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오은정|우리모임 회원,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석사과정

<편집자주> 최근 《시민과학》의 편집을 맡았고 현재 우리 모임 운영위원인 김명진 회원이 {위기의 현대과학}(잉걸, 2001)과 함께 발표한 {대중과 과학기술}(잉걸, 2001)은 얼마전에 번역된 {두얼굴의 과학}(지호, 2001)와 더불어 아직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대중의 과학이해(PUS,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은 일단 대중의 과학이해에 대한 대강의 논의 ― '결핍'모델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 를 알고 있는 독자에게 더욱 흥미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 필자인 데이비드 딕슨은 현재의 대중의 과학이해가 조금더 나아가야 한다는, 다시 말해 대중들의 '권한부여(empowerment)'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혹시, 관심있는 독자라면 《시민과학》 1, 2호에 실린 브라이언 마틴의 [과학비판, 아카데미즘에 빠지다]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올해 초, 영국 상원과학기술위원회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보고서의 첫 단락은 왜 이런 보고서가 필요한 이유를 서술하고 있습니다1). 거기에서는 '사회와 과학이 맺고 있는 관계가 매우 중요한 국면에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은 흥미진진하고 기회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광우병으로 인하여 정부의 과학적 조언은 대중들의 신뢰를 잃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비록 일상적으로 하고싶어하는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과학과 기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공학과 정보기술과 같은 분야의 급속한 성장에 대해서는 우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뢰의 위기는 영국 사회와 과학 양자 모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두 가지 측면이 특별히 두드러지는데, 첫째는 이 자리에 오신 분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보고서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이란게 사실 그리 새로운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적 진보가 항상 ― 그리고 대게는 아주 본격적으로 ― 대중적 우려와 같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70년대 초반, 쓰리마일(Three Mile) 섬이나 보팔에서의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그 때는 그와 같은 정서를 일으키는 문제가 다이옥신과 PCB가 일으키는 화학적 환경오염에서부터 핵의 안전성과 베트남에서의 고엽제 사용에 대한 대중적 우려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그보다 조금 이전 세대에서도 핵무기의 제조와 디자인에서 과학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중심적 과제였습니다. 그리곤 계몽주의시대로 돌아갔습니다.

각각의 논쟁에서의 쟁점은 각 문제가 놓여있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의를 끄는 중요한 핵심 ― 과학적 진보의 양날적 면모 ― 은 너무나도 같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핵심 질문은 왜 과학과 사회간에 긴장의 존재여부가 아니라 왜 정부와 정치가들은 그들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조정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느끼는가입니다.

아마도 그 해답은 이 보고서에서 두드러진, 두 번째 측면에 깔려있을 것입니다. 즉 여기에서의 분석이 이런 논쟁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다루기를 꺼려하는 것은 바로 '정치권력'에 대한 것이라는 겁니다. 상원보고서는 현재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인식과 이해의 부족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중들이 과학적 진보가 본질적으로 이익이라는 인식이 부족하다거나 ― 그것은 대중매체에서 과학관련 쟁점보도에 책임을 돌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혹은 과학자나 정치가들 모두 대중들의 우려가 갖고 있는 속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하는 식이지요.

위원회의 처방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모든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좀더 큰 대화의 장이나 의사결정 과정을 좀더 개방하는 것을 장려하도록 하는 새로운 일련의 노력들을 권장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요구들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개방과 대화의 결합이 현대의 첨단 기술사회가 요구하는 과학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보장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두가지 모두 훌륭한 목표입니다. 특히 첫 번째는 워싱턴에서 '정보자유법'으로 인해 창출된 가능성들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일해온 저널리스트인 저로서는 특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이 충분히 실현가능한가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치적인 요소가 과학이 사회에서 이용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 사실은 거의 결정하고 있는 ― 데에 대해 좀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의사결정에서 개인이 배제되는 것에서 비롯되는 불신이 빚어내는 긴장을 해소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인 패널들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중요하게 빠져있는 것은 단 하나, 즉 일찍이 영국 정치인들에게 익숙한 구절이 요약하고 있는 바, '아는 것이 힘이다'이라는 것입니다2).

예를 들어, 소위 '광우병'이라고 알려진 BSE(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의 사례를 살펴봅시다. 제 가 연설의 모두(冒頭)에 인용한 상원의 보고서 진술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1990년대 초에 정부의 과학자문위원들이 소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우리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그들을 불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말은 소고기 관련 산업이 농업·식품·수산업 부처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있는 대중의 (올바른) 인식을 자주 무시합니다. 그것은 과학자 사회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과도한 비밀스러움이나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아닙니다3).

혹은 유전자 조작식품 문제를 예로 들어봅시다. 여기에서 주요한 쟁점은 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지금까지 유전자조작식품을 소비하는 것이 유해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증거가 거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위험이 존재할지라도 말입니다 ― 과학이 응용되고 있는 그 방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는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유전자변형식품 문제를 둘러싸고 가장 첨예한 갈등은 가공식품에 유전자변형 콩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의사결정에서 소비자가 배제되는 것 혹은 제3세계 농부들이 다음해에 사용할 종자를 보관에 대한 것이나, 어떤 종자를 재배해야 하는 지를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문제였습니다. 몬산토는 한 세대 전에 다우케미컬사가 베트남에서 사용될 고엽제를 생산할 때 그러했듯이, 동일한 방식으로 초국적기업의 권력과 세계화에 대한 당대의 불신이 집중되는 피뢰침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마도 현재 초국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과학에 대한 불신에서 가장 비극적인 조짐은 현재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HIV가 AIDS의 원인인지에 대한 논쟁에 깔려있는 것일 겁니다. 므베키(Mbeki)대통령이 생의학, 연구공동체로부터 최고의 자문을 받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이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 것은 ― 그리고 저도 그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을 아주 신중하게 사용합니다만 ― 그가 과학적 쟁점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과는 거의 아무 상관이 없으며, 제가 앞으로 주장하게 되겠지만, 소위 'AIDS 반대자' ― 에이즈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영향도 아닙니다. 그것은 상당부분 남아프리카에서 외국계 제약회사들의 활동에 대한 앞선 반대지도자들이 오랫동안 유지했던 뿌리깊은 불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와 같은 불신은 신약 ― AIDS치료에 사용되는 것을 포함해서 ― 의 기초가 되는 과학적 성과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그들 회사가 소유하는 것 때문에, 개발도상국에서 그 약의 가격은 주주들을 만족시킬만한 수준에서 고안될 뿐, 이 나라들의 지불 능력을 고려해서 결정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굳이 현대과학과 기업권력이 맺고 있는 그 관계의 복잡함을 따로 상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분명한 수준에서, 현재 경제성장의 국면에서 최선봉에 있는 첨단기술산업이 의료과학기반의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그 과학기반 ― 특히 생의학과 유전공학과 같은 분야들을 포함하는 ― 은 좀더 확장된 경제의 상태(건강)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제상태를 유지하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현대 정치의 핵심이며 정당성을 부여하는 목표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히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성장 전략을 채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원의 보고서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의 강력한 주제는 과학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경제적 ―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 비용을 수반할 것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정부와 산업계 모두가 그러한 상황을 개선할 책임이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고서가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 좀더 많은 개방과 대화를 제안할 때, 그것의 주요 목표는 이러한 정당성 ― '과학에 대한 신뢰'가 현대의 첨단기술 민주주의에 핵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 을 증진하고 보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과학에 대한 어떤 비판일지라도 그것 자체가 과학적 진보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진보를 이끌 것이라는 패러다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보고서의 한 단락에서는 대중 일각에서 '잘 알려졌든지 잘못 인식했든지' 저항하는 것은 '자칫 기술적 진보를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명백하게는 유전자변형식품, 치료상의 복제, 방사능에 노출된 식품, 바다인근시설들의 심해 폐기물 투기사건들을 언급하면서 말입니다4). 그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만약 당신들이 과학의 성과로부터 혜택을 받기를 원한다면, 이 성과가 실행되는 그 방식에 저항하는 것을 멈춰라'는 것입니다. 좀더 여실히 묘사하자면, 그러한 저항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사람들은 대중적이고 단일한 '반과학' 운동 ― 대개 그들 자신은 그러한 광범위한 목표를 부정하는데 ― 으로 싸잡아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유익한 상황이 아닙니다. 더구나 생산적이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대화를 하고자 했던 양측이 서로 다른 의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장기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서로 다른 규칙에 따라 게임을 진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대화는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 혹은, 그것은 현대의 경제학자들의 언어로 번역해 본다면, 우리가 지식자본에 접근하고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과거에 금융자본이나 천연자원에 접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해진 세계화된 지식경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5) ― , 근본적인 갈등은 그러한 지식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혹은 그러한 갈등이 그 자체로 과학과 사회간의 문제를 일으키는 관계에서 중심적인, 친숙한 논쟁을 표명하고 있다는 것도 놀랄만한 것이 아니지요.

이 모든 사실은 새로운 유형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생산적인 비판과 정치적 도전을 대중의 '이해'부족 ― 혹은 좀더 일반적인 문화적인 퇴행으로까지 ― 으로 무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논쟁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하고, 생산적인 비판과 정치적 도전을 위한 장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요청되는 대화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집니다. 하나는 과학으로 인해 가능해진 긍정적인 사회적 성과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야합니다. 우리는 현대 과학의 산물의 일부를 반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계신 어떤 분도 ― 그리고 그들의 비판을 소위 '반과학' 운동으로 치부 당하는 그런 사람들까지도 ― 현대과학의 부정적인 결과가 그것이 인류의 건강과 윤택함에 대량 기여한 바에 비해 더한 무게를 가진다는 생각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과학의 응용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비판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건전하고, 사실은 매우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도 받아들일 수 있는 대화를 필요로 합니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정치지도자에 대한 대중들의 비판을 억압하려고 하거나, 정치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재건하기 위해 대중들이 정치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정부가 후원한다고 해서 문제삼지는 않습니다. 뭐 과학이라고 그렇게 다를까요? 대중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은 때때로 연구공동체들의 에토스에 반대하는 ― 치료목적 복제나 연구에서 동물사용을 반대하는 캠페인과 같은 ― 주의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그와 같은 쟁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을 통해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종종 과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종 많은 과학자들이 그들이 지역적이든, 국가적이든, 국제적인 수준에서든 '합리적인 담화'의 이름으로 지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논쟁을 억압하려해서는 안 됩니다.

미디어가 중요한 기능을 갖는 것이 바로 여기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 일부의 사람들이 '과학의 대중적 이해' 논쟁에서 미디어에 돌려지는 옹색한 역할 ― 마치 그와 같은 '합리적인 담화'를 과학적 공동체에서 대중에게로 전달할 수 있는 수도관처럼 보는 것 말입니다 ― 의 단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거의 정부 프로그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과학 공동체와 기업부문들이 열렬하게 장려하는 기능이죠. 브라이언 윈(Brian Wynne)과 다른 여러 사람들이 대중이해의 '결핍'모형에 대한 비판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그들은 과학적 발견을 정확하게 보고해주는 '최고위급 인사'일 뿐이며, 그렇게 되면 대중적 불신의 많은 부분은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6). 그것은 정확하지 못한 과학보도의 내용을 심사하는 공식적 항의절차(official complaints procedure)를 마련한 상원 보고서의 결론의 연장선에 있습니다7).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벌금을 물게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최근 들어, 이와 같은 '결핍' 모델은 좀더 '대화'적 접근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점차 바뀌는 추세에 있습니다. '대화' 모델에서 과학자들은 단지 그들의 견해를 미디어를 통해 수동적인 청취자에게 전달해왔던 권리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대중들의 우려를 듣고, 대답해야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우려가 표현되는 방식의 언어로 말해야 할 필요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 결과의 중요성을 보도함에 있어서 좀더 광범한 다원주의를 고취해왔던 과학 저널리스트들에게도 좀더 포괄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이와 같은 역할이 과학을 둘러싼 합리적인 담화를 만들어내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을 내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8).

그렇지만 이와 같은 두 가지 접근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권한부여(empowerment)'의 측면인데, 여기에 따르면 효과적인 과학저널리즘은 [평범한] 개인들이 과학의 개발과 응용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과학에 대한 대중들의 지식의 결핍을 보충하자는 것에 대한 것이라거나 혹은 과학의 잠재적인 영향을 둘러싼 대중적 대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이 과학지식이 생산되고 응용되는 방식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서 이런 두 과정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진 결정을 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이런 결정에 공식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 프로젝트에 친숙하다는 식의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 예상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요 ― 과학 저널리즘에 대한 그와 같은 접근은 그다지 호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마도 '대중들의 과학이해' 운동이 작동하고 있는 그 '시대정신'에 반하기 때문이겠지요. '과학팔기'에 헌신하는 문화에서, 이런 표현의 온전한 의미로, 선물을 흠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지를 잃게 되겠죠.MIT의 《테크놀로지 리뷰 Technology Review》같은 잡지들의 표지를 보십시오. 이전에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건전한 냉소주의의 성채였던 그 잡지는, 오늘날 첨단 기술이라는 시류에 편승하고 말았습니다. 《뉴사이언티스트 New Scientist》같은 잡지는 과학 문화의 지배적인 흐름에 통합되려는 열망으로 너무도 자주 과학에 대한 급진적 비판들을 가려버리곤 합니다. 좀더 통상적으로는 《런던타임즈 London Times》조차 그들의 노련하고 훌륭한 과학관련 기고가들을 건강관련 부서로 보내고, 영국 정부가 최근에 걱정하고 있는 기사 ―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위험이 있다는 ― 를 길게 보도할 수 있는 젊은 신입사원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편으로는 과학과 대중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대화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 그리고 의사 결정자들의 일부로도 개방하는 형식을 장려하기도 하며 ― 과학이 개발되고 응용되는 그 절차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리는 '침묵하게 하는(duming down)' 과정이 있습니다. 사실, 과학에 대한 합리적인 담론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의 진흥이 합리성의 정치적 기반을 차단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저는 대중의 과학이해 운동이 불투명성을 늘릴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선택의 자유는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인터넷의 가장 큰 매력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적은 기술기반과 생산비용으로 중앙 통제로부터의 독립 가능성을 좀더 크게 하는 것이겠지요. 여기에서 제가 간략한 광고를 좀 하도록 허락하신다면, 제가 현재 제3세계의 발전과정에서 과학의 적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싶습니다9). 우리는 그것을 '사회 속의 과학 세계뉴스(Global News on Science in Society)' 혹은 줄여서 GNOSIS라고 부르려고 했었습니다만, 도메인 네임이 이미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죠. 우리가 결국 갖게된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아마도 그 웹사이트 자체는,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같이 공헌하게 될 하나의 목표 즉, 진정한 절차는 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정밀한 고찰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합의를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미주
1) Select Committee on Science and Society, House of Lords, Session 1999-2000, 3rd report, Science and Society(London: HMSO, HL Paper 38, February 2000).

2) Francis Bacon, Mediationes Sacrae (1597), 'Of Heresies'.

3) 이 연설을 한 이후에 필립스 상원의원의 BSE위기에 대한 공개조사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Nature, Vol. 408(2 November 2000), 1, pp.3-5.

4) Science and Society, op.cit. note 1, 12, paragraph 1. 11.

5) David Dickson, The New Politics of Science(New York: Pantheon, 1984; chicago, I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6) 브라이언 윈은 1988년 랭카스터대학의 SPSG워크샵에서 발표한 [지식, 이해관계, 효용(Knowledge, Interest, and Utility)]라는 세미나 원고에서 이 모델을 처음 소개했습니다. 이 모델에 대한 최초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John Ziman,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and B. Wynne, 'Knowledges in Context,' Science, Technology & Human Values, and B. Wynne (eds), Misunderstanding Science? The Public Reconstruc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7) Science and Society, op. cit. note 1, 57, paragraph 7.31.

8) 나는 여기에서 어제(2000. 9. 26) 영국 수상인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했던 연설을 연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영인의 어법을 따르고 있으면서 기업문화에 친숙해 보였다. 그의 '나는 당신이 말한 것을 듣고 있습니다'라는 말 아래에는 '그리고 나는 그것을 무시하려고 합니다'가 깔려있었다. Financial Times (2000. 9. 27) 4p.

9) http://www.scidev.net
데이비드 딕슨**
2001/08/15 00:00 200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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