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논객> "게임이즈오버"
칼럼과 기고 :
2003/10/29 12:05
『사이버참여연대』는 매주 수요일,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수요논객>이라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참여연대의 입장과 다르더라도 논리성과 합리성을 갖춘 글이라면 주제와 자격의 제한 없이 소개할 것입니다. 논객으로 참여하고 싶은 분들은 자신의 성함과 신분, 연락처를 명기해 desk@pspd.org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번 주 수요논객은 김시원님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게임이즈오버"
이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노무현 정권이 뭔가 어설프고, 불안하기 짝이 없으며, 일관성도 없고, 거칠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나라꼴이 말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또 "자격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는 이 현실이 견딜 수 없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들은 이 정권이 제발 세련되고, 안정되고, 노련하며, 일관되었으면 하는 주문을 밤낮으로 외친다. 하기사 듣도 보도 못한 촌놈이(아, 이 불경을 용서하시라) 하루아침에 주류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주류는 물론 주류연하는 이들의 속이 편할 리 없다. 그것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인 다음에야.
"시민의 힘으로 정치개혁을!" 외치며 지난 대선에 열성을 쏟았던 노사모 관계자 제위께는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난 대선이 진보와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승리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가 언제 적부터 진보와 개혁에 진정어린 한 편이었던가. 설사 손을 들어주었다 치더라도 그 슬로건에, 그 경향성에 취한(술 취한 것처럼) 적은 있었을지언정 단 한번이라도 그 컨텐츠에 동의한 적 있던가. 그 사례를 나열하는 것조차 촌스럽고 민망할 지경이다. 지난 대선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하나의 흥미로운 이벤트였고 게임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구기득권과의 절연이라는 개혁적 선택이었다고?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국민의 승리였다고? 천만의 말씀!
사람들은 게임을 즐긴 것이다. 무릇 게임은 결과가 쉬 예측되지 않을 때 흥미진진한 법이다. 아니 오히려 뻔히 보이는 결과가 극적으로 뒤집어 질 때 게임의 묘미가 더 해지는 것 아닌가. 국민경선제였던가. 그 흥미로운 이벤트가 한창 펼쳐질 때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개혁과 진보의 컨텐츠 때문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촌놈이"(아, 이 불경을 또 한번 용서하시라) 뻔하기만 했던 정치시나리오를 뒤집어엎는 경이를 보여주었던 데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너무 지루해서, 연상만 해도 하품이 절로 나는 정치판이, 지나가던 개에게서조차 냉소와 조소를 한 몸에 싸안고 있던 정치판이, 경마장처럼, 화투판처럼, 21세기 최신버전의 컴퓨터게임처럼 사람들의 심장을 달뜨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게임이즈오버". 모든 게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게 아니라 게임이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고 정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 당사자는 정작 진실로 정의로운 개혁을 중심에 놓고 선거를 치렀는지 모르겠으되,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는 게임 한판을 즐긴 것이다. 노무현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는, 늘 그랬듯이 채 한 줌도 안 되는 몽상가들에게는 잔존했을지언정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시 지루함과 냉소와 조롱의 일상으로 원위치된 것이다.
보수언론과 구주류는 사정이 어찌됐든 결과가 이렇게 빚어진 데 대해 한 때 망연자실했으나 곧 정신을 수습했다. 특히 사람들의 이 심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 틈을 최대한 이용했다. 어설프니, 불안하니, 일관성이 없느니, 거칠기까지 하다느니 하는 따위들은 이들이 써먹기엔 너무나 알맞은 이미지였고, 이를 이데올로기로 가공하는 데는 그리 힘든 품이 들지 않았다. 공연히 심심해진 사람들에게도 새롭게 주어진 질서를 또 다시 흔드는 도전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과거에 비해 게임의 시나리오가 너무 천박하고, 고루하며, 구태의연한 것은 지금 이 버전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이다. 상종가를 치기에는 경쟁력이 없는 상품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중권력의 공황사태를 맞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윈도우로 표상되는 몰가치의 사이버시대를 근원적으로 불신한다. 있는 질서를 그대로 전제한 위에 모든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안정적이며, 일관된 것은 무릇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던 대로, 있었던 대로, 예전과 같이 하면, 옛 패러다임을 그대로 쓰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본은 한다"고. 과거의 격을 깨고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건 어차피 시행착오를 각오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켜보는 사람들보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권력의 욕망을 스스로 잘라내면서 가는 이가 더 힘들 것이다.
노무현은 자기 자신도 힘들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힘들어하고, 구주류도 힘들어하는 이 일을 왜,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대목을 한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오늘의 이 대중권력의 공황사태는 단지 정적들의 싸움만은 아니다. 누구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니, 동의의 독재니 하는 별 희한한 개념어들을 생산해내며 굳이 어려운 논리를 펼치고 있으나 정치나 사회과학을 쥐뿔도 모르는 나로서는 이리 단순한 문제를, 칠천만 동포들이 다 싸 짊어지고 괴로워하고 있는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순수하지만 미숙한 노무현의 아마추어리즘과 교활하고 세련된 국민의 프로페셔널리즘이 부딪히고 있는 것일까?
"게임이즈오버"
이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노무현 정권이 뭔가 어설프고, 불안하기 짝이 없으며, 일관성도 없고, 거칠기까지 하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나라꼴이 말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또 "자격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는 이 현실이 견딜 수 없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들은 이 정권이 제발 세련되고, 안정되고, 노련하며, 일관되었으면 하는 주문을 밤낮으로 외친다. 하기사 듣도 보도 못한 촌놈이(아, 이 불경을 용서하시라) 하루아침에 주류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주류는 물론 주류연하는 이들의 속이 편할 리 없다. 그것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인 다음에야.
"시민의 힘으로 정치개혁을!" 외치며 지난 대선에 열성을 쏟았던 노사모 관계자 제위께는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난 대선이 진보와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승리한 것이라 보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우리가 언제 적부터 진보와 개혁에 진정어린 한 편이었던가. 설사 손을 들어주었다 치더라도 그 슬로건에, 그 경향성에 취한(술 취한 것처럼) 적은 있었을지언정 단 한번이라도 그 컨텐츠에 동의한 적 있던가. 그 사례를 나열하는 것조차 촌스럽고 민망할 지경이다. 지난 대선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하나의 흥미로운 이벤트였고 게임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구기득권과의 절연이라는 개혁적 선택이었다고?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국민의 승리였다고? 천만의 말씀!
사람들은 게임을 즐긴 것이다. 무릇 게임은 결과가 쉬 예측되지 않을 때 흥미진진한 법이다. 아니 오히려 뻔히 보이는 결과가 극적으로 뒤집어 질 때 게임의 묘미가 더 해지는 것 아닌가. 국민경선제였던가. 그 흥미로운 이벤트가 한창 펼쳐질 때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개혁과 진보의 컨텐츠 때문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촌놈이"(아, 이 불경을 또 한번 용서하시라) 뻔하기만 했던 정치시나리오를 뒤집어엎는 경이를 보여주었던 데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너무 지루해서, 연상만 해도 하품이 절로 나는 정치판이, 지나가던 개에게서조차 냉소와 조소를 한 몸에 싸안고 있던 정치판이, 경마장처럼, 화투판처럼, 21세기 최신버전의 컴퓨터게임처럼 사람들의 심장을 달뜨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게임이즈오버". 모든 게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게 아니라 게임이 끝난 것이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고 정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 당사자는 정작 진실로 정의로운 개혁을 중심에 놓고 선거를 치렀는지 모르겠으되,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는 게임 한판을 즐긴 것이다. 노무현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는, 늘 그랬듯이 채 한 줌도 안 되는 몽상가들에게는 잔존했을지언정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시 지루함과 냉소와 조롱의 일상으로 원위치된 것이다.
보수언론과 구주류는 사정이 어찌됐든 결과가 이렇게 빚어진 데 대해 한 때 망연자실했으나 곧 정신을 수습했다. 특히 사람들의 이 심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 틈을 최대한 이용했다. 어설프니, 불안하니, 일관성이 없느니, 거칠기까지 하다느니 하는 따위들은 이들이 써먹기엔 너무나 알맞은 이미지였고, 이를 이데올로기로 가공하는 데는 그리 힘든 품이 들지 않았다. 공연히 심심해진 사람들에게도 새롭게 주어진 질서를 또 다시 흔드는 도전이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과거에 비해 게임의 시나리오가 너무 천박하고, 고루하며, 구태의연한 것은 지금 이 버전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이다. 상종가를 치기에는 경쟁력이 없는 상품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대중권력의 공황사태를 맞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윈도우로 표상되는 몰가치의 사이버시대를 근원적으로 불신한다. 있는 질서를 그대로 전제한 위에 모든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안정적이며, 일관된 것은 무릇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던 대로, 있었던 대로, 예전과 같이 하면, 옛 패러다임을 그대로 쓰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본은 한다"고. 과거의 격을 깨고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건 어차피 시행착오를 각오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켜보는 사람들보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권력의 욕망을 스스로 잘라내면서 가는 이가 더 힘들 것이다.
노무현은 자기 자신도 힘들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힘들어하고, 구주류도 힘들어하는 이 일을 왜,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대목을 한번쯤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오늘의 이 대중권력의 공황사태는 단지 정적들의 싸움만은 아니다. 누구는 우리 안의 파시즘이니, 동의의 독재니 하는 별 희한한 개념어들을 생산해내며 굳이 어려운 논리를 펼치고 있으나 정치나 사회과학을 쥐뿔도 모르는 나로서는 이리 단순한 문제를, 칠천만 동포들이 다 싸 짊어지고 괴로워하고 있는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순수하지만 미숙한 노무현의 아마추어리즘과 교활하고 세련된 국민의 프로페셔널리즘이 부딪히고 있는 것일까?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떻게 표현해도, 대통령은 대통령
김시원님의 주장에 공감한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우리사회 역사와 정치속에서 가지는 특수성과 지난 대선의 드라마틱한 반전에 대한 해석도 동감한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제 보통사람이 아니다.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있는 통치자이다. 그냥 아마추어다, 순수하다, 이렇게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다. 국민의 이해에 앞서,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그 아마추어를 극복할 수있는) 시스템이나 인사 등등으로 보완하면서 충분히 프로페셔녈하게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을까.
우선 나는 아마추어다. 순수하다. 그러니까 이해해달라는 의식부터 바꿔야한다.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시민 노무현이 아니라, 대통령 노무현이다. 부담스럽고 무리하게 슈퍼맨의 역할을 요구할지는 몰라도, 그걸 감수하고 대통령으로 나선 것 아닌가. 일단 프로가 되려는 노력부터 해야한다. 그것없이 무조건 이해는 더이상 없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게임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잘못 생각한 사람 아닌가?
그런 놈들이 많았기 때문에 잘못이 아니다?
이제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꼭 책임지길.
노무현 옹호의 3가지 방법
대통령 노무현을 옹호(또는 변명)하는 대표적인 2가지 방법이 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수구세력의 집요한 노무현 음해를 강조하는 것이 한 가지고, 국정의 혼란과 난맥상을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해석하는 방식이 다음 한 가지다.
김시원의 글은 이 두가지 방식에 덧붙여, 개혁과 진보를 대하는 유권자 또는 국민들의 이중성이나 위선을 지적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우리가 언제 적부터 개혁과 진보의 진정어린 한 편이었던가" 라고 물으며, 지난 대선의 의미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개혁과 진보의 열망을 거품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진정한 개혁과 진보세력의 부재를 노무현의 보수반동에 대한 사회적 알리바이로 제시하고 있다.
김시원이 도입한 새로운 방식의 노무현 변명은 노사모를 비롯한 참여세력들까지도 재미있는 게임에 열광했던 냄비근성의 소유자로 묘사할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그 파격이 노무현을 위한 유효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노무현정부가 개혁과 진보를 위해 어떤 노력과 정책들을 펼쳤는지가 제시되어야 한다.
새만금과 핵폐기장, 이라크파병과 대미외교, 특검과 남북협력, 경제와 노동정책, 민생과 복지정책 등에서 노무현은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정책을 펼쳤던가. 김시원이 적어도 개혁과 진보의 편에 몸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답을 알 것이다. 개혁과 진보를 표방해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스스로 반개혁과 보수로 회귀하는 마당에 그를 지지했던 유권자나 국민이 더 이상 어떻게 진정한 개혁과 진보의 편에 설 수 있을까. 적어도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노무현보다 개혁과 진보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수구세력의 집요한 노무현 음해는 사실 김대중정부 때부터 이어져온, 개혁과 진보 대 수구반동의 권력함수관계에서 불변의 상수다. 오히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언론지형의 변화, 영남출신 대통령으로서 지역색 시비 차단 등을 고려하면 이 반개혁의 상수는 김대중보다 오히려 그 값이 약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수구세력이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다고 해서 대통령직을 더 잘수행할 수도, 인정하기 싫다고 해서 대통령직을 더 못 수행할 가능성도 없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당선된 것은 수구세력이 인정하기 싫은 최고권력을 인정하고 싶은 사람들의 힘으로 눌렀다는 의미다. 국민들은 수구세력을 표로 이겨준 것이다. 그가 어설프지 않고, 일관성있게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그 이상의 무엇이 더 필요할까.
마지막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 변명도 공허하다. 새만금과 핵폐기장 결정에서 현지 국민의 참여는 원천 봉쇄됐고, 이라크 파병에서 시민단체의 참여는 '참여'의 들러리를 서 준것에 불과하다.
국정원, 검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독립도 결과에서 처참할 뿐이다. 송두율 사건에서 국정원이 수행한 공작은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 못지 않다는 것이 증명됐다.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이름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허울좋은 명분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기관은 시민의 참여 속에서 개혁과 진보를 위한 적절한 견제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
권력기관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시스템을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노무현은 이런 전환을 이룰 의지도 능력도 없음이 이미 증명됐다. 국정원과 검찰이 송두율을 마녀사냥질하든말든 독립이란 이름으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 공정하고 엄정한 수사가 진행하는 것 같은 검찰은 권력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갔을 때 다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장담한다. 이런 구조를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공허한 논리로 노무현 변명에 활용하는 것은 궁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