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안면이 받히는 상황’이다. 관련자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 기사의 날을 세울 수 없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이런 문제 때문에 “잠재적 인터뷰 대상과는 술자리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데, 나는 그저 그 당당함과 자신감이 부러울 뿐이다. 잠재적이기는커녕, 너무나도 명약관화한 비리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와의 술자리를 마다할 수 없다.

오히려 쫓아다니며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할 판이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인터뷰 대상자가 ‘물음을 피해갈 수 없도록 만드는’ 공중파 생방송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지만, 나에겐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 비극은 그런 과정에서 접촉한 모든 정치인들이 기사의 주요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나는 늘 기사를 쓸 때마다 ‘안면이 받혀서’ 곤혹스럽다. 요즘 매일처럼 그 얼굴이 어른거리는 정치인은 김영일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이다.

 

오늘도 나는 김영일 의원과 전화 통화했다. “검찰 다녀오느라 고생 많으셨죠?” “고생은 뭘. 또 나갈 일 있으면 두 번, 세 번이라도 나갈 거요.” 그렇게 서로 말문을 트고 몇 가지를 묻고 답했다. 5분 여의 통화가 끝나고 정중한 인사도 전했다. “그럴 일이 없길 바라겠지만, 혹시 다시 검찰 나가시게 되면 귀띔이나 해주십시오.” “안 기자가 내 말을 잘 이해해 주니까 내가 전화도 꼬박꼬박 받잖아.”

 

이건 참, 묘한 기분이다. 에스케이 비자금 100억원 수수의 핵심 책임자로 지목된 김영일 의원은 ‘낙천·낙선운동’을 한다면, 그 첫손가락에 오를 정치인이다. 지금까지 스스로 인정한 관련 사실만 해도 김 의원은 △공식 후원회에서 거둬들인 돈 외에 추가 후원금 납부를종용하는 대책회의에 참석했고 △에스케이 비자금 100억원의 불법성을 알고도 이를 수수해 선거자금으로 사용했으며 △관련 회계자료의 폐기를 직접 지시했다.

 

이걸 머리 속에 입력해 둔 상태에서조차 그에게 최대한 정중한 방법으로 가급적 내 진정성을 담아 ‘대화’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이를 통해 취재한 내용을 기사로 옮기면서 ‘자꾸만 어른거리는 얼굴을 떨쳐내고’ 날을 세우는 일이다. 그런 나에게 김 의원은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의원은 이른바 대중정치인이 아니다. 이번 에스케이 비자금 국면 때문에 정치인 김영일을 처음으로 알게 된 국민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 또한 정치부에 오기 전에는 그런 정치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요즘의 국민정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겠지만, 지난해 대선 때 사무총장을 지낸 김 의원의 최근 심경에 대해 나는 ‘짐작’하는 바가 있다. 그는 ‘숙명’이란 게 존재하고, 때로 인간은 그것 앞에 어찌할 도리 없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는 정치인인 것 같다.

김 의원은 개인 후원회가 없다. 정확히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현역 의원 가운데 개인 후원회를 아예 두지 않은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평소에도 그는 “의정활동을 위해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물론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유력 기업들의 고문변호사 비용으로 받는 돈만 해도 상당액에 이른다는 게 정설이다. 현직 변호사 가운데 세금납부 실적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굳이 개인 후원회를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돈이 많은데도 개인 후원회를 따로 만들어 막대한 정치자금을 조성하는 현역 의원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도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 김 의원은 분명 클린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지만, 그래도 악질적인 경우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난해 대선 때 네거티브 선거전의 첫 장을 장식했던 국정원 도청의혹 폭로와 관련한 기억도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이 의혹을 폭로한 것은 사무총장이었던 김 의원이었다. 기세 등등한 초반과 달리, 이 의혹제기가 오히려 결정적인 감표 요인이 됐다는 당 안팎의비난이 빗발쳤지만, 그는 그 책임을 혼자서 떠 안았다. 김 의원에게 관련 자료를 건네주고 이의 공표까지 떠맡긴 주역이 따로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그는 끝내 그 공작정치의 주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대선 패배 이후, 그의 모습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둬야겠다. 이회창 전 총재가 정계은퇴를선언하고, 곧이어 서청원 대표가 스스로 물러나고, 남경필 대변인까지 그 직을 던지고 난뒤, 약 석 달여 동안 한나라당을 지킨 것은 김영일 당시 사무총장이었다.

서청원 의원이 대표직을 던진 것은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 대표에 도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면서, 동시에 그 패배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와 지려는 ‘꼼수’를 쓴 셈이다. 다른 당직자들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기 당 지도부가 들어설 때까지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였던 한나라당에서 김 의원은 ‘설겆이’를 맡았다. 그 자리를 지켜서 얻어지는 대단한 이득을 기대할 형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따라, 그 자신의 지역구(경남 김해)를 챙기는 게 더 다급한 일이라는 주변의 충고가 많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매일 중앙당사로 출근해 할 일도 없는 사무실을 지켰다.

 

최근 빚어지고 있는 에스케이 비자금 정국에서 그가 가장 먼저 대 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고 밝힌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게 언론플레이였다 할지라도, 그조차도 망설였던 유력 정치인들이 수두룩하다. 이회창 전 총재나 최병렬 대표, 나오연 후원회장, 최돈웅 의원 등이 그 반열에 있다. 

돈 달라고 요청하고 그 돈을 받아왔던 최 의원은 책임은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서청원 전 대표는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고, 당시 에스케이에 뭉칫돈 후원을 종용했던 다른 중진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분명히 한나라당이 상징하는 구태정치, 부패정치, 공작정치의 한복판에 서있었지만 그 근원은 아니다. 부패정치의 전형, 공작정치의 전형, 구태정치의 전형은 그 말고도 수두룩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최근 정치자금 정국에서 한발 비켜나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김 의원은 ‘책임자’이긴 하지만, 그 모든 책임을 혼자 떠안을 만큼 대단한 정치인은 아니다. 스스로를 그 정도로 과대평가 했다면 그건 김 의원의 착각이다.

 

김영일 의원의 정치생명은 이제 끝났다. 김 의원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다. 대선 패배의 멍에를 짊어졌고, 부패정치의 표본으로 낙인찍혔으며, 지역구 여론도 좋지 않다. 현재의 당 지도부가 그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아 내년 공천마저도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그가 지금까지 실토한 내용만으로도 사법처리를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그에게 ‘애증과 연민’을 느낀다. 어쩌면 그 감정은 정치인 김영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정치인을 탄생시켰다 퇴장시키는 한국정치의 과거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민정부 시절, 실세로 통했던 모 의원이 “나는 깃털”이라고 주장해서 세간의 유행어까지 낳았지만, 김 의원은 한나라당의 또 다른 깃털에 불과하다. 그가 깃털이라는 이유로 그의 잘못이 사라지진 않지만, 깃털 하나 뽑는다고 까마귀가 날개를 잃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깃털이라도 드러나는 대로 다 뽑긴 해야겠지만, 그리고 드러난 깃털도 제대로 뽑아내지 못했던 게 우리의 웃기지도 않은 정치현실이긴 했지만, 상황이 이 지경이 됐어도 숨죽이고 납작 엎드려 있거나, 아예 어깨 펴고 백주대로를 활보하는 다른 깃털들에 대한 미움이 더 크다. 그런 깃털들을 품고 따뜻하게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몸통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 김 의원은 몇 가지 두드러진 잘못을 저질렀다. 애초 자진출두 하겠다던 그가 검찰의 발언을 트집잡아 출두일을 연기한 것이 첫 번째다. 에스케이 비자금 외에 다른 대기업 비자금 수수의 책임도 김 의원에게 묻겠다고 검찰이 엄포를 놓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언론보도 과정에서 불거진 오해의 소지도 있거니와, 그런 일이 있거나 없거나 검찰에 나가서 속 시원히 해명하면 될 일이었다. “떳떳하게 아는 대로 말하겠다”는 공언이 결국 표리부동한 것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됐다. 대통령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문민정부 시절, 날아가는 새도 잡는다는 청와대 민정·사정수석을 거친 정치인의 행동거지로서도 온당치 못한 일이었다.

두번째는 앞서 말한 오늘의 대화 중에 불거졌다. 그는 헌법 12조 2항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는 조문을 들어 “그로 인해 처벌될 지도 모르는 불법자금에 대한 자료를 폐기하라고 지시한 것은 당연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에스케이 비자금 관련 자료를 없애라고 지시한 일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법고시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내가 저명한 법조인 출신의 정치인 말을 꼬투리 잡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해하는 그 헌법조항은 그런 뜻이 아니다. 자료폐기 지시는 모든 국민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가 아니라, 증거인멸의 범죄다.

 

그는 “책임지겠다”는 공언과 달리, 그 책임의 범주에서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될 만한 여지는 없다고 보는 듯 하다. 김영일 의원에 대한 국민들의 인상이 “불법을 저지르고도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나가려는 정치인”이라고 굳어진 것도 이런 이유다. 검찰에 출두하면서 분장한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은 그를 보고 내 주변의 어른들은 “뻔뻔스럽다”며 혀를 끌끌 찼다.

 

검은 돈이 자연스럽게 오가고, 그런 구태에 대해 사과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검찰수사를공작정치라 비난하며, 오로지 역공의 기회만 엿보는 정당에서 수십년간 정치생활을 한 김의원에겐, 어쩌면 여기까지가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건으로 그가 영위했던 한 시대가 가고, 그가 배우고 익혔던 정치와는 전혀 다른 정치패러다임이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여론과 검찰의 압박이 그로선그저 난감하고 억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책임지겠다고 처음으로 나섰음에도 당내의 누구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고 변호해주려 하지도 않으니 그 또한 기막힌 노릇일 게다. 대선을 치른 사무총장으로서 패배의 충격도 감당하기 힘든데, 관련된 불법행위까지 모두 자신에게 뒤집어 씌우려 한다는 정치적 피해의식도 적지 않을 게다.

 

그러나 적어도 한때 국가를 경영했던 유력 정치인이라면, 하늘만은 알아주는 최소한의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진정성은 법의 잣대나 국민여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 대한 냉정한 심판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게다.

하여 법의 심판과 여론의 비난 앞에 난도질당할지라도, 당장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것저것 재거나 고려하지 않고 온전히 털어놓는 것이 김영일 의원이 택해야 할 길이다.

 

그 길을 따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가 언제나 탈 많은 정당에서 궂은 설거지만 도맡아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정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이 마련될 테고, 훗날 자신의 후대앞에 최악의 정치인은 아니었다며 얼굴을 들 수 있는 최소한의 염치가 만들어질 것이다.

사실은 그가 수많은 깃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그런 깃털들을 앞세워 또 다른 부귀와영화를 꿈꾸며 치졸한 정치생명을 조금이나마 더 연장시키려 했던 몸통이 누구였는지도 그제서야 드러나는 것이다.

안수찬 한겨레신문 기자
2003/11/17 10:02 2003/11/1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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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직설적인 견해
    가엽슨 독재권력의 딴나라 떨거지들 이제 조용히 사라질때가 되지 않았을까?. 모두 조사하고 철저하게 법대로 처리 해야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