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김명진 | 우리모임 회원

과학은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어딘가에서, 뭔가 대가를 치르면서 행해진다. 따라서 누가, 어떤 제도적 맥락 하에서, 어떤 비용을 들여 과학 활동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과학적 도구들이 왜 특정한 유형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예리한 반면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딘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 로버트 프록터, {암과의 전쟁 Cancer Wars}

역사가 스티븐 메이슨에 따르면 과학은 두 가지의 주된 원천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기술적 전통인데, 여기서는 실제적인 경험과 솜씨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면서 발전했다. 그리고 둘째는 정신적 전통으로, 그 속에서 인간의 열망과 사고들이 계승되고 확대되어 왔다.' 이 중 기술적 전통은 과학이 물질 세계를 조작하는 유용한 방법들을 제공한다는 주장의 근거이고, 정신적 전통은 과학이 세계를 '객관적이고' 편견 없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이러한 두 전통은 종종 불화를 빚는다.

근대과학이 '과학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고수해 온 특정한 방법론 때문이다. 근대과학은 정량적 방법을 이용하고 측정가능한 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데이터는 경험적으로 유도된 것이며 반복가능한 실험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 활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다. 이데올로기적 사상가들은 도그마를 유포하고 반대 증거에 직면해서도 자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과학자들은 '가설들'을 가지고 작업하며 증거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지 이를 수정한다.

과학적 방법에 대한 표준적 설명을 보면 그것이 마치 참으로부터 거짓을 분리해 걸러내는 거의 기계적인 과정인 것처럼 들린다. 그 방법은 보통 다음의 단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 어떤 현상을 관찰해 기록한다.

2. 그 현상을 설명하고 그것과 이미 알려진 다른 사실들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가설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보통 모종의 수학 공식이 이용된다.

3. 이 가설을 이용해 예측을 수행한다.

4. 실험이나 추가적인 관찰을 통해 그러한 예측들이 맞는지 여부를 검증한다.

5. 만약 예측이 틀렸다면 가설을 기각하거나 수정한다.

'개인적·문화적 믿음들이 자연현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 모두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이론을 만들 때 표준적 절차와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로체스터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프랭크 볼프스는 설명한다. '과학적 방법은 어떤 가설이나 이론을 검증할 때 실험자의 편향이나 편견의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편향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여러 명의 연구자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가설을 검증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가설이 여러 차례의 실험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인정받는 이론의 단계로 상승할 수 있지만, 가설에 근거한 예측이 실험적 검증과 들어맞지 않는 경우에는 과학적 방법의 요구에 따라 가설을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볼프의 말을 빌면, 과학에서는 '실험이 최고'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은 과학적 방법에 대해 통상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와 같은 설명이 종종 신화에 불과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찾아볼 수 있게 된 신화로, 이를 처음 정교화한 사람은 19세기 말의 통계학자 칼 피어슨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위에서 설명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는 아이작 뉴튼 경과 찰스 다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르네 데카르트는 자신의 책 [방법서설](원 제목은 [이성을 올바로 이끌고 과학에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 역주)을 통해 과학적 탐구의 시대를 열어젖힌 것으로 흔히 인정받고 있지만, 데카르트가 사용한 방법은 위에서 설명한 단계들과 거의 아무런 연관도 없다. 벤젠의 분자구조에 대한 가설은 실험실에서가 아니라 꿈속에서 처음 떠올려졌다. 많은 이론들은 가설을 공식화하고 수정하는 일련의 힘든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영감의 순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과학자들의 실제 사고 과정은 표준적 모델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고 더 복잡하며, 그 필연성에 있어 덜 기계적이다. 과학은 인간이 행하는 노력이며, 실제 세상의 과학자들은 상상력, 창조성, 추측, 사전지식, 문헌조사, 인내,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순전한 행운 등의 요소들을 결합시켜 자신의 연구에 접근한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 과학자들이나 비과학자들이나 문제 해결을 시도할 때 이용하는 지적 자원들의 조합은 똑같다는 얘기다.

보편적인 과학적 방법이라는 신화는 실제 세상에서 과학자들이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 순수와는 거리가 먼 많은 진실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어물쩡 넘어간다. 예를 들어, 그 속에는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연구비 신청서를 작성하거나, 학과장, 기업 기부자, 정부관료의 비위를 맞추거나, 연구자금을 얻는 데 필요한 그 외의 활동들을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는지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과학적 방법은 과학자 개개인의 차원에서 편향이 나타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시스템 전체의 편향이 가져올 수 있는 영향에 맞서는 방편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볼프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과학자사회의 성원들 사이에 활발한 실험과 열린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분야에서는 개별 과학자들이 지닌 편향들이 서로 상쇄되어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실험을 통한 검증이 서로 다른 편향을 가질 수 있는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서로 다른 과학자들이 공통된 편향을 공유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편향은 서로 상쇄되는 대신 오히려 증폭될 것이다.

또한 과학적 방법에 대한 표준적 설명은 과학자들이 자신이 연구하는 현상을 정확히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정도에 대해 이상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연구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판된 책과 논문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곡선과 직선들을 그 자신의 실험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영국의 생물학자 고든 헌터의 솔직한 고백이다. '사실, 내가 속임수를 썼다고 비난할 때 가장 크게 공격받는다고 느낄 과학자들은 대체로 논문을 쓸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인용하지 않고 그 중 가장 잘 나온 결과만 선별해 쓴다. 그리고 연구방법에서 조금 덜 엄밀한 이들은 잘 들어맞지 않는 결과를 빼버릴 그럴싸한 이유들을 찾아낼 것이다. 나는 내 동료 데이빗 베어드와 내가 유명한 노벨상 수상자(다름아닌 한스 크렙스 경)와 함께 소 케토시스(ketosis, 동물의 체내에서 지방산이 산화분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케톤체[ketone body]가 과잉 증가하여 혈액이나 오줌 속에 축적된 상태 ― 역주)에 관해 연구했을 때 일어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 네 마리의 소들에서 얻은 실험 결과는 완벽했다. 그러나 몸이 쇠약했던 다섯번째 소에서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한스 경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부가적 요인들이 다섯번째 소에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니 이 소에서 얻은 결과는 빼 버리라고 말해 데이빗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 . . 그런 속임수가 큰 해를 끼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잘못된 결과"를 내게 된 이유를 우리가 파악하거나 추측해볼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한 나머지 실험 전체나 그것의 일부를 거부해 버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연구의 과정이 정직하게 유지되도록 모든 과학 실험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 역시 일종의 신화이다. 실제로는 한 과학자가 해낸 발견들 중 다른 과학자들이 [실험의 반복을 통해] 검토하는 것의 수는 상당히 적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너무 바쁘고, 연구자금은 너무 한정되어 있으며, 새로운 연구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나 커서 [다른 과학자가 한 실험을 반복해 보는] 이런 식의 검토는 그다지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동료심사(peer review)'라는 시스템이 작동하는데, 이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패널이 다른 연구자의 작업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동료심사는 대체로 두 가지 상황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어떤 연구에 자금을 지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연구비 신청 승인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연구가 종료된 후에 그 결과가 과학 저널에 논문으로 실릴 만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과학적 방법에 관한 신화와 마찬가지로, 동료심사 역시 비교적 최근에서야 나타난 현상이다. 동료심사는 19세기 중엽부터 가끔씩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 행해지기 시작했는데, 1차 대전기에 미 연방 정부가 국립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 NRC)를 통해 과학자들을 지원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직 잘 확립된 절차가 아니었다. 과학에 대한 정부지원이 증가함에 따라 어떤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공식적인 시스템을 개발할 필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동료심사의 시스템은 위에서 설명한 과학적 방법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이 '실험이 최고'라는 가정 하에 편향의 제거를 표방한다면, 동료심사는 동료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심사위원들의 편향을 실험이 행해지기 이전과 이후의 과학적 과정 속에 의도적으로 투입한다. 이 말은 동료심사가 꼭 나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동료심사는 통상 정의되는 바와 같은 과학적 방법의 경험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대응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료심사는 이와 아울러 이해관계의 갈등과 일정정도의 독단론을 제도적으로 부추기기도 한다. 1994년 미 의회의 일반회계국(General Accounting Office)이 정부 연구비 지원에서의 동료심사 활용에 대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심사위원들이 연구비 신청자들과 알고 지내는 관계인 경우가 종종 있으며 이럴 때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을 보인다. 여성과 소수집단들은 이 시스템이 과학에서의 '남성 패거리 네트워크(old boys" network)'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공격해 왔다. 또한 이 시스템은 나이가 많은 기성 과학자들에게는 유리한 반면 상대적으로 젊고 독립적인 연구자들에게는 불리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과정 그 자체로부터 이해관계의 갈등이 나타날 수 있는 숱한 기회가 생겨난다. 동료심사의 심사위원들은 많은 경우 익명이며, 이는 곧 자신들이 판단을 내리는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전문화·세분화된 세상에서, 동료심사의 심사위원들이 자기가 심사하는 과학자의 동료이거나 경쟁자인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과학사학자 호레이스 프리랜드 저드슨의 말마따나, '어떤 과학자가 제출한 연구비 신청서의 가치나 제출된 연구 논문의 장점을 판단하는 데 가장 적격인 인물은 다름아닌 그 과학자와 가장 가까운 경쟁자'인 것이다.

1997년 {영국의학저널 British Medical Journal}에 실린 어떤 글에서는, '동료심사의 문제점은 우리가 그것의 결함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를 갖고 있는 반면 장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동료심사가 돈이 많이 들고, 느리며, 편향되기 쉽고, 남용될 가능성이 상존하며, 혁신적 사고를 가로막을 가능성이 있고, 기만행위를 잡아내는 데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동료심사를 거쳐 발표된 논문들에 종종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결국, 이론적으로 보면 동료심사 과정이 과학에서의 실수나 편향에 대한 방패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정부나 기업에 있는 자금제공자의 영향력 ― 이들이 가진 편향은 종종 연구 결과에 영향을 준다 ― 을 걸러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돈이 문제가 되는가?

과학의 결과를 편향시키는 많은 요인들은 노골적인 뇌물공세나 기만행위에 비해 훨씬 더 감지하기 힘들다. '발표된 논문에 작은 편향을 야기하는 왜곡[요인]들이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의사협회지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편집인 드러먼드 레니의 말이다. '영향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이들에게도 예외없이 미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정치나 여타의 외부적 요인들에 대해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기 쉽고, 따라서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돈줄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종종 분개한다. 그러나 과학은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물 개체군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은 특정한 유전적 특질을 가진 개체들이 다른 개체들을 이기고 살아남는 데 미치는 환경 조건들의 영향을 가리켜 '선택 압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과학자집단 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선택 압력이 작용한다. 그 이유는 산업체와 정부의 후원이 정치 풍조의 부침과 복합적으로 작용해 [과학자가 취하는] 어떤 경력이 번성하고 어떤 경력이 쇠퇴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보스턴대학 의대에 있는 데이빗 오조노프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아이디어는 하나의 생명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디어가 성장해 열매를 맺으려면 충분한 자원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아이디어에 물질적 필수요소를 제공하지 않는 적대적 환경에서는 과학의 아이디어가 시들어 죽어버릴 것이다.'

다른 인간의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과학 활동의 발전은 여러 차례의 전진과 후퇴를 경험해 왔으며, 그것이 존재하는 더 큰 사회적 환경에 극히 예민하다. 예컨대 독일은 19세기와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과학에서 세계 최고였지만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과학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나치 하에서 과학자들은 지나치게 '세계주의적인(cosmopolitan)'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문화적으로 뿌리내린 '독일 과학'이라는 관념은 응용과학자들을 '민족적 실천가'들로 탈바꿈시킴과 동시에, 천문학을 버리고 점성술의 지위를 끌어올려 놓았으며, 예전에 이론물리학 연구로 명성을 떨쳤던 독일의 연구기관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구 소련에서도 일어났는데, 여기서는 천문학, 화학, 의학, 심리학, 인류학에서 기존에 수용되었던 이론들이 맑스주의 유물론의 원칙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소련의 경우 가장 악명높은 사례는 멘델주의 유전학을 거부해 소련 농업에 궤멸적 영향을 미친 뤼셍코주의의 부상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에서도 정치적·사회적 운동의 결과로 의심스러운 과학적 경향들이 여럿 등장하였는데, 초(超)심리학이나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와 같은 움직임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창조과학' 같은 것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과학의 방향에 영향을 주었던 가장 극적인 경향이라면 정부와 산업체로부터 나온 연구자금에 과학이 점차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을 꼽아야 할 것이다. 19세기의 '젠틀먼 과학자들'이 재정적 독립을 누리면서 자신의 개인적인 과학적 관심사를 비교적 자유롭게 탐구했던 반면, 오늘날의 주류 과학자들은 부유한 자금제공자들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값비싼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이 빚어지게 된 데는 강력한 정부의 관념이 부상한 것에서부터 과학 연구가 군사화된 것, 그리고 초국적기업들이 연구의 주요 후원자로 등장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경향의 발전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이 시기를 특징지은 전시 생산, 군사 첩보, 정치적 동원 등은 1950년대의 냉전기에 나타난 '군산 복합체'의 전조가 되었다. 또한 2차 대전은 이른바 '거대과학' 시대의 막을 올렸다. 그 이전에 과학자들은 대체로 혼자서, 혹은 몇 안되는 조수들과 함께 자신의 관심사와 호기심에 부합하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접근법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에서] 기대하는 것에 비해 엄밀성은 떨어졌지만, 더 많은 창조성과 독립성의 여지를 제공했다. '거대과학'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 시기에 주요 연구 업적을 남겼던 물리학자 퍼시 브리지먼의 회고를 들어 보면, 그 시절에 그는 '관심사를 자유롭게 다른 쪽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 새로운 관심사가 실험이 되었건, 이론이 되었건, 아니면 근본적 비판이 되었건 간에 상관없었다. . . . 소규모 연구를 할 때의 또하나의 커다란 장점은 자신의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내가 눈을 떴을 때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 아이디어를 써먹으려면 이미 마련해 놓은 정교한 실험 장치들을 몽땅 내다버려야 한다고 치자. 그럴 때에도 이미 해 놓은 일들을 폐기하고 새롭고 더 나은 연구방향을 추구하는 것이 자유로왔다. 만약 복잡한 조직 속에서 대규모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가 이런 결정을 내린다면 사기의 치명적인 저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차 대전이 일어나 대규모의 응용연구에 우선순위가 부여되자, '[그전까지] 자기 연구실에서 자기가 정한 문제들에 관한 [소규모] 연구를 했던 중견 과학자들은 이것[대규모 응용연구]이 애국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보고 참아 넘겼다. 그들은 이를 의무로 부과될 때에만 견디면 되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빨리 빠져나와야 할 그런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과학자들은 독립적인 연구라는 걸 도대체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뭔지조차 몰랐다.'

맨해턴 프로젝트는 '거대과학'을 전례가 없던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려 놓았다. 또한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에서 군사적 고려 때문에 과학자들이 엄격한 검열 하에서 연구를 하도록 강요받음으로써 과학 그 자체의 가정과 사회적 실천이 변형되었다. 스티븐 힐가르트너, 리처드 벨, 로리 오코너는 그들이 공동으로 쓴 핵 시대의 사고와 수사(修辭)에 관한 연구인 {뉴크스피크 Nukespeak}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맨해턴 프로젝트는 비밀에 싸여 있었다. 프로젝트를 위한 도시들이 비밀리에 건설되었고 연구 역시 비밀리에 행해졌으며,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가명을 써서 여행했고, 거기 들어간 자금은 의회로부터 숨겨졌으며, 그것의 존재 자체가 미디어의 눈을 피해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 . .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 ― 즉 프로젝트의 다양한 측면들에 관한 지식이 그것이 생산된 "구획"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제한하는 것 ― 가 이런 전략의 핵심을 이루었다. . . . 언론 검열이 구획화를 보충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의 개발을 두고 '조직화된 과학이 이뤄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추켜세운 적이 있는데, 이는 또한 과학에 대해 역사상 가장 심한 편제(regimentation)를 낳은 사건이기도 했으며 이후 더 심한 편제와 더 많은 비밀의 필요성을 양산했다.

원자폭탄의 개발 이전까지 과학자사회는 극히 적은 예외를 빼면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 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 이전에도 새롭고 더 치명적인 무기를 개발하는 데 과학이 이용된 적이 있었고, 이는 개별 과학자들의 비판적 논평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보통 이상으로 반성적인 과학자들이 곳곳에 존재했는데, 그들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던 일반화된 진보의 철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다수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의해 야기된 도덕적 쟁점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성하게 된 것은 히로시마 이후였다.' 역사학자 루이스 코저의 말이다.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기 이전에도 일군의 원자과학자들이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하려는 노력 ―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 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원자과학자회보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원자 에너지의 민간 통제를 지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성원들 중 몇몇은 과학자들이 군사 연구로부터 완전히 발을 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불어닥친 빨갱이 선풍과 매카시즘이 이런 류의 문제를 제기하는 과학자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연구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공공적인 쟁점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코저는 쓰고 있다. 1961년에 이르면 미국의 총 연구개발 자금의 80% 가량이 군부에 의해, 혹은 강한 군사적 연관성을 지닌 두 개의 기구들 ―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와 미 항공우주국(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 ― 에 의해 직·간접으로 제공되었다.

새로 개발된 무기들의 가공할 만한 잠재력은 맨해턴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비밀주의와 과학 정보의 기밀분류에 관한 정책을 영구적으로 제도화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1947년에 원자력위원회는 직접적인 군사적 중요성이 있는 문제들에 국한되어 있던 비밀 정책을 더욱 확장시켰다. 그들은 이제 법적 책임이 걸린 문제들뿐 아니라 공보(公報)와 관련된 문제 ― 소위 '대중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문제들 ― 에도 비밀 정책을 적용했다. 맨해턴 프로젝트 때 군의관 보조로 활동했던 의사가 인체에 플루토늄을 주입했던 2차대전기의 실험에 관한 보고서를 기밀 해제하려 하자, AEC는 '실험 결과가 작성되고 논의된 냉정하고 과학적인 방식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요청을 기각했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오크리지 국립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앨빈 와인버그는 원자 시대의 과학이 근거하고 있는 가정을 직설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그는 닥쳐올 파국을 피하기 위해 사회에 '핵무기의 부주의한 사용을 미연에 방지할 군사 사제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제단은 '당장이라도 전쟁에 돌입할 수 있는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전쟁을 발발시킬 수 있는 인간의 실수를 경계하는 것 사이의, 그 본질상 불확실해 보이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임무로 하게 될 것이었다. 그가 여기서 '사제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역사상 그 어떤 정부도 1,000년을 버티지 못했다. 오직 카톨릭 교회만이 2,000여년의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해 왔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핵에너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우리가 플루토늄 239의 반감기 한 번만큼의 기간만이라도 살아남을 정도의 지속성을 지닌 국가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참고로 플루토늄 239의 반감기는 약 24,000년이다 ― 역주] 엄청나게 오랜 기간 동안 지속성을 유지할 영구적 전문가 핵심집단이 국가의 형태를 띠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 . . 이 점에서 카톨릭 교회는 내가 마음 속에 두고 있는 바를 가장 잘 구현한 예이다. 특정한 교의를 선포하고 일정정도 강제하며, 그 자체의 장기적인 사회적 안정성을 유지하고, 국가마다 존재하는 카톨릭 교회와 연계를 가지고 있는 중앙 권력으로서 말이다.'

'특정 교의를 선포하고 강제하는 중앙 권력'이라는 생각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갈릴레오로 하여금 교회에 맞서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게 했던 지적 자유와 과학 탐구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와인버그의 논평은 과학의 실천과 철학이 정부 관료제와 군사적 비밀주의의 압박 하에서 얼마나 많이 변질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학은 이제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도그마, 즉 사실상의 국가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강제로 떠미는 일련의 해답 뭉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군사 기밀에서 영업 기밀로

도로시 넬킨은 1984년 저서 {지적 재산으로서의 과학 Science as Intellectual Property}에서 '1950년대에 있었던 대학 연구의 팽창은 주로 군부로부터의 지원이 증가해 빚어진 결과였다'고 썼다. 그러나 20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컴퓨터, 정보통신, 생명공학과 같은 소위 '지식기반' 산업들이 부상하면서 기업의 연구 기획을 다양한 형태로 자극함으로써 거대과학의 상업화가 일어났다. 1970년에는 연구개발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이 모두 149억 달러로 산업체로부터 나온 104억 달러보다 더 많았는데, 1997년이 되면 연방 지출은 627억 달러, 산업체 지출은 1,333억 달러로 관계가 역전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인플레이션을 고려한다면 정부 지출은 거의 증가하지 않은 것에 가까운 반면 기업 지출은 3배 이상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이 증가분은 대부분 대학이나 여타의 대학 부속기구들과 기업간의 제휴관계를 통해 제공됨으로써 사적 연구와 공공 연구간의 전통적인 경계를 흐려놓고 있다. 1980년에 산업체의 자금지원은 미국 대학의 전체 연구 예산에서 겨우 3.8%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산업체의 지원을 받는 것이 거의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으며 교수 개개인들에 대해 산업체와의 연결이나 재정적 혜택을 제공하는 데 그쳤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 때문에 교수들이 대학의 의무로부터 이탈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넬킨은 쓰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 분야들에서 공공자금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많은 교수들과 대학 행정가들은 산업체의 지원을 받는 것에 관대해지고 심지어 이를 열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연구 결과의 소유권과 통제의 문제가 갖는 함의에 덜 비판적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서, 그리고 나서는 적극적으로, 대학들은 생명공학, 농학, 화학, 광산학, 에너지, 컴퓨터과학과 같은 분야들에서 산업체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넬킨은 같은 책에서, '이제 과학자들과 연구기관들이 다양한 유형의 상업적 벤처를 통해 대학 연구의 결과로부터 직접 이익을 취하는 것은 널리 용인된 관행이 되어버렸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주목할 만한 경향이었던 연구의 상업화는 이제 대학 연구의 지배적인 특징으로 탈바꿈했다. 1981년에서 1995년 사이에 미국의 산업체들이 한 명 이상의 대학 연구자와 공동으로 써서 발표한 논문의 비율은 21.6%에서 40.8%로 거의 두 배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는 생물의학 연구 분야에서 더욱 극적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공저 논문의 수가 네 배로 늘었다. 미국의과대학연합(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에 따르면, 대학의 의학 연구에 대한 기업의 후원은 1980년대 초에 5% 정도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몇몇 대학들에서 25%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1999년,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학(UC 버클리)의 식물·미생물학과는 스위스의 생명공학 기업인 노바티스 사와 5년간 2,500만 달러 지원이라는 전대미문의 계약을 체결했다. 노바티스 사는 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이 학과에서 나올 연구 결과의 1/3에 대해 우선적인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 전미공공정책고등교육센터(National Center for Public Policy and Higher Education)는 '버클리의 계약은 미국의 다른 주요 연구대학들이 산업체와 유사한 계약을 추구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그 계약은 돈을 받은 학과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다른 학과에 속한 많은 교수들은 이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였다. 버클리의 천연자원대학 학장이 주관해 이루어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단과대학의 교수들 중 2/3가 계약 조건에 이의를 표명했다.

'우리는 공공 대학에서 앞으로 민간기업의 투자를 끌어오는 교수의 능력이 학문적 자격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는 과학자들이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자세를 갖출 유인을 제거해 버릴 것이다.' 버클리 교수인 미구엘 알티에리와 앤드류 폴 구티에레즈가 대학의 동문 회보에 보낸 편지에서 내비친 우려다. 알티에리가 쌓아 온 그간의 학문적 경력은 '생물학적 방제(biological control)', 즉 농업에서 해충들을 살충제 이외의 수단을 써서 통제하려 하는 분야의 연구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가 씁쓸한 어조로 얘기한 바에 따르면, 노바티스 사로부터 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생물학적 방제 연구에 대한 대학의 지원금이 없어져 버렸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생물학적 방제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연구자들을 양성해 왔다. . . . 살충제가 중요한 환경 문제를 야기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생물학적 방제에 관한 이론 전체가 이곳에서 확립되었다.' 알티에리의 말이다. 또다른 연구자인 UC 버클리의 인류학자 로라 네이더는 노바티스와의 계약이 '아직 종신재직권을 얻지 못한 젊은 교수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 환경에서 연구자와 산업체간의 적절한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매카시즘과 소위 빨갱이 선풍이 몰아닥쳤던 시대를 연상케 하는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이 생겨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그 대상이 추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부였던 반면, 지금은 그것이 무책임한 거대기업이라는 것뿐이다.'

과학 연구에 대한 군부의 지원이 지식 추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여러 구속조건을 수반했던 것처럼, 기업의 지원 역시 과학과 공학 지식을 새로운 '지식 경제' 속에서의 상품으로 변형시키고 있으며, 기업 이사회와 대학 이사회의 구성원간에 서로 얽힌 복잡한 인맥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학들은 학교 로고에 대한 라이센스 부여와 상품화를 통해, 그리고 엄청나게 다양한 대학-산업체간 제휴관계 및 '기술이전' ― 기업이 돈을 대 만들어진 연구 공원에서부터 대학에서 행해지는 약품 시험과 같이 비용을 별도로 지불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 을 통해 돈을 긁어모으려 애쓰고 있다. 그 결과 1990년대 말이 되면 대학의 상아탑은 '기업 대학(Enterprise U)'으로 탈바꿈했다. 대학 교수들, 그 중에서도 특히 첨단기술 분야의 교수들은 자기 실험실에서의 발견을 상품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벤처 기업을 차려 기업가 노릇을 겸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도록 장려받고 있다. 과학이 한때 군부의 시녀였다면, 이제는 월 스트리트의 하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 모델이 아닌 기업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버지니어주립공과대학의 화학자 브라이언 티슈는 말한다. '[기업과의] 협력은 돈을 끌어들일 수 있으니 좋은 것이라는 게 현재의 정당화 논리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 좋은 장비가 생길 것이고 더 많은 학생들을 받을 수 있으니 이건 양쪽 모두 득을 보는 경우(win-win situation)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혜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 학생들을 더 이상 훈련시키지 않게 된다. 단지 용역 연구를 하도록 시킬 뿐이다. 강조점은 학생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서 [학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저선은 어디인가 하는 쪽으로 옮겨지고 있다.'

'우리는 학자들, 그 중에서 특히 과학자들의 경력 궤적이 지적 능력에 따라 판단된 동료들 사이에서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경우를 점점 더 많이 목격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경력은 상업적 성공 가능성에 투자할 돈을 많이 가진 이들에게 자신을 잘 포장해서 파는 기술에 달려 있게 되었다.' 하버드대학을 비롯한 유수의 고등교육기관들을 여럿 대표하고 있는 변호사 마틴 마이켈슨의 진단이다. 1999년에 미국과학진흥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AAS, 미국의 과학 및 공학 학회들의 연합체 성격을 지닌 단체로, 한국에서는 과총이 이에 해당한다 ― 역주)의 후원으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마이켈슨은 '이것은 일종의 골드 러시'라고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 대신 몰래 감추고,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억누르며, 학계의 동료들에게 완전히 공개하기보다는 잠정적 구매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쪽으로 유인이 점점 더 많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또한 오늘날에는 새로운 과학의 내용 ― [주요 내용의 유출을 막기 위해] 아주 일반적인 내용만,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빈약한 형태로 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 을 [전문학회나 학술지 같은] 전통적이고 보다 완전한 학계의 커뮤니케이션 장소에서가 아니라, 최초의 기자회견에서 제공되는 고급 인쇄물이나 미국증권거래위원회의 서류철에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경우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더 잦아졌다.'

산업체와 대학간의 연루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고, 그 중 일부는 특정 연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과학자들은 이윤추구 기업의 이사회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점점 더 많이 받고 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시간은 별로 들이지 않으면서 보수는 매우 좋은 ― 종종 연봉 50,000달러 이상이 보장되는 ― 그런 일거리다. 기업에서 제공하는 다른 특전에는 연구자에게 실험실 장비나 현금을 선물로 준다든지, 강연, 여행, 자문에 대해 후한 보수를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다.

기업으로부터 유입되는 자금은 과거 군부의 자금이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운 학문 연구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비밀주의 문화를 조성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정부의 검열 대신 상업의 언어를 듣는다. 비공개 계약이니, 특허권이니, 지적재산권이니, 지적 자본이니 하는 말들이 그런 것들이다. 기업들은 종종 '독점 정보'를 비밀로 숨겨 경쟁사들이 자사의 영업 기밀에 간섭할 수 없게 하라고 과학자들에게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비밀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연구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활동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게 제너럴 일렉트릭의 연구담당 부회장이었던 고(故) 아서 뷔케의 주장이었다. '연구 결과는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특허로 적절히 연결될 수 있지만, 만약 비밀주의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특허 취득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1994-5년에 걸쳐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의 데이빗 블루멘탈이 이끄는 연구팀은 생명과학 분야와 관련된 3,000여 명의 대학 연구자들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 중 64%가 산업체와 모종의 재정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답했다. 연구팀은 산업체와 연관된 과학자들이 실험 자료의 발표를 지연시키거나 발표 자체를 꺼리는 경향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미국의사협회지}에 발표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설문이 행해지기 이전의 3년 동안 연구자들의 20%가 연구 결과의 발표를 6개월 이상 지연시킨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발표를 늦춘 이유로는 자신들의 발견에 대한 특허 출원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많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의 전파를 늦추고' 싶어 그랬다고 답한 연구자들도 있었다. 논문의 발표를 보류하거나 다른 과학자들과 데이터를 공유하기를 거부하는 경향은 특히 생명공학 연구자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

'과거에는 논문이 발표되고 나면 실험 결과나 시약 등을 요청할 수 있는 게 보통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기밀유지 계약이라는 놈이 버티고 있습니다'하고 노벨상 수상자이자 스탠포드대학의 생화학 교수인 폴 버그는 말한다. '기업에서 연구비를 받을 때 보면 계약 조건에 기업측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겠다는 단서조항을 집어넣어야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런 관행이 과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996년에 미 국립 암 연구소(National Cancer Institute)의 외과부장이었던 스티븐 로젠버그는 연구에서의 비밀주의가 갖는 심각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비밀주의는 의학에서의 암 연구를 가로막고 있다 ― 바로 나 자신의 연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서 비밀주의의 문제는 특히 기업의 마케팅 목적과 일반대중의 알 권리 사이에서 이해관계의 갈등이 일어날 때 심각하게 부각된다. 연구 결과가 자금을 댄 기업의 선호와 어긋날 경우, 기업은 연구 결과의 발표를 억누르는 고압적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다 ― 설사 그것이 공공보건과 공공선을 희생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해도 말이다.

* 출전: Sheldon Rampton and John Stauber, 'The Best Science Money Can Buy,' Loka Alert 9:1 (January 28, 2002). [http://www.loka.org/alerts/loka_alert_9.1.htm] Extracted from Rampton and Stauber, Trust Us, We"re Experts: How Industry Manipulates Science and Gambles with Your Future (New York: J. P. Tarcher, 2001), chap. 8.

** 존 스타우버는 비영리 공익단체인 미디어와 민주주의 센터(Center for Media and Democracy)의 설립자이자 소장이다. 그와 셸든 램튼은 센터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PR Watch: Public Interest Reporting on the PR/Public Affairs Industry의 원고를 쓰고 편집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들은 Toxic Sludge Is Good for You!와 Mad Cow U.S.A.라는 책을 같이 썼다. 두 사람은 모두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 살고 있다.

셸든 램튼 & 존 스타우버
2002/03/29 00:00 2002/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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