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성찬과 검찰국가의 비극
①특별검사제 도입, 검찰인사 및 예산 등을 다룰 검찰위원회 설치(1997년 대선 공약)

②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여러분에게 권력을 위해 일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1998.4.9 법무부 업무보고에서)

③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어떠한 권력자라도 검찰 앞에서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1998.4.13 전국 검사장 초청 오찬)

④판·검사가 부패하면 나라가 끝장난다. 장관직을 걸고라도 법조비리를 엄단하라(1999.1.13 대전법조비리 관련 박상천 법무장관에게 지시)

⑤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검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0.1.18 검찰간부와의 청와대 오찬)

⑥국민의 정부는 검찰의 독립과 중립을 철저히 보장하고 있습니다.(2000년 법무부 업무보고)



어제 발행된 개혁통신 121호를 보셨다면 이미 위 글들이 바로 김대통령께서 하신 말씀들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스스로 약속하셨고, 스스로 지시하셨고, 스스로 다짐하셨던 그런 말씀들이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조용히 되돌아보실 기회가 되셨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검찰의 부당한 수사와 사찰로 엄청난 핍박과 탄압을 받았던 김대통령께서 특별검사제 도입 공약은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그것은 온 국민이 바라는 것이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집권하는 순간 그 약속은 배반당하고 말았습니다. 막강한 검찰권은 전리품이 된 것이지요.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너무 좋은 말씀이십니다. 저도 꼭 같은 생각입니다.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온 국민이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한강상류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의정부지청장과 춘천지검장이 "내 임기동안 한강물에 단 한 방울의 오염원이라도 떨어뜨리는 놈은 최고의 법정형을 구형하고 끝까지 공소유지해서 법을 집행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저는 한강이 하루아침에 훨씬 맑아지리라고 확신해 왔습니다.

말하자면 최고의 환경운동은 검찰이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어디 환경뿐이겠습니까. 검찰이 기업, 특히 재벌의 비리를 제대로 엄벌했다면 오늘날 우리 경제가 이렇게 정경유착, 탈세만연, 변칙증여, 허위·이중장부 등으로 얼룩진 몰골이 되었겠습니까. 검찰이 바로 섰다면 오늘 세계 42위의 부패지수, 넘쳐나는 '리스트', 끝없이 양산되는 의혹과 비리, 허탈감과 좌절감에 휩싸인 국민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겠지요.

이른바 '이용호게이트'로 불리는 이 스캔들로 말미암아 검찰은 날개도 없이 끝모를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제 '뼈를 깎는 아픔'을 말할 체면조차 검찰에 남아 있지 못합니다. 그것을 곧이들을 국민도 이제 없습니다. "판검사가 부패하면 나라가 끝장난다"고 대통령께서도 언명하였듯이 이제 나라가 '끝장'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몇년전 어느 방송사에서 방영된 한 드라마가 사람들을 휘어잡았습니다.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아예 길거리가 텅 빌 정도였지요. 바로 '모래시계'였습니다. 박상원씨가 열연한 그 드라마의 주인공 검사는 국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어떤 압력도 물리치고 오직 진실만을 향하여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그에게는 높은 지위도, 큰 부도 추풍낙엽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없는 드라마속의 영웅에 우리 국민들은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런 국민적 영웅이 외국에는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누폴리테(맑은손)운동의 앞장을 섰던 이태리의 피에트로 검사, 다나카 전 수상을 구속시킨 호타 쯔토무 검사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그런 영웅은커녕 초라하고 비참해진 검찰의 일그러진 모습뿐입니다. 대통령의 그 숱한 언명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런 영웅을 가지지 못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은 말로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입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공연한 말의 성찬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영웅이 우연히 어느 날 탄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상명하복제와 검사동일체원칙, 검찰사무보고와 승인제도와 결제제도 아래에서 질식당하고 포박당하는 것이 이 시대의 검사들의 처지입니다.

기소독점주의와 그에 대해 예외와 견제를 인정하고 있지 않는 완벽한 검찰권 위에서 정치권력을 위해 검무를 추는 것이 오늘 오만한 우리의 검찰의 자화상입니다. 온갖 압력과 로비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 오늘 검찰의 숨길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 모든 현실을 깨뜨리는 제도의 온전한 개혁만이 문제를 푸는 황금의 열쇠입니다.

온전하고 상설적인 특별검사제를 도입하십시오. 검사동일체원칙과 상명하복제, 검찰사무보고와 구속승인제도를 없애 버리십시오. 그럼으로써 호랑이 새끼같은 검사들을 풀어놓아 버리십시오.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심사회에서 불기소한 사건의 심사를 통하여 재수사 요구가 가능하도록 해 주십시오. 유신으로 사실상 사라진 재정신청제도를 전 범죄로 확대하십시오. 검찰인사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검찰인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들이 의결권한을 갖도록 해 주십시오.

검찰총장을 지명하면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통해 인준하도록 하고 검찰총장은 임기후에 장관이나 국회의원, 안기부장 따위의 또 다른 권력에 연연하지 않도록 아예 그런 자리로 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우십시오. 청와대에는 현직검사를 옷만 벗겨 갖다 놓음으로써 검찰과의 통로를 만드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아마도 말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주변사람들이 이랬다간 검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 거라고 겁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이야말로 부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패하지 않았다면 무슨 걱정을 할 것입니까. 어차피 다음 정부에서, 그 정부가 집권당에서 나왔든 야당에서 나왔든, 부패사건은 드러나고 어쩌면 청문회장에 설지 모릅니다. 그럴 바에는 이 정부하에서 모든 것이 밝혀지고 처리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추상같은 검찰이 존재한다면 이 정부는 깨끗한 정부로 기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꾸 김영삼정부의 마지막이 연상되는 것은 왠 곡절입니까. 김영삼 전대통령도 설마 자신의 등잔 아래에서 아들마저 그렇게 큰 돈을 받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좋은 일을 하는데 늦음이란 있을 수 없지요. 한꺼번에 해 치워 버리셔야 합니다. 이미 개혁방안은 오래전부터 국민의 꿈이 되고 염원이 되어 있습니다. 양식 있는 모든 법학자와 법률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해 온 것들입니다. 무엇을 망서릴 것입니까. 이제 우리도 영웅을 보고 싶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닌 숱한 용감한 검사들이 이 나라의 불의와 부패를 일망타진하는 꿈같은 일들을 보고 싶습니다.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
2001/09/29 00:00 2001/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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