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하고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것들이 감당하기 어렵게 쏟아지는 오늘, 흘러간 것의 재방송과 재상영을 기다리는 이는 매니아들뿐이다.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리바이벌’은 지겨움의 대상이다.

잊혀질 만하면 스타워즈와 대부 시리즈 비디오를 빌려와 보고 또 보는 나에게 마누라는 “파시즘에 대한 원초적 향수가 있다”는 의혹을 두고 있다. 대부와 스타워즈에 인생과 권력과 역사에 대한 조롱과 일갈이 숨어있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떠들어봐야 마누라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실제로 대다수의 꼴통마초들이 위의 두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나에게 쏠린 의혹을 크게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누가 뭐라건 그저 그 영화를 거듭 음미할 따름이다.

생협에서 발행한 유기농산물 품목을 보고 또 보며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마누라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집밖에 나서면 온몸으로 들이마시는 게 도시의 오염물질인데, 그깟 유기농 얼마 먹는다고 우리의 건강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어차피 발암물질을 먹고 입고 쓰면서, 한 70년 버티다가 괴롭게 죽어나갈 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았나 말이다. 그런 나에게 생명운동의 저항성을 강변하는 마누라의 말은 애시당초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매니아는 같은 부류끼리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모든 종류의 재방송과 재탕과 재론은 하품 나오는 이야기다. 주말이면 각 방송사마다 연속극 재방송을 틀어대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식으로 연속극을 곱씹어 보는 시청자 층이 제법 있다는 이야기다. 한일 축구전을 생중계 방송하고도, 저녁 9시 뉴스와 스포츠 뉴스, 마감뉴스, 그리고 주말의 주간 스포츠 매거진 등에서 반복해서 틀어대는 것도, 나같은 축구광들 때문에 용납되는 일이다.

거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지, 한나라당도 1년 전의 정치시리즈를 재방송하고 있다. 제목은 ‘나바론 특공대’다.

당의 주인이 이회창에서 최병렬로 바뀌었다는 점 등을 제외하면 스토리는 대동소이하다.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정형근 의원으로 이뤄진 특공대가 집권세력의 거대한 요새를 무너뜨리려고 애쓴다는 이야기다. 1편에선 그들이 끝내 작전에 실패하는 비극적 내용이 큰 줄기를 이뤘다. 오히려 ‘네거티브 선거전’이 대선을 망쳤다며 당내에서조차 왕따를 당했던 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2편에선 부활에 성공한 그들의 재도전을 다룰 터이다. 나바론 특공대는 과연 작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 일부 캐스팅의 변화도 예상된다. 2차 대전 때의 영국군 나바론 특공대가 6명으로 이뤄졌던 것처럼, 1편에서의 한나라당 나바론 특공대는 4인방 외에도, 대북송금의혹 폭로를 주도한 엄호성과 이성헌 의원 등이 지원 사격을 했었다. 속편에선 누가 4인방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맡을지 자못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그 이상 더 새로울 게 없다. 나바론 특공대 매니아도 아닌 나로선 당연히 벌써부터 지겹다. 나에겐 채널선택권도 없어서, 지겹다고 고개돌리면 그만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뚫어져라 지켜봐야 한다. 그러니 더 고역이다.

관련된 삽화 하나. 대선 기간 내내 한나라당을 괴롭힌 병풍의혹에 대해 정형근·홍준표·김문수·이재오 의원 4명이 합동 기자회견을 연 적이 있었다. 그 네 사람이 동시에 한자리에 모여 카메라 앞에 선 것부터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 강해 ‘나바론팀’ 회의를 열어도 서로 티격태격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나는 회견내용보다 그들이 나란히 늘어선 모습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재오 의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이 정치인은 할 말이 너무 많은 스타일이라 남들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30여분간을 혼자 떠들었다.

홍준표 의원은 자기도 한몫 끼어 말하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이 의원이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자, 쉴새없이 투덜대며 복도에 나갔다 들어왔다 했다. 마지막 순간 결국 마이크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문수 의원은 그저 그 곁에서 부동자세로 정면만 응시한 채, 비교적 얌전히 기자회견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치 한눈을 파는 것 자체가 그 자리의 중차대함에 결정적 손상을 주는 것이라 여기는 듯, 사뭇 경건한 자세였다.

공개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정형근 의원은 ‘마지못해 나왔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회견시작과 거의 동시에 회견장을 그냥 빠져나가 버렸다. 기자들은 다른 세 의원을 제쳐놓고 일제히 정 의원을 따라갔지만 그는 손사래를 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언제나‘같이 또 따로’인 이들은 이번엔 대선자금 정국을 돌파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이재오 의원은 사무총장 겸 비대위 위원장을 맡았다. 원래 사무총장은 원내총무나 정책위의장 다음 가는 서열이었지만, 일종의 계엄군 사령관에 오른 이재오 총장은 사실상 당내 2인자 자리를 굳힐 태세다.

홍준표 의원은 전략기획본부장에 올랐다. 전략기획본부는 비대위 산하의 한 부분이지만, 홍 의원은 “비대위와 전략기획본부는 동등한 조직”이라며 스스로 2인자 그룹 가운데 하나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김문수 의원은 외부인사영입팀장을 맡았다. 모든 정치인들이 내년 총선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숨은 실세 중의 실세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기성 정치인을 정치권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바깥의 신진들에게 금뺏지를 선사할 수 있는 길목을 차지했다.

정형근 의원은 당내 정치발전특위 간사를 맡았다. 각종 정치개혁안이 이 기구를 거쳐 나온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 의원은 정발특위를 등에 업고 최병렬 대표를 직접 상대하며 단독 플레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당 지도부의 전면에 나선 뒤로, 한나라당 기자실에 또다시 등장한 풍경이 있다.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기자실에 등장하면, 기자들이 우루루 달려가 질문공세를 퍼붓는 것이다. 그런 기자들이 귀엽고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들이 기자 간담회라도 시작하면, 그‘말의 잔치’가 30분 이상 계속된다.

예측가능한 말만 내놓고 그나마 했던 말 또 하는 브리핑을 30분씩 듣는 것도 지겨운데, 1년 전에 했던 그 짓을 똑같이 반복해야 하니, 나로선 참 한숨만 나온다. 멋모르고 달려가 눈빛을 반짝이며 그들의 말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받아 적는 다른 기자들을 보면 딱하기도 하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나바론 특공대의 활약이 비교적 오랜 세월 이어진 시리즈물의 하나라는 사실을 그들도 머지 않아 깨달을 것이다. 연속극의 특성상, 소재가 조금씩 달라질 뿐, 극중 긴장요소를 전개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는 것을 그들도 쉽사리 눈치채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자들의 노동강도에 있지 않다. 어차피 ‘적는 놈’(기자)이 하는 일이란 게 한시간이건, 두시간이건 남의 말을 받아쓰는 것이다.

의협심도 없고 시대정신도 없고 아는 것도 없어서, 지식은커녕 머리가 없어도 괜찮은 직업이 신문기자가 돼버린 마당에 좀 힘들여 정치인의 말을 받아치고 있는 게 뭐 대수가 되겠는가.

심각한 것은 이런 재방송이 먹혀 들어갈 것으로 보는 한나라당의 정서다.

최병렬 대표체제의 출범에 대해 상당수 당내 인사들은 일종의 ‘당 쇄신의 신호탄’이라고 분석했다. 최 대표 스스로가 5공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당내 비주류의 길을 걸었던 특성상, 당내 다수파인 민정계 중진들을 내칠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5공 세력인 최 대표가 다른 5공 세력과 대립하는 딜레마에 대해선 <계간> 인물과 사상 28호에 실린 잡문을 참조하시길...)

대표 취임과 동시에 원희룡, 박진, 임태희 등 초선급 소장파 의원들을 요직에 중용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이를 위해 최 대표가 꺼내든 무기는 과거의 것과 똑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적청산 대상으로 떠오른 5공 출신의 민정계 중진들이 이회창 후보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를 방어할 방패이자 역공을 시도할 무기로 내세웠던 저격수 그룹을 이제 최 대표가 다시 중용한 것이다.

최 대표도 잘 알고 있겠지만, 그가 명분으로 내건 정치개혁은 정치자금 문제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자금 투명화는 일종의 ‘경로’다. 검은 돈의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이를 통해 악착같이 정치생명을 연장해온 구태 정치인들의 토양을 없애는 게 정치개혁의 요체다.

그리고 그 구태의 중요한 한 축에 폭로와 비방공세를 특징으로 하는 여야 정쟁이 있다. 그 정쟁의 주역에게 정치개혁과 정치신인의 영입을 맡기는 한, 한나라당 정치개혁의 진정성은 두고 볼 일이다. 정형근 의원이 한나라당 정치발전특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무엇보다 이들 나바론팀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최근 대선자금 정국은 집권세력이 펼치고 있는 고도의 정치공작 이상이 아니다. 이를 정치공작으로 보는 한, 이를 극복하고 돌파하는 방법도 또 다른 정치공작에 의할 수밖에 없다.

복잡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보기에, 지금 한나라당의 진용과 언술은 정확히 1년전의 그것과 똑같다. 야당탄압하지 말라고 하고, 정권의 치부라며 폭로전을 펼치면서, 지지를 호소한다. 그랬던 결과를 유권자도 알고, 한나라당도 안다. 대선 패배다.

아직도 그들의 복귀를 환호하는 매니아 층이 있는 지 모르겠다. 어딘가에 그 매니아층이 있으니 재방송이 가능할 게다. 그러나 일부의 매니아를 제외한 대다수에게 이 재방송은 하품 나올 정도로 지루하다. 한나라당이 일부 매니아를 상대로 정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안수찬 한겨레신문 기자
2003/11/03 10:38 2003/11/0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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