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국회 당선자들께 드리는 글



파병 논란 1년,

안이한 정세판단과 맹목적 대세추종이 합리적 토론과 현실분석을 대체했습니다.

한국 파병외교는 완벽하게 실패했고 정부는 진퇴양난에 직면했습니다.

17대 국회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 합니다.


'이라크 파병 재검토'는 더 이상 '장외'에서 외쳐지는 메아리 없는 울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야 의원을 막론하고 17대 국회 당선자들 사이에서 "이대로 파병해선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여당에서는 당 내 기구를 두어 파병문제, 부안사태 등 현안을 공식적으로 검토하자는 얘기도 나오는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환영합니다. 지난 1년간, 특히 추가파병문제가 불거진 지난 해 9월 이후 이라크 파병을 막기 위해 거리로, 국회로 뛰어다닌 활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어둔 터널에서 작은 빛줄기를 만난 느낌입니다. 지난 4월의 이라크 봉기와 팔루자 학살, 그리고 최근 공개된 충격적인 고문학대 사건 등을 통해 이라크 점령의 총체적 실패가 확연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국회가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는구나하는 약간의 안도감도 느낍니다.

기왕 파병 재검토 논의를 하시는 김에 제대로 한번, 진지하게 토론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실, 지난 1년간 파병관련 운동을 해온 저의 심경은 한마디로 '갈증' 그 자체였습니다. 합리적 논쟁에 대한 갈증입니다. 국회의원들을 만나보면, "원칙과 명분이야 여러분(시민운동)이 다 옳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어쩌겠냐"는 말씀들 많이 하십니다. 골백번 토론해도 한국적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죠.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국가 전체를 고민해야 할 정부와 국회의원들이 현실을 고려치 않고 명분만 따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파병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정부와 국회의원들의 이러한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파병문제로 지난 1년간 국회를 들락거리면서 제가 보고 느낀 것은 현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발견한 것은 현실주의를 빙자한 무관심과 패배주의, 무모함에 가까운 불성실과 무사일주의였습니다.

너무 심한 소리라고 여기실 수도 있을 듯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6개월 여의 기간 동안 정부와 국회가 심사숙고해서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사항에 대해 그런 식으로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가 바라보는 우리 정부와 국회의원들의 '비현실적인 현실 인식'에 대해 단 한 번만 진지하게 검토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백보를 양보하고, 백번을 고쳐 생각해도 세계 3위 규모의 전투병력을 파견해야만 한반도 평화가 유지되고 한미동맹이 지켜진다는 말엔 수긍할 수 없습니다.

파병 얘기만 나오면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의례 한미동맹을 걱정합니다. 물론 정부 혹은 국회의 공식입장은 "파병은 미국의 강요가 아니라 우리의 자주적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을 신뢰하는 국민은 별로 없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명료해집니다. 미국이 파병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군대를 이라크에 보냈겠습니까?

저는 침략전쟁에 대한 파병과 한미동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믿고 있고 그 근거도 조목조목 나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어쨋든 그래도 정부의 걱정을 '역지사지' 할 수는 있습니다. 누가 집권한들 이 걱정에서 자유롭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도의 문제"입니다.

우리 정부는 국민의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한미동맹'을 위해 서희제마부대 650여명을 이미 이라크에 보냈습니다.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어느 나라보다도 신속하게 보냈습니다. 오죽하면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해서 파병안을 통과시킨 후 그 날로 국회 국방위에 상정하여 단 두 시간만에 안건을 처리했겠습니까? 시민단체들은 정부 제출 동의안은 구경도 못했고 의견서 한 장 전달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상임위 통과 후엔 또 어떠했습니까? 불과 10여일 만에 국회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서희제마부대 650여명의 병력은 적은 수가 아닙니다. 이미 이 파병만으로도 우리 정부는 이라크에 파병한 나라 중 8번째로 많은 수의 군대를 보낸 세계 8위 파병국입니다. 파병병력 규모로만 따지면 G7에 준하는 대열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말 정부는 여기에 더 해 3000명의 추가병역을 파견하겠다고 결정했고, 16대 국회는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파병국가 중 추가병력을 1000명 이상 파견하기로 한 나라는 미국·영국 외에는 없습니다. 3000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하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미국 외에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총 3700 여명의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결과, 한국정부는 미영제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이라크에 보내는 나라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라크 내 저항대상 서열 3위에 오른 것입니다.

정부와 국회가 얼마나 황당한 결정을 한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난 수개월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파병'도 아니고 '추가파병'이라는 점입니다. 정부는 지금 이미 세계 8위 규모의 군대를 보낸 한국정부가 '추가파병'을 하지 않을 경우 한미동맹에 금이 가거나,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동참할 수 없다고 국민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국회는 지금 1-200명도 아닌 3000명이나 되는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국민에게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3위 규모의 전범국으로 확실한 오명을 날리지 않고서는 미국에 대한 우리의 우의를 입증할 수 없다고 국민을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주의입니까? 다른 나라들이 철군을 얘기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정부가 선택한 이토록 황당한 추가파병결정에 대해 국제사회의 어느 정부, 어느 국민이 '국익에 합치되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이해해주겠습니까? 국회는 왜 이런, 누가 보기에도 굴욕적인 결정에 대해 일언반구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다못해 다른 나라 만큼만 성의표시를 하자는 주장조차 없었습니다.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얼토당토않은 결론이 내려지는 상황 앞에서 그 알량한 '현실주의'는 다 어디로 갔습니까? 왜 국회의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논쟁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라크에서 전쟁은 끝났다?"

조사 없는 정세 판단, 현실에 눈감은 '현실주의'가 부른 위기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맞아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에는 전투도 없고 전투할 대상도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말꼬리를 잡아 시비를 걸 의도는 없습니다만 굳이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정부와 국회의 전반적인 인식이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방부와 외통부, 국방위와 각 당 지도부의 대다수는 압도적 무력을 가진 세계 제1일의 패권국가 미국이 이라크로 진격했으니 곧 결판이 날 것이고, 일시적 저항은 곧 안정화되리라고 단정했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그렇게 보고했겠지요. 파병의 명분이니 원칙이니 하는 것도 '곧 안정화될 평화로운 친미이라크'를 전제로 '허접스러운 겉치레'쯤으로 여겼습니다. 3700여명이라는 세계3위의 파병규모의 전쟁지원이 가져올 부담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을 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판단이 실증적인 조사나 치밀한 정세판단에 의한 것이었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실리와 현실주의를 그토록 주장하던 사람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무모한 희망사항을 정세판단과 맞바꾸었던 것입니다.

이미 미국이 2003년 5월 종전을 선언했을 때, 미국과 국제사회의 무수한 군사전문가들과 아랍 전문가들이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점령에 대한 준비가 너무 없다, 점령을 위해서는 현 미군의 두 배에 가까운 병력이 필요할 거다, 이라크는 제2의 팔레스타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저항은 후세인 잔당이 아닌 시아파로부터 시작될 거다" 등 우려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부시 정부는 이를 완전히 무시했고, 한국정부는 맹목적으로 이를 그대로 신봉했습니다.

2003년 하반기 이후 전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갈 때도 국방부가 보낸 조사단은 이라크는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다고 "조사 없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는데도 국방부의 공식발표내용은 "이라크는 안정화되고 있고 이라크 국민들은 한국군을 환영한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를 강변하기 위해 정보조작과 허위사실 공표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런 주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평화정착과 재건지원"을 손쉽게 내걸었습니다. "군사작전은 안하고 민사작전만 한다, 재건지원이지 참전이 아니다, 친한화정책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겠다." 등 파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그럴듯한 말을 다 갖다 부쳤습니다.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재건지원'을 내세우면서도 기능부대가 아닌 특전사 등 전투부대 중심으로 파병군을 편성했습니다. 전투부대가 더 많이 간다고 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궤변입니다. 저항세력의 표적이 되지 않아야 안전하지요. 따라서 이것은 이라크 상황의 악화를 진정으로 대비해서라기 보다는, 미국의 요구대로 대규모 전투부대를 파병한다 한들 이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적대감과 저항행위가 크지 않을 것이고 차츰 사라질 것이라는 판단이 컸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대의명분이란 '말 만들기 나름'이라는 안이한 판단도 한 몫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상황은 어떻습니까? 이라크는 제2의 전쟁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후세인 잔당이 아닌 수니-시아파의 연합전선이 미점령군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여의치 않게 되자 미국은 '팔루자 학살' 같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패착을 두고 말았습니다. 수감자 고문학대는 무너져가는 이라크 점령정책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친한화 정책이라구요? 미국을 위해 3700명 전투부대를 보내는 나라의 테크니컬한 노력은 가련하게 느껴집니다. 이 판국에 무장한 전투부대를 보내야 더 안전하다는 말은 천진한 소리처럼 들립니다. 특히 미국의 팔루자 학살과 고문학대가 터져나온 지난 4월 이후의 이라크에서는 씨도 안먹힐 소리입니다.

정부와 국회는 "정세예측의 완전한 실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조사 없는 상황 판단, 무모할 정도의 맹목적 대세추종이 가져온 외교의 실패를 인정해야 합니다. 파병문제 재검토는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조사 없는 맹목적 주장을 계속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지금의 이라크 사태는 민정이양을 앞둔 정치세력들의 과시적 행동의 단계로 봐야 하고, 민정이양 후 곧 안정화될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무슨 근거가 있냐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주관적 희망사항을 확신에 차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 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당국자가 그럴듯한 개념조작으로 현실에 대한 실사구시적 분석을 대체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당부합니다. 그런 공허한 예측을 남발할 때가 아닙니다. 예측의 실패를 인정하고, 이라크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상황변화를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분석하는 것이 현명한 자세입니다. 이라크가 제2의 팔레스타인이 될 지, 수년간의 내전 끝에 안정화를 찾을 지, 수개월간의 유혈사태 이후 안정화 될 지 예측하기 힘Š年求
이태호(참여연대 정책실장)
2004/05/14 00:10 2004/05/14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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