적 절차와 시민들 사이의 새로운 참여방식을 포함하도록 심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과학에 대해 비유를 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과 과학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과학을 대중들로부터 고립·절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대중참여와 대중적논의의 장으로 개방함으로써 극복되어야 한다. 이러한 개방은 지역적, 지방적 수준을 넘어서 국가적, 국제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과학은 전인류의 행위 중에서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진 분야이게 때문이다.

이미 세계 여러 곳에서는 이러한 실천이 실행되고 있다는 증거도 있다. 최근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전통적인 분야 ― 강의, 출판, 방송, 과학축제 등등 ― 에서의 여러가지 반가운 시도들도 있었고 시민과 과학자 사이, 그리고 시민들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를 이루겠다는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실험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런 실험의 사례로는 시민배심원제도(citizen's juries), 심의적 여론조사(deliberative opinion polls), 합의회의 등이 있다. 이들 실험들은 다양한 시민들이 모여 진지한 심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결과물이 정책결정과정에 되먹임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대중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이러한 세 가지 기제 중에서 특별히 과학기술에 관련된 정책사안을 다루기 위해 설계된 형태는 합의회의이다. 합의회의는 덴마크의회와 덴마크 기술위원회가 처음 시작했고 가장 많이 연구되고 이용된 것도 역시 덴마크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래, 덴마크에서는 합의회의를 자국의 논쟁과 의사결정에 이용하기 위해 설계했지만 점차 다른 나라들에서도 합의회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1994년에는 영국에서 식물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최초의 합의회의가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의 주최로 열리기도 했다.

1999년 5월, 영국에서는 방사성폐기물의 관리를 위한 장기 방안을 위한 합의회의가 개최되었다. 식물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격렬한 대중논쟁이 있는 와중에 이러한 주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1999년 합의회의의 시민패널들이 의견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5년 전 식물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합의회의에서 발표된 시민패널 보고서의 권고사항에 대해 관심을 가졌더라면 유전자조작식품을 둘러싼 현재 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쟁은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UK CEED, 1999).

영국 합의회의에서 이미 지적했던 주의사항을 채택하면 PUSET의 맥락 내로 참여적 TA의 모델이 포함된 것을 포함시켜 다시 틀을 짠 것이다. 영어권 국가들에서의 PUSET전통이 가진 본질에 비춰보면 이런 해석은 항상 어느 정도의 모호함을 포함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식물 생명공학기술에 대해 시민패널에게 자문을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대중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일 뿐인가, 아니면 대중들을 과학기술적 정책결정과정에 보다 긴밀하게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설계된 급진적 실험인가?

영국 최초의 합의회의는 PUSET의 민주적 모델로 이해되고 조직되었지만 결핍모델이 지배적인 문화적 맥락에서 전달되어 수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직당국의 목표는 부분적으로만 달성되었다. 시민패널은 독립적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국가적 수준의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정책결정과정으로는 통합되지는 못했다(Science Museum, 1994; Joss, 1998).

방사성 폐기물 관리 장기방안에 대한 제2회 영국 합의회의가 처하고 있는 상황은 1회 때와는 매우 상이하다. 1회와 2회 사이의 5년 동안, 영국에서는 결핍모델에 대한 지지가 감소했고 PUSET의 민주적 모델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제2회 합의회의에 대해서는 영국 정부의 지원도 있었고 시민패널의 보고서가 방사성 폐기물 관리에 대한 대중논쟁에 통합될 것이라는 전망도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는 매우 민감하고 어려운 공공정책에서 PUSET의 민주적 모델을 적용하려는 전망을 가진 의미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실험이 성공을 거두면 '대중들의 과학이해'는 과학과 사회 사이의 접점에서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기회를 포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게 되는 셈이다.


참고문헌

U. Beck(1992), Risk Society: Towards a New Modernity(Sage, London); 국역 홍성태역,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새물결)

H. Collins and T. Pinch(1993), The Golem. What Everyone Should Know About Science(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J. Durant(1990), "Copernicus and Conan Doyle, or why should we care about the public understading of science", Science and Public Affairs, 5(1), pages 7-22.

J. Durant, M.W.Bauer and G.Gaskell (editors) (1998), Biotechnology in the Public Sphere: a European Sourcebook(Science Museum, London).

J. Durant et al (in press), "Two cultures of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Europe" in M. Dierkes and C. von Grote (editors), Between Understanding and Trust(Harwood Academic Publishers).

G. Gaskell et al(1997), "Europe ambivalent on biotechnology", Nature, 387, pages 845-847.

G. Gaskell et al(1999), "Worlds apart? The reception of genetically modified foods in Europe and the US", Science, 285, pages 384-387.

G. Holton(1993), Science and Anti-Science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MA).

A. Irwin and B. Wynne (editors) (1996), Misunderstanding Science? The Public Reconstruc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S. Joss(1998), The Role of Participation in Institutionalized Technology Assessment: A Case Study of Consensus Conferences, PhD. thesis, University of London.

B. Lewenstein(1992), "The meaning of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in the United States after World War II",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1, pages 45-68.

Royal Society of London(1985),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Royal Society, London).

B. Schiele(editor) (1994), When Science Becomes Culture: World Survey of Scientific Culture (University of Ottawa Press, Montreal).

Science Museum(1994), UK National Consensus Conference on Plant Biotechnology Final Report(Science Museum, London).

UK CEED(UK Centre for Economic and Environmental Development) (1999), UK National Consensus Conference o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Final Report(UKCEED, Cambridge).

J. Ziman(1991),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Science, Technology, and Human Values, 16, pages 99-105.

후주
* John Durant, Participatory technology assessment and the democratic model of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Science and Public Policy, volume 26, number 5, October 1999, pp.313-319. 본 논문은 1999년 6월 28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과학회의에서 기조연설원고였던 [대중들이 지각하는 과학: 수용과 거부 사이(Public perception of Science: Between acception and rejection)]을 토대로 한 것이다.

** 존 듀란트는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의 '대중의 과학이해' 교수이며 과학박물관의 과학커뮤니케이션 책임자를 맡고있다. 그는 과학박물관에서 현대의 과학기술을 위한 새로운 전시관으로 2000년 6월 개관예정인 웰컴전시관(the Wellcome Wing)의 건립 책임을 맡고있다. 듀란트는 생명과학의 역사, 과학과 인간적 가치의 관계, 대중의 과학이해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아울러 1년에 4회 발간되는 국제학술지인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의 설립했고 현재까지 편집자를 맡고 있다. 정기적으로 대중적 지면에 글을 발표하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과학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한다. 또한 여러 연구프로젝트의 책임자이며 현재에는 유럽공동체가 지원하는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유럽에서의 논쟁 : 대중적 우려의 차원"에 대한 국제적 연구프로젝트의 조정위원으로 있다.

1) "초기 전망"은 다음과 같다.

"대중의 과학이해를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 ― 본더 경과 윌킨스(Sir W. Bonder and J. Wilkins)

"대중화된 과학커뮤니케이션학자들을 위한 도전: 우리 자신을 설명하기" ― 던우디(S. Dunwoody)

"갈릴레오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기를 멈추자" ― 페이야드(P. Fayard)

"오해에 대한 오해에 관해" ― 페이야드(P. Fayard)

"대중들의 과학기술이해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위해" ― 밀러(J. D. Miller)

"왜 대중들은 형성중인 과학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 샤피로(S. Shapiro)

"과학센터에서의 대중들의 이해" ― 바겐버그(J. Wagenberg)

"과학연구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 새로운 지평 또는 거울로된 강당!" ― 윈(B. Wynne)

2) Collins and Pinch(1993)을 보라.

3) 비판적 시각을 담은 논문들은 Irwin and Wynne(1996)이 있다.

4) 이 강의록은 {질주하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서평은 {창작과비평} 109호(2000년 가을호)에 김주환(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것이 있다.

5) 기든스의 라이쓰 전체 강의록은 http://news.bbc.co.uk/hi/english/static/events/reith_99/default.htm에서 구할 수 있다.

6) Holton(1993)이 대표적이다.

존 듀란트**
2000/09/15 00:00 2000/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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