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단 한번도 부패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대통령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전직 대통령 중 2명은 재벌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하여 비자금으로 조성한 대가로 수인의 신세가 되었고, 다른 대통령하에서도 권력층이 연루된 비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이들이 과거의 정치자금수수의 관행에서 생겨난 "불행한 희생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훨씬 더 불행한 이들은 바로 단 한번도 청렴한 대통령을 만나보지 못한 주권자인 국민들입니다. 그래서인가요? 50년만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던 날,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님이 자신과 친인척, 측근들의 비리로 국민 앞에서 사죄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불행한 전통을 마감하는 첫 대통령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한낱 허황된 꿈으로 끝나가고 있습니다. 옷로비사건이나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은 차치하고서라도,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4대 게이트 사건의 핵심에는 여전히 권력층이 있다는 것이 특별검사의 수사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전·현직 의원, 행정부와 국정원의 고위 관료, 청와대 비서관들까지 그 어느 곳 하나 로비의 검은 손이 뻗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 참담한 것은 이들 중 누구 하나 부패의 검은 손을 단호히 뿌리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 누구도 지금 연이어 터져 나오는 각종 게이트의 끝이 어디까지인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부패한 자들이 바로 권력층이고, 이들이 적반하장격으로 "사정의 칼날"을 휘둘러 왔다는 점입니다.

"벤처비리"만 문제인가요? "권력형 비리" 전체에 대한 처방이 필요합니다.

정부는 올 초부터 각종 반부패대책을 연일 신문지상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반부패대책이 현재의 국민의 비판여론을 임시방편식으로 덮어두기 위해 급조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부패정책이 겉도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대통령님의 부패 문제에 대한 상황인식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나 정부는 작년 부패방지법, 돈세탁방지법 제정으로 부패에 대한 상당한 제도적 대안을 도입한 것으로 자찬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도개선은 그런 대로 되었고 운용만 잘하면 된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만약 정부여당, 심지어 대통령까지 그런 인식을 가지고 계시다면 뭔가 크게 착각하고 계신 겁니다.

대통령님은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현재의 사건들을 한마디로 "벤처게이트"로 명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2001년도 정부업무평가보고회의(1월 19일)에서는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과거처럼 재벌과 권력의 유착은 없으며, (최근 사건들은) `사이비 벤처기업"이 정부 시책을 악용해 말썽을 일으킨 것”이라며“정부가 특정 벤처기업과 결탁한 건 없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 당장 이형택 씨를 보십시오. 한 향토사업자가 소규모로 추진하여 부진을 면치 못하던 보물선 발굴 사업이 대통령의 처조카가 개입하자마자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청와대, 국가정보원, 해군, 해경 등 국가기관이 총 동원된 "국가 프로젝트"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일개 "사이비 벤처 기업가"가 국가정보원과 해군과 청와대를 내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며 이런 일들을 벌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오직 그가 "무소불위"의 권능을 갖은 대통령의 처조카의 지위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대통령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할 때 올바른 해결책을 내올 수 있습니다.

지금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게이트 사건은 대통령님이 말씀하시듯이 몇몇 사이비 벤처기업가가 저지른 무차별적인 로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국회, 청와대, 검찰, 국정원, 언론 등 권력 최고위층의 도덕적 해이와 윤리적 불감증, 그리고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내·외적 통제 장치의 부재가 빚어낸 전형적인 "권력형 부패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단순히 "벤처비리"로 치부해버리고 이와 관련된 몇몇 대책만을 급조하는 것으로는 결코 현재의 의문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미 돌아 앉아버린 민심을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경제위기에 걸려 파손되었던 "대한민국호"가 이제야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전진하려 하는데, 또다시 "권력형 부패"라는 거센 파도에 휘말려 흔들리고 있습니다. "전자정부의 구현"같은 원론적 과제나 "세무비리 척결"과 같은 지엽적인 정책으로 이러한 상황을 대처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부패문제에 대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상설특검제 도입, 공직자윤리법 개정 등의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정권교체 이후 대통령님과 집권여당이 야당시절 약속했던 핵심적인 반부패제도들을 도입하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더라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권력형 비리들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님과 민주당은 야당시절, 특별검사만이 권력형 비리를 뿌리뽑을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이후 "그때와는 다르다.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고 하시면서 상설적 특별검사제법안을 폐기하였습니다.

어디 특별검사제만 그렇습니까?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역시 야당시절에는 줄곧 도입을 주장하였으나 역시 "대통령의 인사권에 대한 침해"라는 이유를 들며 그 도입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집권당의 대표마저 검찰총장에 대한 인사청문회 도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며 수용할 의사를 보이고 있는데도 여전히 청와대는 기존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청와대의 위헌주장이야말로 국민의 기본권신장과 권력분립의 원칙을 규정한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님, 권력은 쪼갤수록 깨끗해집니다. 상설적 특별검사제도를 조속히 도입해 주십시오.

이미 특검제의 실효성은 이번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수사를 통해 명백히 입증되었습니다.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 도입과 검찰 인사제도의 개선과 같은 대안을 마련하여 인사권자의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독립적인 수사를 가능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공직사회 내부의 감시시스템을 구축하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 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직무관련자로부터 "떡값"등 일체의 재산상 이익수수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이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이번 개정을 통해 공직을 이권추구의 도구로 사용하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각종 제도들이 도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작년 11월 참여연대는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국회에 입법 청원하였고 이와 거의 유사한 의원 입법안도 국회에 제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법안에 대한 한차례의 심사도 진행되고 있지 못합니다. 대통령님이 직접 나서서 여당과 야당이 개정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대통령님,

저희는 대통령님이 진심으로 "반부패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기억과 역사 속에 기록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대통령님의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단호한 판단과 강력한 실천이 필요한 때입니다.
최한수 (참여연대 투명사회국 간사)
2002/01/31 00:00 2002/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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