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 과학교육, 그리고 새로운 과학사, 과학사회학"
정기간행물(종간)/시민과학 :
2003/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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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말에 당시 하버드대 총장이었던 제임스 코난트(James B. Conant)는 자유민주주의에서의 과학의 위치와 원자폭탄 투하 이후 대중의 과학이해를 놓고 숙고한 끝에, 과학교육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1). 그는 자신이 "과학의 전략과 전술"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미래의 시민들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 핵심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난트와 그 동료들은 이러한 개괄적 선언을 교육 현장에서의 실천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명한 {하버드 실험과학 사례사 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를 얼마 후 출간했다. 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이용되던 교수자료를 부분적으로 모형으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었다.2) 코난트는 실험적 실천이 실제로 어떻게 행해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실험대에서 이런 이해를 직접 얻지 못하는 학생[즉, 장래 과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지 않는 학생]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점차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커져 가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단지 과학자가 만들어낸 산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지식이 창출되고 평가되는 실험적 수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보가 없다면 시민들이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지적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과학자들간에 오가는 토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항상 실패하게 될' 터인데, 왜냐하면 '과학이 무엇을 이뤄낼 수 있고 무엇을 이뤄낼 수 없는지에 대해 시민들이 근본적으로 무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 이런 식으로 무지한 시민은 자신이 가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코난트의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현재의 시점[이 글의 원문은 1983년에 씌어졌다 ― 옮긴이]에서, 코난트의 분석이 지닌 현실적합성은 더욱 커졌다. 거대과학(Big Science)을 지원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자원, 환경적·군사적 쟁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술적 세부사항, 언론과 법정에 나선 과학 전문가들이 [특정 쟁점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 광경의 증가, 사회정책에 대한 사회과학의 영향력,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기술변화의 엄청난 규모 및 속도와 그것이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이 모든 것들은 교육기관과 교사들이 코난트의 목표에 다시금 응답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과학의 전략과 전술"을 교육시키는 것이 그러한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과학의] 발전상을 따라잡는 데 그간 실패해 왔다는 점에는 별다른 의문의 여지가 없다.
코난트가 묘사한 상황이 오늘날 더욱 긴급한 것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육 기획은 제한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데 쓸 수 있는 개념적 밑천들은 그간 더욱 정교해졌고 이 작업에 더욱 적합한 것이 되었다. 일찍이 코난트는 과학의 실제 본질에 대한 감각을 학생에게 제공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과학의 역사에 선별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즉, 이상화된 과학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대로, 또 그것이 인간의 활동이자 문화의 일부로서 실제 발전해 온 대로의 과학적 실천을 그려내는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4) 그러나 코난트가 {하버드 사례사}를 편집하고 있을 무렵에 학문적 연구로서의 과학사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주인공을 성인(聖人)시하는 역사서술이 지배적이었고, "과학적 방법"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상화가 역사가들의 설명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으며, 당시 과학사회학이라고 불리던 분야는 과학적 실천이 아니라 과학자사회의 규범적 구조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난 10여년 동안 과거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변화를 겪었다. 흥미로운 것은, 과학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한 영향력있는 텍스트 중 하나가 코난트의 교육 기획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버드 사례사}가 출간된 것과 같은 해인 1948년에 토머스 쿤(Thomas S. Kuhn)은 하버드대학의 신진연구원(Junior Fellow)이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쿤은 코난트와 교분을 갖게 되었고, 결국 {하버드 사례사}를 교재로 쓰는 과학개론 강좌의 강의를 돕게 되었다.5)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그 경험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쿤이 인용한 사례들이 {사례사}에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래 20년,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과학지식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적 탐구가 발전했던 지난 10년이 경과한 후, "새로운 과학사·과학사회학(new history and sociology of science, NHS)" 문헌들이 출현했다. NHS 문헌들의 등장은 과학교육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문젯거리와 기회를 동시에 던져주었다. 그것의 등장 이전에는 전형적인 과학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화된 과학의 모습과 과학사·과학철학자들이 설명하는 과학의 모습이 거칠게나마 서로 "부합"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이제 전형적인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과학적 실천의 모습과 NHS 문헌에서 제공하는 과학적 실천의 모습 사이에 근본적인 불일치가 생겨났다. 이는 곧 대중의 과학이해 형성을 돕는 사람들[교육기관이나 교사 등]이 과학의 모형을 [전통적 모형과 NHS 문헌이 제공하는 모형 중에서] 선택해 제시할 수 있는 기회와 의무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7)
새로운 과학사·과학사회학과 과학교육
NHS에서는 실험의 본질과 지위에 관한 이해가 그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 이러한 이해의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몇몇 핵심만을 간략히 추려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겠다.
1. 실험,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진리의 생산에서 하는 역할은 이제 자명하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탐구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2. 실험적 발견은 본질적으로 논박가능하다. 모든 실험적 발견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실험적 발견도 그것이 검증하기로 되어 있는 이론의 결정적 입증 혹은 반증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3. 이로부터 실험에 근거한 판단은 그 성격상 재고(再考)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실험적 발견의 지위에 관한 결정은 그 발견의 내용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판단은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특정한 방식에 대한 헌신 정도, 이론적·기술적 밑천에 대한 투자, 그리고 그 외 다양한 고려들 ― 이 중 일부는 통상 과학 "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 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4. 과학적 발견의 설명에서 "발명" 모형이 "발견" 모형보다 더 선호된다. 과학자들은 실험과 기타 수단들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자연 세계를 구성한다.
5. 실험에서 이용되는 숙련(skill)의 전달은 "장인적" 유형을 따른다. 순전히 언어적인 수단만 가지고도 그런 숙련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의문시되고 있다.
6. 이상으로부터 자연 세계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합의의 유지는 사회적 성취물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8)
그렇다면 교사는 NHS 문헌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의 선택은 교육의 목표에 관한 것으로, 과학교육에서 "근본적인" 혁신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보다 "온건한" 혁신이 바람직한지의 결정을 요구할 것이다. 과학교육 영역의 많은 주요 논자들은 과학사에 대해 분명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상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렌치(A. P. French) 교수는 과학교육을 "인간화시키는" 데 과학사를 이용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과학교육의 현재 목적, 구조, 교육자료는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9) 그는 현재의 커리큘럼이 제기하는 실질적 제약요건들, 특히 좀더 야심적인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프렌치는 교사들에게 질낮은 역사가 아닌 훌륭한 역사를 과학교육에서 가르침으로써 "인간화"를 이뤄내도록 조언하는 데 그친다. 이와 같은 온건한 목적 하에서는 NHS가 과학교육에 특별히 제공할 만한 것이 없다. 물론 NHS 문헌들에서도 보다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만큼 많은 "훌륭한" 역사를 찾아볼 수 있지만, NHS가 제공하는 과학에 대한 특정한 이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온건한 목표에서는 과학적 실천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 이상화에 근거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런 이상화가 미래의 과학자들에 대한 훈련에서 중요한 교육적 기능을 한다며 이를 정당화할지도 모른다.
프렌치와는 달리, 우리는 NHS 문헌을 교육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보다 근본적인 목적에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비과학자들을 교육시키는 ― 다시말해 과학적 문제들에 관해 일반시민들을 교육시키는 ― 목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데서 그 잠재력을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아울러 NHS 문헌은 실험실 바깥에서의 역할을 위해 과학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의 본질에 대해 시민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코난트와 뜻을 같이하며, NHS가 그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학교육의 목표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대체로(그러나 다른 쪽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 비전문가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주로 중등학교와 대학 초반 커리큘럼에서의 과학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는 대상을 이보다 더 엄격하게 정의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과학교육 체계가 국가별로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과학교육의 목표, 예컨대 어느 지루한 12월의 아침 10시 30분에 교실에 들어선 한 과학교사의 목표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이러한 목표는 어느 특정한 교사의 동기나 소망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한 교사가 우리 사회 내의 전형적인 교육기관에 의해 부과된 제약 속에서 아마도 가졌음직한 "중간 정도의" 야심적 목표를 그려낸 것으로 간주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교육은 다음 네 가지 목표를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 아이들이 과학 과목에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준다.
2. 미래의 시민들에게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3.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다.
4. 아이들에게 자연 세계의 몇몇 특징들을 가르쳐준다.
흔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의 모형에 따르면 이러한 네 가지 목표는 서로 일치할 개연성이 크다. 기존 모형의 핵심은 편향되지 않은 탐구 방법을 통해 자연 세계에 관해 명확하고 유일하며 반복가능한 참인 사실이 밝혀질 거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목표 2, 3, 4는 다음과 같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 과학을 올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3), 아이들은 자연 세계의 진정한 특징들을 밝혀내게 되고(4), 그러면서 과학의 본질, 즉 주의깊고 편향되지 않은 실험은 반복가능하며 자연 세계의 진정한 특징을 밝혀내는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2). 이것이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끔 강의요목(syllabus)을 설계할 필요가 있으며, 이와 같은 "발견의 방법(discovery methods)"은 그것이 잘 설계, 조직, 관리되어 목표 1과 4가 어지러운 교실 속에서 완전히 실종되지만 않는다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발견의 방법과 보다 정형화된 교수법 사이의 긴장은 목표 2, 3(과정에 관한)에 대한 강조와 목표 1, 4("사실"과 좀더 연관이 있는)에 대한 강조 사이의 긴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강의요목의] 설계와 조직에 좀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목표 2, 3, 4는 서로 일치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목표 1은 강의요목을 반영한 시험 문제를 냄으로써 이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NHS가 기존 모형으로부터 가장 중요하게 갈라서는 지점은, 편향되지 않고 유능한 관찰과 실험이 이루지기만 하면 자연 세계에 관해 명확하고 반복가능하며 참인 사실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어떤 것이 참이고 명확하며 반복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과정이며 따라서 이는 경험적 연구가 가능한 주제가 된다. 자연 세계의 "동일한" 영역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이한 시간 혹은 장소에서 관찰되면 서로 다른 사실들을 낳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는 심지어 유사한 과학적 방법이 쓰인 경우에조차 그러하다. 어떤 주어진 시기에 과학자사회 내에서 자연 세계의 구조에 대해 광범한 합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연 세계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과학의 사회적 조직의 특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때때로 이러한 광범한 합의들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일이 생긴다. 새로운 시각에서 보면 합의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며, 과학자들이 새로 등장하는 연구영역에 대해 종종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 모형으로부터 도출되는 한 가지 결론은 과학이 한 종류 이상의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광범한 합의가 전제된 속에서의 활동(정상과학), 과학 연구의 전통 전체가 뒤집어지는 시기(혁명적 과학),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상태, 다시말해 지배적인 합의 속으로 얼른 꿰어맞출 수 없는 새로운 해석이나 발견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완전한 혁명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인 상황, 이렇게 3가지로 구성된다. 여기서는 이 마지막 상황을 "특이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라고 부르겠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모형을 염두에 두고 과학교육의 네 가지 목표로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는 이제 목표들간의 일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는 목표 2, 3, 4가 모두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목표 2와 관련해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과학 활동의 근본적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정상과학, 혁명적 과학, 특이과학 중] 어떤 종류의 과학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목표 3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여기서의 물음은 '예비 과학자에게는 합의와 혼란 중 어느 것에 대처하도록 가르칠 것인가?'가 된다. 목표 4에 있어 우리는 아마도 현재 합의된 측면들을 가르치는 것을 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남는다. 우리는 그런 측면들을 사회적 합의의 특징으로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변할 수 없는 자연의 사실로서 가르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앞선 두 질문에 대한 답과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선택과 제약
정상과학
정상과학은 합의가 전제된 속에서 수행되는 과학이다. 정상과학 내에서의 실험이 갖는 한 가지 특성은 허용될 수 있는 결과의 범위를 상당히 좁게 미리 명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상과학 내에서의 실험은 다른 모든 실험이나 기술적 성취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숙련의 발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숙련은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것을 충분히 터득했는지 여부를 직접적인 시험에 의해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정상과학에서의 실험이 제한된 범위의 예측가능한 결과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범위 안에 떨어지는 결과를 얻었는가 하는 것이 적절한 숙련에 도달했는지를 나타내어 주기 때문이다. 변칙 결과를 낳은 실험 실행은 실패한 실행으로 설명되고 평가된다. 이러한 사후적 평가 절차는 정상과학에서 합의가 유지되는 방법들 중 하나이다. 변칙 결과는 권위있는 명령에 의해 배제된다.10) (이러한 절차가 "교실 윤리[classroom ethics]"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갖는지는 다른 지면에서 토론해 볼만한 흥미로운 문제이다.)
특이과학
특이과학은 잘 정의된 범위의 실험 결과들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을 탐구한다. 특이과학의 한 예로 중력복사(gravitational radiation)에 대한 탐지를 들 수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얼마나 많은 중력파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중력파를 과연 탐지할 수 있는가?'에 더 가깝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과학자가 문제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내기에 적합한 숙련을 갖추었는지 여부가 종종 명확하지 않다.11) 과학자는 이미 주어져 있는 범위의 실험 결과들에 비추어 자신의 실험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과연 누가 성공적인 실험을 해냈는가, 즉 중력파를 탐지한 사람이 실험에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탐지하지 못한 사람이 성공한 것인가를 놓고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과학은 혼란스럽고 불명확하며 결론이 분명치 않고 종종 격렬한 개인간의 다툼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로부터 일어난 논쟁은 많은 경우 오랜 시간을 끌게 된다.12)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전문가들이 자연 세계의 구성요소에 관해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음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며, 과학적 합리성에 관한 기존 모형이 가진 결함이 극히 분명해진다.
앞으로 과학자가 될 학생
거의 모든 과학은 "정상과학"이다. 만약 과학 교육가의 관심이 과학자를 만들기 위한 훈련을 시작하는 거라면, 과학교육의 내용은 정상과학의 실천과 연관된 능력들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할 터이다.13) 따라서 학생이 실험을 해서 변칙 결과(정상적인 기대범위 바깥의 결과)가 나온 경우, 그 학생에게는 실험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적합한 결과가 얻어질 때까지 실험을 계속하도록 해야 한다. 적합한 결과가 나오면 이는 자연에 대해 합의된 관점과 과학지식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으로 칭송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이 다루기 까다로운 결과에 마주쳐서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은 기존 모형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칙 결과가 실험자의 실수 때문이라는 해석이나 옳은 결과를 내려는 강한 욕구는 과학적 합리성의 기존 모형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이것은 (경멸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과학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만한 것의 실천적 표현인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 전문가가 될 학생들의 교육에서는 (지엽적인 사항들을 제외한다면) 딱히 변화를 꾀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누군가 설득력있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NHS가 제공하는 과학에 대한 이해의 몇몇 특징들은 심지어 여기에서도 고려해볼 만하다. 예를 들어 과학사회학자들은 실험적 숙련이 사실 순전히 언어적인 수단만으로는 안정적으로 전달되지 않음을 입증해 왔다.14) 실제 과학 연구에서는 그러한 숙련을 견습 기간을 통해서나, 유능한 실험자가 실험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거나, 아니면 뭉뚱그려 "서당개 3년(sitting by Nellie)"이라고 부를 만한 과정을 거치는 등의 "암묵적" 수단들에 의해서 습득해야 한다. 퍼프 페스트리 만드는 법을 신참 요리사에게 가르쳐 줄 때 쓰이는 테크닉은 적정(滴定)법을 신참 화학자에게 가르쳐 줄 때 쓰이는 그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과학 교사들은 요구되는 실험적 유능성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글로 적힌 지침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수 있으며, 실험실에서의 교수법을 다르게 조직함으로써 그런 숙련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 좀더 상층부로 올라가면, 앞으로 과학 예산을 담당할 행정가들은 학술회의 여행, 교환 연구원제, 기타 다른 형태의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정당화함에 있어 이를 근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간 과학전공 학생의 위치로부터 과학 연구자의 위치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심리적 충격"이 종종 수반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15) 만약 과학전공 학생이 문제에 대한 답이 미리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전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면, 그/그녀는 많은 과학자들이 겪고 있는 실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혼란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실제 상황에서는 답을 미리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특이과학의 경우) 자연현상의 존재 여부는 실험이 유능하게 수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과 동떨어져 결정될 수 없다. 학생에서 연구자로 넘어가는 이 단계에서 "중도탈락"이나 "낭비"의 측면이 있다는 우려가 때때로 제기되어 왔는데, 이러한 낭비는 과학전공 학생들이 실제 과학 실험에 영향을 주는 우연적 요인들 ― 과학에서 합의가 도출되는 사회적 과정을 포함하는 ― 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감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 관해 좀더 길게 논의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우리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할 수 있는 보통 시민에 대한 과학교육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앞으로 일반시민이 될 학생
시민들, 그리고 그들이 유능한 구성원이 되어야 할 민주사회는, 만약 과학교육에서 과학의 이데올로기만을 가르친다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셈이 된다. 이 말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반과학적" 태도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우리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과학 전문가들간의 의견불일치는 오늘날의 과학기술 사회에서 점점 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시민들(과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되어 있는 기관들)은 이에 반응해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받고 있다. 만약 시민들이 과학의 이데올로기만을 주입받았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 전문가들을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생각건대, 그 반응은 양극화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상에서 그려지는 과학은 전적으로 진리거나 전적으로 틀린 것이거나 둘 중 하나로 그려진다. 만약 시민들이 실제로 이렇게 믿고 있다면, 전문가들간의 의견불일치는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한마디로 심대한 환멸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모두 무능력하거나, 거짓말쟁이거나, 강력한 이해집단이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견해차이도 없고, 의견불일치는 많은 과학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느낌도 없으며, 전문가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광경을 "훌륭한" 과학에서 피해갈 수 없는 특징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처하려는 경향도 없다. 결국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의 상, 즉 민주사회에서 과학에 주어져야 마땅한 존중을 보증하는 가장 좋은 길로 종종 믿어져 왔던 바로 그 과학의 상이 실제로는 과학자들과 과학 교사들에게 근심거리를 주는 반과학적 태도의 많은 부분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NHS의 시각은 불합리한 기대나 이에 수반해 반과학적 견해를 초래하는 양극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미래의 시민들이 과학자들을 "가능한 최고의 전문가"로 여기도록 도울 수 있다.
과학교육은 과학의 본질에 대해 과학자들 자신이 제시하는 것이 아닌 대안적 설명을 미래의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16)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안하는 개혁의 핵심이다. 만약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의 상이 제대로 내면화되었다면 즉시 실험에서의 실수로 재해석되어야 할 변칙 결과들이, 여기서는 프런티어 영역(특이과학)의 실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발견의 방법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발견법적 가치(heuristic value)를 갖는 길이다. 즉, 아직 합의가 형성되지 않은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의 경계에 놓인 문제에 논평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해체나 의견불일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발견의 방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음 단계, 즉 이러한 잠재적 혼돈 상태에서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도 교실에서 실제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사실 앞으로 과학자가 될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과학적 합리성의 기존 모형에 따라 자신의 실천 속에서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어놓는 방법을 이미 교육받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과학자가 될 학생과 앞으로 일반시민이 될 학생을 가르치는 데 있어 긴장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쪽 관점들을 모두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둘을 서로 약간 나눠서 교육을 할 필요도 있다.
과학자로서의 교사
교육의 현재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한, (적어도 영국과 미국의) 과학 교사들은 이데올로기적 외양을 띄지 않은 과학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단지 몇 안되는 과학자들 ― 과학 논쟁에 관여해본 적이 있는 ― 만이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과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과학 교사들은 자신이 받은 교육 외에 과학을 경험해볼 일이 거의 없고,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의 모습만을 계속해서 주입받게 된다. 물론 최상층부에 있는 소수의 과학자들을 제외한다면, 기존 모형을 성공적으로 흡수하고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학계에서의 성공과 과학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 교사들이 과학적 합리성의 기존 모형을 성공적으로 흡수·적용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할 수 있으며, 강의요목 설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낡고 판에 박은 교수법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발견의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발견의 방법은 기존 모형의 실천적 적용을 교육하는 데 있어 좀더 부드럽고 좀더 효과적일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네 가지 목표와 교육 실험을 위한 제안
이제 앞서 언급했던 과학교육의 네 가지 목표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 목표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아이들이 과학 과목에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준다.
2. 미래의 시민들에게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3.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다.
4. 아이들에게 자연 세계의 몇몇 특징들을 가르쳐준다.
만약 목적이 과학을 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가르치는 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모형 하에서 1, 3, 4가 일치하도록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목표 2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목표 2와 4가 서로 일치하려면 자연 세계의 특징들이 현재 사회적으로 조직된 합의의 특징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실험적 방법을 써서 훌륭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의] 관심의 초점이 타당한 실험 결과라는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합의의 사회적 조직에 맞추어질 때에만 그러하다. 이는 교실에서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이 과학자사회 내에서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거쳐)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의 축소판이 될 것을 요구한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교사의 지도 하에 처음에는 무질서한 유사발견(quasi-finding)들의 집합이었던 것을 선호되는(바로 옳은!) 가설에 대한 실험적 지지로 바꾸어놓게 되는데, 우리는 학생들이 바로 이 과정에 주목하도록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교실에서의 교훈과 과학 논쟁이 종결로 향하면서 겪는 실제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은 정말 놀랄 만한 정도다.17)
새로운 모형 하에서 목표 1, 즉 시험의 통과가 다른 목표들과 일치할 수 있으려면 강의요목의 일부를 과학의 사회적 조직에 관한 질문들 ― 현재 "과학학(Science Studies)"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주제인 ― 에 할애하는 도리밖에 없다.
제언과 문제들
지금은 NHS를 혁신적 과학교육에 통합시키는 프로젝트에서 매우 초기 단계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잠정적인 실천적 제언들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할 듯싶다. 첫째로, 35년 전에 개발된 {하버드 사례사}의 방향을 따르는 새로운 교육 자료를 만들어낼 시기가 이제 무르익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코난트가 과학의 실제 본질에 관해 당시 그가 이용할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역사적 설명들에 의존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NHS 문헌이 제공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학의 상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코난트의 것과 매우 유사할 것이고, 우리가 염두에 둔 대상 역시 중등학교 고학년과 대학교육 초반부 사이의 학생들로 그가 상정했던 것과 거의 같을 것이다.18) 둘째는 이보다는 좀 덜 구체적인 제언으로, 우리는 실제 이루어지는 실험 교육이 (적어도 때때로) 연구와 반성의 대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험 교육을 학생들에게 적절한 숙련과 자연 세계의 몇몇 측면들을 가르치기 위해 쓰는 것 외에, 이를 과학적 숙련이 전달되고 실재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길잡이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야심적인 계획일 것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할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논문에서 제안한 접근에 관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지적받았다. 그러한 혁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교육 환경에 대해 매우 세심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가 제안한 것 중 많은 수는 중등학교 고학년이나 대학교육 초반부에 적용된다. 중등학교는 그 제도적 환경 때문에 대학과는 매우 다른 조건을 제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변화가 중등학교에는 전혀 안맞다거나 혹은 대학에는 전혀 안맞다거나 하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국가별 교육 시스템의 다양성에서 나오는 엄청난 차이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교육패턴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불가피하게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른 국가의 시스템들을 특징짓는 구조와 목표들은 이런 방향의 혁신에서 더 많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더 많은 제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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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Harry Collins and Steven Shapin, 'Experiment, cience Teaching, and the New History and Sociology of Science,' Michael Shortland and Andrew Warwick (eds.), Teaching the History of Science (Oxford: Basil Blackwell, 1989), pp. 67-79.
** 이 글은 원래 1983년 9월 5일에서 9일까지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혁신적 물리교육에서의 과학사의 이용"을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던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원 논문의 타자본 사본은 학술회의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다. 원 논문은 독일어로도 번역되었고, Physica Didactica, 33(11), (1984), 33-46에 실렸다.
1. Conant (1947).
2. Conant (1948); 기업 사례연구를 모형으로 했다는 얘기는 Conant (1947)에 나와 있다.
3. Conant (1948), vol. 1, p. vii; Conant (1967), pp. 8-12도 보라.
4. Conant (1967), 특히 pp. 6-9를 보라.
5. 코난트와 쿤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는 Merton (1977), pp. 3-14, 81-9를 보라.
6. Kuhn (1962)의 서문을 보라.
7. NHS 연구들에 대한 선별적 리뷰에는 Barnes and Edge (1982), Shapin (1982), 그리고 Collins (1982) 등이 있다.
8. Collins (1985)를 보면 이러한 점들을 세부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사례연구들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9. French (1983).
10. Kuhn (1963).
11. Collins (1985).
12. Farley and Geison (1974)와 Shapin (1979), pp. 139-78도 보라.
13. 학생들을 과학자로 취급하는 다른 예로 로스 드라이버(Ros Driver)의 연구가 있는데, 예컨대 Driver, Guesne, and Tiberghien (1985)와 Driver (1983)을 보라.
14. 예를 들어 Collins (1974)와 Collins and Harrison (1975)를 보라.
15. 예컨대 MIT의 프렌치 교수가 쓴 저작을 보라 (French 1983). 이 글의 관점과 대체로 일치하는 저술로는 Edge and Aikenhead (1983)이 있다.
16. 텔레비전에서 과학이 "지식생산 활동"이 아닌 일군의 "확실한 지식"으로 그려지는 방식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 Collins (1987)이 있다.
17. "발견" 양식의 교수법을 이용하는 과학 수업에서 인지적 질서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것에 대한 탁월한 설명으로는 Atkinson and Delamont (1977)을 보라.
18.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콜린즈(H. M. Collins)와 밀러(R. H. Millar)는 현재 Science in Practice라는 제목의 책을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콜린즈와 핀치(Trevor Pinch)의 공저로 1993년에 출간된 The Golem: What Everyone Should Know about Science를 가리키는 듯하다. ― 옮긴이]
<참고문헌>
Atkinson, P., and S. Delamont (1977). "Mock-ups and cock-ups: the stage-management of guided discovery instructions". In School experience: explorations in the sociology of education, ed. P. Woods and M. Hammersley. London.
Barnes, B., and D. Edge (1982). Science in context: readings in the sociology of science. Milton Keynes, Cambridge, Mass.
Collins, H. M. (1974). "The TEA set: tacit knowledge and scientific networks". Science Studies, 4: 165-86.
Collins, H. M. (1982). 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 a source book. Bath.
Collins, H. M. (1985). Changing order: replication and induction in scientific practice. Beverly Hills/London.
Collins, H. M. (1987). "Certainty and the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science on television". Social Studies of Science, 17: 689-713.
Collins, H. M., and R. Harrison (1975). "Building a TEA laser: the caprices of communication". Social Studies of Science, 5: 441-50.
Conant, J. B. (1947). On understanding science: an historical approach. Oxford.
Conant, J. B. (1948). 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 2 vols. Cambridge, Mass.
Conant, J. B. (1967). Scientific principles and moral conduct. Cambridge.
Driver, R. (1983). The pupil as scientist. Milton Key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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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D., and G. Aikenhead (1983). Paper presented to the joint seminar of the Vrije Universiteit and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on Science Education and Ethics, Vrije Universiteit, Amsterdam, June.
Farley, J., and G. Geison (1974). "Science, politics and spontaneous generation in nineteenth-century France: the Pasteur-Pouchet debate". Bulletin of the History of Medicine, 48: 161-98.
French, A. P. (1983). "Pleasures and dangers of bringing history into physics teaching". Proceedings of a conference on using history of science in innovatory physics education, 5-9 September, 1983, Pavia, Italy (Pavia: Centro Studi per la Didattica della Facolta di Scienze Matematiche, Fisiche e Naturali, Universit di Pavia).
Kuhn, T. S. (1962).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Chicago/London.
Kuhn, T. S. (1963). "The function of dogma in scientific research". In Scientific Change, ed. A. C. Crombie, pp. 347-69. London.
Merton, R. K. (1977). "The sociology of science: an episodic memoir". In The Sociology of Science in Europe, ed. R. K. Merton and J. Gaston. Carbondale: Ill.
Shapin S. (1979). "The politics of observation: cerebral anatomy and social interests in the Edinburgh phrenology disputes". In On the margins of science: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jected knowledge, ed. R. Wallis, Sociological Review Monographs, 27, pp. 139-78. Keele.
Shapin, S. (1982). "History of science and its sociological reconstructions". History of Science, 20: 157-211.
1940년대 말에 당시 하버드대 총장이었던 제임스 코난트(James B. Conant)는 자유민주주의에서의 과학의 위치와 원자폭탄 투하 이후 대중의 과학이해를 놓고 숙고한 끝에, 과학교육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1). 그는 자신이 "과학의 전략과 전술"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미래의 시민들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 핵심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난트와 그 동료들은 이러한 개괄적 선언을 교육 현장에서의 실천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명한 {하버드 실험과학 사례사 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를 얼마 후 출간했다. 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이용되던 교수자료를 부분적으로 모형으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었다.2) 코난트는 실험적 실천이 실제로 어떻게 행해지는지에 대한 이해가 실험대에서 이런 이해를 직접 얻지 못하는 학생[즉, 장래 과학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지 않는 학생]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점차로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커져 가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단지 과학자가 만들어낸 산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학지식이 창출되고 평가되는 실험적 수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보가 없다면 시민들이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지적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과학자들간에 오가는 토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항상 실패하게 될' 터인데, 왜냐하면 '과학이 무엇을 이뤄낼 수 있고 무엇을 이뤄낼 수 없는지에 대해 시민들이 근본적으로 무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3) 이런 식으로 무지한 시민은 자신이 가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코난트의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현재의 시점[이 글의 원문은 1983년에 씌어졌다 ― 옮긴이]에서, 코난트의 분석이 지닌 현실적합성은 더욱 커졌다. 거대과학(Big Science)을 지원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자원, 환경적·군사적 쟁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술적 세부사항, 언론과 법정에 나선 과학 전문가들이 [특정 쟁점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 광경의 증가, 사회정책에 대한 사회과학의 영향력,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기술변화의 엄청난 규모 및 속도와 그것이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이 모든 것들은 교육기관과 교사들이 코난트의 목표에 다시금 응답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과학의 전략과 전술"을 교육시키는 것이 그러한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과학의] 발전상을 따라잡는 데 그간 실패해 왔다는 점에는 별다른 의문의 여지가 없다.
코난트가 묘사한 상황이 오늘날 더욱 긴급한 것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교육 기획은 제한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데 쓸 수 있는 개념적 밑천들은 그간 더욱 정교해졌고 이 작업에 더욱 적합한 것이 되었다. 일찍이 코난트는 과학의 실제 본질에 대한 감각을 학생에게 제공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과학의 역사에 선별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즉, 이상화된 과학을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모습대로, 또 그것이 인간의 활동이자 문화의 일부로서 실제 발전해 온 대로의 과학적 실천을 그려내는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4) 그러나 코난트가 {하버드 사례사}를 편집하고 있을 무렵에 학문적 연구로서의 과학사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주인공을 성인(聖人)시하는 역사서술이 지배적이었고, "과학적 방법"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상화가 역사가들의 설명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으며, 당시 과학사회학이라고 불리던 분야는 과학적 실천이 아니라 과학자사회의 규범적 구조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난 10여년 동안 과거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한 변화를 겪었다. 흥미로운 것은, 과학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한 영향력있는 텍스트 중 하나가 코난트의 교육 기획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버드 사례사}가 출간된 것과 같은 해인 1948년에 토머스 쿤(Thomas S. Kuhn)은 하버드대학의 신진연구원(Junior Fellow)이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쿤은 코난트와 교분을 갖게 되었고, 결국 {하버드 사례사}를 교재로 쓰는 과학개론 강좌의 강의를 돕게 되었다.5)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1962)에서 그 경험이 자신에게 매우 중요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쿤이 인용한 사례들이 {사례사}에 상당부분 빚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이래 20년,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과학지식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적 탐구가 발전했던 지난 10년이 경과한 후, "새로운 과학사·과학사회학(new history and sociology of science, NHS)" 문헌들이 출현했다. NHS 문헌들의 등장은 과학교육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문젯거리와 기회를 동시에 던져주었다. 그것의 등장 이전에는 전형적인 과학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화된 과학의 모습과 과학사·과학철학자들이 설명하는 과학의 모습이 거칠게나마 서로 "부합"했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이제 전형적인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과학적 실천의 모습과 NHS 문헌에서 제공하는 과학적 실천의 모습 사이에 근본적인 불일치가 생겨났다. 이는 곧 대중의 과학이해 형성을 돕는 사람들[교육기관이나 교사 등]이 과학의 모형을 [전통적 모형과 NHS 문헌이 제공하는 모형 중에서] 선택해 제시할 수 있는 기회와 의무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7)
새로운 과학사·과학사회학과 과학교육
NHS에서는 실험의 본질과 지위에 관한 이해가 그 근간을 이룬다. 여기서 이러한 이해의 세부적인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몇몇 핵심만을 간략히 추려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겠다.
1. 실험, 그리고 그것이 과학적 진리의 생산에서 하는 역할은 이제 자명하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탐구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2. 실험적 발견은 본질적으로 논박가능하다. 모든 실험적 발견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실험적 발견도 그것이 검증하기로 되어 있는 이론의 결정적 입증 혹은 반증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3. 이로부터 실험에 근거한 판단은 그 성격상 재고(再考)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실험적 발견의 지위에 관한 결정은 그 발견의 내용에 의해 지시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판단은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특정한 방식에 대한 헌신 정도, 이론적·기술적 밑천에 대한 투자, 그리고 그 외 다양한 고려들 ― 이 중 일부는 통상 과학 "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 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4. 과학적 발견의 설명에서 "발명" 모형이 "발견" 모형보다 더 선호된다. 과학자들은 실험과 기타 수단들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자연 세계를 구성한다.
5. 실험에서 이용되는 숙련(skill)의 전달은 "장인적" 유형을 따른다. 순전히 언어적인 수단만 가지고도 그런 숙련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의문시되고 있다.
6. 이상으로부터 자연 세계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한 합의의 유지는 사회적 성취물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8)
그렇다면 교사는 NHS 문헌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의 선택은 교육의 목표에 관한 것으로, 과학교육에서 "근본적인" 혁신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보다 "온건한" 혁신이 바람직한지의 결정을 요구할 것이다. 과학교육 영역의 많은 주요 논자들은 과학사에 대해 분명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상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렌치(A. P. French) 교수는 과학교육을 "인간화시키는" 데 과학사를 이용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과학교육의 현재 목적, 구조, 교육자료는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9) 그는 현재의 커리큘럼이 제기하는 실질적 제약요건들, 특히 좀더 야심적인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프렌치는 교사들에게 질낮은 역사가 아닌 훌륭한 역사를 과학교육에서 가르침으로써 "인간화"를 이뤄내도록 조언하는 데 그친다. 이와 같은 온건한 목적 하에서는 NHS가 과학교육에 특별히 제공할 만한 것이 없다. 물론 NHS 문헌들에서도 보다 전통적인 역사서술에서만큼 많은 "훌륭한" 역사를 찾아볼 수 있지만, NHS가 제공하는 과학에 대한 특정한 이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온건한 목표에서는 과학적 실천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 이상화에 근거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런 이상화가 미래의 과학자들에 대한 훈련에서 중요한 교육적 기능을 한다며 이를 정당화할지도 모른다.
프렌치와는 달리, 우리는 NHS 문헌을 교육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보다 근본적인 목적에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비과학자들을 교육시키는 ― 다시말해 과학적 문제들에 관해 일반시민들을 교육시키는 ― 목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데서 그 잠재력을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아울러 NHS 문헌은 실험실 바깥에서의 역할을 위해 과학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이용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의 본질에 대해 시민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코난트와 뜻을 같이하며, NHS가 그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과학교육의 목표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대체로(그러나 다른 쪽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 비전문가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주로 중등학교와 대학 초반 커리큘럼에서의 과학교육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는 대상을 이보다 더 엄격하게 정의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과학교육 체계가 국가별로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과학교육의 목표, 예컨대 어느 지루한 12월의 아침 10시 30분에 교실에 들어선 한 과학교사의 목표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얘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이러한 목표는 어느 특정한 교사의 동기나 소망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러한 교사가 우리 사회 내의 전형적인 교육기관에 의해 부과된 제약 속에서 아마도 가졌음직한 "중간 정도의" 야심적 목표를 그려낸 것으로 간주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교육은 다음 네 가지 목표를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 아이들이 과학 과목에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준다.
2. 미래의 시민들에게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3.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다.
4. 아이들에게 자연 세계의 몇몇 특징들을 가르쳐준다.
흔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과학적 합리성의 모형에 따르면 이러한 네 가지 목표는 서로 일치할 개연성이 크다. 기존 모형의 핵심은 편향되지 않은 탐구 방법을 통해 자연 세계에 관해 명확하고 유일하며 반복가능한 참인 사실이 밝혀질 거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목표 2, 3, 4는 다음과 같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 과학을 올바르게 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3), 아이들은 자연 세계의 진정한 특징들을 밝혀내게 되고(4), 그러면서 과학의 본질, 즉 주의깊고 편향되지 않은 실험은 반복가능하며 자연 세계의 진정한 특징을 밝혀내는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2). 이것이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끔 강의요목(syllabus)을 설계할 필요가 있으며, 이와 같은 "발견의 방법(discovery methods)"은 그것이 잘 설계, 조직, 관리되어 목표 1과 4가 어지러운 교실 속에서 완전히 실종되지만 않는다면 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발견의 방법과 보다 정형화된 교수법 사이의 긴장은 목표 2, 3(과정에 관한)에 대한 강조와 목표 1, 4("사실"과 좀더 연관이 있는)에 대한 강조 사이의 긴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강의요목의] 설계와 조직에 좀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목표 2, 3, 4는 서로 일치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목표 1은 강의요목을 반영한 시험 문제를 냄으로써 이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
NHS가 기존 모형으로부터 가장 중요하게 갈라서는 지점은, 편향되지 않고 유능한 관찰과 실험이 이루지기만 하면 자연 세계에 관해 명확하고 반복가능하며 참인 사실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어떤 것이 참이고 명확하며 반복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과정 자체가 사회적 과정이며 따라서 이는 경험적 연구가 가능한 주제가 된다. 자연 세계의 "동일한" 영역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이한 시간 혹은 장소에서 관찰되면 서로 다른 사실들을 낳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는 심지어 유사한 과학적 방법이 쓰인 경우에조차 그러하다. 어떤 주어진 시기에 과학자사회 내에서 자연 세계의 구조에 대해 광범한 합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연 세계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과학의 사회적 조직의 특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때때로 이러한 광범한 합의들이 통째로 뒤집어지는 일이 생긴다. 새로운 시각에서 보면 합의가 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며, 과학자들이 새로 등장하는 연구영역에 대해 종종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 모형으로부터 도출되는 한 가지 결론은 과학이 한 종류 이상의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학은 광범한 합의가 전제된 속에서의 활동(정상과학), 과학 연구의 전통 전체가 뒤집어지는 시기(혁명적 과학),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상태, 다시말해 지배적인 합의 속으로 얼른 꿰어맞출 수 없는 새로운 해석이나 발견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완전한 혁명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인 상황, 이렇게 3가지로 구성된다. 여기서는 이 마지막 상황을 "특이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라고 부르겠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모형을 염두에 두고 과학교육의 네 가지 목표로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는 이제 목표들간의 일치를 손쉽게 파악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는 목표 2, 3, 4가 모두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목표 2와 관련해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과학 활동의 근본적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우리는 [정상과학, 혁명적 과학, 특이과학 중] 어떤 종류의 과학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목표 3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데, 여기서의 물음은 '예비 과학자에게는 합의와 혼란 중 어느 것에 대처하도록 가르칠 것인가?'가 된다. 목표 4에 있어 우리는 아마도 현재 합의된 측면들을 가르치는 것을 원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남는다. 우리는 그런 측면들을 사회적 합의의 특징으로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변할 수 없는 자연의 사실로서 가르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앞선 두 질문에 대한 답과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선택과 제약
정상과학
정상과학은 합의가 전제된 속에서 수행되는 과학이다. 정상과학 내에서의 실험이 갖는 한 가지 특성은 허용될 수 있는 결과의 범위를 상당히 좁게 미리 명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상과학 내에서의 실험은 다른 모든 실험이나 기술적 성취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숙련의 발휘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숙련은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것을 충분히 터득했는지 여부를 직접적인 시험에 의해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정상과학에서의 실험이 제한된 범위의 예측가능한 결과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범위 안에 떨어지는 결과를 얻었는가 하는 것이 적절한 숙련에 도달했는지를 나타내어 주기 때문이다. 변칙 결과를 낳은 실험 실행은 실패한 실행으로 설명되고 평가된다. 이러한 사후적 평가 절차는 정상과학에서 합의가 유지되는 방법들 중 하나이다. 변칙 결과는 권위있는 명령에 의해 배제된다.10) (이러한 절차가 "교실 윤리[classroom ethics]"에 대해 어떤 함의를 갖는지는 다른 지면에서 토론해 볼만한 흥미로운 문제이다.)
특이과학
특이과학은 잘 정의된 범위의 실험 결과들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을 탐구한다. 특이과학의 한 예로 중력복사(gravitational radiation)에 대한 탐지를 들 수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얼마나 많은 중력파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지구상에서 중력파를 과연 탐지할 수 있는가?'에 더 가깝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과학자가 문제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내기에 적합한 숙련을 갖추었는지 여부가 종종 명확하지 않다.11) 과학자는 이미 주어져 있는 범위의 실험 결과들에 비추어 자신의 실험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과연 누가 성공적인 실험을 해냈는가, 즉 중력파를 탐지한 사람이 실험에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탐지하지 못한 사람이 성공한 것인가를 놓고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과학은 혼란스럽고 불명확하며 결론이 분명치 않고 종종 격렬한 개인간의 다툼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로부터 일어난 논쟁은 많은 경우 오랜 시간을 끌게 된다.12) 이러한 조건 하에서는 전문가들이 자연 세계의 구성요소에 관해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음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며, 과학적 합리성에 관한 기존 모형이 가진 결함이 극히 분명해진다.
앞으로 과학자가 될 학생
거의 모든 과학은 "정상과학"이다. 만약 과학 교육가의 관심이 과학자를 만들기 위한 훈련을 시작하는 거라면, 과학교육의 내용은 정상과학의 실천과 연관된 능력들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할 터이다.13) 따라서 학생이 실험을 해서 변칙 결과(정상적인 기대범위 바깥의 결과)가 나온 경우, 그 학생에게는 실험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적합한 결과가 얻어질 때까지 실험을 계속하도록 해야 한다. 적합한 결과가 나오면 이는 자연에 대해 합의된 관점과 과학지식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으로 칭송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이 다루기 까다로운 결과에 마주쳐서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은 기존 모형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칙 결과가 실험자의 실수 때문이라는 해석이나 옳은 결과를 내려는 강한 욕구는 과학적 합리성의 기존 모형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다. 이것은 (경멸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과학의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만한 것의 실천적 표현인 셈이다.
따라서 앞으로 전문가가 될 학생들의 교육에서는 (지엽적인 사항들을 제외한다면) 딱히 변화를 꾀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누군가 설득력있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NHS가 제공하는 과학에 대한 이해의 몇몇 특징들은 심지어 여기에서도 고려해볼 만하다. 예를 들어 과학사회학자들은 실험적 숙련이 사실 순전히 언어적인 수단만으로는 안정적으로 전달되지 않음을 입증해 왔다.14) 실제 과학 연구에서는 그러한 숙련을 견습 기간을 통해서나, 유능한 실험자가 실험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거나, 아니면 뭉뚱그려 "서당개 3년(sitting by Nellie)"이라고 부를 만한 과정을 거치는 등의 "암묵적" 수단들에 의해서 습득해야 한다. 퍼프 페스트리 만드는 법을 신참 요리사에게 가르쳐 줄 때 쓰이는 테크닉은 적정(滴定)법을 신참 화학자에게 가르쳐 줄 때 쓰이는 그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과학 교사들은 요구되는 실험적 유능성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글로 적힌 지침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수 있으며, 실험실에서의 교수법을 다르게 조직함으로써 그런 숙련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 좀더 상층부로 올라가면, 앞으로 과학 예산을 담당할 행정가들은 학술회의 여행, 교환 연구원제, 기타 다른 형태의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정당화함에 있어 이를 근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간 과학전공 학생의 위치로부터 과학 연구자의 위치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심리적 충격"이 종종 수반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15) 만약 과학전공 학생이 문제에 대한 답이 미리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전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면, 그/그녀는 많은 과학자들이 겪고 있는 실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혼란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실제 상황에서는 답을 미리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특이과학의 경우) 자연현상의 존재 여부는 실험이 유능하게 수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과 동떨어져 결정될 수 없다. 학생에서 연구자로 넘어가는 이 단계에서 "중도탈락"이나 "낭비"의 측면이 있다는 우려가 때때로 제기되어 왔는데, 이러한 낭비는 과학전공 학생들이 실제 과학 실험에 영향을 주는 우연적 요인들 ― 과학에서 합의가 도출되는 사회적 과정을 포함하는 ― 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감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 관해 좀더 길게 논의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우리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할 수 있는 보통 시민에 대한 과학교육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앞으로 일반시민이 될 학생
시민들, 그리고 그들이 유능한 구성원이 되어야 할 민주사회는, 만약 과학교육에서 과학의 이데올로기만을 가르친다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셈이 된다. 이 말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반과학적" 태도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우리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과학 전문가들간의 의견불일치는 오늘날의 과학기술 사회에서 점점 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고, 시민들(과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되어 있는 기관들)은 이에 반응해 결정을 내리도록 요구받고 있다. 만약 시민들이 과학의 이데올로기만을 주입받았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 전문가들을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생각건대, 그 반응은 양극화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상에서 그려지는 과학은 전적으로 진리거나 전적으로 틀린 것이거나 둘 중 하나로 그려진다. 만약 시민들이 실제로 이렇게 믿고 있다면, 전문가들간의 의견불일치는 과학으로 간주되는 것에 대해 한마디로 심대한 환멸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모두 무능력하거나, 거짓말쟁이거나, 강력한 이해집단이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견해차이도 없고, 의견불일치는 많은 과학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느낌도 없으며, 전문가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광경을 "훌륭한" 과학에서 피해갈 수 없는 특징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처하려는 경향도 없다. 결국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의 상, 즉 민주사회에서 과학에 주어져야 마땅한 존중을 보증하는 가장 좋은 길로 종종 믿어져 왔던 바로 그 과학의 상이 실제로는 과학자들과 과학 교사들에게 근심거리를 주는 반과학적 태도의 많은 부분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NHS의 시각은 불합리한 기대나 이에 수반해 반과학적 견해를 초래하는 양극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미래의 시민들이 과학자들을 "가능한 최고의 전문가"로 여기도록 도울 수 있다.
과학교육은 과학의 본질에 대해 과학자들 자신이 제시하는 것이 아닌 대안적 설명을 미래의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16)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안하는 개혁의 핵심이다. 만약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의 상이 제대로 내면화되었다면 즉시 실험에서의 실수로 재해석되어야 할 변칙 결과들이, 여기서는 프런티어 영역(특이과학)의 실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발견의 방법을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발견법적 가치(heuristic value)를 갖는 길이다. 즉, 아직 합의가 형성되지 않은 영역에서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의 경계에 놓인 문제에 논평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해체나 의견불일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발견의 방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음 단계, 즉 이러한 잠재적 혼돈 상태에서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도 교실에서 실제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 사실 앞으로 과학자가 될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과학적 합리성의 기존 모형에 따라 자신의 실천 속에서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어놓는 방법을 이미 교육받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 과학자가 될 학생과 앞으로 일반시민이 될 학생을 가르치는 데 있어 긴장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양쪽 관점들을 모두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둘을 서로 약간 나눠서 교육을 할 필요도 있다.
과학자로서의 교사
교육의 현재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한, (적어도 영국과 미국의) 과학 교사들은 이데올로기적 외양을 띄지 않은 과학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단지 몇 안되는 과학자들 ― 과학 논쟁에 관여해본 적이 있는 ― 만이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과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과학 교사들은 자신이 받은 교육 외에 과학을 경험해볼 일이 거의 없고,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의 모습만을 계속해서 주입받게 된다. 물론 최상층부에 있는 소수의 과학자들을 제외한다면, 기존 모형을 성공적으로 흡수하고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학계에서의 성공과 과학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 교사들이 과학적 합리성의 기존 모형을 성공적으로 흡수·적용한 사람들이라고 간주할 수 있으며, 강의요목 설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낡고 판에 박은 교수법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발견의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발견의 방법은 기존 모형의 실천적 적용을 교육하는 데 있어 좀더 부드럽고 좀더 효과적일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네 가지 목표와 교육 실험을 위한 제안
이제 앞서 언급했던 과학교육의 네 가지 목표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 목표들은 다음과 같았다.
1. 아이들이 과학 과목에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준다.
2. 미래의 시민들에게 과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3.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을 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을 시작한다.
4. 아이들에게 자연 세계의 몇몇 특징들을 가르쳐준다.
만약 목적이 과학을 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가르치는 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모형 하에서 1, 3, 4가 일치하도록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목표 2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목표 2와 4가 서로 일치하려면 자연 세계의 특징들이 현재 사회적으로 조직된 합의의 특징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실험적 방법을 써서 훌륭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의] 관심의 초점이 타당한 실험 결과라는 추상적 사고가 아니라 합의의 사회적 조직에 맞추어질 때에만 그러하다. 이는 교실에서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이 과학자사회 내에서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거쳐)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의 축소판이 될 것을 요구한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교사의 지도 하에 처음에는 무질서한 유사발견(quasi-finding)들의 집합이었던 것을 선호되는(바로 옳은!) 가설에 대한 실험적 지지로 바꾸어놓게 되는데, 우리는 학생들이 바로 이 과정에 주목하도록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교실에서의 교훈과 과학 논쟁이 종결로 향하면서 겪는 실제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은 정말 놀랄 만한 정도다.17)
새로운 모형 하에서 목표 1, 즉 시험의 통과가 다른 목표들과 일치할 수 있으려면 강의요목의 일부를 과학의 사회적 조직에 관한 질문들 ― 현재 "과학학(Science Studies)"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주제인 ― 에 할애하는 도리밖에 없다.
제언과 문제들
지금은 NHS를 혁신적 과학교육에 통합시키는 프로젝트에서 매우 초기 단계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잠정적인 실천적 제언들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할 듯싶다. 첫째로, 35년 전에 개발된 {하버드 사례사}의 방향을 따르는 새로운 교육 자료를 만들어낼 시기가 이제 무르익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코난트가 과학의 실제 본질에 관해 당시 그가 이용할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역사적 설명들에 의존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NHS 문헌이 제공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과학의 상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코난트의 것과 매우 유사할 것이고, 우리가 염두에 둔 대상 역시 중등학교 고학년과 대학교육 초반부 사이의 학생들로 그가 상정했던 것과 거의 같을 것이다.18) 둘째는 이보다는 좀 덜 구체적인 제언으로, 우리는 실제 이루어지는 실험 교육이 (적어도 때때로) 연구와 반성의 대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실험 교육을 학생들에게 적절한 숙련과 자연 세계의 몇몇 측면들을 가르치기 위해 쓰는 것 외에, 이를 과학적 숙련이 전달되고 실재에 관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길잡이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야심적인 계획일 것이며, 우리는 이를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할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논문에서 제안한 접근에 관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지적받았다. 그러한 혁신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교육 환경에 대해 매우 세심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가 제안한 것 중 많은 수는 중등학교 고학년이나 대학교육 초반부에 적용된다. 중등학교는 그 제도적 환경 때문에 대학과는 매우 다른 조건을 제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변화가 중등학교에는 전혀 안맞다거나 혹은 대학에는 전혀 안맞다거나 하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국가별 교육 시스템의 다양성에서 나오는 엄청난 차이들을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교육패턴에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불가피하게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른 국가의 시스템들을 특징짓는 구조와 목표들은 이런 방향의 혁신에서 더 많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더 많은 제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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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Harry Collins and Steven Shapin, 'Experiment, cience Teaching, and the New History and Sociology of Science,' Michael Shortland and Andrew Warwick (eds.), Teaching the History of Science (Oxford: Basil Blackwell, 1989), pp. 67-79.
** 이 글은 원래 1983년 9월 5일에서 9일까지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혁신적 물리교육에서의 과학사의 이용"을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던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원 논문의 타자본 사본은 학술회의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다. 원 논문은 독일어로도 번역되었고, Physica Didactica, 33(11), (1984), 33-46에 실렸다.
1. Conant (1947).
2. Conant (1948); 기업 사례연구를 모형으로 했다는 얘기는 Conant (1947)에 나와 있다.
3. Conant (1948), vol. 1, p. vii; Conant (1967), pp. 8-12도 보라.
4. Conant (1967), 특히 pp. 6-9를 보라.
5. 코난트와 쿤의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는 Merton (1977), pp. 3-14, 81-9를 보라.
6. Kuhn (1962)의 서문을 보라.
7. NHS 연구들에 대한 선별적 리뷰에는 Barnes and Edge (1982), Shapin (1982), 그리고 Collins (1982) 등이 있다.
8. Collins (1985)를 보면 이러한 점들을 세부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사례연구들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9. French (1983).
10. Kuhn (1963).
11. Collins (1985).
12. Farley and Geison (1974)와 Shapin (1979), pp. 139-78도 보라.
13. 학생들을 과학자로 취급하는 다른 예로 로스 드라이버(Ros Driver)의 연구가 있는데, 예컨대 Driver, Guesne, and Tiberghien (1985)와 Driver (1983)을 보라.
14. 예를 들어 Collins (1974)와 Collins and Harrison (1975)를 보라.
15. 예컨대 MIT의 프렌치 교수가 쓴 저작을 보라 (French 1983). 이 글의 관점과 대체로 일치하는 저술로는 Edge and Aikenhead (1983)이 있다.
16. 텔레비전에서 과학이 "지식생산 활동"이 아닌 일군의 "확실한 지식"으로 그려지는 방식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 Collins (1987)이 있다.
17. "발견" 양식의 교수법을 이용하는 과학 수업에서 인지적 질서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것에 대한 탁월한 설명으로는 Atkinson and Delamont (1977)을 보라.
18. 이 목표를 염두에 두고 콜린즈(H. M. Collins)와 밀러(R. H. Millar)는 현재 Science in Practice라는 제목의 책을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콜린즈와 핀치(Trevor Pinch)의 공저로 1993년에 출간된 The Golem: What Everyone Should Know about Science를 가리키는 듯하다.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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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pin, S. (1982). "History of science and its sociological reconstructions". History of Science, 20: 15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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