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재 정치칼럼사이트 '시대소리' 운영위원 pyein2@hanmail.net


복싱의 인기가 요즘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바로 개싸움, 이른바 무규칙 이종 격투기가 치고 들어오고 있다. KBS 위성방송에서 거의 매일 같이 프라이드 FC, K1, KOTC 등의 이종격투기를 중계방송하면서, 인터넷의 일부 마니아층에게만 알려졌던 희대의 개싸움이 한국을 강타하고 있다.

복싱, 태권도, 레슬링, 유도, 합기도, 가라데 등 무술 고수들이 한꺼번에 모여, 최강의 파이터를 뽑는 대회? 무언가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자기 자신도 대단한 무술가이기도 한 문화일보의 김용옥 기자도 이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태권도의 고수와 세계 복싱 챔피온이 실제로 싸운다면? 역도산과 무하마드 알리가 실제로 싸운다면? 일본유도의 창시자 카노오 지고로오(嘉納治五郞, 1860∼1938)와 절권도(截拳道)의 창시자 브루스 리(李小龍, 1940∼1973)가 실제로 맞짱을 뜬다면? 상상만 해도 흥미진진한 이런 이야기는 끝없는 공담으로 흐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룰을 가지고 있는 이들 고수들의 실제싸움장면을 상상한다는 것은 실제로 매우 난해한 것이다. 그러나 극한상황에서 싸움이란 어차피 벌어지게 마련이다.

생각해보라! 알리가 쨉과 스트레이트를 뻗으면서 덤벼들때, 브루스 리가 붕 날러서 이단옆차기로, 뒤돌려차기로 멋있게 아구를 날린다? 이런 장면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러나 이종격투기 대회를 실제로 보게 되면 이런 기대는 한순간에 날아간다. 넘어진 놈 위에 올라타서 머리채고, 팔 잡고 늘어지는 개싸움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벌어진 이종격투기를 직접 관람한 김용옥 기자도 이런 실망감을 표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싸운다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기술은 뭔 기술이 필요했는가? 그냥 엉겨붙어 치고박고 하다가 코피나면 울고 끝났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술의 최고수들의 리얼파이트의 최종적 현실은 바로 우리들의 옛 황토길의 노스탈자, 그 엉겨붙어 코피터지던 그 동심의 세계였던 것이다.

리얼파이트! 한마디로 개판이요, 메챠쿠챠요, 루안치빠짜오다.그러나 이렇게 룰없이 엉겨붙어 싸우고 있는 현실이 탈신화를 지향하는 우리시대의 가장 정직한 자화상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도, 정당간의 싸움도, 남북간의 대립도, 한·미관계의 모든 적나라한 현실도 이렇게 개판속에서 개판으로 살아남는 놈만이 승자가 될 뿐이라는 뼈저린 교훈을 되새기며 나는 장충체육관의 광분한 인파를 헤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속에서의 성룡과 이소룡이 보여주는 현란한 공중 날라차기, 혹은 오락 버츄얼파이트에서 볼 수 있는 괴력의 장풍 등은 실제의 이종격투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발차기라도 잘못하는 날에는 다리가 붙잡혀 그대로 바닥에서 개싸움으로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의 경기 내용이다. 그런데 왜 이런 잔인하고 한심한 경기에 현대인들이 속속 몰입하고 있는가?

김용옥 기자의 분석대로 "개판으로 살아남는 놈만이 승자가 될 뿐"이라는 현대인의 생존문법 때문일까? 이종격투기에 관한 취재를 한 MBC 시사매거진2580에서도 그런 식의 분석을 하였다. 각박한 사회에서 왜소해진 현대인, 무언가 풀어버리고, 때려버리고 싶은 그 잠재적 욕망을 이종격투기에 던져 넣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격투기 선수 이효필의 말도 인용했다.

"이제 복싱은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더 잔인한 걸 원합니다."

무술 장풍을 원하던 사람들이 이종격투기를 보게 되면 현대인, 고독, 왜소, 잔인함 등등 너무나 판에 박힌 분석의 틀을 갖다대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나 역시 이런 분석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무언가 좀 다른 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종격투기보다는 복싱을 훨씬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복싱은 국내에서 70년대와 80년대초까지 최고의 인기스포츠였다. 그러다 프로야구, 프로농구, 프로축구에 밀리며 비인기 종목으로 몰락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복싱이 덜 잔인해서 몰락했다면, 왜 무려 20여년 동안 국내의 스포츠 시장을 프로야구, 프로농구, 프로축구가 장악했을까? 복싱에서 이종격투기로 넘어가는 그 간극이 애매하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복싱의 인기가 떨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작아보이지만 결정적인 문제 한 가지를 든다면 심판의 편파 판정이다. 국내경기는 물론 국제경기에서조차 80년대 중반 이후에 온갖 편파 판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젊은 선수들이 좌절하고, 젊은 지도자들이 좌절하고, 젋은 관객들이 좌절했다.

복싱이 당시의 다른 경기에 비해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트렁크 한 장 걸치고 글러브 하나 끼고,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움직임으로 정정당당히 두 주먹의 승부를 가리는 한판 대결의 스포츠였기 때문이었다. 더 열심히 노력한. 더 강한 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본주의 체제와 가장 적합한 스포츠였고, 자본주의는 이에 돈으로 보상해주었다.

그런데 판정이 이상해지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그런 승부의 쾌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히려 그 점에서는 투기종목보다는 야구나 축구와 같은 구기 종목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물론 야구나 축구에서도 심판 판정에 따라 승부가 뒤집어 질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1:0 이든 8:7 이든 객관적인 수치로 승부가 결정난다. 어찌되었든 골이 들어가고, 홈베이스를 밟는 그 장면은 현실이고, 그 현실의 장면을 수치로 표현한게 득점 스코이고, 그게 곧 승부 아니던가.

반면 복싱, 레슬링, 유도, 태권도와 같이 투기종목일수록 심판판정이 주관적인 이유는 이들 스포츠가 신체에 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필살기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신체를 보호하다보니 수많은 규정을 두어야 하고, 그 규정에 적용하는 인간의 주관이 승부를 결정짓는다.

분명히 100대를 때린 놈과 10대를 때린 놈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는데 판정은 10대 때린 놈이 이기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고 싶은 관중들은 짜증나는 잡규정들로 범벅이 된, 현대의 각박한 사회를 격투경기에서 또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 자가 빽있는 자에게 패하며 서럽게 우는 모습 역시, 격투 경기에서 또 다시 보게 되면서, 점점 더 이들 경기에 등을 돌리게 되고 만다.

반면 이종격투기를 생각해보자. 이종격투기의 최초의 무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UFC 초기 시절에는 체급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이 대회의 캐치프레이즈는 "두 명이 8각 링에 올라가서 한 명만 나올 수 있다"였다. 즉 둘이서 죽을 때까지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이다. 이 경기의 승패에 심판이 끼어들 수 있는가?

나는 프라이드 FC의 거의 모든 경기를 다 보았지만 심판 때문에 경기가 뒤집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규정이 별로 없다보니 심판이 끼어들 여지가 없고, 한 명이 완전히 녹아웃되지 않고, 끝까지 경기가 이어지면 그냥 무승부를 줘버리니, 판정도 없는 셈이다. 복싱에서 수많은 오심과 편파판정은 이종격투기에서는 본질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그뿐이 아니다. 복싱과 달리 이종격투기에는 체급 차를 중시여기지 않는다. 프라이드 FC의 경우 미들급과 헤비급이 나뉘어지지만, 이종 체급 간의 경기도 벌어진다. 또 헤비급 내에서도 엄청난 체급 차가 있다.

미국 럭비선수 출신 밥샵은 2미터가 넘는 키에, 체중이 무려 170킬로그램이다. 별다른 기술은 없고 오직 힘으로 때려눕힌다. 이 선수와 브라질의 유술 선수인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가(190센티의 키에 100킬로그램 정도) 대결을 한 적이 있다. 힘으로 깔아뭉게고 올라타서 두들겨대는데 저러다 죽지나 않을까 하는 정도로 맞았다. 그런데 순간의 틈을 이용하여 팔꺽기 암바로 이겨버렸다.

영화 속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모습은 너무나 자주 본다. 그러나 그걸 현실에서 본 적이 있는가? 정치영역이든 경제영역이든, 조폭의 영역이든 항상 강자가 이기고, 이긴 자가 또 이긴다 이 말이다. 이종격투기는 바로 그 영화 속의 환상을 깨버린다. 무술 유단자라 해도 덩치 큰 근육질에는 애와 어른의 싸움밖에 안 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가끔가다 정말 가끔가다 그렇게 영화가 아닌 실전 개싸움에서 무수히 두들겨 맞는 약자가 강자를 단 한 순간의 기회로 역전을 하는 것도 실제로 보여줄 때가 있다는 말이다. 관중들은 이럴 때 가장 환호한다.

이종격투기의 관중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기는 것엔 흥미가 없다. 또한 빽있는 자가 노력하는 자를 이기는 것에도 흥미가 없다. 외부 개입없이 정정당당히 맞붙어, 약자로 인식되던 자가 강자를 눌러 이겼을 때, 그것이야말로 이 스포츠의 최고의 매력이다.

나는 언젠가 인터넷에 글을 쓰는 사이버 논객의 전장을 이종격투기 장에 비교한 적이 있다. 글쓰기 시장의 반은 일간지 기자가 잡고 있고, 나머지 반은 교수 혹은 박사학위 소지자가 잡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글쓰기 시장에 타 업종 사람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인터넷이라는 장에서는 이것이 가능하다. 누가 더 정확한 분석을 하여, 더 많은 대중을 설득해낼 수 있느냐라는 단 한 가지의 기준으로 판정이 내려진다. 이 무규칙 격투기 장에 기자가 출전을 한다면 다양한 팩트라는 무기로, 교수가 출전을 한다면 심도깊은 학적 내공으로 기업가가 출전을 한다면 체감으로 익힌 현실적 감각으로, 소설가가 출전을 한다면 상상력 넘치는 문장으로, 각자의 필살기를 들고 서로 논전 및 여론전을 벌인다.

신문사에 기고할 때, 학위가 없어 무시당한다거나, 혹은 출판을 할 때, 학벌이 신통치 않아 좌절한다거나, 교수임용 때 배경이 없어 미끌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오직 분석과 설득이라는 실력 하나로 승부를 건다.

이종격투기와 사이버 논전의 비유가 맞다면, "사람들이 너무 잔인해졌다"느니 "강한 자가 약한자를 밟는 것"이라느니 하는 너무 삐딱한 비판은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빽없고 배경은 없지만 노력하고 실력있는 자가 이긴다"라는 개혁적인 메시지도 부여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최근 들어 이종격투기 쪽에서도 너무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대중화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조금씩 규정을 보완해가고 있다. 이종격투기의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보완하겠다는 발상이다.

인터넷 논객들도 이와 똑같다. 지금까지 마이너판에서 자기 마음대로 소리를 내질렀는데, 이제 인터넷 매체의 대중화가 진행되는 지금 시점에서는 스스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없는 말도 지어내고, 기본적인 팩트도 없이 단언을 내린다거나, 기초적인 사회과학적 용어도 파악하지 못하는 수준의 상식, 이제는 이런 것들은 극복해나가며 그야말로 빽있고 덩치 큰 강자들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이종격투기, 나는 그래서 마음에 든다.
2003/07/22 20:20 2003/07/22 20:2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PSPD/trackback/9094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