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막 지나온 지난 20세기를 조망하는 관점은 무척이나 다양할 수 있을 테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를 의학과 의료의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들은 인체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연구기법으로 무장하고 각종의 첨단기기들을 동원함으로써 진단이나 치료가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했던 많은 질병들에 대해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전까지 특효약이 존재하지 않던 세균감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터준 항생제는 20세기 의학이 낳은 가장 큰 경이 가운데 하나였다. 2차대전기에 설퍼제와 페니실린이 대량생산되어 위력을 발휘한 것을 시작으로 속속 등장한 다양한 항생제들은 백신의 개발 및 예방접종의 보편화와 아울러 선진국에서 감염병의 발병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1960년대에 감염병이 사실상 정복되었다는 낙관을 가져왔고, 1969년 미국의 공중위생국장 윌리엄 스튜어트는 "전염성 질병이 이제 끝이 보인다"고 선언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의 주요 제약회사들은 신규 항생제 개발 연구를 사실상 중단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낙관이 지나치게 성급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이내 나타났다.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결핵. 말라리아, 매독 등 한때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졌던 감염병들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이는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바뀌었는데, 그 배경에는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항생제내성 세균들이 등장했다는 두려운 현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항생제에 내성(耐性)을 가진 세균의 존재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페니실린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1950년대 초반에 이미 감지되었던 문제였다. 당시 의사들은 항생제 투약을 받은 일부 환자들에서 처음에 병이 낫는 듯 보이다가 얼마 안되어 더 심한 상태로 재발하는 현상을 종종 목격했고, 그 이유가 항생제 투약에 저항해 내성을 갖게 된 세균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대부분의 경우 항생제내성 세균을 굴복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항생제가 여전히 있었고, 그 덕분에 인간과 미생물간의 "진화적 군비경쟁(evolutionary arms race)"에서 인간

은 한 걸음 앞서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다중약물내성 결핵균과 같이 여러 가지 항생제에 동시에 내성을 가진 세균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위기의 징후가 드러난 것은 1990년대 초, 가장 강력한 항생제이자 최후의 보루로 생각되었던 반코마이신(vancomycin)에 내성을 가진 장구균(腸球菌)이 발견되었을 때였다. 장구균은 인체의 장내에 흔히 서식하는 세균으로, 면역 기능이 약해진 사람의 혈류 속으로 들어갔을 때는 패혈증과 같은 치명적인 감염병을 일으킬 수 있지만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들은 장구균의 반코마이신 내성 유전자가 황색포도상구균과 같이 인간에게 치명적이면서 반코마이신 이외의 항생제에 이미 내성을 지니고 있는 다른 세균들로 전달되는 최악의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이는 1996년과 1997년에 반코마이신내성 황색포도상구균(VRSA, 일명 '슈퍼박테리아')이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서 발견됨으로써 현실로 탈바꿈했다. VRSA에 감염된 환자들 중 몇 명은 운좋게 다른 항생제로 치료가 가능했지만, 다른 몇 명은 어떠한 항생제도 듣지 않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간 강건너 불구경처럼 여겨지던 항생제내성 세균에 대해 새로운 대중적 각성을 불러오는 계기로 작용했다.

'비상사태'에 직면한 각국의 정부와 의료계는 항생제내성 증가의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여기서 항생제내성의 확산을 가져오는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 것은 두 가지였다. 우선 과거부터 줄곧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항생제 오·남용 문제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앞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항생제내성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미생물 개체군 내의 돌연변이 및 개체간의 내성유전자 전이에 의한 것으로, 우리가 질병 치료를 위해 항생제를 사용하는 한 결코 완전히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간 의료계는 감기와 같이 항생제가 전혀 효과가 없는 바이러스감염 질병에 항생제를 불필요하게 처방함으로써 세균들을 항생제에 더 많이 노출시켜 내성의 발달을 촉진해 왔는데, 이런 간단한 사실을 뒤늦게서야 의료계와 일반대중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좀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지고 있는 쟁점은 인간이 아닌 가축류에 질병 치료나 예방 차원이 아닌 성장촉진 명목으로 항생제를 투여하는 관행의 문제이다. 미국의 경우 전체 항생제 사용량의 40% 이상이 가축류에 투여되고 있는데, 이 중 대부분은 가축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사료에 섞어 먹이고 있다(항생제 투여가 실제로 가축의 성장을 촉진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지의 문제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문제는 일부 가축용 항생제의 경우 인간에게 사용되는 항생제와 화학적으로 유사해 세균들이 이에 대한 저항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가축류에 사용되는 아보파르신(avoparcin)이라는 항생제에 내성을 갖게 된 장구균은 반코마이신에도 내성을 갖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람이 이 장구균에 오염된 육류 등을 섭취하면 반코마이신내성 장구균을 받아들이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1998년에는 항생제 시프로플록사신(ciprofloxacin)에 내성을 가진 살모넬라균 감염에 의해 덴마크에서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후속 연구를 통해 이 살모넬라균이 가축류에 투여되는 항생제 인로플록사신(enrofloxacin)을 통해 시프로플록사신에 내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EU는 1997년에 아보파르신을 포함한 5가지 가축류 항생제의 사용을 금지했고, 여타 항생제에 대해서도 투약량이나 잔류 항생제의 양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2001년 말 발표된 한 연구는 일부 가축류 항생제의 금지 이후 반코마이신내성 장구균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보여 줌으로써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 1999년 6월 최초의 VRSA 감염이 확인됨으로써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끈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은 처방전 없는 마구잡이 항생제 투약으로 인해 이미 페니실린, 스트렙토마이신, 테트라사이클린 등과 같은 주요 항생제들에 대한 내성이 세계 최고수준이라는 사실이 줄곧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VRSA 감염 확인은 이미 예견되었던 문제를 단지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여론도 만만찮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런 관심과 비판도 일과적으로 잠시 스쳐지나가고 만 듯하다. 2000년 여름의 의약분업 실시 이후 강력항생제 처방 비율은 오히려 상승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의 의료계와 제약회사들은 항생제내성 세균에 대항하기 위한 내성 우회 경로의 확보 및 신세대 항생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한 성과로, 미국의 파마시아 앤 업존 사가 개발한 초강력 항생제 자이복스(Zybox)가 FDA 승인을 얻어 2000년 4월에 시판되기 시작했다. 자이복스는 반코마이신에 내성을 가진 VRSA 등의 세균들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자이복스 역시 남용할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세균들이 이에 대한 내성을 발달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결국 새로운 항생제 개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생제의 오·남용을 줄임과 동시에, 세균을 '박멸'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미생물과 적절히 공존하는 법을 익히는 사고방식의 전환인 것이다.

출전: 웹진 ≪컬티즌≫ http://www.cultizen.co.kr

김명진 | 우리모임 회원
2002/07/02 00:00 200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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