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재 정치칼럼사이트 '시대소리' 운영위원 pyein2@hanmail.net


KBS 예비신입사원 모집에, 국내 언론사 중 유일하게 지방대 할당제를 도입했다. 기자, PD 방송 경영직 등에 각 지역의 대학출신을 50% 할당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KBS가 공영기업이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사회는 더 이상 신분의 이동이 없는 경직된 사회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초기 천민자본주의의 시스템이 급속히 사회를 장악하면서, 문화자본까지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 계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엘리트로서의 의식도 갖추기도 전에, 정치,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방면의 자본까지 모다 장악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젊은층의 직업의 문제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터넷의 언론고시 사이트를 보면 학벌과 지역에 관한 불만섞인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영어도 잘하고 학점도 높은데,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비공식적으로 공개되는 각 언론사들의 신입사원 합격자들의 대학분포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방송3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사는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를 중심으로 신입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KBS를 제외한 각 언론사로서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어차피 언론사도 사기업인 이상 자신의 회사에 가장 필요한 사람을 뽑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정말 실력이 있는데, 학벌 때문에 탈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야기하는 실력이 바로 학벌이라면 언론고시 사이트의 불평불만의 글은 허탈한 하소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당 언론사들이 일부러 실력이 형편없는 학벌좋은 신입사원을 뽑은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들 나름대로 최고의 인재라고 선택하여 뽑은 결과가, 바로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로 나왔다면 그들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언론사의 시험구조 자체가 학벌이 높은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되어있다. 서류전형에서는 다 알려졌듯이, 대학별마다 가중치를 다르게 매긴다. 그리고,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토익.토플의 경우도 흔히 말하는 스카이대학출신들에게 더 유리하다.

각 대학의 생활과학연구소의 조사결과에서도 드러나듯이, 90년대 이후 서울대, 연대, 고대의 신입생의 출신계급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미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많은 돈을 들여 어학연수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더 빠른 학생들은 그 이전에 미리 다녀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학생들이 스카이 대학에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대학 내에서 자연스럽게 토익과 토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대학입시 때부터 영어성적이 높은 사람들이 스카이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언론사의 1차 시험은 대부분은 객관식 상식이다. 객관식 상식 시험은 내신이나 대학입시시험의 방식과 유사하다. 앉아서 죽어라고 외워댈 수 있는 사람에게 유리한 대규모 입시방식이니, 당연히 대학입시에 성공한 사람이 적응을 빠르게 할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면 굳이 학벌을 보지 않고 똑같은 조건에서 입사경쟁을 해도, 서울대, 연대, 고대, 이대 출신들이 더 많이 합격하게끔 되어있는 것이 언론사 채용방식인 것이다. 이게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최종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세 배수 면접을 본다고 치자. 누가 최종면접을 보겠는가? 언론사 사장을 비롯한 간부진들이다. 이들의 출신학교가 어디일까? 거의 100%가 소위 스카이 대학출신이다. 그럼 이 사람들이 과연 누구를 신입사원으로 뽑을까?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 역시, 자신의 학교 후배를 도와주려고 선심쓰듯 뽑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언론사 간부까지 올라가는데 노력한 자신의 과거 행적을 파노라마 필름처럼 되살려보니, 자신의 학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게 될 것이다. 청와대, 재경부, 한국은행 등 고급 취재원들의 학벌이 어디에 집중되어있을까? 그냥 생판 모르는데 처들어가는 것보다는 학교 선후배 끼고 들어가는게 취재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수십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동아일보의 경우는 아예 신입사원의 집안배경까지 본다고 한다. 이것도 그냥 심심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집안배경이 뛰어나면 친인척들 중 고급 취재원을 공짜로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런 신입기자를 채용하면, 고부가가치를 지닌 사치성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생산하는데 훨씬 유리하다. 예를 들면, 최근 들어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명품 문제만 해도, 나 같이 평소에 명품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접근해야할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명품에 환장한 사람을 투입하는 게 프로그램의 정보를 훨씬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언론사는 기본적으로 가진 자들을 위한 기사를 생산한다. 이는 언론사의 수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가진 자들을 위한 기사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못 가진 자를 기자나 PD로 채용한다? 이것은 회사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다. 그래서 KBS의 지방대 할당제는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기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언론사의 뉴스가 철저히 서울중심주의적인 이유는 서울 출신, 그리고 서울지역 대학출신 기자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지방대 출신이 언론사에 입사해야 이 구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번 KBS의 지방대 할당제는 그런 과정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평가할 만하다.

물론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학력, 학점, 토익이라는 수치 자료에 의해 언론인을 뽑는 그 관행을 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자를 하려면 대학에서 기자활동을 하면 곤란다. 대학에서 기자활동을 할 시간에 도서관에 박혀서 상식 외우고 작문 베끼는 게 기자가 되는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KBS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면 앞으로 이 문제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 때부터 기자나 PD와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면, 앞으로 그 누구도 기자나 PD가 될 수 없도록 해야한다. 그래야 한국의 언론이 산다. 지금까지는 기자 따로 학생 따로 놀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학생시절부터, 현직 기자나 PD와 거의 동등하게 활동을 하고,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유력 언론사에 입사를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대학시절 교지든 학보사든 단대 신문사이든, 이런 곳에서 활동했다는 추천서가 없으면 처음부터 원서접수를 받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만약에 PD의 경우라면 각 지역방송, 그리고 인터넷 방송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해본 경험, 그리고 그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사원을 채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 역시, 지방대 할당제와 병행해야하는 것은 물론이다. 한국에서의 지방대 할당제 혹은 지역할당제는 사실 상, 계급할당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이것을 마음 속으로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줄 안다.

2003/08/13 11:46 2003/08/1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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