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가 끝난 뒤에 그는 결코 자신이 "자유로운 거래자"가 아니었다는 것, 자신이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시간은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된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사실상 그의 흡혈귀는 "아직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네들을 괴롭히는 뱀에 저항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동료들을 규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 자유의지로 자본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자신과 자기종족을 죽음과 노예상태 속으로 팔아 넘기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방지책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 칼 맑스

2000년, 수많은 과학기술 노동자들은 실리콘 벨리의 꿈을 안고 벤처로 향했다. 제도권 언론을 통해 스톡옵션, 성과급제로 "돈벼락"을 맞고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즐겁게 일한다고 하였고, 혹자는 대기업의 횡포에 치를 떨며, 혹은 재벌의 독점을 막을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을 안고 벤처로 향한 이들도 있었다.

화려한 프리랜스 혹은 벤처로 독립한 이공계 출신 과학기술자들은 각 여성잡지에 신랑감 후보 1위로 등급하면서, 그 자부심은 의사와 변호사도 부럽지 않았다. 그들은 전세계 노동자, 민중들이 시에틀에 모여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해 힘차게 투쟁할 그때에도 노조 무용론, 연봉제, 비정규직, 노동 유연화 정책 등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에 앞장섰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벤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사뭇 달랐다. "수습 3개월 동안 40만원, 수습을 마치면 55만원, 입사 2년이 된 대리가 65만원이라는 임금에, 별다른 수당조차 지급되지 않는 초과근무, 야근, 휴일근무가 벤처, 병역특례라는 미명으로 자행되고 있다(주1)"는 것이었다.

2002년, 벤처 거품은 미국의 불황과 한국 내 수많은 "게이트"들에 의해 상당히 빠졌다. 상당수의 과학기술 노동자들이 그나마 행복한 고민하면서 향했던 벤처로의 발길은 뜸해졌고, 다시 대기업과 정부출연연구소 혹은 국가고시(주2)에 매달리고 있다. 그나마 정규직으로 취직한 과학기술자들은 행운아였다. 이도 저도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은 비정규직(주3)도 마다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과학기술자들은 두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의사, 변호사의 호화로운 생활을 억울해 하며 "과학기술자여 일어나라"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특권적 생존권을 요구하는가 하면, 일부 과학기술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실리콘 벨리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리콘 벨리는 현실도 과학기술자들이 요구하는 특권적 생존권을 보장해주지는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과학기술자들은 단기취업 비자(H-1B)(주4)를 받아 미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단기취업 비자 노동자들은 다른 회사로 옮길 경우 1만-2만 달러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당초 고용된 직장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장기간 근무해야 하는 열악한 근로 환경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 일각에서는 단기취업 비자를 노예문서에 비유하기도 한다.(주5)

첨단산업의 이면

자본가들은 첨단산업에서 기술변화가 불확실하고 빨라 미래의 필요숙련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예전처럼 노동자 재교육을 통해 필요 인력을 확보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시간상의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간의 경쟁에서 버틸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장기간의 직업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신규 채용하거나 기존의 노동력을 재배치해야 하고 또한, 호황기에도 기존의 인력을 해고하고, 새로운 유형의 노동력을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첨단기술분야의 기업들은 PC의 업그레이드 부품을 구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첨단분야 일자리를 채우겠다고 주장(주6)하고 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과학기술 노동자들을 스톡옵션과 같은 대박의 환상으로 마취시켜, 연봉제, 비정규직 등 노동유연화 정책을 과학기술자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자본측에서 수행했던 모든 교육과 복지들은 개인과 사회에 떠맡겨 버렸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자들의 심한 박탈감은 첨단 산업에 만연해 있는 나이 차별(age discrimination)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평등고용기회위원회(the Equal Employment Opportunity Commission)의 보고에 따르면,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여 20년 경력을 가진 사람은 당시 겨우 19%만이 프로그래머로 남아있는 실정(주7)이며, 프로그래머 중 나이가 40이 넘은 노동자들의 퇴출률은 40이하의 노동자 퇴출률의 10배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기술자들의 미래는 현재 노동을 더욱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은 필연적으로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지만, 첨단분야에 나타나는 심각한 실업률과 고용불안 그리고 대박의 거짓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반자본운동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한 동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아마존닷컴이 지난 해 1월 광범위한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시애틀에 있는 서비스센터를 철수한다고 발표했을 때, 이제 막 태어나려던 기술 인력들의 노조 결성 의지도 약화되었다. 2001년에 온라인 식품업체인 웹밴(Webvan)과 온라인 전자 리뷰어인 이타운닷컴(Etown.com) 두 업체 역시 회사가 문을 닫을 때 노조 결성 노력도 끝나 버렸다. 74만명의 노조원을 갖는 미국통신 노조 역시 조직화에 어려움에 처해있기는 마찬가지이다(주8). 실업을 지렛대로 노동유연화 임금삭감을 강요하는 자본의 위협 앞에서 실업공포는 과학기술자 사회를 왜곡시켰다. 과학기술자는 노동의 재분배, 더 나아가 노동사회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통한 현실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굴욕과 양보, 경쟁과 배신을 거듭하며 유례없는 자본권력의 전횡을 지켜보는 처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특권적 지위를 누렸던 과학기술자들은 이제, "상층" 과학기술자들의 일부만 남기고 정보 지식의 생산자들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지력(知力)을 자본가에게 팔 수밖에 없는 "하층" 과학기술 노동자로 급속히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자여 단결하라!

이렇듯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던 과학기술 전문인으로서의 특권은 신자유주의가 모두 가져가 버렸다. 과학 기술분야의 비정규직 노동자 증가, 불안정 고용, 연구의 질이 아닌 성과중심주의 등으로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사회적, 물질적 지위는 하락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과학기술은 사적자본의 지배하에 더 많이 놓이게 되었다. 이제 과학기술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권과 과학기술의 사회성 획득을 동시에 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에 처해 있다. 따라서 앞으로 과학기술 노동자들에게는 과학기술 (부문)운동을 노동계급의 이해와 동일한 선에서 제기하고 투쟁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최근 과학기술자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연구할 권리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모순에 대항하기보다는 그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적 생존권의 부활에 집착하고 있는 면이 강하다. 이런 류의 주장과 행동은 의사 파업 때처럼 결국 대중들로부터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 낼 수 없을 뿐더러, 성공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외쳐야 한다.

'과학기술자들이여 신자유주의 반대를 기치로 노동계급과 함께 단결하라'

표절 문건

1. 최형익, 『칼마르크스의 권리 정치이론』, 박사학위 논문, 1999.

2. Simon Clarkem The Globalisation of Capital, Crisis and Class Struggle, Capital and Class, 2001, 김공회 역(진보 저널 홈페이지)

3. 이환식, 「지식사회의 이율배반(Antinomy)」, 진보평론 2000년 가을호

4. 김영식, 「실리콘벨리의 벤쳐, 한국적 벤쳐, 그리고 노동자」, 진보평론 2000년 가을호

5. 김해민, 「"청년과학기술자 겨울캠프"에 다녀와서」, 노동자의 힘 2002년 창간호

6. 김성구, 「의사들의 폐·파업사태, 왼쪽에서 보는 법」, 사회진보연대 10월호

* 이 글은 지난 2월 10일자 <한겨레신문> 에 실린 여인철 박사의 '과학기술인이여 일어나라'의 글을 읽고 필자의 의견을 나름대로 적어본 글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part I은 여인철 박사의 글이다. 아울러 이 글은 월간 <사회진보연대> 3월호에 기고한 글을 재편집하였음을 밝힌다.

주1) 멀티데이터 노동조합 http://www.multidata.or.kr

주2) 서울대, 연고대의 이공계 학생중 36%가 각종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공계 인력공급위기와 과제' CEO Information(제 341호) 삼성경제연구소 2002년

주3) 2001년 8월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전체 비정규직이 1158명에 이르고 그 중 학연생이 783명에 이르고 있다는 점에서 출연기관의 비정규직 사용 실태가 증가하고 있다. 2002년 2월 청년과학기술자 겨울캠프 자료집

주4) 미국이 자랑하는 탁월한 기술력의 상당 부분은 이주노동자들 덕분이다. 1995∼98년 실리콘 밸리에서 생겨난 IT 관련 창업회사들 중 3분의 1은 인도와 중국계 이민이 설립한 것이다. WORLD AFFAIRS 제 429호 2000.5.17

주5)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이 노예 문서인 단기 취업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부류들도 있다. 아~ 이땅의 과학기술자들이여~

주6) 한국 노동연구원, [디지털 경제와 인력개발], 1999년. http://networker.jinbo.net 자료실.

주7) 토목기사(Civil engineer)의 경우 학교를 졸업한지 20년 경력을 가진 사람중 57%가 아직까지 전공을 살리면서 일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19%는 확실하게 낮은 수치이다.

주8) ZDnet, 2002년 01월 15일

김영식 | 월간 [사회진보연대]편집위원
2002/04/29 00:00 2002/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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