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평화바이러스> 송두율, 비적대적 전향, 중간파
칼럼과 기고 :
2003/12/23 13:25
아마도 10년 전 늦가을이었을 거다. 면접관이 물었다. ‘누구를 존경하는가.’ 나는 ‘여운형 선생’이라고 답했다. 면접을 앞두고 미리 준비했던 답변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여운형 선생을 엄청 존경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마도 근현대사에서 여운형과 같은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가슴이 저리는 안타까움 비스무리한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모르겠다. 중도노선, 또는 중간파.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그 이름은 ‘패배자’와 동의어였고,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과 다를 바 없었다.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른바 ‘사법적 잣대’로 보자면, 아마도 핵심 쟁점은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 일 것이다.
검찰은 그가 ‘후보위원’이라고 하고, 송 교수는 “없는 사실을 인정할 바에야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하겠다”(12월1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4(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2차 공판에서)고 답했다. 긴가 아닌가, 논쟁은 치열하지만, 나는 모른다. 이 쟁점의 결론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내 머리와 가슴을 겨울밤 맵찬 바람처럼 되풀이해 쓸고 지나가는 의문이 있다.
‘전향제도’이라는 게 있었다(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 분들은 홍기선 감독의 <선택>을 보시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대한민국 사법체계에서 더 이상 ‘전향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세력들은 송두율 교수에게 ‘확실한 전향’을 요구한다.
‘니가 친북이 아니라면 확실하게 전향하면 될 거 아냐?’라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검찰도 ‘반성과 참회’라는 용어를 활용해 사실상의 전향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법체계를 잘 아는 검찰은 “송 교수에게 개전의 정을 보일 경우 관용 조처하겠다는 원론적 얘기를 한 것이 전부”라며 “‘전향 권유’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고 있기는 하다.
‘전향’(轉向)이 뭔가. 국어사전을 보면, “①방향을 바꿈. ②종래의 사상이나 이념을 바꾸어서 그와 배치되는 사상이나 이념으로 돌림”이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전향’하면 흔히 떠올리는 뜻은 ②에 해당할 터이다.
방향 바꾸기는 어느 쪽으로든 가능할 터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전향의 방향은 한쪽으로 고정돼 있다. “반일에서 친일로 즉 불령선인에서 황국신민으로, 용공=친북에서 반공=친남으로 즉 빨갱이에서 반공투사로의 전향만 있었다. 그래서 전향서들은 논리나 문투에서 천편일률적”(계간 <역사비평> 2003년 겨울호 ‘책머리에’에서)이다.
송 교수는 ‘반쪽 조국’ 남한에 들어온 이후 온갖 논란에 휩싸이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 질서를 존중할 것’을 다짐하고, “그동안 남북의 화해자를 자처하며 써 온 ‘경계인’이라는 표현이 ‘회색분자’라는 오해를 빚는다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세력과 검찰이 은연중에 압박하는 그 ‘전향’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방향전환은 전환이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말하는 그런 뜻의 ‘전향’은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송 교수의 이런 태도를 일러 계간 <역사비평>은 ‘비적대적 전환(전향)’이라는 낯선 개념어를 동원해, “송두율은 (적대적)전향도 비전향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도 지난 16일 2차 공판에서 “한국사회도 0과 1의 사이에 0.001도 있고 0.999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0도 1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를 서성이는 것으로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있는 ‘조국’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비적대적 전향’ 또는 ‘비적대적 전환’이라…, 글을 읽은 이후 오래도록 머리를 맴도는 개념이다.
나는 ‘송두율 문제’가 한국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화를 전조하는 시대적 징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없이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온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하늘을 뒤덮은 먹장구름마냥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에 그득한 이 즈음, ‘이도 저도 아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낯선 ‘그 무엇’일 것이다. 늘 그렇듯 새로운 것은 얼마간 낯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새로운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되, 이 경우에 ‘낯선 그 무엇’은 적어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다. ‘이거 아니면 저거’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은 그 특유의 단순함으로 지루하기도 하지만, 너무 숨막히지 않은가.
송두율 교수의 처신은 분단 전후 해방정국에서 중도노선을 취한 인물들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지금은 요령부득이지만, 이 의문이 어떤 길을 내는지 좀더 밀고 가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점이지대가 없다면, 세상은 그만큼 덜 다채롭고, 거대한 두 세력이 화해와 공존하기보단 갈등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 나는 소설가 황석영의, 정말 그다운, 애절한 호소를 떠올린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시대의 국가주의를 위한 박제와 같은 ‘전향과 비전향’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제 더는 비전향 장기수를 미화하지 말라. 전향 작업을 사상적 승리라고 자만하지 말라. 어떤 제도가 인간의 꿈과 사랑과 소망과 행복들을 저버리고라도 지켜낼 가치가 있다고 자신한단 말인가. 또는 어떤 제도적 가치를 옹호하려고 인간이 자주적으로 변하기 전에 강제로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분단시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쪽 아니면 저쪽을 분명히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이제 분단체제가 또 사람 하나를 잡는다. 북쪽이 모질면 남쪽이라도 너그러워야 하지 않나…”(2003년 10월8일치 <한겨레> 6면 기고문 중에서)
아마도 근현대사에서 여운형과 같은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가슴이 저리는 안타까움 비스무리한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 모르겠다. 중도노선, 또는 중간파. 20세기 한반도의 역사에서 그 이름은 ‘패배자’와 동의어였고,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운명과 다를 바 없었다.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른바 ‘사법적 잣대’로 보자면, 아마도 핵심 쟁점은 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아닌가 일 것이다.
검찰은 그가 ‘후보위원’이라고 하고, 송 교수는 “없는 사실을 인정할 바에야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하겠다”(12월16일 서울지법 형사합의24(재판장 이대경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2차 공판에서)고 답했다. 긴가 아닌가, 논쟁은 치열하지만, 나는 모른다. 이 쟁점의 결론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내 머리와 가슴을 겨울밤 맵찬 바람처럼 되풀이해 쓸고 지나가는 의문이 있다.
‘전향제도’이라는 게 있었다(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 분들은 홍기선 감독의 <선택>을 보시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듯하다). 대한민국 사법체계에서 더 이상 ‘전향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세력들은 송두율 교수에게 ‘확실한 전향’을 요구한다.
‘니가 친북이 아니라면 확실하게 전향하면 될 거 아냐?’라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검찰도 ‘반성과 참회’라는 용어를 활용해 사실상의 전향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법체계를 잘 아는 검찰은 “송 교수에게 개전의 정을 보일 경우 관용 조처하겠다는 원론적 얘기를 한 것이 전부”라며 “‘전향 권유’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하고 있기는 하다.
‘전향’(轉向)이 뭔가. 국어사전을 보면, “①방향을 바꿈. ②종래의 사상이나 이념을 바꾸어서 그와 배치되는 사상이나 이념으로 돌림”이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전향’하면 흔히 떠올리는 뜻은 ②에 해당할 터이다.
방향 바꾸기는 어느 쪽으로든 가능할 터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전향의 방향은 한쪽으로 고정돼 있다. “반일에서 친일로 즉 불령선인에서 황국신민으로, 용공=친북에서 반공=친남으로 즉 빨갱이에서 반공투사로의 전향만 있었다. 그래서 전향서들은 논리나 문투에서 천편일률적”(계간 <역사비평> 2003년 겨울호 ‘책머리에’에서)이다.
송 교수는 ‘반쪽 조국’ 남한에 들어온 이후 온갖 논란에 휩싸이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 질서를 존중할 것’을 다짐하고, “그동안 남북의 화해자를 자처하며 써 온 ‘경계인’이라는 표현이 ‘회색분자’라는 오해를 빚는다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세력과 검찰이 은연중에 압박하는 그 ‘전향’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방향전환은 전환이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말하는 그런 뜻의 ‘전향’은 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인 것 같다. 송 교수의 이런 태도를 일러 계간 <역사비평>은 ‘비적대적 전환(전향)’이라는 낯선 개념어를 동원해, “송두율은 (적대적)전향도 비전향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송 교수도 지난 16일 2차 공판에서 “한국사회도 0과 1의 사이에 0.001도 있고 0.999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0도 1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를 서성이는 것으로 아직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있는 ‘조국’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비적대적 전향’ 또는 ‘비적대적 전환’이라…, 글을 읽은 이후 오래도록 머리를 맴도는 개념이다.
나는 ‘송두율 문제’가 한국의 역사에서 중대한 변화를 전조하는 시대적 징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없이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온 한국에서,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하늘을 뒤덮은 먹장구름마냥 한국인의 머리와 가슴에 그득한 이 즈음, ‘이도 저도 아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낯선 ‘그 무엇’일 것이다. 늘 그렇듯 새로운 것은 얼마간 낯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새로운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되, 이 경우에 ‘낯선 그 무엇’은 적어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다. ‘이거 아니면 저거’만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은 그 특유의 단순함으로 지루하기도 하지만, 너무 숨막히지 않은가.
송두율 교수의 처신은 분단 전후 해방정국에서 중도노선을 취한 인물들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지금은 요령부득이지만, 이 의문이 어떤 길을 내는지 좀더 밀고 가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점이지대가 없다면, 세상은 그만큼 덜 다채롭고, 거대한 두 세력이 화해와 공존하기보단 갈등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 나는 소설가 황석영의, 정말 그다운, 애절한 호소를 떠올린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시대의 국가주의를 위한 박제와 같은 ‘전향과 비전향’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제 더는 비전향 장기수를 미화하지 말라. 전향 작업을 사상적 승리라고 자만하지 말라. 어떤 제도가 인간의 꿈과 사랑과 소망과 행복들을 저버리고라도 지켜낼 가치가 있다고 자신한단 말인가. 또는 어떤 제도적 가치를 옹호하려고 인간이 자주적으로 변하기 전에 강제로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분단시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쪽 아니면 저쪽을 분명히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이제 분단체제가 또 사람 하나를 잡는다. 북쪽이 모질면 남쪽이라도 너그러워야 하지 않나…”(2003년 10월8일치 <한겨레> 6면 기고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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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시민단체 윤리규정의 제정이 시급한 것 아닐까요?
2003년 11월 19일 참여연대 운영자가 "객"이라는 사기성 이름으로 방문자에게 욕설과 비방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이후 그런 사실을 게시판 프로그램 조작을 통해 은폐해왔다는 것도 공개되었습니다.
거짓, 욕설, 감추기 등은 매우 심각한 부도덕한 행위로서, 그런 행위가 도덕성을 존재의 기반으로 하는 시민단체, 그것도 시민단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시민단체 홈페이지 운영자가 그랬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참여연대 안에서 벌어진 이런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스스로 비판하지 않는 참여연대 회원들은 은폐조작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어용 또는 홍위병 회원들만 존재하는 단체는 시민단체란 이름을 사용할 자격이 없습니다.
참여연대 회원들은 거짓, 욕설, 은폐조작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 때문에 한달이 넘도록 침묵하고 계십니까? 자신들이 행한 행동에 대한 자기비판과 속죄를 거부하는것은 참여연대가 해도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참여연대 운영자가 행한 거짓, 욕설, 은폐조작을 방치하는 것은 시민단체의 직무유기 아닙니까? 다른 무엇보다 시민단체의 도덕성 회복을 위한 시민단체 윤리규정의 제정이 시급한 것 아닐까요?
참여연대는 거짓, 욕설, 은폐조작 문제의 해결을 새해로 넘기시렵니까?
김대중 대통령시절 자신도 잘못된 정책이라 인정했던 정책 -- 의약분업
김대중 대통령시절 자신도 잘못된 정책이라 인정했던 정책 -- 의약분업
김대중 대통령시절 자신도 잘못된 정책이라
인정했던 정책 -- 의약분업
의약분업 시행 후 지금까지 국민들이 더 부담한
비용이 약 6조원 (병원 1.5조, 약국 4.5조)
의료보험료는 그래도 끝없이 올라가고
의약분업 전 병원서 3000원에 약까지 원스톱 서비스 되던게 지금은 병원서 3000원 내고
약국까지 찾아가서 또 1500원 이상 내고.
이 추가 부담의 대부분은 약국의 조제료란
명목으로 들어갑니다.
1500원 내고 약 받아오니 별로 안 비싼같지만,
약국에서는 이 1500원과 순수한 약값외에
조제료란 명목으로 4000원에서 10000여원까지 의료보험조합에 청구해 받아갑니다.
--> (당연히 의료보험료 올라가겠죠)
이 조제료라는게 의약분업전에는 없던게 새로 생겨
국민들의 추가부담이 되고 있는겁니다.
해결책은? ---> 일본식 의약분업(선택분업)입니다.
즉 병원에서 약 받을 사람은 병원에서 약 받고,
병원이 미덥지 못하고 돈을 더 내더라도
약의 전문가라는 약사에게 조제 받고 복약지도
받고싶은 사람은 처방전 들고 약국가서
약을 받으면 됩니다.
환자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는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정부 당국자도 이 사실을 훤히 알고 있으면서 어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애써 외면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죄악입니다.
잘못된 정책은 바뀌어야 합니다.
핵 폐기물 처리시설같이 대안이 없을 경우야
어쩔 수 없더라도 훤히 보이는 방법이 있을 떄는
바뀌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