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 『한겨레』 정치부 기자 ahn@hani.co.kr


누구에게나 각인돼 지워지지 않는 ‘역사’가 있다. 그건 마치 어깨죽지에 새겨진 주사자국과 같다. 심드렁한 일상에 파묻혀 있다가도 어느날 들여다본 거울 속에 기억 그대로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 엄연한 존재에 새삼 놀라고 있자면, 그 뒤로 밀려드는 온갖 추억의 파동. 그것은 다시 파문을 일으키며 잔잔하고 지루했던 일상을 헤집으며 아우성친다. 1년에 한두번 있는 그 순간들 때문에 ‘나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추된다. 잊혀지지 않는다.

소설가의 상당수가 ‘자전적 소설’이니 ‘회고담’이니 하며,사실은 시답잖은 개인사를 시부렁시부렁대는 건, 그 기억의 굴레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 한 가운데서 똬리틀고 있는, 시대와 연관된 그 추억을 ‘과대평가’한다. 뭇 사람들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아예 코웃음치는 일이 일어날까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어머니에게 무릎의 상처를 보여주는 어린 아이의 심리처럼, 우리는 그 회고담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정당한(?) 위로를 받고 싶다.

내가 ‘386 세대’를 부러워하는(사실은 질투하는) 단 한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삼이사들의 이런 욕망이 언제나 불충족되기 마련인 반면, 그들은 이제 전사회적으로 위로받는 처지가 됐다. 80년대에 그들이 얼마나 전투적으로 시위에 나섰는지, 지하 자취방에서 얼마나 은밀하게 사상토론을 벌였는지, 심지어는 그런 동료들 틈에서 얼마나 ‘개인주의적’‘기회주의적’으로 번민했는지조차도 모두 진지한 경청의 대상이 된다. 하여 나의 짧은 지식 속에서 ‘386’은 ‘변증법’다음 가는 만병통치약이다. 적어도 2003년 한국에서 ‘386 세대’라는 호명은 “변증법적으로 해결해”라는 80년대의 공언만큼이나 강력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불편하다. 그 중에서도 80년 광주항쟁을 그 현장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학번의 ‘386’들이 가장 눈에 밟힌다. 술 한잔의 기운을 빌어, 그네들이 오랫동안 묵혔던 흉터를 길어 올리기라도 하면,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비장한 눈빛으로 그네들을 바라보며, 머릿 속으로는 그 역사를 정당하게 위로하고 평가하는 단어가 무엇인지를 열심히 궁리한다. 논평이나 토론은 커녕, 추임새를 넣기도 곤란해지는 분위기에 눌려 한없이 주눅 든다. ‘나의 역사’도 덩달아 초라해진다. 사회적으로 아낌받는 상처를 가진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80년 광주항쟁(및 그 추체험)의 회고담을 듣는 것은 선배들의 군대 이야기를 처연히 듣고 있는 것만큼이나 고역이었다. (나는 그렇게 진작부터 싹수가 노랬다)

이른바 ‘386 정치인’들은 그 ‘아낌’을 동력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유력 대학의 총학생회장 출신들, 각종 시국사범 출신들, 노동현장에 투신한 사람들이 그 코어를 형성하고 있다. 감옥에 드나든 일은 군사독재 시절 관료로 승승장구한 것보다 분명 더 강력한 ‘아우라’를 갖고 있다.

그 주변에 일련의 ‘뷰로크라트’와 ‘테크노크라트’들이 인권과 민주화 경력의 장식을 곁들여 포진해 있다. 이들은 혼란한 헌정 속에서도 70년대 경제성장의 토대 위에서 정상적인 고급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다. 이들이 이전의 정치꾼들과 구분되는 유일한 준거는 80년대를 가로지르는 동안 체험한(혹은체험했다고 추정되거나 그렇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번민’이다. 인권변호사, 대쪽 판사, 소신 검사, 양심적 언론인, 소장 학자 등의 레떼르가 이들이 내세우는 ‘386 시대’의 흉터다.

그리고 다시 그 주변에 폭넓게 자리한 30~40대의 인사들. 이들은 그저 그 시대를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곧잘 386으로 불린다. 한나라당의 소장파 의원들, 내년 총선을 노리는 수많은 젊은 정치신인들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은 “당신이 무슨 386이냐”고 할때, 곧잘 그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386의 범주를 ‘사회적으로 정착’시킨 일등공신이다. 고결한 희생과 준열한 시대정신이 없어도 비교적 손쉽게 개혁과 민주화의 세대에 편입될 수 있다는 ‘매력’을 발견할 다음에서야,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넘어 386이라는 기괴한 단어를 일반명사로 승격시켰다.

이런 386세대는 중심부와 주변부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 고대 로마의 장교를 연상시킨다. 거구의 게르만족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로마 장교들은 투구 위에 수십 센티나 되는 깃 장식을 달았다. 아마도 전투 현장에서 그 닭벼슬같은치장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웠을 테지만, 그들은 휘하의 병졸들로부터 북유럽인 못지 않은 장대한 체구를 갖췄다는 ‘위로’를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들의 역사적 흉터가 기괴해 보이는 일이 부쩍 늘었다. 여권 내부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386 음모론 따위가 오르내리는 건, 오히려 웃어넘길 만하다. 상식적으로 보기에도 무슨 비밀지하조직을 갖지 않는 이상, 그들이 일사분란하게 음모를 꾸밀만큼 균일하지는 않다. 다분히 동교동계나 노회한 정치꾼들이 퍼뜨린 말장난의 성격이 짙다.

나를 정말 심란하게 하는 건, 이에 대한 당사자들의 반응이다. 이인영 민주당 구로갑 위원장은 최근 ‘386 음모론’에 대해 “386의 특징은 음모론이 아니라 정면돌파다. 386은 다른 할 일이 많아 음모할 시간도 없다. 386은 꼼수를 쓰면서역사를 밀고 온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정치인의 말을 전체로 확대시키는 게 무리와 비약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언명은 못내 불편하다. 젊은 정치인들 스스로가 미디어가 상징조작한 386이라는 단어를 마치 실체를 가진 정치적 주체인양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외곽에 포진했을 때만 해도 ‘푸른 설움’같은 뉘앙스를 풍겼던 이 단어가 최근 문제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앞서 말한, 386 세대 정치인의 중층적 구성 때문에 그들이 기득권의 표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점을 짚어야 겠다.실제로 상당수 386 정치인들은 그 세대가 경험한 정치적 소외 및 인권탄압과는 거리가 있다. 심지어 그 핵심이라 할, 유력대학 학생회 간부 출신의 정치인들이 “87년을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받게 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의미있는 주목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386 세대 정치인 가운데서도 ‘어떤 누구’에 불과하다. 집합적 단어로서의 386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울림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들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시간이 갈수록 ‘20대부터 시작해 40대까지 이어진 저항’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가졌던 386 세대 정치인의 집합적 코드가 ‘역사적 임무를 방기한 채 개인적 이익만 챙기는 오합지졸’의 양상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지지부진한 정치개혁 논의와 이전투구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분명치 않고, 다만 그들이 차지한 ‘자리’만이 명약관화하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약속으로 지지를 받았던 386 정치인들의 핵심조차도,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보면, 그 자리가 주는 명예와 영화만 보전하고 있을 뿐, 애초의 약속은 온데 간데 없다.

나는 이인영이나 오영식, 임종석, 김부겸, 김영춘 같은 사람들이 더이상 386을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포함해 말 만들기 좋아하는 기자들이 간혹 386 정치인이라며 한 두릅에 묶으려 할 때도, 그런 규정을 거부했으면 좋겠다. 짧게는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6년 여 동안, 길게는 문민정부 이후 10여년 동안, 386 세대라는 언명은 이념적·정치적으로 닳고 닳아 이제는 거의 무의미한 말이 돼버렸다.

그런 점에서 386은 ‘붉은 악마’와 비슷하다. 빨간 티셔츠만 입으면 개나 소나 다 붉은 악마다.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붉은 악마가 유명해졌다. 386 정치인과 붉은 악마 운영진의 차이는, 후자의 경우 이를 기반으로 어떤 기득권도 누리고 있지 않지만, 전자는 그 광범위한 자양분에 기대 금뺏지를 얻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이라면, 지난 역사에 대한 ‘대리보상’ 심리로 386 정치인에게 보냈던 국민적 지지가 철회될 날이 머지 않았다. 도매급으로 386으로 묶여 떠받들어 졌다가, 마찬가지 방식으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길은 단 하나다. 그 묶음에서 뛰쳐 나오는 것이다.

386의 언명 뒤에 숨어 자신의 모든 행위가 자연스레 역사적 의미와 연결될 것이라는 안이한 현실인식을 버리고, 그 이름 석자를 걸고 정치를 할 때가 왔다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무슨 386이니 475니 하는 무원칙한 세대간 합종연횡이 아니라, 국민적 관심사를 제대로 구현할 뜻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386 정치인’들은 더 이상 386 뒤에 숨지 말고, 정치인으로 홀로 서라. 20년 전의 기억으로 더 이상, 동시대의 장삼이사와 그 후배 세대를 현혹시키지 말라. 이제부터는 술 기운을 빌어서라도 옛날 이야기 하지 말라. 제발 2003년 오늘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으로 보여라.

상처 받은 영혼을 서로 위로 받는 일 따위는 그저 평범한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하니, 제발 그 수준을 벗어나라. 386 정치인들에 쏟아지는 몰매를 보며, 우리의 80년대가 도매급으로 매도 당하고, 그 시대에 함께 묻어두었으나 누구처럼 제대로 평가 받아 보지도 못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아픈 추억까지 무시당하게 되는 그런 나라를 제발 만들지 말란 말이다.

2003/07/28 10:02 2003/07/2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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