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발뻗고 살 수 있는 날을 위하여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 사회는 무슨 빛깔일까. 이김유진 씨는 앞으로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사이버참여연대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생활 속의 우연한 발견일 수 있고, 늘 당하던 일에 맞장구 칠 지 모릅니다. 이유진 씨는 현재 국선도를 수련 중이며, 영성과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를 다양하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김유진 격주간 '한겨레 스카이라이프' 편집장 ujinlee@hanmail.net


장마 틈새를 비집고 잠시 햇살이 비치는군요. 하지만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가려고만 하면 왜 마땅히 갈 곳이 없겠습니까. 얼마 전 저희 동네엔 극장과 대형 할인마트, 심지어 웨딩홀과 부페까지 생겼거든요. 오분만 다리품 팔면 아이쇼핑이건 산책이건 실컷 할 수 있는 위치라, 이겁니다.

이게 다 집 근처에 있는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덕분이지요. 축구경기를 일년 내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윗분들'께서 '머리'라도 쓰셨나봅니다. 경기장에 대형 상가를 조성해주셨거든요. 덕분에 살기가 나아졌으니 좋겠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으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경기장 덕분에 이런저런 편의시설이 생기고 나니, 전세값은 2년여 사이에 평균 3천만원이나 껑충 뛰었구요, (저는 '운좋게도' 2천3백만원'만' 올려줬습니다) 집값은 무려 1억 가까이나 올랐습니다.

전세 재계약을 하려고 과일상자를 들고 집주인을 찾았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첫 계약 당시 저에게 집을 사라고 권하던 집주인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왜 진작 그 때 집을 사지 않았느냐"고 야단이더군요. 아이고, 제발 속편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그때나 지금이나, 집값이 마나 돈이 있어야 집을 살 것 아닙니까요. 하지만 정작 그 말씀은 드리지 못하고 고분고분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집 깨끗하게 쓰고 있으니까 걱정마세요"라고 깍듯하게 인사까지 드린 탓에 못질 한번 속편하게 하지 못한 채 살고 있지만요.

택시강도, 강간 후 신용카드 뺏아

이런, 또 이야기가 새는군요. 왜 제가 문밖으로 안 나가느냐,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멀리라도 나갈라치면 저는 돈이 많이 듭니다. 많지 않은 월급에도 불구하고 자주 택시를 타거든요. 밤일수록 특히 더 그렇습니다. 지하철을 타면 늘 불쾌한 일을 겪었거든요.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가 "안녕?"하고 인사를 하며 따라오거나 가방 밑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더듬는 건 오히려 예사입니다.

몇 년 전엔 낯선 아저씨가 하도 저를 이상하게 보는 바람에 객차를 옮겨가며 도망까지 쳤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 끝까지 저를 따라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일을 겪고는 아끼던 긴 생머리를 단발로 자르기도 했지요.

지하철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따라오는 남자를 물리치느라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어요. 이런저런 사건을 겪은 이후론 지하철은 웬만하면 안 타는 버릇이 들었답니다. 버스라고 안전하겠어요. 다리를 쭉 벌리고는 자리를 다 차지하는 아저씨 때문이라면 그나마 한숨쉬고 말아버리지요.

난폭운전을 항의하거나 뒤늦게 하차벨을 눌렀다가 기사님에게서 '니은자' 받침의 욕지거리를 들은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나요. 하긴, 택시라고 안전한가요. 잊을 만! 하면 '택시강도, 강간 후 카드뺏아' 등의 기사가 툭툭 튀어나오지 않나요. 차를 사지 않는 것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줌마가 밥솥이나 운전하지…"라는 욕을

먹을까봐 지레 무서운 탓도 있습니다. 저 참 소심하지요?

다 차치하고서라도, 요즘은 더욱 무서워 외출하지 못하겠습니다. 혹여라도 압니까. 삶의 울분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지하철로 저의 등을 떠밀어버리고는 "저 아줌마가 내 욕을 했다"고 할지, "세상의 모든 여자가 나를 무시한다"며 어느 10대가 칼을 들고 덤빌지, 저의 '짝퉁 가방'을 '오리지날'로 착각한 나머지 카드값에 주린 누군가가 저를 납치할지(돈을 건네줄 가족조차 없는데!) 말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모두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라니 더 기가 찰 노릇입니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여성들이 살기 힘들어진다고 하지요.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랍니다. 어린아이, 여성들은 사회의 지배질서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희생된다고도 합니다. IMF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 해고된 여성들은 유령처럼 거리를 떠돌았지요.

'나라 살리기 프로젝트'에 여성들이 아끼던 금붙이를 시장에 내놓았지만 이눔의 나라는 여성들에게 무엇하나 해주지 않더군요. 맞벌이 여성은 해고되고, 임산부 역시 직장에서 1순위로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요즘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여성들이 이유없이 공격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디, 무서워서 살겠습니까? 햇살좋은 날, 밖에 좀 나가보라구요? 집안이 더우니 어디 강변에 나가 수박이라도 먹으며 밤바람을 쐬라구요? 아이고, 정말 속편한 소리 좀 하지 마시라니까요.

소심한 여자도 밤길 산책 할 수 있으려면?

최근 발간된 점성술 관련책자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션(과업)을 지닌 채 태어난다고 합니다. 불교나 선도 등에서와 비슷한 이유로요. <섹스 사인>(쥬디스 베냇)이란 책인데요,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한 평생을 살게 된다고 해요.

물론 이 과업을 성공리에 마치면 다음 생에서 그 과업을 다시 겪지 않게 된다나요. 그러니까, 윤회를 거듭하다보면 어느새 업보가 모두 소멸이 되는 것처럼, 이 생의 문제들을 많이 겪는 만큼 빨리빨리 다음생에 해결할 과제가 줄어든다니는 겁니다. 다음 생은 그 문제들 때문에 고통받는 일은 없다는 거지요.

이 얘기대로라면, 후세들은 집 없이도 울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는 거겠지요? 한국 사회의 여성들은, 적어도 다음 생에선 좀더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거겠지요? 제발, 그렇게 되길 빕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들이, 빨리빨리 드러나고 곪아 터져서 다음에 태어나는 우리 후세들에게는 이런 아픔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처럼, 소심하고 물러터진 여성들도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혼자라도 밤공기의 달콤함을 맘껏 느끼며 공원을 산책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적어도,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다음 생에서는 말입니다.

사이버참여연대
2003/06/29 17:13 2003/06/2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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