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윤리와 정치적 상상력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2/02/27 00:00
최근 미국의 여러 대학들에서 [예비] 과학기술자들에게 윤리학을 가르치려는 노력은 높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경향은 윤리학이나 도덕의 문제를 인문학자들이나 나이먹은 과학계의 정치가들에게 맡기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런 문제들이 이공계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과 남성들이 과거와는 달리, 자신의 직업이 갖고 있는 윤리적 측면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도 있다.
이런 목표는 매우 존경할만한 것이지만, 과학기술자들에게 윤리학을 가르치는 데에 사용되는 수단에는 아직도 고려해야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이런 주제들이 소개되는 방식을 대체로 보면, 극도로 제한된 맥락에서 개인적 책임이 논의되거나 윤리적 선택은 개인의 정상적인 업무에 달갑지 않게 침입하는, 무언가 이상한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전문직업에 대한 윤리학 수업시간은 상대적으로 드물고, 학생들의 가장 기초적이고 실질적인 진로 선택을 스스로 평가하게 하기보다는 협소한 경계를 가진 위기 ― 이런 위기가 없었다면 일상적이고 행복했을 상황과 대조되는 ― 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주1)
대학에서의 수업이 기술관련 전문직의 근저에 깔려있는 난해한 문제들을 피해나가는 방법의 하나는 특정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사례 연구를 중심으로 배치하는 방법이다. 이는 단순한 추상을 넘어서서 '실제 현실'의 실천에 추상을 놓고 쟁점들을 맥락 속에 배치하기에 유용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주2). 불행하게도 이를 통해서 일상생활이라는 현실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가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만화적 단면은 손에 잡을 수 있는 추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육적인 사례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당신은 최신 크루즈미사일을 조립하는 군수산업체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다. 어느 날 당신이 미사일의 표면에 사용되는 페인트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몸에 해롭고 유독성 기체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의 마감까지는 상당히 촉박했고 당신의 상관은 마감일을 엄수할 것을 지시했다. 당신이라면 유독성 기체에 대해 보고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일자리와 경력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 보다는 가만히 있겠느냐?'
내가 다소 과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많이 과장한 것도 아니다. 이른바 윤리학 사례연구가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구체적인 문제 사례는 만약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조화롭게 유지되었으리라는 가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사례연구방식]이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특정한 사례가 놓여있는 맥락 그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게, 경영학, 법학, 공학 교육에서의 '사례연구'적 접근법의 특징이다. 이런 맥락을 분석하고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례연구는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원자핵무기를 제작하는 군수산업체에서 일하겠다는 결정은 윤리적인 문제로 좀처럼 인지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도덕적 딜레마 ― 엄청난 개인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경우 ― 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서 기술관련 전문직업의 삶이라는 중요한 차원이 빠져있다.
무기와 '좋은 지위'
내가 어떤 공대생에 대해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은 단지 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내가 자주 직면했던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내가 말하려는 요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 나는 항공공학과 교수와 함께 기술사 수업을 진행했다. 우리는 근대의 전문직업으로서의 공학과 공학교육의 기초에 대한 부분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기는 공대와 대기업들이 공대의 커리큘럼을 기업의 당면과제에 적합하게 변형시키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주3). 독서과제에 제시된 사실에 대한 강의가 끝난 후, 내 동료였던 항공공학과 교수는 30여명 정도의 이공계열 학생들에게 나라면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그래, 컨베이어 벨트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느낍니까?'
제법 긴 당혹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수업 내내 침묵을 지켰던 학생 중의 한 명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저는 그런 직업을 갖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고 잠시 생각한 후에 '저는 ... [다른] 좋은 자리를 찾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이렇게 요점을 잘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음 달에 나는 이 학생을 매우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길게 이어진 찰스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면서 그의 인생과 우리가 직면했던 선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우 전형적인 공대생이었던 그는 기계공의 아들이었고 계층상승을 이루려는 노동자계급 가정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전기공학에 대해 말했고 요즘 컴퓨터가 이용되는 양상에 대해 불안을 토로했고 자신의 기술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분야에 사용되기를 원하는 바램 등을 얘기했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에 대해 생각해야 하기를 권했기 때문에 나는 내심 '좋아, 내가 정말 찾고 있었던 학생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1년 쯤 지난 후, 나는 캠퍼스에서 이 학생을 다시 만났고 어떻게 지내는 지를 물었다.
'잘 지내는 편이에요. 참, 일자리를 구했어요.'
'어디?'
'드레이퍼 연구소요.'
'거기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요'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는 작업이 얼마나 정교하고 야심적인 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어디에 이용하는데?'
'유도시스템에 이용되죠'
내 질문은 명확했다: '그 유도시스템은 무엇을 유도하지?'
그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요'라고 대답하면서 다소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브루스, 너는 폭탄을 만들고 있는 거 맞지? 네가 왜 그런 일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해 말을 해봐라,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 했는지 말야.'
그는 파우스트의 시시함과 메피스토필레스의 굉장함 사이의 거래를 제시했다. 문제는 순전히 기술적인 의미에서 '최신'의 문제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었다. 4학년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기쁜 일이다. 특히 그동안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하던 학생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더욱 기쁜 일이다. 물론 당신은 그들이 냈던 돈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말하고 그리고 젊고 똑똑한 학생들을 전쟁과 죽음의 도구를 만들어내는 회사로 유혹하기 위한 시스템을 내가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해 실망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네가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라고 낮게 말하고 헤어졌다.
내 생각에 우리의 공학계는 공학이 심각한 도덕적 문제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기술이 중립적이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많은 엔지니어들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려하거나 발언하지 않는 무능력에 대해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 대체로 엔지니어들은 기업이나 관료시스템을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은 보수를 약속하기만 하면 수동적인 도구가 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면서 '아, 나는 수소폭탄을 만들고 싶어요. 나는 환경에 발암물질을 배출시키는 기술을 배우려고 해요. 자동차 회사가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는 연료탱크를 바꾸는 게 비용효율적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이런 목표를 확인하기 위해 공대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학교를 떠나 직장을 찾을 때에는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여기에 묘사한 상황은, 비록 내가 다소 강조하기는 했지만 공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다른 직업인들도 스스로를 자의식 있는 도덕적 주체나 자유사회의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 통제를 확대함에 따라 점차 생각할 필요를 잃어가는 개인을 만드는 대기업의 직원들이 되고 마는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문기술인 교육에서 누락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는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다. 사실 권력현상과 그 현상에 대한 개인의 참여는 일반적으로 근대 교육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교과과정을 비롯한 전체 교육과정은 특정한 사람과 기관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직업을 갖고 공학분야에서의 직장생활을 할 가능성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공계열 수업이나 문제풀이 과정은 '당신이 방위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또는 '당신이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는 말로 시작하곤 한다. 이런 맥락적 어구는 학생들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요?", "내가 어렵게 배운 지식이나 숙련을 써먹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인가요", "다른 길은 없나요"라는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를 없게 만든다.
전문직 윤리학이 사례를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는 암묵적 전제는 어떤 사람이 전문직업인이 되면 해당 전문직업이 갖고 있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기존의 연관관계들, 제도적 패턴, 권력관계에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업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분야를 재평가하거나 때로는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신참자들의 기본적인 고분고분함이 수용된 후에야 그/그녀는 앞에 놓여있는 긴장되는 윤리적 도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가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소명으로서의 직업(vocation)에 대한 민감성
권력현상을 탐구하는 공학윤리수업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명으로서의 직업 ― 도덕의식을 자극하는 ― 이라는 물음에 대한 탐구가 없다는 심각한 문제 때문이다(주4). 어떤 개인이 수십 년 동안 한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로부터 몇 가지 기본적인 의문들이 제기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일에 투자된 개인의 인생의 근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최초에 이런 방향으로 나의 지식과 숙련을 개발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누가 내 직업이 무엇인지를 가장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데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의 교육기관들은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의 도덕적·정치적 기초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등한시하여 이런 쟁점들을 회피하여 학생들을 기만하고 있는 셈이다.
공학윤리 수업은 개인의 행동이 옳고 그른가 ―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 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철학자들은 윤리학이 한계에 봉착하고 정치학이 시작되는 지점이 서로 논리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환점은 우리가 개인의 행동에 대한 물음을 넘어 인간들 전체의 본질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고려하게 될 때에 드러난다. 우리는 정치 사회에서의 삶의 질에 대해 숙고하고 이러한 사회 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단지 개별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준다.
나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을 교육하면서 개인 윤리 수준에서는 영웅적인 행동을 할 태세가 되어있지만 자신의 노동이 조직적 또는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그리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공학프로젝트가 경제·사회적 이해관계 외에는 다른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배운 학생들이 있다는 건 내겐 놀라움이었다. 그들은 누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어떻게 이런 분야가 만들어졌는지 등, 자신들의 전공분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게다가 이런 사실들은 잘 감추어진 비밀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될 때에서야 그/그녀는 "연봉이 높은 일자리를 가진 좋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고 싶어한다.
엔지니어 및 다른 전문직업인들이 정치적 성찰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에서의 작은 결함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이로 인해 거대한 비극이 초래될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의 권력형태들이 재생산되고 새로이 창조되는 가장 중요한 방식들은 대체로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에 반영된다. 20세기의 사회, 정치적 삶의 가능성은 기술적 기회와 제약에 의해 정의되는 게 보통이다. 우리가 좋은 사회에서 살게 될 지 나쁜 사회에서 살게 될 지는 우리가 개발하고 사용하는 기술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엔지니어나 기술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들은 핵심적인 사회 패턴을 유지하고 새로운 사회 패턴을 창조하는 데에 긴밀하게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의 사회·정치적 미래의 기초 구조를 구축하는 책임을 갖고 있는, 우리들 나머지의 대리자이자 대표자가 된다. 그들이 전망을 상실하고 지식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택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 사회는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런 우세한 상황에서는 잘 정리되어 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기보다는 정치적 감각과 정치적 상상력을 숙달하도록 노력하는 게 더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교육을 받는 공대생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비판적인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기 분야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 분야가 현재 어떠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있는 지는 물론이고 처음에는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대표했는지도 점검해봐야 한다. 또한 누가 프로젝트의 선택권을 갖고 있고 왜 그러한 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 진지하지 않은 관찰자들은 학생들이 뛰어든 사회의 사회적 실재를 간파하는 게 좋은 공학교육의 표준적 부분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이해는 명확하게 제시되는 법이 거의 없다. 학생들은 대신 일종의 감춰진 커리큘럼, 일련의 언급되지 않는 가정, 기대, 사소하더라도 철저한 문화화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모델 등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것들에 깔려있는 구절은 "묻지 마라", "기존의 위계에서 당신의 위치를 찾고 질서에 복종해라" 등이다.
이런 류의 정치적 감각이 길러지고 검증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다. 나는 수업을 할 때에 종종 다음과 같은 퀴즈를 내기도 한다.
루이스 멈포드의 {전력의 펜타곤 Pentagon of Power}(주5)의 [핵발전화 The Nucleation of Power] 장을 주의깊게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1. 당신은 멈포드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2. 장래에 당신들이 '권력복합체'에 참여할 것 같습니까?
3. 각각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시오.
물론 정치적 감각을 얻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정치적 감각은 어떤 사람을 민감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냉소적으로 만들어서 이롭기보다는 해로울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노동이 사회 전체에 ― 대중들의 삶의 질에 ― 기여 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인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또다른 무언가를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내는 계획, 방법, 모델, 시제품 안에 우리 사회 미래의 청사진이 있다. 이러한 산물들이 수도사업, 고속도로, 산업기계, 전자부품, 에너지시스템과 관련을 갖고 있는 지와 무관하게, 이것은 사실이다. 자신들의 분야, 엔지니어, 다른 전문직업에서 기본 사항을 완전히 숙달하는 과정의 일부로 "우리는 민주적 참여와 사회적 평등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기보다는 확장할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할 수 있는가", "기술변화를 위한 계획은 협소하게 정의된 경제적 이해관계와는 구분되는 공공선을 위한 관심을 통합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는 게 권장되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엔지니어들이 대학을 떠날 때 갖고 나가야하는 지적 도구상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런 능력을 숙달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없지만,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분과에서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여러 중요한 자원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철학에서는 정치철학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 설계했던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공학과 다리를 놓을 수 있다. 플라톤에서 루소, 존 롤즈에 이르기까지 정치이론은 좋은 사회라는 이상을 작동가능한 제도적 구조로 번역해내려는 노력을 해왔다. 예를 들어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회의 ― 역주]에 모인 사람들은 이후 세대에까지 이로운 결과를 자아낼 헌법이라는 정치적 기계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이론과 공학은 지속가능한 것을 만든다는, 어느 정도 공통의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정치이론과 공학이 동일한 평가 기준 ― 좋은 삶을 위해 적절한 요소들이 무엇인가 ― 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주6).
이런 물음에 시사점을 주는 구체적인 인문학 분야들이 선택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학생들이 (학계나 기업에서 유일하게 필요하게 생각하는) 과학기술적 문제풀이의 재능 뿐 아니라 공상가 및 몽상가로서의 재능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주7). 자신의 분야에서 자료를 찾으면서 그들은 자신의 지적능력과 노하우가 어떻게 하면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지를 상상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엔지니어와 기술전문가들은 우리 기술 시대의 인증되지 않은 입법의원이다. 공공선을 보장하거나 짓밟아버리는 선택은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들이 이러한 중대한 역할과 책임을 간과한다면 인간성을 최선으로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 것이다.
'왜'라고 물어서는 안되는가
공학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게, 그것도 상당히 '어떻게' ―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 어떻게 물리적·경제적 제약 내에서 특정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일을 성취할 수 있는가 ― 라는 질문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엔지니어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생들이 효과적으로 '어떻게'라는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공학교육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세계에서 '어떻게'라는 쟁점은 '왜'라는 쟁점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강력한 수단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가능한 빨리 전지구에 이러한 수단을 적용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엄청난 지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적 수단에 대한 사고로부터 우리의 선택을 이끌 수 있는 합리적 이유들에 대한 생각은 누락되는 게 보통이다.
좋다, 그러면 우주에서의 공격무기와 이른바 방어무기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한가? 그러나 왜 만들어야 하지? 다른 영역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긴급한 필요가 있는데, 희소한 자원을 왜 파괴만을 위한 물건에 이용해야 하지? 조금 더 나가기 전에 정책을 관장하는 암묵적 합리성을 검토해보는 게 필요하다. 아마도 이런 성찰을 위한 일시 중지는 맹목적인 군비경쟁이 아닌 다른 대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지금 우리는 이 지구의 생명들의 유전적 구조를 혁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지? 이런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에서 필요하지? 어떤 목표, 결과에 이르게 될까? 계속 뻗쳐 나가기 전에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해야 한다. 좋아, 거의 완전한 자동생산시스템들을 건설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왜 건설해야 하지? 어떤 목표를 위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이고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이지? 우리들이 이런 류의 시스템을 공학을 통해 만들어내기 전에 우리의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기초에 대해 투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검토하면 '왜'라는 물음은 유용하고 의욕을 끌만한 여러 방식으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우리 기술들이 어떤 심오하고 의미있는 목표를 위해 잘 들어맞는지, 아니면 어색한지", "인간에게 중요한 필요를 위해 우리의 기술과 도구가 개발되고 적용되는가", "기술과 관련된 관행이나 제도들이 유용하다거나 한계를 보이는 것은 어떠한 근본적인 [방향설정] 원칙에 기초한 것인가", "특정한 공학프로젝트를 선택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세계를 창조하고 추구하려 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런 물음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에는 상당한 불일치가 존재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기술적 수단을 활용하거나 발전시키는 지침이 되는 기본 개념들을 명료하게 한다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유, 정의, 안전, 인권, 복지, 공공선, 기타 핵심 개념들의 의미와 적절한 사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서로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들이 핵심적 기술선택에 대한 우리의 숙의 과정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논의되고 토론되어야 한다는 건 핵심적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에 관한 사고가 우리의 사고 전체를 구성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제로 자끄 엘룰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존재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도구성과 효율성에 관한 메마른 논의로 대체되는 게 근대적 사고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주8).
1980년대 초반의 별들의 전쟁 논쟁은 이런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1983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을 위한 숭고한 목표라는 말을 쓰면서 '핵무기를 무력화시키고 낙후된 것으로 만드는'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발표했다. 이 때 이후로 '[전략방어계획은] 과연 작동할 것인가', '사용된 기술들이 계획대로 기능할 것인가' 등에 대한 찬반 논쟁들이 잇달았다. 격화된 논쟁 이후, 대중들은 '어떻게'라는 도구적 쟁점이 마치 진정으로 핵심적인 것인양 매달렸다(주9). 이 시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전략방어계획이 조나단 쉘이 {지구의 운명 The Fate of Earth}에서 논의했던 다양한 측면과 핵무기확대중지운동에서 제기되었던 것처럼, 대중들이 국방정책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을 던졌던 시기에 제기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주10). 레이건의 입장 변경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은 도구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목적과 기술적 수단 사이의 관계나 근본 목표에 대한 사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주11).
우리의 정책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추론양상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지금의 기술적 선택에 대해 정보를 충분히 갖고 논의라고 간주되는 현실이 얼마나 불합리한 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비용/편익'분석에는 관심을 많이 갖고 있지만 비용과 편익에 대한 우리들 판단의 궁극적 기초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극대화해야 하고 왜 그렇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효율성'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효율성을 계산하는] 분자와 분모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특정한 길을 따라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진보'에 대한 무수한 찬양의 목소리를 듣지만 이러한 길, 또는 그 길의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국가 '경쟁력'에 대한 격앙된 목소리는 있지만 경쟁을 통해 어떤 바람직한 상태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찾을 수는 없다(주12).
기술변화에 대한 야심찬 시도들에 대한 여러 논의들에서 가장 깊이 있으면서 한편으로 당혹스런 질문은 '왜'라는 물음이다. 수많은 경우에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시되거나, 잊혀지고 때로는 억압되기까지 한다. 학생들이 끈질기게 자신의 작업의 기본 목표에 대해 탐구하지 않도록 하는 공학교육 프로그램들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를 먼저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를 질문하는 기술적 분석이라면 맥이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정교하게 말하면 '왜'라는 질문은 커리큘럼의 한 편에서 쉽게 잊혀지고 마는 교양으로 선택하는 인문학 관련과목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난해한 기술관련 교과목에 포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용/편익 분석을 직접 시작하기 전에 비용항목과 편익항목들을 열거해서 양쪽을 서로 바꾸어 읽어서 어떻게 느껴지는 지를 비교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1950년대의 교통공학자들의 분석에서 '교통량의 증가'는 편익으로 간주되었지만 이후 고속도로 건설계획의 영향을 받은 지역사회에서는 심각한 비용으로 느꼈다. 이렇게 비용/편익 분석에서 비용과 편익 항목을 서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다소 거센 소란을 유발하고 당신이 다시 질문을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견고하고 관습화된 기술관료주의적 사고 과정에 생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인 엔지니어
결론적으로 지금 전문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주의깊고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게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그녀의 분야에서의 여러 프로젝트들과 우리 문화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상과 원칙과의 지속적인 대화의 맥락 내에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귀결을 곰곰히 뜯어봐야 한다. 다음으로 과학기술전문가들은 중요한 조건에 대한 이해가 전체 대중에 대한 새로운 사고, 논쟁, 행동의 초점이 되는 공공의 역할을 설정하고, 필요하다면 만들어 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윤리적 책임은 이러한 삶이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공손하고 정직하며 진실한 삶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게 그들 자신에게 제시될 때에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기술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핵심에 놓여있는 선택들을 정의하는 난해한 작업에 타인들이 참여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것과 어떻게 이런 선택들을 지적으로 접근할 것인가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첫번째 요구조건은 대화의 책임이라고 불릴 수 있고 두번째 요구조건은 시민성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모두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인식되어 온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관행들을 첨단기술시대에 실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관행들이 폭넓게 수행되거나 정교화된 책임은 명백하지 않다. 지금 공대생들은 대화를 배제한 경력을 쌓고 자기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도록 장려되고 있다. 그들이 대학에서 받는 학위는 '이학사(B.S., Bachelor of Science)'일 뿐만 아니라 '공인 무책임(Certified Uncommitted)'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많은 사람들이 변해야만 의미있는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상당한 희망이 된다. 적절한 시기, 적절한 장소에서 한 사람만 말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1960년대 초, 레이첼 카슨의 공헌이 좋은 사례가 된다(주13). 처음에는 과학자나 여러 화학공학자들의 광범한 비판에 놓였지만 카슨의 호소는 국제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고 점차 농업에서 파괴적인 화학약품의 사용을 억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주14). 이와 유사한 윤리적인 관심은 1980년대 중반 레이건의 전략방어계획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여러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의 청원 열풍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들 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사회적 책임을 위한 컴퓨터전문가들 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 <우려하는 과학자연합 The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등 여러 집단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중요한 공공정책관련 쟁점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유럽의 여러 컴퓨터 과학자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보호할 수 있는 방식의 새로운 정보시스템에 관심을 부여하고 있다(주15).
나는 이런 사례들을 과학기술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책임 ― 우리 문명의 고귀한 원칙과 부합하는 기존 기술 및 신기술의 연구, 개발, 응용 패턴의 점진적 재정향 ―을 실현한 진실된 약속으로 이해하고있다. 우리 시대의 공학윤리에 대한 진정한 도전을 제시한 것은 '내부고발(whistleblowing)'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리허설이라기 보다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진보'다.
내가 앞서 말한 두 가지 종류의 책임 ― 대화와 시민성의 책임 ― 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패러독스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적절하게 말할 때, 분명히 그/그녀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각각의 사람들은 휴머니티의 미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인식이다. 이와 같은 패러독스와 부담에 부딪힌 여러 개인들은 자신들의 사적 영역의 보호로 숨어들거나 적어도 자신들이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 안전하고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인, 협소하게 정의된 경쟁력에 만족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충동은 여느 다른 이유보다도 기술관련 전문가들을 도덕적으로 무능하게 만들고 대기업의 권력이 행사되는 유혹의 조작에 취약하기 쉽다. 공공영역에서의 생기있고 실용적인 지속적 참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공학윤리 교육을 가르치고 정의하려는 노력은 실패일 뿐만 아니라 배신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각주)
* Langdon Winner, Engineering Ethics and Political Imagination, ed. Deborah G. Johnson ; Ethical Issues in Engineering, (Englewood Cliff : Prentice Hall, 1991) pp.376-385; reprinted from Broad and Narrow Interpretations of Philosophy of Technology, ed. Paul Durbin; Philosophy and Technology, vol.7 (Dordrecht : Kluwer, 1990)
1) Stephen H. Unger, Controlling Technology: Ethics and the Responsible Engineer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82)
2) 이런 방법론을 옹호하는 입장은 다음을 보라. C. Roland Christensen, et al., Teaching and the Case Method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1987).
3) David Noble, America by Design: Science, Technology and the Rise of Corporate Capitalism (New York : Alfred Knopf, 1977)
4)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의 학문]에서 유사한 문제를 다뤘다.
5) Lewis Mumford, The Myth of the Machine: The Pentagon of Power (New York :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0), Ch. 9.
6) 나는 이 주제를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내 책, {고래와 원자로 The Whale and the Reactor}의 3장 [테크네와 폴리테이아]에서 다뤘다.
7) 로버트 보거슬로의 책은 이런 관점에서 컴퓨터 과학자를 너무나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초기의 시도로 볼 수 있다. Robert Boguslaw, The New Utopians: A Study of Systems Design and Social Change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965)
8)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Society; trans. John Wilkinson (New York : Alfred Knopf, 1965); 박광덕 역, {기술과 사회}, 한울아카데미
9) John Timan, ed., Empty Promise: The Growing Case Against Star Wars (Boston : Beacon Press, 1986).
10) Jonathan Schell, The Fate of the Earth (New York : Alfred Knopf, 1982).
11) Janice Hocker Rushing, 'Ronald Reagan"s Star Wars" Address: Mythic Containment of Technical Reasoning,' Quarterly Journal of Speech, 72 (1986), pp. 415-33.
12) Martin Kenneth Starr, ed., Global Competitiveness: Getting the U.S. Back on Track (New York : W. W. Norton, 1988).
13) Rachel Carson, Silent Spring (Boston : Houghton Miffin, 1962); {봄의 침묵}, 넥서스
14) Keith Schneider, 'Science Academy Says Chemicals Do Not Necessarily Increase Crops,' New York Times, September 8, 1989, p.1
15)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 논문에서 논의한 바 있다. 'Political Ergonomics : Technological Design and the Quality of Public Life,' Wissenschaftszentrum Discussion Papers, IIUG dp 87-7 (Berlin: Wissenschaftszentrum Berlin, 1987)
이런 목표는 매우 존경할만한 것이지만, 과학기술자들에게 윤리학을 가르치는 데에 사용되는 수단에는 아직도 고려해야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이런 주제들이 소개되는 방식을 대체로 보면, 극도로 제한된 맥락에서 개인적 책임이 논의되거나 윤리적 선택은 개인의 정상적인 업무에 달갑지 않게 침입하는, 무언가 이상한 것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전문직업에 대한 윤리학 수업시간은 상대적으로 드물고, 학생들의 가장 기초적이고 실질적인 진로 선택을 스스로 평가하게 하기보다는 협소한 경계를 가진 위기 ― 이런 위기가 없었다면 일상적이고 행복했을 상황과 대조되는 ― 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주1)
대학에서의 수업이 기술관련 전문직의 근저에 깔려있는 난해한 문제들을 피해나가는 방법의 하나는 특정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사례 연구를 중심으로 배치하는 방법이다. 이는 단순한 추상을 넘어서서 '실제 현실'의 실천에 추상을 놓고 쟁점들을 맥락 속에 배치하기에 유용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주2). 불행하게도 이를 통해서 일상생활이라는 현실을 괄호 안에 넣어버리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가설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만화적 단면은 손에 잡을 수 있는 추상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육적인 사례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당신은 최신 크루즈미사일을 조립하는 군수산업체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다. 어느 날 당신이 미사일의 표면에 사용되는 페인트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몸에 해롭고 유독성 기체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젝트의 마감까지는 상당히 촉박했고 당신의 상관은 마감일을 엄수할 것을 지시했다. 당신이라면 유독성 기체에 대해 보고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일자리와 경력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기 보다는 가만히 있겠느냐?'
내가 다소 과장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많이 과장한 것도 아니다. 이른바 윤리학 사례연구가 학생들에게 제시하는 구체적인 문제 사례는 만약 이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조화롭게 유지되었으리라는 가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사례연구방식]이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특정한 사례가 놓여있는 맥락 그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 게, 경영학, 법학, 공학 교육에서의 '사례연구'적 접근법의 특징이다. 이런 맥락을 분석하고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례연구는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원자핵무기를 제작하는 군수산업체에서 일하겠다는 결정은 윤리적인 문제로 좀처럼 인지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도덕적 딜레마 ― 엄청난 개인적인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경우 ― 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를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서 기술관련 전문직업의 삶이라는 중요한 차원이 빠져있다.
무기와 '좋은 지위'
내가 어떤 공대생에 대해 느꼈던 개인적인 경험은 단지 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내가 자주 직면했던 상황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내가 말하려는 요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 년 전, 나는 항공공학과 교수와 함께 기술사 수업을 진행했다. 우리는 근대의 전문직업으로서의 공학과 공학교육의 기초에 대한 부분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기는 공대와 대기업들이 공대의 커리큘럼을 기업의 당면과제에 적합하게 변형시키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주3). 독서과제에 제시된 사실에 대한 강의가 끝난 후, 내 동료였던 항공공학과 교수는 30여명 정도의 이공계열 학생들에게 나라면 제기할 엄두를 내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
'그래, 컨베이어 벨트가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느낍니까?'
제법 긴 당혹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수업 내내 침묵을 지켰던 학생 중의 한 명이 손을 들고 대답했다.
'저는 그런 직업을 갖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했고 잠시 생각한 후에 '저는 ... [다른] 좋은 자리를 찾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이렇게 요점을 잘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음 달에 나는 이 학생을 매우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길게 이어진 찰스 강변을 따라 산책을 하면서 그의 인생과 우리가 직면했던 선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우 전형적인 공대생이었던 그는 기계공의 아들이었고 계층상승을 이루려는 노동자계급 가정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전기공학에 대해 말했고 요즘 컴퓨터가 이용되는 양상에 대해 불안을 토로했고 자신의 기술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분야에 사용되기를 원하는 바램 등을 얘기했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에 대해 생각해야 하기를 권했기 때문에 나는 내심 '좋아, 내가 정말 찾고 있었던 학생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1년 쯤 지난 후, 나는 캠퍼스에서 이 학생을 다시 만났고 어떻게 지내는 지를 물었다.
'잘 지내는 편이에요. 참, 일자리를 구했어요.'
'어디?'
'드레이퍼 연구소요.'
'거기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요'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는 작업이 얼마나 정교하고 야심적인 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어디에 이용하는데?'
'유도시스템에 이용되죠'
내 질문은 명확했다: '그 유도시스템은 무엇을 유도하지?'
그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요'라고 대답하면서 다소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브루스, 너는 폭탄을 만들고 있는 거 맞지? 네가 왜 그런 일에 뛰어들었는지에 대해 말을 해봐라, 어떻게 스스로 정당화 했는지 말야.'
그는 파우스트의 시시함과 메피스토필레스의 굉장함 사이의 거래를 제시했다. 문제는 순전히 기술적인 의미에서 '최신'의 문제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었다. 4학년 학생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기쁜 일이다. 특히 그동안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하던 학생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더욱 기쁜 일이다. 물론 당신은 그들이 냈던 돈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말하고 그리고 젊고 똑똑한 학생들을 전쟁과 죽음의 도구를 만들어내는 회사로 유혹하기 위한 시스템을 내가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해 실망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네가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라고 낮게 말하고 헤어졌다.
내 생각에 우리의 공학계는 공학이 심각한 도덕적 문제에 연루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기술이 중립적이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많은 엔지니어들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려하거나 발언하지 않는 무능력에 대해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다. 대체로 엔지니어들은 기업이나 관료시스템을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은 보수를 약속하기만 하면 수동적인 도구가 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오면서 '아, 나는 수소폭탄을 만들고 싶어요. 나는 환경에 발암물질을 배출시키는 기술을 배우려고 해요. 자동차 회사가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는 연료탱크를 바꾸는 게 비용효율적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이런 목표를 확인하기 위해 공대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학교를 떠나 직장을 찾을 때에는 무엇을 하는 거지?
내가 여기에 묘사한 상황은, 비록 내가 다소 강조하기는 했지만 공학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의 다른 직업인들도 스스로를 자의식 있는 도덕적 주체나 자유사회의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 통제를 확대함에 따라 점차 생각할 필요를 잃어가는 개인을 만드는 대기업의 직원들이 되고 마는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문기술인 교육에서 누락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는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다. 사실 권력현상과 그 현상에 대한 개인의 참여는 일반적으로 근대 교육의 가장 은밀한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교과과정을 비롯한 전체 교육과정은 특정한 사람과 기관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을 갖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직업을 갖고 공학분야에서의 직장생활을 할 가능성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공계열 수업이나 문제풀이 과정은 '당신이 방위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또는 '당신이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는 말로 시작하곤 한다. 이런 맥락적 어구는 학생들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요?", "내가 어렵게 배운 지식이나 숙련을 써먹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인가요", "다른 길은 없나요"라는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를 없게 만든다.
전문직 윤리학이 사례를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는 암묵적 전제는 어떤 사람이 전문직업인이 되면 해당 전문직업이 갖고 있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기존의 연관관계들, 제도적 패턴, 권력관계에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업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분야를 재평가하거나 때로는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신참자들의 기본적인 고분고분함이 수용된 후에야 그/그녀는 앞에 놓여있는 긴장되는 윤리적 도전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가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소명으로서의 직업(vocation)에 대한 민감성
권력현상을 탐구하는 공학윤리수업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명으로서의 직업 ― 도덕의식을 자극하는 ― 이라는 물음에 대한 탐구가 없다는 심각한 문제 때문이다(주4). 어떤 개인이 수십 년 동안 한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로부터 몇 가지 기본적인 의문들이 제기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일에 투자된 개인의 인생의 근본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최초에 이런 방향으로 나의 지식과 숙련을 개발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누가 내 직업이 무엇인지를 가장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데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의 교육기관들은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생활의 도덕적·정치적 기초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등한시하여 이런 쟁점들을 회피하여 학생들을 기만하고 있는 셈이다.
공학윤리 수업은 개인의 행동이 옳고 그른가 ― 실제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 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철학자들은 윤리학이 한계에 봉착하고 정치학이 시작되는 지점이 서로 논리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환점은 우리가 개인의 행동에 대한 물음을 넘어 인간들 전체의 본질과 그 안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고려하게 될 때에 드러난다. 우리는 정치 사회에서의 삶의 질에 대해 숙고하고 이러한 사회 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단지 개별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 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준다.
나는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을 교육하면서 개인 윤리 수준에서는 영웅적인 행동을 할 태세가 되어있지만 자신의 노동이 조직적 또는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그리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공학프로젝트가 경제·사회적 이해관계 외에는 다른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배운 학생들이 있다는 건 내겐 놀라움이었다. 그들은 누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어떻게 이런 분야가 만들어졌는지 등, 자신들의 전공분야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게다가 이런 사실들은 잘 감추어진 비밀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될 때에서야 그/그녀는 "연봉이 높은 일자리를 가진 좋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 지"를 알고 싶어한다.
엔지니어 및 다른 전문직업인들이 정치적 성찰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에서의 작은 결함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이로 인해 거대한 비극이 초래될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의 권력형태들이 재생산되고 새로이 창조되는 가장 중요한 방식들은 대체로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에 반영된다. 20세기의 사회, 정치적 삶의 가능성은 기술적 기회와 제약에 의해 정의되는 게 보통이다. 우리가 좋은 사회에서 살게 될 지 나쁜 사회에서 살게 될 지는 우리가 개발하고 사용하는 기술에 의해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엔지니어나 기술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이들은 핵심적인 사회 패턴을 유지하고 새로운 사회 패턴을 창조하는 데에 긴밀하게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의 사회·정치적 미래의 기초 구조를 구축하는 책임을 갖고 있는, 우리들 나머지의 대리자이자 대표자가 된다. 그들이 전망을 상실하고 지식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택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 사회는 문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런 우세한 상황에서는 잘 정리되어 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기보다는 정치적 감각과 정치적 상상력을 숙달하도록 노력하는 게 더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교육을 받는 공대생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직업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비판적인 점검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기 분야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 분야가 현재 어떠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대표하고 있는 지는 물론이고 처음에는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대표했는지도 점검해봐야 한다. 또한 누가 프로젝트의 선택권을 갖고 있고 왜 그러한 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 진지하지 않은 관찰자들은 학생들이 뛰어든 사회의 사회적 실재를 간파하는 게 좋은 공학교육의 표준적 부분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이해는 명확하게 제시되는 법이 거의 없다. 학생들은 대신 일종의 감춰진 커리큘럼, 일련의 언급되지 않는 가정, 기대, 사소하더라도 철저한 문화화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모델 등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것들에 깔려있는 구절은 "묻지 마라", "기존의 위계에서 당신의 위치를 찾고 질서에 복종해라" 등이다.
이런 류의 정치적 감각이 길러지고 검증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들이 있다. 나는 수업을 할 때에 종종 다음과 같은 퀴즈를 내기도 한다.
루이스 멈포드의 {전력의 펜타곤 Pentagon of Power}(주5)의 [핵발전화 The Nucleation of Power] 장을 주의깊게 읽고 다음 물음에 답하시오.
1. 당신은 멈포드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2. 장래에 당신들이 '권력복합체'에 참여할 것 같습니까?
3. 각각에 대해 이유를 설명하시오.
물론 정치적 감각을 얻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정치적 감각은 어떤 사람을 민감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냉소적으로 만들어서 이롭기보다는 해로울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노동이 사회 전체에 ― 대중들의 삶의 질에 ― 기여 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인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또다른 무언가를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내는 계획, 방법, 모델, 시제품 안에 우리 사회 미래의 청사진이 있다. 이러한 산물들이 수도사업, 고속도로, 산업기계, 전자부품, 에너지시스템과 관련을 갖고 있는 지와 무관하게, 이것은 사실이다. 자신들의 분야, 엔지니어, 다른 전문직업에서 기본 사항을 완전히 숙달하는 과정의 일부로 "우리는 민주적 참여와 사회적 평등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기보다는 확장할 수 있는 방식을 개발할 수 있는가", "기술변화를 위한 계획은 협소하게 정의된 경제적 이해관계와는 구분되는 공공선을 위한 관심을 통합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는 게 권장되어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엔지니어들이 대학을 떠날 때 갖고 나가야하는 지적 도구상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런 능력을 숙달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없지만,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분과에서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여러 중요한 자원들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정치철학에서는 정치철학자들이 어느 정도까지 [직접] 설계했던 사례들을 보여주면서 공학과 다리를 놓을 수 있다. 플라톤에서 루소, 존 롤즈에 이르기까지 정치이론은 좋은 사회라는 이상을 작동가능한 제도적 구조로 번역해내려는 노력을 해왔다. 예를 들어 1787년 필라델피아 회의[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회의 ― 역주]에 모인 사람들은 이후 세대에까지 이로운 결과를 자아낼 헌법이라는 정치적 기계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이론과 공학은 지속가능한 것을 만든다는, 어느 정도 공통의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정치이론과 공학이 동일한 평가 기준 ― 좋은 삶을 위해 적절한 요소들이 무엇인가 ― 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주6).
이런 물음에 시사점을 주는 구체적인 인문학 분야들이 선택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학생들이 (학계나 기업에서 유일하게 필요하게 생각하는) 과학기술적 문제풀이의 재능 뿐 아니라 공상가 및 몽상가로서의 재능도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주7). 자신의 분야에서 자료를 찾으면서 그들은 자신의 지적능력과 노하우가 어떻게 하면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지를 상상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엔지니어와 기술전문가들은 우리 기술 시대의 인증되지 않은 입법의원이다. 공공선을 보장하거나 짓밟아버리는 선택은 그들의 손에 달려있다. 그들이 이러한 중대한 역할과 책임을 간과한다면 인간성을 최선으로 보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 것이다.
'왜'라고 물어서는 안되는가
공학을 소명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게, 그것도 상당히 '어떻게' ―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 어떻게 물리적·경제적 제약 내에서 특정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일을 성취할 수 있는가 ― 라는 질문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엔지니어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생들이 효과적으로 '어떻게'라는 문제와 씨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공학교육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세계에서 '어떻게'라는 쟁점은 '왜'라는 쟁점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강력한 수단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가능한 빨리 전지구에 이러한 수단을 적용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엄청난 지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적 수단에 대한 사고로부터 우리의 선택을 이끌 수 있는 합리적 이유들에 대한 생각은 누락되는 게 보통이다.
좋다, 그러면 우주에서의 공격무기와 이른바 방어무기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한가? 그러나 왜 만들어야 하지? 다른 영역에서 우리 인간들에게 긴급한 필요가 있는데, 희소한 자원을 왜 파괴만을 위한 물건에 이용해야 하지? 조금 더 나가기 전에 정책을 관장하는 암묵적 합리성을 검토해보는 게 필요하다. 아마도 이런 성찰을 위한 일시 중지는 맹목적인 군비경쟁이 아닌 다른 대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지금 우리는 이 지구의 생명들의 유전적 구조를 혁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지? 이런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에서 필요하지? 어떤 목표, 결과에 이르게 될까? 계속 뻗쳐 나가기 전에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해야 한다. 좋아, 거의 완전한 자동생산시스템들을 건설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왜 건설해야 하지? 어떤 목표를 위해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누구이고 손해를 보는 사람은 누구이지? 우리들이 이런 류의 시스템을 공학을 통해 만들어내기 전에 우리의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기초에 대해 투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런 주제들을 검토하면 '왜'라는 물음은 유용하고 의욕을 끌만한 여러 방식으로 재정식화될 수 있다. "우리 기술들이 어떤 심오하고 의미있는 목표를 위해 잘 들어맞는지, 아니면 어색한지", "인간에게 중요한 필요를 위해 우리의 기술과 도구가 개발되고 적용되는가", "기술과 관련된 관행이나 제도들이 유용하다거나 한계를 보이는 것은 어떠한 근본적인 [방향설정] 원칙에 기초한 것인가", "특정한 공학프로젝트를 선택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세계를 창조하고 추구하려 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런 물음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에는 상당한 불일치가 존재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기술적 수단을 활용하거나 발전시키는 지침이 되는 기본 개념들을 명료하게 한다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유, 정의, 안전, 인권, 복지, 공공선, 기타 핵심 개념들의 의미와 적절한 사용이 무엇인가에 대해 서로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들이 핵심적 기술선택에 대한 우리의 숙의 과정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논의되고 토론되어야 한다는 건 핵심적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에 관한 사고가 우리의 사고 전체를 구성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제로 자끄 엘룰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존재이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도구성과 효율성에 관한 메마른 논의로 대체되는 게 근대적 사고의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주8).
1980년대 초반의 별들의 전쟁 논쟁은 이런 경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1983년 3월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을 위한 숭고한 목표라는 말을 쓰면서 '핵무기를 무력화시키고 낙후된 것으로 만드는' 전략방어계획(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발표했다. 이 때 이후로 '[전략방어계획은] 과연 작동할 것인가', '사용된 기술들이 계획대로 기능할 것인가' 등에 대한 찬반 논쟁들이 잇달았다. 격화된 논쟁 이후, 대중들은 '어떻게'라는 도구적 쟁점이 마치 진정으로 핵심적인 것인양 매달렸다(주9). 이 시기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전략방어계획이 조나단 쉘이 {지구의 운명 The Fate of Earth}에서 논의했던 다양한 측면과 핵무기확대중지운동에서 제기되었던 것처럼, 대중들이 국방정책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을 던졌던 시기에 제기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주10). 레이건의 입장 변경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은 도구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목적과 기술적 수단 사이의 관계나 근본 목표에 대한 사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주11).
우리의 정책 배후에 있는 기본적인 추론양상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지금의 기술적 선택에 대해 정보를 충분히 갖고 논의라고 간주되는 현실이 얼마나 불합리한 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비용/편익'분석에는 관심을 많이 갖고 있지만 비용과 편익에 대한 우리들 판단의 궁극적 기초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극대화해야 하고 왜 그렇게 해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효율성'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효율성을 계산하는] 분자와 분모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특정한 길을 따라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진보'에 대한 무수한 찬양의 목소리를 듣지만 이러한 길, 또는 그 길의 목적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국가 '경쟁력'에 대한 격앙된 목소리는 있지만 경쟁을 통해 어떤 바람직한 상태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찾을 수는 없다(주12).
기술변화에 대한 야심찬 시도들에 대한 여러 논의들에서 가장 깊이 있으면서 한편으로 당혹스런 질문은 '왜'라는 물음이다. 수많은 경우에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무시되거나, 잊혀지고 때로는 억압되기까지 한다. 학생들이 끈질기게 자신의 작업의 기본 목표에 대해 탐구하지 않도록 하는 공학교육 프로그램들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를 먼저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를 질문하는 기술적 분석이라면 맥이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정교하게 말하면 '왜'라는 질문은 커리큘럼의 한 편에서 쉽게 잊혀지고 마는 교양으로 선택하는 인문학 관련과목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난해한 기술관련 교과목에 포함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용/편익 분석을 직접 시작하기 전에 비용항목과 편익항목들을 열거해서 양쪽을 서로 바꾸어 읽어서 어떻게 느껴지는 지를 비교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1950년대의 교통공학자들의 분석에서 '교통량의 증가'는 편익으로 간주되었지만 이후 고속도로 건설계획의 영향을 받은 지역사회에서는 심각한 비용으로 느꼈다. 이렇게 비용/편익 분석에서 비용과 편익 항목을 서로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다소 거센 소란을 유발하고 당신이 다시 질문을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견고하고 관습화된 기술관료주의적 사고 과정에 생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인 엔지니어
결론적으로 지금 전문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주의깊고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게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그녀의 분야에서의 여러 프로젝트들과 우리 문화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상과 원칙과의 지속적인 대화의 맥락 내에서 이러한 프로젝트의 귀결을 곰곰히 뜯어봐야 한다. 다음으로 과학기술전문가들은 중요한 조건에 대한 이해가 전체 대중에 대한 새로운 사고, 논쟁, 행동의 초점이 되는 공공의 역할을 설정하고, 필요하다면 만들어 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윤리적 책임은 이러한 삶이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공손하고 정직하며 진실한 삶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게 그들 자신에게 제시될 때에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기술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핵심에 놓여있는 선택들을 정의하는 난해한 작업에 타인들이 참여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것과 어떻게 이런 선택들을 지적으로 접근할 것인가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첫번째 요구조건은 대화의 책임이라고 불릴 수 있고 두번째 요구조건은 시민성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모두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인식되어 온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관행들을 첨단기술시대에 실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관행들이 폭넓게 수행되거나 정교화된 책임은 명백하지 않다. 지금 공대생들은 대화를 배제한 경력을 쌓고 자기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도록 장려되고 있다. 그들이 대학에서 받는 학위는 '이학사(B.S., Bachelor of Science)'일 뿐만 아니라 '공인 무책임(Certified Uncommitted)'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많은 사람들이 변해야만 의미있는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상당한 희망이 된다. 적절한 시기, 적절한 장소에서 한 사람만 말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1960년대 초, 레이첼 카슨의 공헌이 좋은 사례가 된다(주13). 처음에는 과학자나 여러 화학공학자들의 광범한 비판에 놓였지만 카슨의 호소는 국제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고 점차 농업에서 파괴적인 화학약품의 사용을 억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주14). 이와 유사한 윤리적인 관심은 1980년대 중반 레이건의 전략방어계획에 참여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여러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의 청원 열풍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들 Physicians for Social Responsibility>, <사회적 책임을 위한 컴퓨터전문가들 Computer Professionals for Social Responsibility>, <우려하는 과학자연합 The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등 여러 집단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중요한 공공정책관련 쟁점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유럽의 여러 컴퓨터 과학자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라 자유를 보호할 수 있는 방식의 새로운 정보시스템에 관심을 부여하고 있다(주15).
나는 이런 사례들을 과학기술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책임 ― 우리 문명의 고귀한 원칙과 부합하는 기존 기술 및 신기술의 연구, 개발, 응용 패턴의 점진적 재정향 ―을 실현한 진실된 약속으로 이해하고있다. 우리 시대의 공학윤리에 대한 진정한 도전을 제시한 것은 '내부고발(whistleblowing)'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리허설이라기 보다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진보'다.
내가 앞서 말한 두 가지 종류의 책임 ― 대화와 시민성의 책임 ― 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패러독스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적절하게 말할 때, 분명히 그/그녀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각각의 사람들은 휴머니티의 미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인식이다. 이와 같은 패러독스와 부담에 부딪힌 여러 개인들은 자신들의 사적 영역의 보호로 숨어들거나 적어도 자신들이 느끼기에는 어느 정도 안전하고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인, 협소하게 정의된 경쟁력에 만족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충동은 여느 다른 이유보다도 기술관련 전문가들을 도덕적으로 무능하게 만들고 대기업의 권력이 행사되는 유혹의 조작에 취약하기 쉽다. 공공영역에서의 생기있고 실용적인 지속적 참여를 만들어 내지 않는 공학윤리 교육을 가르치고 정의하려는 노력은 실패일 뿐만 아니라 배신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각주)
* Langdon Winner, Engineering Ethics and Political Imagination, ed. Deborah G. Johnson ; Ethical Issues in Engineering, (Englewood Cliff : Prentice Hall, 1991) pp.376-385; reprinted from Broad and Narrow Interpretations of Philosophy of Technology, ed. Paul Durbin; Philosophy and Technology, vol.7 (Dordrecht : Kluwer, 1990)
1) Stephen H. Unger, Controlling Technology: Ethics and the Responsible Engineer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82)
2) 이런 방법론을 옹호하는 입장은 다음을 보라. C. Roland Christensen, et al., Teaching and the Case Method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1987).
3) David Noble, America by Design: Science, Technology and the Rise of Corporate Capitalism (New York : Alfred Knopf, 1977)
4)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의 학문]에서 유사한 문제를 다뤘다.
5) Lewis Mumford, The Myth of the Machine: The Pentagon of Power (New York : Harcourt Brace Jovanovich, 1970), Ch. 9.
6) 나는 이 주제를 시카고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내 책, {고래와 원자로 The Whale and the Reactor}의 3장 [테크네와 폴리테이아]에서 다뤘다.
7) 로버트 보거슬로의 책은 이런 관점에서 컴퓨터 과학자를 너무나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초기의 시도로 볼 수 있다. Robert Boguslaw, The New Utopians: A Study of Systems Design and Social Change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965)
8)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Society; trans. John Wilkinson (New York : Alfred Knopf, 1965); 박광덕 역, {기술과 사회}, 한울아카데미
9) John Timan, ed., Empty Promise: The Growing Case Against Star Wars (Boston : Beacon Press, 1986).
10) Jonathan Schell, The Fate of the Earth (New York : Alfred Knopf, 1982).
11) Janice Hocker Rushing, 'Ronald Reagan"s Star Wars" Address: Mythic Containment of Technical Reasoning,' Quarterly Journal of Speech, 72 (1986), pp. 415-33.
12) Martin Kenneth Starr, ed., Global Competitiveness: Getting the U.S. Back on Track (New York : W. W. Norton, 1988).
13) Rachel Carson, Silent Spring (Boston : Houghton Miffin, 1962); {봄의 침묵}, 넥서스
14) Keith Schneider, 'Science Academy Says Chemicals Do Not Necessarily Increase Crops,' New York Times, September 8, 1989, p.1
15)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 논문에서 논의한 바 있다. 'Political Ergonomics : Technological Design and the Quality of Public Life,' Wissenschaftszentrum Discussion Papers, IIUG dp 87-7 (Berlin: Wissenschaftszentrum Berlin, 1987)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