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과 시민참여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2/07/02 00:00
그 근거와 사례
1. 들어가는 말
광우병 문제로 호된 곤욕을 치렀던 영국 상원의 특별위원회는 2000년에 발간한 '과학과 사회' 보고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과학과 사회의 관계는 지극히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의 과학은 흥분과 무궁한 가능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정부에 주어지는 과학적 조언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는 BSE로 암벽에 부딪혀있는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은 생명공학과 IT의 빠른 발전에 대해 심기가 불편한 형편이다 - 심지어는 일상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과학기술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신뢰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는 영국 사회와 영국의 과학 모두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보고서는 과학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직접적인 참여가 이제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과정의 일부(normal and integral part of the process)'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작성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영국의 과학사회학자 앨런 어윈은 보고서가 '대화의 새로운 분위기(new mood for dialogue)'를 중요한 논제로 제기하면서 1985년 영국왕립협회가 발표했던 보고서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에서 표현되었던 전통적인 과학-대중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크게 진일보한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을 둘러싼 의사결정에서 대중들이 수행하는 역할과 지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국 상원의 '과학과 사회' 보고서는 오늘날 과학과 대중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괄목할만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유전자 조작 식품(GMOs)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으로 등장했고, 1997년 복제양 돌리의 탄생은 언론의 영향으로 인간복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비화하면서 생명공학 기술을 중심으로 윤리적 논쟁, 과학정책, 규제 입법 등에 대한 폭넓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은 신뢰 위기를 극복하고 과학과 대중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른바 '대화의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에서 시민참여는 선택이 아닌 필수의 요소로 간주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또한 대중들의 우려와 비판은 그 깊이와 세기, 초점을 변화시키면서 그 영역을 과학기술의 영향에서 과학 연구 그 자체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최근 과학기술정책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시민참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왔다. 넓은 의미에서 공공 참여(public participation)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시민, 이해당사자, 그리고 특정한 결정이나 문제와 연관된 이익집단과 기업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는 교환의 장'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참여는 시민, 과학기술자, 정부, 시민단체, 언론 등이 모두 중요한 행위자로 포괄되는 매우 넓고 복합적인 과정이다.
이 글은 사례 연구를 통해 시민참여가 가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살피고, 생명공학의 시민참여가 실제로 정책결정에 영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기본적인 논거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재조합 DNA 논쟁과 시민참여
재조합 DNA(recombonant DNA) 기술은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1953년의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필적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기술은 1973년에 스탠리 코헨(Stanley Cohen)과 허버트 보이어(Herbert Boyer)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종의 경계를 뛰어넘는 유전자 이식(gene-transplantation)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재조합 DNA 기술은 탄생의 시점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생명공학의 대중 논쟁과 시민참여가 처음 시도되는 중요한 장을 마련해주었다. 1970년대 초반의 몇 년 동안 진행된 이 논쟁 과정은 과학기술의 시민참여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쟁점과 주제들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과학자들의 주도로 시작된 위험에 대한 경고에서 시작되어 케임브리지시의 시민참여 실험에 이르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성과와 한계를 살펴볼 것이다.
1)재조합 DNA 논쟁의 개요
논쟁의 발단은 재조합 기술을 연구한 과학자들의 경고에서 시작되었다. 이 경고는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제기되었다. 하나는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의 로버트 폴락(Robert Pollack)이 스탠퍼드 대학의 폴 버그(Paul Berg)와 그의 연구팀이 수행하고 있던 실험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이어와 코헨이 실험 결과를 발표한 고든 회의(Gordon Conference on Nucleic Acids)였다.
이 회의는 새로운 기술이 실험실의 연구자들과 일반 대중에게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국립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 NAS)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NAS는 버그, 제임스 왓슨, 데이비드 볼티모어 등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는 1973년에서 1974년까지 이 문제를 검토했고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에게 공개서한의 형태로 연구의 '자발적인 중지'를 제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75년 2월에 아실로마(Asiloma)에서 '이 영역에서 이루어진 과학적 진보를 리뷰하고 재조합 DNA 분자의 잠재적인 생물위해를 다룰 수 있는 보다 나은 방법을 토론하기 위해 전세계의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아실로마 회의는 분자생물학자들이 중심이 된 전문가 회의였고, 회의에서 이루어진 주된 토의 내용은 엄청난 과학적 가치가 예상되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예견되는 위험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기술적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참석자들은 위험을 임의적으로 분류하고, 발생 가능한 위험을 막기 위한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회의 보고서는 NAS에 제출되었고, 검토를 통해 같은 해에 과학 잡지 <사이언스>에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는 최초로 새로운 기술의 잠재적인 위험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위험을 다루기 위한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는 실험설계에서 필수적인 고려사항으로 봉쇄(containment)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쇄
가 예상되는 위험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이드라인의 작성은 미국립보건원의 재조합 DNA 자문위원회(RAC)가 맡았다. RAC 가이드라인은 1976년 6월에 발표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주된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연구의 잠재적 위험 평가를 위한 행정적 책임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수준의 봉쇄를 실행하는 절차였다.
2)논쟁의 대중적 확산과 연관 집단들의 움직임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이드라인은 과학자, 환경운동가, 그리고 지역주민 등의 다양한 집단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우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신셰이머(Sinsheimer), 컬럼비아 대학의 어윈 샤가프(Erwin Chargaff)와 같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실수와 부주의로 인해 재조합 생물이 실험실을 벗어나 주거지역과 자연으로 방출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복구불가능한 영향을 중심적으로 제기했다. 또한 환경운동단체와 과학자 단체는 재조합 DNA 논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은 가이드 라인에 대한 평가 이전에 먼저 모라토리엄이 선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에라 클럽(Siera Club)도 연방 정부에 의해 직접 감독되고 가장 높은 등급의 봉쇄가 이루어지는 소수의 연구소에서 실험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어떤 목적으로든 재조합 DNA를 생성하는 행위를 반대했다.
이들 단체들은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초기의 논의가 이후 여러 지역 공동체의 대중논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대항 담론을 생산하고 쟁점을 제기하는 논쟁 촉진자(facilitator)의 역할을 했다. 또한 이후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케임브리지 실험 심사위원회'
NIH 가이드라인이 발표되자 여러 지역에서 격렬한 대중논쟁이 벌어졌다. 시민들의 우려는 주로 자신들의 지역에 있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재조합 DNA 실험의 안전성 문제였다. 케임브리지에서
DNA 재조합 연구가 대중적인 쟁점이 된 것은 하버드대학교가 낡은 실험실 하나를 개조해서 P3 수준의 DNA 재조합 연구시설을 만들려는 계획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계획을 다룬 지역 신문들의 보도가 케임브리지 시장 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그는 시 의회차원의 청문회를 소집했다. 그 지역의 과학자들로부터 이틀 간에 걸쳐 판단의 근거로 삼을 상반되는 증언들을 들은 후, 시의회는 투표를 통해 NIH가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는 단계(P-3)로 분류한 모든 연구를 일시적으로 중지하도록 결정했다.
바바라 컬리턴은 <사이언스> 1976년 7월 23일자에서 '재조합 DNA; 케임브리지 시의회,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1976년 7월 7일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 의회 회의실은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7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 대개는 조세나 도로 폐쇄 등 시의 일상사를 다루었던 - 특정 형태의 재조합 DNA 연구의 안전성이라는 현대 생물
학의 가장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생물학자가 아닌 시민들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는 결국 5 대 3의 표결로 연구자들에게 향후 3개월 동안 '양심에 따른' 일시중지를 실행할 것을 요구했고, 재조합 DNA 연구를 포함해서 이후 이루어질 다른 종류의 연구의 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조사할 항구적인 기구로 과학자와 시민으로 이루어진 재조합 DNA 실험 심사위원회(Cambridge Laboratory Experimentation Review Board, CERB)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
처음에 시의회는 다른 지역들처럼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 구성을 고려했지만, 구성원 임명의 책임을 맡은 행정 담당관은 보통 시민들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결정했다. 그 이유는 과학자들로 위원회를 구성할 경우 분열이 일어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민 위원회를 구성한 근거는 엄밀한 실용적인 관점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우연적이기도 했다. 시민패널은 1976년 여름 케임브리지시 의회의 시 행정 담당관이 임명했다. 시민패널의 구성원 선발의 일차적인 기준은 활동중인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과학 엘리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었고, 시민들의 의사를 나타낼 수 있는 대표성이 배려되었다. 따라서 인종과 지역의 다양성이 고려되었고 과거에 DNA 논쟁에 관련되지 않았던 사람들로 선발되었다. 석유회사 경영자였던 위원장을 제외한 7명의 위원은 의사(2명), 간호사, 수녀, 지역 활동가, 공학자, 그리고 도시 정책학 교수였고 이들은 8월에 첫 모임을 가질 때까지도 재조합 DNA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배경지식 획득을 위해 많은 자료가 제공되었고 35명 이상의 전문가들로부터 상반되는 관점의 증언을 청취했고, 무수한 토론을 가졌다. 회의는 1주일에 두차례씩 총 1백시간 이상 진행되었고, 그중 절반은 과학자들로부터 찬반 양편의 진술을 듣는데 할애되었다.
1977년 1월 5일 CERB는 5개월 간에 걸친 활동 끝에 실험을 허가하기 전에 NIH 규제지침에 별도의 안전조치를 추가할 것을 권고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여기서의 안전조치는 실험실에 대한 상시적 모니터링과 함께, 변형된 유기체가 임상적으로 쓰이는 항생제에 대해 저항성을 갖는지 여부를 지속적으로 반드시 검사할 것, 그리고 유전자 접합 실험에 대해서는 최고 수준의 생물학적 봉쇄를 도입할 것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Krimsky, 1992). 이 권고안은 1977년 2월에 케임브리지시 조례에 포함되어 통과되었다. 이것은 미국 최초의 재조합 DNA 입법이었다. 이후 1978년까지 전국적으로 재조합 DNA의 안전 표준과 위반시 처벌 조항을 포함한 16개의 독립적인 법안들이 제정되었다.
3. 평가와 분석
- 시민참여의 가능성과 근거
재조합 DNA 논쟁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CERB의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려 25년전에 미국의 한 작은 대학도시에서 이루어진 5개월 남짓한 CERB의 활동은 생명공학에 대한 시민참여라는 주제에서 제기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슈를 드러내주고, 생명공학의 시민참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다.
1)능력과 공정성
CERB의 활동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의 과학자와 정책결정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후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다. '사이언스'를 비롯한 과학언론들이 CERB의 활동을 비중있게 다루었을 뿐아니라 TV, 신문 등 일반 매체들도 비상한 관심으로 취재에 열을 올렸다. 케임브리지 실험은 과학정책 결정에 시민이 참여한다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뿐더러 성공적인 사례로 간주되었다.
①평범한 시민들의 합리적인 능력
거의 모든 학자들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내린 근거는 케임브리지 시민패널의 능력과 공정성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인들로 이루어진 시민패널이 DNA 재조합 기술이라는 당시로서 생소하고 복잡한 전문적 내용을 5개월에 가까운 기간 동안 토론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넬킨은 'CERB는 [재조합 DNA 연구의] 위험과 이익이 과학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인(layman)들의 문제이며, 일반인들이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고, 스스로를 교육하고, 공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원칙 하에 조직되었다. 전원이 비과학자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4개월 동안 DNA 연구의 위험성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을 놓고 토론을 벌였고, 지역적인 조사를 한다는 조건으로 NIH의 연방 가이드 라인을 수용했다.'라고 평가했다. 시민패널들이 수개월에 걸쳐 자기학습, 전문가들의 증언 청취, 토론과 숙의를 통해 내린 결론은 일부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NIH 가이드라인의 조건부 수용이라는 시민패널의 결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된다. 우선 고든회의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일반 시민들이 과학적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큰 우려를 제기했다. 대학과 과학자 단체들은 지역 차원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실험실의 안전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위협하는 '과도한 행동'으로 간주했고, 처음에 위험성을 제기했던 일부 과학자들은 초기의 우려가 지나친 것이었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또한 전국에서 대중논쟁과 입법 움직임이 일어나자 과학자들은 '그들이 더욱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것, 즉 과학 연구에 관한 의사결정에 대중이 개입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자신들간의 기술적 의견불일치를 옆으로 제쳐두기까지' 했다. 한편 반대로 CERB의 활동이 계속되는 동안 대학측을 비롯한 지지자들의 조직적인 영향력으로 시민패널의 결정이 지나치게 수용일변도로 기울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체적인 평가는 시민패널들이 과학기술의 정책결정에 참여한다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재조합 DNA 실험의 위험성을 지역사회의 다양한 입장들을 고려해서 훌륭하게
다루었고,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서 연구 진행을 허용하는 합리적인 결정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②공정한 의사결정; 시민패널 방식의 성과와 한계
CERB는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으며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형성과정의 특성은 절차적 공정성이 획득되는 과정에도 상당부분 투영된다. 이 점은 생명공학의 시민참여에서 공정성의 실현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많은 함축을 가진다.
처음에 케임브리지시는 앞에서 언급했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의회는 첫째, 문제의 복잡성을 인식했고, 둘째 과학자들 사이에 이미 위험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의회는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패널을 구성해서 새로운 기술이 지역 공동체의 공중보건에 미칠 수 있는 위해를 조사하도록 결정했다. 따라서 CERB의 형성과정에서 이미 지역주민들로 이루어진 시민패널의 공정성에 대한 가정이 내재되었던 셈이다.
시민패널은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관점을 포괄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선발되었고, 시민패널 위원장 댄 헤이스(Dan Hayes)가 말했듯이 모든 결정은 외부 과학자들의 견해가 아닌 시민 패널의 구성원들 자체에서 이루어졌다. 토론이 이루어지고 권고안을 마련하는 과정은 전반적으로 민주적, 합리적 절차를 통해 진행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연방차원의 입법을 추진했던 케네디 상원의원도 CERB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시의회와 시민자문위원회는 다른 지역이 따를 수 있는 패턴을 설정해주었다'라고 평가했고, 대중이 지식의 적용에 대한 결정 뿐아니라 '과학 개발이라는 근본적인 수준에' 대한 의사결정에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가들은 케임브리지 사례를 과학적 의사결정에 시민이 참여하는 모형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케임브리지시가 재조합 DNA 실험을 허용할 것인가라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실용적인 방안으로 채택했던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민위원회'라는 방법은 공정성과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최소한 정치가, 일반 대중, 그리고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시민패널의 논의진행과정은 내외적으로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한계는 앞서 언급했던 형성과정의 자연발생성에서 투영되는 측면과 시민패널 방식의 고유한 한계의 양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 한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재조합 DNA 연구를 지지하는 측의 과학자들의 영향력과 비판적 과학자들의 영향력의 비대칭성. 지지 입장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저명한 과학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자청해서 케임브리지시의 공청회에 참석했다. 또한 지지측은 연구의 성사를 원하는 하바드와 MIT의 제도적인 뒷받침과 대대적인 선전과 로비를 기반으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벌인 반면, 반대측은 조직력과 지명도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민중을 위한 과학' 보스턴 지부와 같은 단체가 있었지만, 조직적 활동의 수준은 아니었으며 모임과 역할분담은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둘째, 시민패널 내부논의의 위계화. 9명의 시민패널 중에서 가장 많은 발언을 하고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두 명의 의사였다. 이들은 초기과정에서 실험을 지지하는 입장을 나타냈고, 이후 전체 논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터프츠 대학의 교수였던 크림스키가 비판적 입장을 고수하며 고군분투했고, 나머지 사람들의 발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특히 수녀와 간호사였던 두 명의 여성은 이 위계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했다. 다시 말해서 남성-전문가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이 점에 대해서는 크림스키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 시민패널들에 대한 사전 교육 프로그램이 없어서 각자 스스로 과학적 주제를 친숙하게 익혀야 하는 부담이 있었
고, 따라서 시민위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해 수준에 상당한 차이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 시의원과 CERB는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냈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과정에서 시의원들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차적인 임무가 연구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기관[NIH]이 그 연구를 효율적으로 규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대칭적으로 제공되는 정보와 로비 압력 속에서도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우연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에서 채택된 것이기는 하지만 케임브리지시가 초기에 선택한 '평범한 시민들에게 결정을 맡긴다는 기본 설정'이었다. 이 설정은 크림스키가 이름 붙인 '시민법정'이라는 공간을 열어주었고, 그 속에서 시민들은 찬반 입장의 과학자들의 견해를 청취하면서 토론과 숙의를 통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시의원과 시민패널들은 시민참여의 실험 과정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자신들의 앞에 놓인 문제의 본질과 그 속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 시민은 후일 상원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앞에 놓인 진정한 문제는 재조합 DNA 연구가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대중의 알 권리이고, 대중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2)위험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차이
무엇보다 CERB 활동이 생명공학에 대한 시민참여의 필요성과 가능성의 근거를 가장 분명하게 제기한 대목은 위험 인식(risk perception)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NIH 가이드라인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제기된 비판의 핵심은 재조합 DNA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면서 연구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의 이해관계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 집단 내에서도 위험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지만, 위험 인식과 평가의 근본적인 차이는 CERB의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전문가의 위험평가(risk Assessment)와 비전문가의 위험평가의 차이이다. 과학자들의 위험인식은 최초의 문제제기인 아실로마 회의에서부터 줄곧 재조합 DNA 연구가 야기할 수 있는 생물학적 재해라는 테크니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NIH 가이드라인도 물리적, 생물학적 '봉쇄 절차'라는 기술적 해결로 귀결되었으며,
CERB의 규제 움직임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논의를 과학적 근거로 한정시켰다. 반면 시민패널의 경우에는 지역공동체의 관점에서 시민들이 실제로 입을 수 있는 위험과 불안감과 같은 사회적 문제가 폭넓게 고려되었다. 이른바 '우려의 범위'가 달랐던 것이다.
또한 재조합 DNA 기술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식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났다. 연구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초기에는 문제제기자의 입장에 섰지만, 논쟁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위험이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입장으로 선회한데 비해 시민패널은 NIH 가이드라인이 과학자들의 자의적인 위험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험을 통한 평가를 요구했다. 과학자들의 추측이나 예상이 아닌 실제 실험을 통한 위험 평가를 제안한 것은 CERB가 유일한 경우였다.
4. 나가는 말
- 상징성을 넘어 실질적인 영향으로
CERB의 활동은 과학기술의 정책 결정에 시민이 참여한 최초의 성공적 사례로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과학자들의 강력한 반발과 로비로 재조합 DNA 연구에 대한 연방 차원의 규제 입법은
실현되지 못했다. 시민참여와 연방 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케네디 상원의원도 결국 과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법안을 철회했다. 모라토리엄은 해제되고 봉쇄 수준도 점차 약화되었다. CERB가 거둔 실질적인 소득은 NIH RAC가 케임브리지 사례를 통해 위원회에 과학자가 아닌 위원들을 포함시킨 정도였다. 따라서 재조합 DNA 실험의 규제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CERB의 성공은 실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수준에 가깝다.
그러나 CERB의 활동은 그 성과와 한계를 통해 시민참여가 상징성을 넘어 정책적 의사결정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여러 가지 함의를 제공한다.
첫째, 이 실험은 시민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설정이 주어진다면 시민들이 능력과 공정성을 획득해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그 동안 결여되었던 것은 '대중의 능력이 아니라 대중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임을 확인해주었으며, CERB와 같은 비전문가로 이루어진 시민 위원회 방식이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케임브리지의 경우 재조합 DNA 실험의 위험성에 대한 결정을 시민 위원회에 위임한 결정은 이후 CERB의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중요한 설정(lay setting)을 제공했다. 케임브리지 사례가 비록 실질적인 영향의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드러냈지만, 이러한 설정 자체는 매우 유효했다. 이러한 설정의 핵심은 시민의 능력을 믿고 그들
에게 권한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를 통해 시민패널은 정보를 획득하고, 토론하고, 숙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둘째, 대항 전문가와 전문가 단체의 중요한 역할. CERB의 사례를 통해 비판적 입장의 과학자들과 '민중을 위한 과학'과 같은 전문가 단체가 시민참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입증되었다.
비록 지지 입장의 과학자들에 비해 덜 조직적이었지만, 그들은 시민패널들에게 대항 담론을 제공해주고 해당 주제에 대한 사회적, 윤리적 고려의 지점들을 제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 시민운동의 필요성. CERB 활동이 상징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근원적인 문제는 재조합 DNA 실험을 둘러싼 논쟁이 대중적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CERB가 미국 전체의 관심을 얻었던 배경도 재조합 DNA 논쟁이 전문가 논쟁에서 여러 지역의 대중 논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초기에 과학자들이 장악했던 위험 평가와 제어의 주도권이 CERB로 이양되었던 것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중적 논쟁과 규제의 움직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대중 논쟁이 이어지지 못하자 주도권은 급속하게 과학자와 정치가들에게 넘어갔고, CERB의 영향은 상징적 의미로 국한되었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양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CERB의 사례는 전문적 지식이 없는 평범한 시민이 과학기술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결핍모형이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과학자와 대중 사이에 권력의 비대칭성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내려진 결정이 정책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상징성은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자칫 현상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으며, 환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생명공학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의사결정에 시민들이 참여해서 레토릭이나 상징의 수준을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시민-대항전문가-대중운동이라는 여러 층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없는 상태에서의 시민참여의 제도화는 자칫 체제내화로 이어질 수 있다.
CERB의 사례는 생명공학의 시민참여의 가능성과 한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케임브리지 시의원 데이비드 클렘(David Clem)이 한 청문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케임브리지 모형은 하나의 사례, 완벽하지 않은 사례에 불과하다 . . .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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