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응급피임약 '노레보'의 수입 허용 여부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프랑스에서 개발된 이 약은 성관계를 맺은 여성이 72시간 안에 한 알을 먹고 다시 12-24시간 안에 한 알을 더 먹으면 임신을 98%까지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란을 억제하는 기존의 사전피임약과는 달리 이 약은 수정란의 자궁 착상을 억제하여 임신을 막는다는 것이다. 이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수술의 공포에서 여성을 벗어나게 해주는 좋은 수단으로 보는 반면,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것이 또 다른 형태의 낙태일 뿐 아니라 현재의 성 문란 풍조를 더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은 종교계와 반낙태운동단체인데, 이들은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는 순간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에 수정란의 착상을 막는 것은 곧 이러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며 따라서 노레보는 결코 피임약이 아닌 '조기 낙태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같은 반대측이지만 의료계에서는 임신이 수정단계가 아닌 수정후 5-7일 후의 자궁 착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노레보가 낙태 곧 임신중절을 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와 같이 노레보를 둘러싼 논쟁은 단지 기술의 이용 여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아니라, 수정란을 생명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 하는 심오한 윤리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최근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생명윤리자문위원회에서도 인간배아연구에 대한 허용한계를 논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뜨거운 논란을 벌인 바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지난 1978년 시험관아기의 첫 탄생 이후 인간배아 곧 수정란에 대한 연구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은 사회적 논의를 오랫동안 거쳐 그 결과를 법으로 제정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최근 인간배아에서 우리 몸의 210여 가지 세포로 분화될 수 있는 '줄기세포'를 분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다시 한번 전세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줄기세포는 당뇨병, 치매, 파킨슨씨병 등에 대해 획기적인 치료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결국 인간배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배아에 대해서는 종교계처럼 그것을 수정단계부터 인간으로 보는 입장과 일부 과학계처럼 그것을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간주하는 입장 두 가지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간배아연구에 대한 법제정의 바탕을 이룬 관점은 이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이 아니라, 수정란을 앞으로 인간이 될 잠재력을 지닌 '잠재적 인간존재'로 보는 제3의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수정란은 생명체에 포함되나 살아 있는 인간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고는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배아연구나 사후피임약처럼 수정란을 파괴하는 것은 그것이 살아 있는 인간들에게 주는 혜택이 크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노레보가 많은 여성들에게 원치 않는 임신과 낙태수술로 인해 받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란은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생명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노레보를 언제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피임수단으로 무절제하게 남용한다면, 수정란의 생명권 파괴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굴레씌워진 피임과 낙태의 책임도 더욱 강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김환석 |우리모임 대표·국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2001/08/15 00:00 2001/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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