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지형의 변화와 시민운동 1] 정당정치 정상화와 시민운동 (상)
정치일반 :
2004/05/19 02:24
인터넷참여연대는 17대 총선을 계기로 달라진 정치지형이 시민사회에 미칠 영향을 점검해보고, 이를 기초로 시민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의미에서 기획시리즈 '정치지형의 변화와 시민운동'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4·15 총선이 끝나고 보름 남짓 지난 5월 4일 정동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간판급 인사들과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7대 총선 이후 시민사회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가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던진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실업자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 사이에 흔한 '사회가 합리화하고 민주화되면 시민운동가는 할 일이 없어 실업자가 된다'는 농담을 상기시키는 발언이었다. 참석자들은 가볍게 웃어 넘겼지만, 이 유머 속에 담긴 긴장의 끈을 놓치지는 않았다.
시민운동의 긴장. 17대 총선 과정에서 확인된 시민사회의 성장과, 그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지형이 오랜 '정치 실종'의 시기를 마감하고 명실공히 정치 본연의 기능을 회복시킬 가능성이 커지면서, 그 정치 실종의 시기에 국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대변하는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해온 '종합 대변형 시민운동'은 앞으로 '정치 정상화'에 대응해 어떻게 자기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정립할 것인가, 그것이 이날 토론회 내내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사로잡은 화두였다.
정당정치의 정상화
새로운 시민운동의 위상 정립을 위해서는 그것을 논하게 된 '정치 정상화'의 의미가 무엇이고, 17대 총선 과정과 결과가 낳은 정치 정상화의 조건들을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 17대 총선 결과에 대한 진보적 학자들의 평가 속에서 정치 정상화의 의미를 연역해보자.
"정책생산자로서의 정당, 시민사회의 요구를 정치투쟁의 장에 투입하는 전달벨트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점에 오게 됐다. (지금까지) 정당은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 여성, 소수자의 목소리는 정당정치에 반영되지 않았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반부패와 탄핵반대를 축으로 한 사회적 동원이 기존의 정치구도를 일거에 허물어뜨림으로써 진보세력과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이뤄졌고, 정치적 대표성의 폭은 더욱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윤상철 한신대 교수)
"17대 총선은 수구보수세력의 의회독점이 깨지고, 진보정치세력의 원내 진입으로 제도정치의 완고한 폐쇄성이 깨졌다는 두 가지 점에서 정치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들이 17대 총선 결과를 '정치 정상화'의 계기로 보는 핵심 근거는 결국 노동자·농민·여성·장애인 등 그 동안 정치의 장에서 소외돼온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정치적 대표성이 확대됐다는 것, 그 결과 정치 본연의 기능인 사회적 갈등의 조정이 '거리'가 아닌 '정치의 장'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 정상화의 수위에 대한 평가에는 이견이 있다. 김동춘 교수가 이번 17대 총선 결과로 "정치의 개념이 군림하는 정치에서 자원 배분과 조정기구로서의 정치"로 변화됐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전망하는 반면,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정치에서 탈권위와 문화적 유연성은 가능하겠지만 조정과 배분의 기능은 여전히 회의적"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어쨌든, 시민운동이 현재 주목하는 정치 정상화의 범위는 주로 '정당정치'에 관련된 것이고, 그 수위는 다양한 시민사회적 가치들이 정당정치라는 제도정치권 내에서 문제의 핵심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채 논의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6대 국회와 시민운동의 관계를 보면 시민운동이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해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실감할 수 있다. 네이스(NEIS) 문제, 부안 핵폐기장 건설, 새만금 개발, 정치개혁 요구,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호주제 폐지, 집시법 개악 등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와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현안에서 정당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시대 변화에 걸맞는 정책을 제도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정략적 이해만을 앞세운 수구세력과 자기 정책과 정부 입장 사이에서 고민하며 결국 개악을 묵인한 자유주의 개혁세력은 인터넷 실명제, 집시법 개악과 같은 시대착오적 법률안을 통과시키거나 방조하기도 했다. 마지못해 개혁과제를 입법화하지만, 최종 통과된 법안의 개혁성을 누더기로 만드는 일도 다반사로 벌어졌다.
결국 네이스 문제, 부안 핵폐기장 문제, 정치개혁 입법에서 그나마 조정과 개혁이 이뤄진 것은 순전히 제도정치의 외부에서 이런 문제를 의제화해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했던 시민운동의 역할로 돌릴 수 있다. 그리고 17대 총선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지형으로 인해 이런 시민운동의 준정당적 기능의 역할이 쇠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시민운동이 자기 진로와 위상 정립을 요구받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기대하는 정치지형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
시민사회적 의제의 제도정치권화
많은 전문가들은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은 정치의 장에서 소외돼 있던 기층 민중의 목소리가 제도 정치권에서 시민권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정당정치의 정상화라 부를 만하다. 김동춘 교수는 "진보정당 10석과 여성 13% 의석 차지는 천년 동안 지속돼온 정치의 개념을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새로운 위상 정립과 관련돼 진보정당 원내 진출이 갖는 의미는 조돈문 카톨릭대 교수가 "10석에 불과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수행하게 될 사회적 의제화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이뤄질 사회적 의제화의 정치는, 환경 이슈에서 "부안에 핵폐기장을 지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넘어, 핵에너지 정책을 계속 유지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의제"가,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파병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넘어 한국과 미국의 특수관계를 조정하거나 청산하는 문제"가 제도 정치권에서 논의되게 만들 것이고, 지금까지 제도 정치권 밖에서 이런 사회적 의제화의 정치를 수행해온 시민운동의 역할의 상당 부분을 민주노동당이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모적인 정쟁 대신 정책경쟁의 장으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 못지 않게 수구보수세력의 쇠퇴와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의 과반 장악도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지형의 변화다.
수구보수세력 최대의 정치 결사체 한나라당의 후퇴와 그 여파에 따른 변신 노력이 갖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한나라당을 출입해온 한겨레신문 안수찬 기자는 "적어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 아닌 논쟁'을 상당 부분 생략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제서야 말이 통하는 상대가 등장한 것이다"라는 평가를 내린다. 예를 들어, 남북협력 문제를 국회에서 논할 때 친북이니, 노동당 2중대니 하는 문제로 시간과 사회적 역량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도 한나라당의 쇠퇴와 변신 노력에 대해 대체로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을 듣고 있노라면 거대한 벽같은 것을 느꼈다. 수구 논리와 시스템은 심각했다. 열린우리당은 정책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할 말은 있지만, 그 만큼 우리 당이 수구적 논리, 지역주의 논리를 극복하는 데 온 힘을 쏟은 측면이 있다."
17대 당선자들 일부와 주요 간부들까지 이라크 파병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낼 정도로 바뀐 한나라당의 변신 노력은 얼마만큼 그리고 얼마나 빨리 성공할 수 있을까? 안수찬 기자는 "이미 97년 이후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은 나름의 자기 합리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면서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이 합리적 담론구조를 담지한 정당을 만드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단정한다.
한나라당 변신의 속도와 폭에 대해서는 전문가별로 전망이 다르지만, 대중의 증오심과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지역주의와 색깔론을 무기로 한 선동정치에서 자신의 정책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정책정치의 장으로 한나라당이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의 과반 의석 장악도 정치 정상화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87년 이후의 정치변동 과정을 '국가 및 정치의 자유민주주의적 정상화' 과정으로 보는 조희연 교수는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의 과반 의석 확보를 이렇게 평가한다.
"보수세력과 새롭게 다수정당의 지위를 차지한 중도자유주의적 개혁세력 간의 다원적 경쟁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는 과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신 집권세력이 될 정도로 한국의 국가와 정치는 정상화되고 합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반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다수결 논리만으로 거의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시민운동이 원외에서 열심히 의제화에 노력해온 정치개혁입법,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 과거사 청산문제, 집시법 개정 문제 등 일반민주주의적 과제들은 열린우리당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아주 쉽게 시민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제도화 될 수 있다.
김민영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은 "부패척결, 정치개혁, 국민 기본권 확대, 언론개혁, 사법개혁 등 일반 민주주의적 개혁과제들은 17대 국회 개원 초기에 집중해야 개혁이 가능한데, 열린우리당과 시민운동 사이에 이런 개혁의 속도 문제를 둘러싸고 견인, 비판, 협력의 다양한 관계들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한다.
정책 정당화의 의미
각 당이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원내 정당화도 최소한 정책 정당화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과연 우리 정당이 정책정당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금권선거 방지에서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 개정 선거법은 대신 유권자의 자유로운 선거참여를 제한하고, 미디어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윤상철 교수가 "이번 선거는 과거 정치의 내신성적에 불과할 뿐 새로운 정치능력을 검증하는 수능고사가 아니었다"며 지적하고 있는 '바람'과 '이미지'에 의한 선거는 다음 선거에서도 여전히 정책 정당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조현연 교수는 "미국식 모델을 지향하는 원내 정당화는 정책 수립에 있어서도 결국 기층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책보다는 시민의 참여를 봉쇄하는 엘리트 중심의 정책 생산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합리적 정책논쟁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는 수구보수세력의 선동정치가 후퇴하면서, 그 빈 공간에 정책경쟁이 들어서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파병반대, 부유세 도입,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의 정책을 내건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함으로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정책대응을 피할 수 없어졌다는 점도 정책 정당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여야 정당의 정책 정당화 추세는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정책전문성 제고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렇듯 17대 총선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 지형과 이에 따른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시민운동은 '위기이자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진로 모색은 특히 참여연대와 같은 종합대변형 시민운동에 더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1. 정당정치 정상화와 시민운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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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이 끝나고 보름 남짓 지난 5월 4일 정동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 전국의 시민사회단체 간판급 인사들과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7대 총선 이후 시민사회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가 딱딱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던진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실업자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민단체 활동가들 사이에 흔한 '사회가 합리화하고 민주화되면 시민운동가는 할 일이 없어 실업자가 된다'는 농담을 상기시키는 발언이었다. 참석자들은 가볍게 웃어 넘겼지만, 이 유머 속에 담긴 긴장의 끈을 놓치지는 않았다.

▲ 박원순 변호사가 발제를 맡은 '17대 총선 이후 시민사회의 역할과 과제' 토론회
시민운동의 긴장. 17대 총선 과정에서 확인된 시민사회의 성장과, 그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지형이 오랜 '정치 실종'의 시기를 마감하고 명실공히 정치 본연의 기능을 회복시킬 가능성이 커지면서, 그 정치 실종의 시기에 국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대변하는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해온 '종합 대변형 시민운동'은 앞으로 '정치 정상화'에 대응해 어떻게 자기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정립할 것인가, 그것이 이날 토론회 내내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사로잡은 화두였다.
정당정치의 정상화
새로운 시민운동의 위상 정립을 위해서는 그것을 논하게 된 '정치 정상화'의 의미가 무엇이고, 17대 총선 과정과 결과가 낳은 정치 정상화의 조건들을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 17대 총선 결과에 대한 진보적 학자들의 평가 속에서 정치 정상화의 의미를 연역해보자.
"정책생산자로서의 정당, 시민사회의 요구를 정치투쟁의 장에 투입하는 전달벨트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점에 오게 됐다. (지금까지) 정당은 사회적 균열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 여성, 소수자의 목소리는 정당정치에 반영되지 않았다."(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반부패와 탄핵반대를 축으로 한 사회적 동원이 기존의 정치구도를 일거에 허물어뜨림으로써 진보세력과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이뤄졌고, 정치적 대표성의 폭은 더욱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윤상철 한신대 교수)
"17대 총선은 수구보수세력의 의회독점이 깨지고, 진보정치세력의 원내 진입으로 제도정치의 완고한 폐쇄성이 깨졌다는 두 가지 점에서 정치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들이 17대 총선 결과를 '정치 정상화'의 계기로 보는 핵심 근거는 결국 노동자·농민·여성·장애인 등 그 동안 정치의 장에서 소외돼온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정치적 대표성이 확대됐다는 것, 그 결과 정치 본연의 기능인 사회적 갈등의 조정이 '거리'가 아닌 '정치의 장'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 정상화의 수위에 대한 평가에는 이견이 있다. 김동춘 교수가 이번 17대 총선 결과로 "정치의 개념이 군림하는 정치에서 자원 배분과 조정기구로서의 정치"로 변화됐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전망하는 반면,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정치에서 탈권위와 문화적 유연성은 가능하겠지만 조정과 배분의 기능은 여전히 회의적"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어쨌든, 시민운동이 현재 주목하는 정치 정상화의 범위는 주로 '정당정치'에 관련된 것이고, 그 수위는 다양한 시민사회적 가치들이 정당정치라는 제도정치권 내에서 문제의 핵심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채 논의될 수 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6대 국회와 시민운동의 관계를 보면 시민운동이 '준정당적 기능'을 수행해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실감할 수 있다. 네이스(NEIS) 문제, 부안 핵폐기장 건설, 새만금 개발, 정치개혁 요구,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호주제 폐지, 집시법 개악 등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와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현안에서 정당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시대 변화에 걸맞는 정책을 제도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정략적 이해만을 앞세운 수구세력과 자기 정책과 정부 입장 사이에서 고민하며 결국 개악을 묵인한 자유주의 개혁세력은 인터넷 실명제, 집시법 개악과 같은 시대착오적 법률안을 통과시키거나 방조하기도 했다. 마지못해 개혁과제를 입법화하지만, 최종 통과된 법안의 개혁성을 누더기로 만드는 일도 다반사로 벌어졌다.

▲ 새로운 정치지형과 시민운동의 변화 방향 모색이 활발하다. 사진은 참여사회연구소에서 개최한 토론회 장면.
결국 네이스 문제, 부안 핵폐기장 문제, 정치개혁 입법에서 그나마 조정과 개혁이 이뤄진 것은 순전히 제도정치의 외부에서 이런 문제를 의제화해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했던 시민운동의 역할로 돌릴 수 있다. 그리고 17대 총선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지형으로 인해 이런 시민운동의 준정당적 기능의 역할이 쇠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이다. 시민운동이 자기 진로와 위상 정립을 요구받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렇다면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기대하는 정치지형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
시민사회적 의제의 제도정치권화
많은 전문가들은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은 정치의 장에서 소외돼 있던 기층 민중의 목소리가 제도 정치권에서 시민권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정당정치의 정상화라 부를 만하다. 김동춘 교수는 "진보정당 10석과 여성 13% 의석 차지는 천년 동안 지속돼온 정치의 개념을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운동의 새로운 위상 정립과 관련돼 진보정당 원내 진출이 갖는 의미는 조돈문 카톨릭대 교수가 "10석에 불과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원내에서 수행하게 될 사회적 의제화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이뤄질 사회적 의제화의 정치는, 환경 이슈에서 "부안에 핵폐기장을 지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넘어, 핵에너지 정책을 계속 유지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의제"가,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파병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넘어 한국과 미국의 특수관계를 조정하거나 청산하는 문제"가 제도 정치권에서 논의되게 만들 것이고, 지금까지 제도 정치권 밖에서 이런 사회적 의제화의 정치를 수행해온 시민운동의 역할의 상당 부분을 민주노동당이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모적인 정쟁 대신 정책경쟁의 장으로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 못지 않게 수구보수세력의 쇠퇴와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의 과반 장악도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기대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지형의 변화다.
수구보수세력 최대의 정치 결사체 한나라당의 후퇴와 그 여파에 따른 변신 노력이 갖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한나라당을 출입해온 한겨레신문 안수찬 기자는 "적어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 아닌 논쟁'을 상당 부분 생략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제서야 말이 통하는 상대가 등장한 것이다"라는 평가를 내린다. 예를 들어, 남북협력 문제를 국회에서 논할 때 친북이니, 노동당 2중대니 하는 문제로 시간과 사회적 역량을 소모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도 한나라당의 쇠퇴와 변신 노력에 대해 대체로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을 듣고 있노라면 거대한 벽같은 것을 느꼈다. 수구 논리와 시스템은 심각했다. 열린우리당은 정책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할 말은 있지만, 그 만큼 우리 당이 수구적 논리, 지역주의 논리를 극복하는 데 온 힘을 쏟은 측면이 있다."
17대 당선자들 일부와 주요 간부들까지 이라크 파병 문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낼 정도로 바뀐 한나라당의 변신 노력은 얼마만큼 그리고 얼마나 빨리 성공할 수 있을까? 안수찬 기자는 "이미 97년 이후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은 나름의 자기 합리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면서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보수세력이 합리적 담론구조를 담지한 정당을 만드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단정한다.
한나라당 변신의 속도와 폭에 대해서는 전문가별로 전망이 다르지만, 대중의 증오심과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지역주의와 색깔론을 무기로 한 선동정치에서 자신의 정책을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정책정치의 장으로 한나라당이 성큼성큼 들어서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열린우리당으로 상징되는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의 과반 의석 장악도 정치 정상화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87년 이후의 정치변동 과정을 '국가 및 정치의 자유민주주의적 정상화' 과정으로 보는 조희연 교수는 중도자유주의 개혁세력의 과반 의석 확보를 이렇게 평가한다.
"보수세력과 새롭게 다수정당의 지위를 차지한 중도자유주의적 개혁세력 간의 다원적 경쟁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는 과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신 집권세력이 될 정도로 한국의 국가와 정치는 정상화되고 합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반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은 다수결 논리만으로 거의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특히 지금까지 시민운동이 원외에서 열심히 의제화에 노력해온 정치개혁입법,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 과거사 청산문제, 집시법 개정 문제 등 일반민주주의적 과제들은 열린우리당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아주 쉽게 시민사회적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제도화 될 수 있다.
김민영 참여연대 시민감시국장은 "부패척결, 정치개혁, 국민 기본권 확대, 언론개혁, 사법개혁 등 일반 민주주의적 개혁과제들은 17대 국회 개원 초기에 집중해야 개혁이 가능한데, 열린우리당과 시민운동 사이에 이런 개혁의 속도 문제를 둘러싸고 견인, 비판, 협력의 다양한 관계들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한다.
정책 정당화의 의미
각 당이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원내 정당화도 최소한 정책 정당화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과연 우리 정당이 정책정당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 금권선거 방지에서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한 개정 선거법은 대신 유권자의 자유로운 선거참여를 제한하고, 미디어의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윤상철 교수가 "이번 선거는 과거 정치의 내신성적에 불과할 뿐 새로운 정치능력을 검증하는 수능고사가 아니었다"며 지적하고 있는 '바람'과 '이미지'에 의한 선거는 다음 선거에서도 여전히 정책 정당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조현연 교수는 "미국식 모델을 지향하는 원내 정당화는 정책 수립에 있어서도 결국 기층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책보다는 시민의 참여를 봉쇄하는 엘리트 중심의 정책 생산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합리적 정책논쟁의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는 수구보수세력의 선동정치가 후퇴하면서, 그 빈 공간에 정책경쟁이 들어서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파병반대, 부유세 도입, 무상교육·무상의료 등의 정책을 내건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함으로써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정책대응을 피할 수 없어졌다는 점도 정책 정당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여야 정당의 정책 정당화 추세는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정책전문성 제고라는 과제를 던지고 있다.
이렇듯 17대 총선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 지형과 이에 따른 정당정치의 정상화를 시민운동은 '위기이자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민운동의 새로운 진로 모색은 특히 참여연대와 같은 종합대변형 시민운동에 더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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