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참여연대』는 매주 수요일,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수요논객>이라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참여연대의 입장과 다르더라도 논리성과 합리성을 갖춘 글이라면 주제와 자격의 제한 없이 소개할 것입니다. 논객으로 참여하고 싶은 분들은 자신의 성함과 신분, 연락처를 명기해 desk@pspd.org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번 주 수요논객은 구영단님의 글입니다. 편집자 주

보통 사람들은 '강아지'라는 단어가 실재의 강아지를 지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본다. 이와 달리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외부의 대상과 무관하게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확정된다. 강아지는 송아지, 병아리, 당나귀 등의 다른 단어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자신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한 단어의 의미가 그것이 다른 단어와 맺는 차이값에 의해서만 확정될 때, 결과적으로 한 단어의 의미는 확정될 수 있을까 없을까? 한 단어가 차이관계를 맺는 비교항이 유한하다고 본 소쉬르에게는 한 단어의 의미가 확정될 수 있었다. 반면 이 비교항이 무한하다고 본 데리다는 한 단어의 기의(記意)는 그 의미 확정이 계속해서 '미뤄진다'고 했다. 데리다에게 언어는 이러한 '차이 놀이'에 의해 구조화된 체계다.

비리 혐의가 거의 확정적인 7명의 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키며 막판 대미를 장식한 2003년 한국의 정치사회는 그 봉건적 후진성에도 불구하고 부패 문제를 다루는 기술만큼은 데리다 뺨칠 정도로 포스트모던한데,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그 두가지를 얘기하기 전에 나는 구조주의 언어학의 '차이 놀이'라는 개념을 차용해 정치부패를 다루는 우리 정치사회의 게임과 이 게임을 가능케 하는구조를 총칭해서 '부패 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첫째, 우리 정치사회에서 부패는 정적(政敵)의 부패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노무현 캠프의 부패는 이회창 캠프의 부패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한나라당의 부패는 민주당 또는 열린우리당의 그것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비로서 그 평가가 이뤄지는 것이다.

"불법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 이상일 경우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과 "대리인들만 처벌받고 책임자는 뒤로 숨는 풍토에서는 결코 대선자금의 어두운 과거가 청산될 수 없다"는 이회창 후보의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은 청와대와 여의도에서 정적을 향해 쏘아올린 '부패 불꽃놀이'의 결정판이었다.

물론 나는 노 대통령이나 그 캠프가 이회창 후보나 한나라당에 비해 최소한 10분의 1 정도는 '덜 뻔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에게 10배의 자신감을 줄 사안은 아니다. 측근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면서 이제 대통령은 자신의 '10분의 1'이 한나라당 대비 10배의 도덕성이 아니라 10분의 1의 모금능력을 의미한다는 세간의 냉소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달기 어려워졌다.

이회창 전 후보의 대국민사과 역시 부패 문제에서 우리 정치사회가 스스로 성찰의 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윤리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정적의 부패에 의존하는 경향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초반에 국민을 향해 "고개숙여 깊숙이" 사과한 그의 언어는 막판으로 갈수록 실패한 혁명가의 비장미가 흐른다. "저의 결심이 작금의 국가적 혼돈을 끝내고 우리 모두 새 시대를 향하여 역사를 한 걸음 진보시키는…. 한나라당은 이회창을 밟고 지나가서라도…." 등등.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넘을 듯하던 이 고뇌의 엘리트는 사법적 단죄를 받을 만한 어떤 책임있는 발언도 교묘하게 회피하고는, 정치적 희생양인냥 칩거에 들어간 상태다.

그가 "대선승리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심정이 아무리 절박했다고 하더라도…."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정치사회에서 부패 연루자들의 정치적 자아는 모두 확신범에 가깝다. 그것은 포스트모던보다는 그로테스크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이 부패의 값은 확정될 수 있을까? 우리 정치사회에서 부패는 자신의 마땅한 몫을 찾지 못하고 검찰수사를 축으로 빙빙 돌면서 그 정치적 평가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대통령 측근비리 검찰수사가 발표되면서 예상대로 대통령의 '10분의 1'을 둘러싼 해석을 놓고 한 판 말싸움이 벌어졌고, 앞으로도 후속편도 벌어질 태세다. 검찰 수사가 끝나면 측근비리 특검이 열릴 것이고, 총선을 앞두고 각 당과 정파간의 치열한 공방은 계속될 것이다.

검찰 수사와 특검이 아무리 공정하게 진행되더라도, 우리 정치사회는 부패에 대한 사법적 평가를 정치적으로 해체시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렇게 부패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계속 '미뤄져왔고', 결국 총선과 지방선거, 대선 등을 통해 정치적 복권을 누려온 것이 우리 정치사회 부패의 역사였다.

이번 검찰 수사가 정치 부패 청산에 있어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2003년 정치사회의 부패에 제 몫을 달아주는 것은 결국 2004년 총선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2004년 총선에서 유권자는 작은 부패가 큰 부패와의 차별대우를 주문하고, 이 작은 부패의 얄미운 담론에 맞서 큰 부패가 "우리 모두 오십보 백보 같은 부패"라고 뻔뻔한 연대가를 합창하는, 정치사회 '부패 놀이'의 이 기괴한 포스트모던을 끝내야 한다. 부패는 정적의 부패와의 차이에 의해 그 죄값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의 최소한으로 존재하는 사법적 평가에 의해 단죄되어야 한다. 그러나 7명의 파렴치범 보호에 앞장선 현 입법부의 수준에서 보듯이, 그것은 최소한 지역과 연고, 향응에서 벗어난 유권자 선택이 이뤄졌을 때에나 가능하다.



내년 총선에서 이런 수준의 유권자 선택을 결정하는 두 가지 원칙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한나라당의 원내 1당을 막는 것, 그리고 진보정당의 유의미한 대표성 확보다.

차떼기 수법으로 기업의 돈을 갈취한 당이 "한나라당은 경제살리기에 주력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당사 앞에 걸어 놓고, 부패의 제도적 근절을 위한 정치개혁마저 오히려 개악으로 난도질치는 작태를 보이는 것.

그것은 총선만 치르면 과반수 정당, 최소한 원내 1당은 가능하다는 공학적 계산 속에서 재생산되는 뻔뻔함이다. 그것은 해방 이후 반세기 우리 유권자의 선택이 "이 놈도 썩고 저 놈도 썩었으면 아무도 안썩은 정치적 효과"를 냈던 것에 대한 경험적 기대감으로 합성된 철면피다. 유권자와 시민사회는 이 '절대 부패정당'의 부패에 대해 제 몫을 찾아주어야 한다. 나머지 정당과 정치인 역시 그들의 부패에 상응하는 정치적 책임추궁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정치사회의 '부패 놀이'를 끝장내는 것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이제는 이 '부패 놀이'를 가능케 하는 구조가, 정치부패를 원천적으로 막는 제도의 불비와 더불어, 그 제도를 만드는 주체로서 적어도 부패 문제에서만큼은 자정 능력을 상실한 보수정당이 우리 정치사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바로 이 현실임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

사실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7명의 의원이 오직 한 개 정당 소속이라면 이런 결정이 가능했겠는가?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이 각각 4 : 2 : 1. 이렇게 보수정당의 부패는 신의 작품처럼 절묘하게 안배된 채 도저히 퇴로가 없을 것만 같은 위기에도 상생(相生)의 홍해바닷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 '부패 놀이'의 구조에서 예정된 수순일 뿐이다. 이 '부패 놀이'를 떠받치는 구조를 해체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이 구조를 완전히 해체하는 선택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수정당에게 일말의 자정 능력을 되찾아줄 새로운 정당의 유의미한 원내 진출이 절실하다.

우리 시민사회와 유권자는 그것을 할 수 있을까.

* <수요논객>에 실린 글은 사이버참여연대의 입장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구영단
2003/12/31 14:26 2003/12/3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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