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물/관념과 정치문화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2/11/13 00:00
번역 정재윤 | 서울대 과학사, 과학철학 협동과정
편집자 주
이번 호 기획번역은 오랜만에 기술사회학과 기술철학 쪽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에 앞서 실린 걸프전에서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관한 사례연구가 기술사회학에서의 논의를 보여준다면, 랭던 위너의 이 글은 기술에 대한 철학적 접근과 과학기술 민주화를 연관지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너는 이전에 쓴 다른 글에서 자신이 발전시켰던 '인공물은 정치를 갖는다(artifacts have politics)'는 생각을 확장하면서, 서로 다른 기술 형태들이 권력과 부의 분배, 사회적 유동성, 성평등과 같은 사회의 여러 측면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공물/관념"이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하고 있다. 이어 그는 기술에 대한 논의들이 기술혁신의 필요성이나 생산성·경쟁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술정책 결정을 민주화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선 정국을 맞아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난무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약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한번쯤 곱씹어 볼 만한 글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새로운 기술의 풍부한 가능성에 흥분하는 동시에, 그러한 가능성이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걱정하게 되는 시기이다. 극소전자공학, 광(光)기술, 생명공학, 합성 재료들, 컴퓨터, 그 외 여러 분야들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꿀 만한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전망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오늘날 개인, 집단, 국가가 기술 변화를 고려할 때, 보통 세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기술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 그 기술의 기능과 실용적 가치는 무엇인가?
둘째: 기술이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물질적 부(富)의 생산, 분배, 소비에 어떤 기여를 하게 될 것인가?
셋째: 기술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기술이 가져오는 결과가 전지구적 기후 변화, 생태계 오염, 기타 환경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쟁점들도 중요하지만, 잘 언급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또 하나 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새로운 장치, 기술, 기술시스템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속성을 가진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인간의 사회성에 우호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는 현대 정치문화의 발전과 기술변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다. 유용한 도구들을 발전시키고, 채택하고, 사용하는 일들이 자유, 권력, 권위, 공동체, 정의에 대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어떻게 하면 현대 정치생활에서 기술이 수행하는 역할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매우 많은 책과 논문, 그리고 토론회에서, 이 주제는 종종 '기술과 사회,' '기술과 문화' 혹은 '기술과 정치' 등의 말로 표현된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구분은 거의 쓸모가 없다. 20세기 말에 있어 기술과 사회, 기술과 문화, 기술과 정치는 결코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인간 생활을 유지하고 생활상을 형성하는 다양한 기술적 고안물과 시스템으로 구성된 중층적인 환경 속에서, [기술, 사회, 문화, 정치 등은]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유용한 인공물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은 우리를 둘러싼 기술들을 반영하고 있다. 기술이 사회 활동과 인간의 의식을 매개하는 정도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기술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려는 어떤 시도도 두 가지 기본적인 관점 중 하나에서 시작할 수 있다: (1) 인간의 관점에서 본 기술세계, (2) 인공물의 관점에서 본 기술세계.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두번째 관점부터 다루고자 한다.
우리가 단순히 도구나 장치로 취급하는 많은 것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구성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떤 역할, 책임, 행동 가능성들이 기술의 산물들에 주어지는가? 개개의 인공물은 어떤 사회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는가? 예컨대 컴퓨터는 일터에서 하인, 노예, 회계 담당자, 경비원, 감독관 중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전화 자동응답기의 사회적 역할이 좋은 예이다. 전에는 기업이나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만이 하루 종일 걸려오는 전화를 대신 처리해주는 비서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이제는 비서가 하던 일을 적어도 일부 담당해 주는 값싸고 작은 자동응답기를 살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직접 전화를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시키거나, 그냥 일부 전화를 놓치는 것이 될 터이다. 자동응답기는 특정한 종류의 임무가 부여된 대리자, 일종의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gent)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동응답기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은, 처음 이 장치를 사용할 때 사람들이 다소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삐 소리가 나기 전에 자동응답기에서 나오는 녹음 메시지들은 종종 미안해하는 내용이다. '지금 전화에 응답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만…' 혹은 '이 기계에 말씀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등등. 내가 보기에 현대 생활에서는 이런 경우가 매우 흔하다. 즉, 기술변화를 둘러싸고 사회적·도덕적 경계의 재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초기에 종종 불편한 느낌을 주던 것들
은 결국 널리 받아들여지는 패턴, 즉 '제 2의 자연(second nature)'이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수 년 안에 전화 자동응답기나 은행 ATM기 같은 많은 장치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면서 초기에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좋건 싫건 간에 경계 재협상은 완료될 것이다. 최근에 내가 한 친구에게 전화했을 때 나는 이런 녹음 메시지를 들었다. '지금은 1991년입니다. 뭘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앞서의 첫번째 관점, 즉 인간의 역할, 책임, 행동 가능성을 다양한 기술시스템 안팎에서 파악하는 관점에서 기술혁신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시스템의 작동을 위해 인간의 조종(guiding hand)을 필요로 하는가? 인간이 시스템에 질서를 부여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인간에게 질서를 부여하는가? 인간은 행동의 주체인가, 객체인가? 인간의 존재에 어떤 사회적 속성들이 수반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몇몇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즉, 내가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관점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경제학자, 엔지니어, 기술정책 결정자들이 보통 택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사회적·정치적 기술관(觀)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기술이 그냥 '주워서 쓸 수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술은 인간과 생명이 없는 대상들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연결하는 '삶의 양식
(forms of life)'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기술을 우리가 어떻게 그려내고 평가할 수 있는가?
이에 비해 종래의 관점에서는, 기술이 자연에서 새로운 이점을 끌어내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과 같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 취급된다. 이에 따르면, 일단 편리함과 경제적 이익을 얻고 난 다음 다른 일들이 뒤따를 수 있다. 흔히 '충격'이라든지 '의도하지 않은' 결과 등으로 지칭되는 우리 행동의 2차, 3차 또는 그 이상의 간접적 결과, 즉 여러 기술적 응용에 따르는 광범위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환경적 영향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술변화를 종래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더 장기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이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시간이 흐르면, 기술변화의 이른바 '2차적' 결과 내지 충격들이 처음에 생각한 '1차적'인 결과들보다 훨씬 중요해지는 일이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산업혁명에 따른 변화들이 그렇다. 이 시기에 직조 기술, 석탄 채굴, 기관차 운행 등등 수천수만 가지의 유용한 기계들이 도입되고 경제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데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사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낳은 영속적이고 진정으로 중요한 측면은 오늘날 우리가 산업사회라고 일컫는 사람과 사람, 인간과 기술 사이의 중층적인 관계들에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애초에 기술변화의 이른바 '2차적' 결과들로 나타났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만약 우리가 폭넓은 인간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기술혁신들을 꼼꼼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에 수반해] 종종 특정한 정치문화의 형태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볼티모어에서 18년간 전화교환수로 일해 온 매번 개럿이라는 한 여성이 감독관 사무실로 불려가 갑작스럽게 해고당한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한 상급자는, 전화교환수들의 업무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컴퓨터에 수집된 정보에 따르면 그녀의 업무효율이 평균치를 밑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순간, 매번 개럿은 새로운 기술시스템에 체현된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기준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개럿이 그런 사유로 해고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주목거리가 될 만했는데, 여기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해고에 대한 그녀의 대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업무시간의 일부를, 외롭기 때문에 또는 상담 상대가 필요해서 전화교환수에게 전화를 건 사람들 ― 혼자 사는 노인이나 부모의 맞벌이로 텅빈 집에서 방과후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 ― 과 통화하는 데 썼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단지 전화회사의 시간 할당량을 지키기 위해 이런 사람들의 전화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렇게 결론내리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즉, 그녀는 시민 문화 속에서는 책임있는 행동을 했지만, 그녀를 고용한 시스템의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기준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이다. 이는 기술적 합리성과 문화적 합리성의 조건들이 상호모순을 일으킨 한 예이다. 좋은 소식은 이후 노동조합의 항의로 매번 개럿이 복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쁜 소식도 있는데, 문제를 일으킨 기술편제인 시스템 설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삶의 양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 미 의회 산하 기술영향평가국(OTA)에서 내놓은 한 연구보고서에서는 대략 7백만 명의 미국 노동자들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컴퓨터화된 감시시스템 ― 사무자동화가 낳은 불운한 파생물 ― 하에서 일하고 있다고 썼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그 내용과 딱 들어맞는 [전자 감독관 The Electronic Supervisor]이었다. 오늘날의 일터에서 컴퓨터는 점점 더 폭넓은 감독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반면 사람들에게는 일을 점점 더 빨리 하면서도 사회적 대화는 덜 하는 역할만이 주어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 그러면서도 인간적 의미에서의 사람들의 의사소통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제한하고 있는 ― 시스템의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편제(regime)라는 용어가 이러한 상황에 딱 들어맞는 듯하다. 일단 설계되고 만들어져 작동을 시작하면, 사회기술적(sociotechnical) 시스템은 정치적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 편제를 이룬다. 따라서 [기술시스템의 도입을 놓고] 자유 대 부자유, 평등 대 불평등, 정의 대 불공평,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그 외 기술적 수단과 시스템들이 포함하는 다양한 권력관계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일이 된다.
복잡한 기술뿐만 아니라 매우 단순한 기술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미국 남서부의 농업지대의 일꾼들은 '엘 코르티토(el cortito)'라는 짧은 손잡이가 달린 괭이를 사용한다. 목제 손잡이의 길이에는 정치적인 함의가 전혀 없는 것일까? 그 여부는 괭이를 둘러싼 폭넓은 사회적 관계와 사회 활동들에 달려 있다. '엘 코르티토'를 사용하려면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여야 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바르게 서서 땅을 파는 것이 더 편할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손잡이를 짧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작업을 감독하는 십장이 농장을 훑어보면서 ― 때로는 아주 먼 거리에서 ― 누가 열심히 일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허리를 굽힌 사람은 일하고 있는 것이고 똑바로 선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십장은 이에 따라 규율을 적용한다. 이렇게 보면, 괭이 손잡이의 길이조차도 하나의 편제, 즉 권력, 권위, 통제의 편제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결국 현대 기술의 도구와 수단들에는 하나의 정치세계가 체현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다양한 기술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해독하기 위해 정치적 담화에서 쓰는 은유와 수사적 장치들을 이용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정치적 관념들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관념들은 물질적 대상 속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정치적 관념을 우리는 인공물/관념
(artifact/idea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는 낼 수 없지만, 인공물/관념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것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사회 질서 속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무엇이 정상이며 무엇이 가능한지, 또 무엇이 배제되는지를 말해준다. 기술세계는 현대 정치문화에 중요한 결과를 낳은 인공물/관념들로 가득차 있다. 사물은 종종 말보다 더 큰소리로 이야기한다. 현대의 기술적 고안물들과 시스템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많은 관념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권력은 중심부에 집중되어 있다.
· 소수가 발언하고 다수는 듣는다.
· 사회 계층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한다.
· 세상은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 좋은 것들은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 여성과 남성이 유능함을 보이는 영역은 서로 다르다.
· 개인의 삶은 지속적인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관념들은 물질적 대상의 모습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통상적인 정치적 토론의 주제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인공물/관념이 은폐되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대상의 의미에 대한 기능적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동차로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빨리 이동할 수 있다'거나 '이 괭이를 쓰면 땅을 쉽게 팔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물 속에 든 이데올로기가 은폐되는 또다른 이유는 그 관념들이 알려지거나 광범위한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 의해 사물 속에 이데올로기가 주입되기 때문이다. 유용한 물건들은 견고한 외양을 갖고 있는데, 이는 종종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는 보통 이런 식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혹은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등등.
그러나 인공물/관념이 어떤 이유에서 은폐되건 간에, 물질적 대상에 체현된 관념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많은 경우 쉽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인공물/관념은 놀랄 만한 자기모순을 내포할 수 있다. 특히 사물의 형태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의 지형도는 서구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봉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자주 상충된다.
특히 오늘날 널리 보급된 많은 인공물/관념들은 현대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첨예한 모순을 빚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정의, 자치라는 조건 하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인류가 번영한다고 본다. 이런 견지에서 각 사회는 개개인이 각자의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는 사회환경과 정치제도를 만들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이 겪은 승리와 좌절은 각각의 역사적 시기를 풍미했던 법률, 헌법, 정치관행 등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술사회는 도구성의 영역(domains of instrumentality)이라는 새로우면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 그럼에도 이 영역에서 민주주의적인 자유, 평등, 정의의 목표는 어떻게든 인식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 영역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만 독특하다. 나는 이런 질문들이 '중립적인' 기술이라는 외양을 띠고 드러나는 방식을 거듭 무시해온 것이 현대 문명의 근본적인 실패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대상의 영역에 체현된 관념들은 우리의 정치문화를 설명하고 이끌어나간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중심 관념과 심각한 충돌을 빚고 있다.
인간 공동체에서의 자유와 정의는 적절한 물질적 환경의 존재 ― 즉 자기결정권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목표를 방해하지 않고 북돋워 주는 물질적 배치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 에 중요한 방식으로 의존한다. 우리가 현재 도입되고 있는 사회기술적 혁신들을 연구할 때,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인지 묻는 것은 초점을 놓친 질문이 되기 쉽다. 어떤 혁신이든 누군가의 기준에서 보면 대단히 효율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그러한 기술들이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문화적 환경을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위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아래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발전 사례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사람들의 사고, 욕망, 행위를 통제하려는 시도에 이용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들
2.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잠식하고 자유를 감소시키는 데 이용되는 컴퓨터 기술들
3. 한때 공동체 생활의 장소였던 공간을 없애 버리는 정보 기술들
4. 자신이 전혀 통제권을 갖지 못한 연료 자원에 사람들이 의존하게끔 하고, 나아가 그 포로가 되게까지 만드는 에너지 시스템
5. 인간의 창발성과 창조성을 가능한 제거함으로써 통제를 추구하는 생산 시스템
이와 같은 조건들에 대해 조사하고 논쟁을 벌이기에 적합한 때는 기술이 설계되고 처음으로 인간 활동의 조직 속에 도입되는 시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가]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고, 불필요하며, 멍청하고, 어떤 행동을 자발적으로 시작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기술적 인공물을 고안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한 시스템들은 미래의 시민이 될 문화적 맹아를 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기술 시스템을 발명하면서 동시에 그 시스템을 이용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을 사람들의 유형까지도 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의 사회·정치생활의 구조와 짜임새는 지금 현재 제도판(製圖板) 위에 놓여 있는 기술들의 청사진에서 엿볼 수 있다.
요즘 우리는 국가의 흥망이 경쟁 우위를 위해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는 '기술 경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율, 생산성, 전지구적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근사해 보이는 전략들 중 일부는 동양적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교묘한 합성물이다. 미국과 같이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동화, 전자감시, 사이비민주주의적 '품질관리 분임조'에서 표현되고 있는 억압적 사회통합 모델을 열렬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기
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의 융합 패턴들을 그저 '미래의 물결'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에 저항하고, 자유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기술의 영역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접근법이 아닐까?
사실, 기술정책 결정 과정과 기술혁신 과정에 대한 민주화를 적극 추구하는 한 가지 명백한 경로가 우리에게는 아직 열려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시민과 전문가들이 기술정책과 기술설계 과정에서 행해지는 선택에 내포된 사회적·도덕적·정치적 차원들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중요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직접적·민주적으로 행동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나는 [현재의] 기술적 선택과 미래의 정치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지침이 될 만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원칙들은 '생산성,' '경쟁력,' '혁신의 필요성,' 혹은 '기술 이전'에 관한 무비판적 가정들이 당면한 기술적 선택에 관한 논의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표 없이 혁신 없다. 특정 유형의 기술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모든 집단과 이해당사자들이 그 기술을 규정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기술들은 복잡하고 다중심적인 과정을 거쳐 등장하는 사회적 창조물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황을 잘 모른 채 방치된 관련 집단은 없는지, 모든 관련 집단들에게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자. 만약 이를 가능케 하는 유형의 사회 제도가 지금 없다면, 그러한 가능성의 창출을 위해 우리의 제도를 고쳐나가자.
2. 정치적 숙의 없이 엔지니어링 없다. 제안된 기술 프로젝트들은 은폐된 정치적 조건들과 그 프로젝트에 수반되는 인공물/관념들을 밝히기 위해 철저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를 꿰뚫어보는 해석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이는 특히, 놀라운 창조성과 형편없이 좁은 안목을 종종 함께 보여주곤 하는 엔지니어와 기술분야 전문가들에게 꼭 필요하다. 공학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 정치적 관념, 정치적 논쟁, 정치적 결과의 유형을 평가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엔지니어들이 교육과정에서 숙달하는 '연장통' 속에는 민주적 시민권의 기예가 포함되어야 한다.
3. 목적 없이 수단 없다. 요즈음 대중 앞에 선보이는 많은 기술혁신들은 '쓰일 곳을 찾는 도구' '목적을 찾는 수단'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의 단적인 사례를 최근 몇 년간 학교에 컴퓨터를 도입하면서 일어난 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고선명 텔레비전(HDTV)에 대한 현재의 판촉 공세나 레이건 시기에 제안되었던 전략방위계획(SDI, 일명 스타워즈 계획)을 다시 추진하려는 최근의 노력은 더욱 분명한 예들이다. HDTV나 SDI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제시하는 전망에 대해 연구할 때, 반드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왜? 왜 우리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선택한 목표들은 무엇이고, 그 목표는 이용가능한 수단들의 패턴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 많은
첨단기술 계획들은, <환상특급 The Twilight Zone>의 주제곡을 배경음악에 깔고 있는 꼴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원칙과 유사한 뭔가가 실제로 활용된 사례를 찾고 싶다면, 먼저 스칸디나비아 민주주의 ―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술정치가 연구개발의 초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곳 ― 에서 최근 수행되고 있는 실험들을 지적할 수 있다. 한 프로젝트에서는, 인쇄공, 식자공, 석판인쇄공 등이 포함된 스웨덴 신문산업의 노동자들이 경영진 대표 및 대학의 컴퓨터 공학자들과 힘을 합쳐 신문의 지면 배정과 조판 공정에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컴퓨터 그래픽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숙련노동자의 관점에서 본 훈련, 기술, 생산물'이라는 뜻을 가진 스웨덴말의 머리글자를 따 UTOPIA라고 명명되었다.
UTOPIA의 목표는 기술적으로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최종 사용자들의 관점, 요구, 숙련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경영진의 일방적 지시에 따라 구축한 시스템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이 프로젝트에는 관련된 사람들의 대표가 참여했다. UTOPIA는 스웨덴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소인 스톡홀름 노동생활센터에서 진행되는 엄격한 연구개발 프로그램의 초점이 되었다.
이는 순수하게 도구적이고 경제적인 기술혁신의 추동력이 정치적 목표와 계몽된 인공물/관념의 정당한 조합과 조우한 사례이다. 그 결과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간의 관계 속에 나타난 민주화이다.
21세기의 기술적 세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곳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보다 더 나을 것인가,아니면 더 나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자유라는 약속을 이뤄줄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축소시킬 것인가? 그리고 누구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평범한 시민들에게 다가올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려면, 우리는 지금 너무나 모르고 있는 영역들에 매우 능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작업장의 새로운 기계, 컴퓨터화된 정보관리 시스템, 농업과 의료 분야에서의 생명공학, 가정에 도입된 통신장비 같은 기술 그 자체의 영역 내에서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정의를 규정하고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디어와 능력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숙련을 발전시킬 수 없거나 아예 관심도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기술이 제공하는, 세계를 형성하는 힘들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지나간 시절의 낡은 유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편집자 주
이번 호 기획번역은 오랜만에 기술사회학과 기술철학 쪽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에 앞서 실린 걸프전에서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관한 사례연구가 기술사회학에서의 논의를 보여준다면, 랭던 위너의 이 글은 기술에 대한 철학적 접근과 과학기술 민주화를 연관지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너는 이전에 쓴 다른 글에서 자신이 발전시켰던 '인공물은 정치를 갖는다(artifacts have politics)'는 생각을 확장하면서, 서로 다른 기술 형태들이 권력과 부의 분배, 사회적 유동성, 성평등과 같은 사회의 여러 측면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공물/관념"이라는 용어를 써서 설명하고 있다. 이어 그는 기술에 대한 논의들이 기술혁신의 필요성이나 생산성·경쟁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술정책 결정을 민주화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선 정국을 맞아 미래의 과학기술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 난무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 지원이 약속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한번쯤 곱씹어 볼 만한 글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새로운 기술의 풍부한 가능성에 흥분하는 동시에, 그러한 가능성이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걱정하게 되는 시기이다. 극소전자공학, 광(光)기술, 생명공학, 합성 재료들, 컴퓨터, 그 외 여러 분야들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꿀 만한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전망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오늘날 개인, 집단, 국가가 기술 변화를 고려할 때, 보통 세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기술이 어떻게 쓰일 것인가? 그 기술의 기능과 실용적 가치는 무엇인가?
둘째: 기술이 경제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물질적 부(富)의 생산, 분배, 소비에 어떤 기여를 하게 될 것인가?
셋째: 기술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기술이 가져오는 결과가 전지구적 기후 변화, 생태계 오염, 기타 환경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쟁점들도 중요하지만, 잘 언급되지 않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또 하나 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새로운 장치, 기술, 기술시스템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속성을 가진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생활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인간의 사회성에 우호적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는 현대 정치문화의 발전과 기술변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이다. 유용한 도구들을 발전시키고, 채택하고, 사용하는 일들이 자유, 권력, 권위, 공동체, 정의에 대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경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어떻게 하면 현대 정치생활에서 기술이 수행하는 역할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의 매우 많은 책과 논문, 그리고 토론회에서, 이 주제는 종종 '기술과 사회,' '기술과 문화' 혹은 '기술과 정치' 등의 말로 표현된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구분은 거의 쓸모가 없다. 20세기 말에 있어 기술과 사회, 기술과 문화, 기술과 정치는 결코 별개의 것들이 아니다. 인간 생활을 유지하고 생활상을 형성하는 다양한 기술적 고안물과 시스템으로 구성된 중층적인 환경 속에서, [기술, 사회, 문화, 정치 등은] 밀접하게 서로 얽혀 있다. 우리가 만들어낸 유용한 인공물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동시에 우리 자신은 우리를 둘러싼 기술들을 반영하고 있다. 기술이 사회 활동과 인간의 의식을 매개하는 정도가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기술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려는 어떤 시도도 두 가지 기본적인 관점 중 하나에서 시작할 수 있다: (1) 인간의 관점에서 본 기술세계, (2) 인공물의 관점에서 본 기술세계.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두번째 관점부터 다루고자 한다.
우리가 단순히 도구나 장치로 취급하는 많은 것들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구성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어떤 역할, 책임, 행동 가능성들이 기술의 산물들에 주어지는가? 개개의 인공물은 어떤 사회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는가? 예컨대 컴퓨터는 일터에서 하인, 노예, 회계 담당자, 경비원, 감독관 중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전화 자동응답기의 사회적 역할이 좋은 예이다. 전에는 기업이나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만이 하루 종일 걸려오는 전화를 대신 처리해주는 비서를 고용할 수 있었다. 이제는 비서가 하던 일을 적어도 일부 담당해 주는 값싸고 작은 자동응답기를 살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직접 전화를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시키거나, 그냥 일부 전화를 놓치는 것이 될 터이다. 자동응답기는 특정한 종류의 임무가 부여된 대리자, 일종의 비인간 행위자(nonhuman agent)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동응답기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은, 처음 이 장치를 사용할 때 사람들이 다소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삐 소리가 나기 전에 자동응답기에서 나오는 녹음 메시지들은 종종 미안해하는 내용이다. '지금 전화에 응답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만…' 혹은 '이 기계에 말씀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등등. 내가 보기에 현대 생활에서는 이런 경우가 매우 흔하다. 즉, 기술변화를 둘러싸고 사회적·도덕적 경계의 재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초기에 종종 불편한 느낌을 주던 것들
은 결국 널리 받아들여지는 패턴, 즉 '제 2의 자연(second nature)'이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수 년 안에 전화 자동응답기나 은행 ATM기 같은 많은 장치들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면서 초기에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좋건 싫건 간에 경계 재협상은 완료될 것이다. 최근에 내가 한 친구에게 전화했을 때 나는 이런 녹음 메시지를 들었다. '지금은 1991년입니다. 뭘 해야 하는지 아시겠죠?'
앞서의 첫번째 관점, 즉 인간의 역할, 책임, 행동 가능성을 다양한 기술시스템 안팎에서 파악하는 관점에서 기술혁신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질문을 해보자: 시스템의 작동을 위해 인간의 조종(guiding hand)을 필요로 하는가? 인간이 시스템에 질서를 부여하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인간에게 질서를 부여하는가? 인간은 행동의 주체인가, 객체인가? 인간의 존재에 어떤 사회적 속성들이 수반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몇몇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즉, 내가 위에서 제시한 두 가지 관점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경제학자, 엔지니어, 기술정책 결정자들이 보통 택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사회적·정치적 기술관(觀)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기술이 그냥 '주워서 쓸 수 있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술은 인간과 생명이 없는 대상들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연결하는 '삶의 양식
(forms of life)'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기술을 우리가 어떻게 그려내고 평가할 수 있는가?
이에 비해 종래의 관점에서는, 기술이 자연에서 새로운 이점을 끌어내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과 같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 취급된다. 이에 따르면, 일단 편리함과 경제적 이익을 얻고 난 다음 다른 일들이 뒤따를 수 있다. 흔히 '충격'이라든지 '의도하지 않은' 결과 등으로 지칭되는 우리 행동의 2차, 3차 또는 그 이상의 간접적 결과, 즉 여러 기술적 응용에 따르는 광범위한 사회적·문화적·정치적·환경적 영향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술변화를 종래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나 더 장기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이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시간이 흐르면, 기술변화의 이른바 '2차적' 결과 내지 충격들이 처음에 생각한 '1차적'인 결과들보다 훨씬 중요해지는 일이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산업혁명에 따른 변화들이 그렇다. 이 시기에 직조 기술, 석탄 채굴, 기관차 운행 등등 수천수만 가지의 유용한 기계들이 도입되고 경제적인 발전이 이뤄졌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데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사회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낳은 영속적이고 진정으로 중요한 측면은 오늘날 우리가 산업사회라고 일컫는 사람과 사람, 인간과 기술 사이의 중층적인 관계들에 있다. 이러한 결과들은 애초에 기술변화의 이른바 '2차적' 결과들로 나타났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만약 우리가 폭넓은 인간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기술혁신들을 꼼꼼하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이에 수반해] 종종 특정한 정치문화의 형태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볼티모어에서 18년간 전화교환수로 일해 온 매번 개럿이라는 한 여성이 감독관 사무실로 불려가 갑작스럽게 해고당한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해고를 통보한 상급자는, 전화교환수들의 업무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컴퓨터에 수집된 정보에 따르면 그녀의 업무효율이 평균치를 밑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순간, 매번 개럿은 새로운 기술시스템에 체현된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기준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개럿이 그런 사유로 해고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주목거리가 될 만했는데, 여기서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해고에 대한 그녀의 대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업무시간의 일부를, 외롭기 때문에 또는 상담 상대가 필요해서 전화교환수에게 전화를 건 사람들 ― 혼자 사는 노인이나 부모의 맞벌이로 텅빈 집에서 방과후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 ― 과 통화하는 데 썼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단지 전화회사의 시간 할당량을 지키기 위해 이런 사람들의 전화를 끊어버릴 수는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렇게 결론내리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즉, 그녀는 시민 문화 속에서는 책임있는 행동을 했지만, 그녀를 고용한 시스템의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기준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이다. 이는 기술적 합리성과 문화적 합리성의 조건들이 상호모순을 일으킨 한 예이다. 좋은 소식은 이후 노동조합의 항의로 매번 개럿이 복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쁜 소식도 있는데, 문제를 일으킨 기술편제인 시스템 설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삶의 양식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 미 의회 산하 기술영향평가국(OTA)에서 내놓은 한 연구보고서에서는 대략 7백만 명의 미국 노동자들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컴퓨터화된 감시시스템 ― 사무자동화가 낳은 불운한 파생물 ― 하에서 일하고 있다고 썼다. 이 보고서의 제목은 그 내용과 딱 들어맞는 [전자 감독관 The Electronic Supervisor]이었다. 오늘날의 일터에서 컴퓨터는 점점 더 폭넓은 감독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반면 사람들에게는 일을 점점 더 빨리 하면서도 사회적 대화는 덜 하는 역할만이 주어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 그러면서도 인간적 의미에서의 사람들의 의사소통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제한하고 있는 ― 시스템의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편제(regime)라는 용어가 이러한 상황에 딱 들어맞는 듯하다. 일단 설계되고 만들어져 작동을 시작하면, 사회기술적(sociotechnical) 시스템은 정치적 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진 편제를 이룬다. 따라서 [기술시스템의 도입을 놓고] 자유 대 부자유, 평등 대 불평등, 정의 대 불공평,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그 외 기술적 수단과 시스템들이 포함하는 다양한 권력관계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일이 된다.
복잡한 기술뿐만 아니라 매우 단순한 기술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미국 남서부의 농업지대의 일꾼들은 '엘 코르티토(el cortito)'라는 짧은 손잡이가 달린 괭이를 사용한다. 목제 손잡이의 길이에는 정치적인 함의가 전혀 없는 것일까? 그 여부는 괭이를 둘러싼 폭넓은 사회적 관계와 사회 활동들에 달려 있다. '엘 코르티토'를 사용하려면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여야 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바르게 서서 땅을 파는 것이 더 편할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손잡이를 짧게 만들었을까?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작업을 감독하는 십장이 농장을 훑어보면서 ― 때로는 아주 먼 거리에서 ― 누가 열심히 일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허리를 굽힌 사람은 일하고 있는 것이고 똑바로 선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므로, 십장은 이에 따라 규율을 적용한다. 이렇게 보면, 괭이 손잡이의 길이조차도 하나의 편제, 즉 권력, 권위, 통제의 편제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결국 현대 기술의 도구와 수단들에는 하나의 정치세계가 체현되어 있다. 나는 여기서, 다양한 기술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해독하기 위해 정치적 담화에서 쓰는 은유와 수사적 장치들을 이용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정치적 관념들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관념들은 물질적 대상 속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정치적 관념을 우리는 인공물/관념
(artifact/ideas)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는 낼 수 없지만, 인공물/관념은 우리에게 매우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것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사회 질서 속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무엇이 정상이며 무엇이 가능한지, 또 무엇이 배제되는지를 말해준다. 기술세계는 현대 정치문화에 중요한 결과를 낳은 인공물/관념들로 가득차 있다. 사물은 종종 말보다 더 큰소리로 이야기한다. 현대의 기술적 고안물들과 시스템 구조 속에서 드러나는 많은 관념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권력은 중심부에 집중되어 있다.
· 소수가 발언하고 다수는 듣는다.
· 사회 계층 사이에는 장벽이 존재한다.
· 세상은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 좋은 것들은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 여성과 남성이 유능함을 보이는 영역은 서로 다르다.
· 개인의 삶은 지속적인 감시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관념들은 물질적 대상의 모습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들은 통상적인 정치적 토론의 주제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인공물/관념이 은폐되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대상의 의미에 대한 기능적 설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자동차로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빨리 이동할 수 있다'거나 '이 괭이를 쓰면 땅을 쉽게 팔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사물 속에 든 이데올로기가 은폐되는 또다른 이유는 그 관념들이 알려지거나 광범위한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 의해 사물 속에 이데올로기가 주입되기 때문이다. 유용한 물건들은 견고한 외양을 갖고 있는데, 이는 종종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나 집단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는 보통 이런 식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혹은 '이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등등.
그러나 인공물/관념이 어떤 이유에서 은폐되건 간에, 물질적 대상에 체현된 관념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많은 경우 쉽지 않으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인공물/관념은 놀랄 만한 자기모순을 내포할 수 있다. 특히 사물의 형태를 통해 들여다본 세상의 지형도는 서구 사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봉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자주 상충된다.
특히 오늘날 널리 보급된 많은 인공물/관념들은 현대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와 첨예한 모순을 빚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정의, 자치라는 조건 하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인류가 번영한다고 본다. 이런 견지에서 각 사회는 개개인이 각자의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는 사회환경과 정치제도를 만들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이 겪은 승리와 좌절은 각각의 역사적 시기를 풍미했던 법률, 헌법, 정치관행 등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술사회는 도구성의 영역(domains of instrumentality)이라는 새로우면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 그럼에도 이 영역에서 민주주의적인 자유, 평등, 정의의 목표는 어떻게든 인식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 영역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만 독특하다. 나는 이런 질문들이 '중립적인' 기술이라는 외양을 띠고 드러나는 방식을 거듭 무시해온 것이 현대 문명의 근본적인 실패라고 생각한다.
물질적 대상의 영역에 체현된 관념들은 우리의 정치문화를 설명하고 이끌어나간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 중심 관념과 심각한 충돌을 빚고 있다.
인간 공동체에서의 자유와 정의는 적절한 물질적 환경의 존재 ― 즉 자기결정권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목표를 방해하지 않고 북돋워 주는 물질적 배치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 에 중요한 방식으로 의존한다. 우리가 현재 도입되고 있는 사회기술적 혁신들을 연구할 때,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인지 묻는 것은 초점을 놓친 질문이 되기 쉽다. 어떤 혁신이든 누군가의 기준에서 보면 대단히 효율적인 법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그러한 기술들이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문화적 환경을 제공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위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아래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발전 사례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사람들의 사고, 욕망, 행위를 통제하려는 시도에 이용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들
2.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를 잠식하고 자유를 감소시키는 데 이용되는 컴퓨터 기술들
3. 한때 공동체 생활의 장소였던 공간을 없애 버리는 정보 기술들
4. 자신이 전혀 통제권을 갖지 못한 연료 자원에 사람들이 의존하게끔 하고, 나아가 그 포로가 되게까지 만드는 에너지 시스템
5. 인간의 창발성과 창조성을 가능한 제거함으로써 통제를 추구하는 생산 시스템
이와 같은 조건들에 대해 조사하고 논쟁을 벌이기에 적합한 때는 기술이 설계되고 처음으로 인간 활동의 조직 속에 도입되는 시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가]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고, 불필요하며, 멍청하고, 어떤 행동을 자발적으로 시작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기술적 인공물을 고안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한 시스템들은 미래의 시민이 될 문화적 맹아를 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기술 시스템을 발명하면서 동시에 그 시스템을 이용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을 사람들의 유형까지도 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의 사회·정치생활의 구조와 짜임새는 지금 현재 제도판(製圖板) 위에 놓여 있는 기술들의 청사진에서 엿볼 수 있다.
요즘 우리는 국가의 흥망이 경쟁 우위를 위해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는 '기술 경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율, 생산성, 전지구적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근사해 보이는 전략들 중 일부는 동양적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교묘한 합성물이다. 미국과 같이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자동화, 전자감시, 사이비민주주의적 '품질관리 분임조'에서 표현되고 있는 억압적 사회통합 모델을 열렬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기
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의 융합 패턴들을 그저 '미래의 물결'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이에 저항하고, 자유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기술의 영역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접근법이 아닐까?
사실, 기술정책 결정 과정과 기술혁신 과정에 대한 민주화를 적극 추구하는 한 가지 명백한 경로가 우리에게는 아직 열려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시민과 전문가들이 기술정책과 기술설계 과정에서 행해지는 선택에 내포된 사회적·도덕적·정치적 차원들을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중요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직접적·민주적으로 행동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나는 [현재의] 기술적 선택과 미래의 정치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지침이 될 만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원칙들은 '생산성,' '경쟁력,' '혁신의 필요성,' 혹은 '기술 이전'에 관한 무비판적 가정들이 당면한 기술적 선택에 관한 논의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1. 대표 없이 혁신 없다. 특정 유형의 기술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는 모든 집단과 이해당사자들이 그 기술을 규정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한 기술들은 복잡하고 다중심적인 과정을 거쳐 등장하는 사회적 창조물이라는 관념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황을 잘 모른 채 방치된 관련 집단은 없는지, 모든 관련 집단들에게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자. 만약 이를 가능케 하는 유형의 사회 제도가 지금 없다면, 그러한 가능성의 창출을 위해 우리의 제도를 고쳐나가자.
2. 정치적 숙의 없이 엔지니어링 없다. 제안된 기술 프로젝트들은 은폐된 정치적 조건들과 그 프로젝트에 수반되는 인공물/관념들을 밝히기 위해 철저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를 꿰뚫어보는 해석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이는 특히, 놀라운 창조성과 형편없이 좁은 안목을 종종 함께 보여주곤 하는 엔지니어와 기술분야 전문가들에게 꼭 필요하다. 공학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둘러싼 정치적 맥락, 정치적 관념, 정치적 논쟁, 정치적 결과의 유형을 평가할 수 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엔지니어들이 교육과정에서 숙달하는 '연장통' 속에는 민주적 시민권의 기예가 포함되어야 한다.
3. 목적 없이 수단 없다. 요즈음 대중 앞에 선보이는 많은 기술혁신들은 '쓰일 곳을 찾는 도구' '목적을 찾는 수단'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의 단적인 사례를 최근 몇 년간 학교에 컴퓨터를 도입하면서 일어난 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고선명 텔레비전(HDTV)에 대한 현재의 판촉 공세나 레이건 시기에 제안되었던 전략방위계획(SDI, 일명 스타워즈 계획)을 다시 추진하려는 최근의 노력은 더욱 분명한 예들이다. HDTV나 SDI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제시하는 전망에 대해 연구할 때, 반드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왜? 왜 우리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선택한 목표들은 무엇이고, 그 목표는 이용가능한 수단들의 패턴에 얼마나 잘 들어맞는가? 많은
첨단기술 계획들은, <환상특급 The Twilight Zone>의 주제곡을 배경음악에 깔고 있는 꼴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세 원칙과 유사한 뭔가가 실제로 활용된 사례를 찾고 싶다면, 먼저 스칸디나비아 민주주의 ―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기술정치가 연구개발의 초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곳 ― 에서 최근 수행되고 있는 실험들을 지적할 수 있다. 한 프로젝트에서는, 인쇄공, 식자공, 석판인쇄공 등이 포함된 스웨덴 신문산업의 노동자들이 경영진 대표 및 대학의 컴퓨터 공학자들과 힘을 합쳐 신문의 지면 배정과 조판 공정에 이용할 수 있는 새로운 컴퓨터 그래픽 시스템을 고안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숙련노동자의 관점에서 본 훈련, 기술, 생산물'이라는 뜻을 가진 스웨덴말의 머리글자를 따 UTOPIA라고 명명되었다.
UTOPIA의 목표는 기술적으로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최종 사용자들의 관점, 요구, 숙련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경영진의 일방적 지시에 따라 구축한 시스템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이 프로젝트에는 관련된 사람들의 대표가 참여했다. UTOPIA는 스웨덴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소인 스톡홀름 노동생활센터에서 진행되는 엄격한 연구개발 프로그램의 초점이 되었다.
이는 순수하게 도구적이고 경제적인 기술혁신의 추동력이 정치적 목표와 계몽된 인공물/관념의 정당한 조합과 조우한 사례이다. 그 결과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인간의 관계 속에 나타난 민주화이다.
21세기의 기술적 세계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곳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보다 더 나을 것인가,아니면 더 나쁠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자유라는 약속을 이뤄줄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축소시킬 것인가? 그리고 누구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평범한 시민들에게 다가올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려면, 우리는 지금 너무나 모르고 있는 영역들에 매우 능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작업장의 새로운 기계, 컴퓨터화된 정보관리 시스템, 농업과 의료 분야에서의 생명공학, 가정에 도입된 통신장비 같은 기술 그 자체의 영역 내에서 인간의 자유와 사회 정의를 규정하고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아이디어와 능력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숙련을 발전시킬 수 없거나 아예 관심도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기술이 제공하는, 세계를 형성하는 힘들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지나간 시절의 낡은 유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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