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만회혁명’, 그리고 ‘새로운 사회동력’으로서의 시민사회
시민과세계/2003년 상반기 :
2003/03/01 00:26
『시민과세계』 창간호를 내고 2호 기획에 들어갔던 2002년 9월경만 해도 단 넉 달 뒤인 12월에 우리 한국의 국가와 시민사회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누구도 자신 있게 예측할 수 없었다. 아니, 예측하기를 두려워했다.
어떤 비난을 받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었던 집권 민주당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태어났었다. 그러나 집권당은 후보든 이념이든, 아니면 민주화운동의 적자라는 자존심이든, 어느 것도 더 이상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그 짧은 5년집권 동안 맛본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뽑아놓은 후보조차 서슴없이 팽개치려고 했다. 권토중래를 노려온 수구세력의 꿈이 지방선거에 이어 대통령선거에서도 이루어질 판이었다. 지난 세월 수많은 희생을 치러 얻어냈던 약간의 민주적 삶도 과연 지켜질지 의문스러웠다. 오랜 세월 한국정치를 겪으며 관찰해 온 한 원로학자는 비통한 기분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토로했고, 한국민주주의는 ‘보수적 민주화’의 저주를 벗어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22년 전 5월 전남도청에서 애타게 그랬듯이,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려고 달려올 원군은 이번에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6월 월드컵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 역동적 에너지는 문화전선에서 진군을 멈춘 듯했으며, 시민운동은 포스트김대중 시대의 제2차 민주화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패배주의의 유혹을 견뎌낸 것은, 진보든 개혁이든 수구든, 정치권에 떠오른 어떤 가시적 세력도 역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태의 추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판단 덕분이었다. 끝까지 가본다는 것은 가진 게 많은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길지 않은 인생역전에서 체득했듯이, 어떤 판정이 나도 최선을 다한 자에게 후일의 기회라도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2002년 강력한 보수회귀 역풍을 목도하고 있던 시점에서 시민운동의 몫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했다. 특집 <한국 시민운동의 진단과 세 도그마>는 그동안 한국민주주의의 전진을 위해 다대한 기여를 했으면서도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부당하게 폄하당한 한국 시민운동의 내적 동력과 발전 전망을 철저하게 점검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구상되었다.
이 특집에 착수하면서 우리는 한국 시민운동의 역동성을 안에서부터 제약한 도그마적 굴레들이 더 이상 묵수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압박 속에서 시민의 이해와 삶의 욕구가 거의 도외시됨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만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야 하고, 부패정치인과 사회권력들이 온갖 특혜를 누리고 불법을 자행함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만은 법을 지켜야 하며, 관변단체들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온갖 지원을 누리는데도 시민운동만은 꼬박꼬박 세금을 바친 시민들의 푼돈으로 자립하라고 강요받아 왔다.
정치적 중립성, 법치주의적 합법성, 그리고 재정자립성은 분명히 시민들의 민주적 덕성에 해당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덕성들이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봉쇄하고 시민운동의 발전에 족쇄를 채우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시민운동은 단순 소박한 정치적 중립성을 넘어 정의와 자유 그리고 진리의 편에 서는 강한 당파성을 가지고 사회적 억압을 돌파해야 할 것이다(홍일표). ‘나쁜 법’이 억압의 또 다른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시민운동은 참여자가 처벌을 감수하는 위법을 감행하고서라도 그로 인해 얻게 될 ‘더 좋은 법’을 통해 우리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민주적 법치주의 정신, 시민불복종 운동의 정신으로 시민들의 희망을 걸고 분투할 것이다(이대훈). 그리고 국가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도 자발적으로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에, 우리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사회권력들 앞으로 당당하고도 투명하게 재정적 분배를 요청할 수 있다(하승수). 오늘날 나라의 안팎을 막론하고 공공성은 결코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적, 성찰적 공공성의 차원과 그 광범한 발전 가능성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법적 신임보다도 상위에 위치하면서 국민적 신뢰를 창출하는 시민사회의 소통적 정당성, 자율적 소통관계와 소통능력, 정치적 투지를 확보하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한국시민사회가 정치사회에 대해 갖는 강점이다(조효제). 이런 메시지들을 전달하기 위해 ꡔ시민과세계ꡕ 편집진은 약간은 비장한 분위기에 잠기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 뒷걸음질치던 한국민주주의 이행의 시계가 12ㆍ19대선을 통해 정상궤도를 되찾았다. 멈추는가 했던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시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 시민운동의 세 도그마에 대한 반성은, 한층 발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국민적 역량을 ‘새로운 사회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차원에서 훨씬 전향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승리를 가져온 이 새로운 사회동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선거가 종료된 다음날 이미 우리의 의식은, 바라긴 했지만 예상은 할 수 없었던 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쪽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승리한 것은 노무현인가? 노무현이 마냥 ‘바보’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민주당에서 국민경선제가 제기되었을 때 호남향우회의 위력에 자신이 선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려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받아들인 게임의 규칙에 깨끗이 승복한 것말고도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벌써 나왔어야 할 직업정치가로서의 헌법적ㆍ정치적 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헌법 제8조)하여 국민이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국민이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입에 올리는 수사이다. 그러나 주인이 주인으로서 제구실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 즉 주인으로서 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는 일은 한국정치사에서 아직 어떤 정치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판단을 강압하거나, 돈으로 사려고 하거나, 아니면 혹세무민의 지역감정으로 눈을 가리고 어둡게 만들었다. 바로 이렇게 주권자인 국민이 주인으로서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그르치게 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한국정치인들은 주인의 자리와 업무를 가로챈 민주주의의 찬탈자들인지 모른다. 그런데 노무현은 국민 위에서 마치 한국민주주의의 구원자처럼 떠오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민주주의 정치의 겸허한 전문가로서 국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인은 오직 주인 자신만이 구할 수 있었다.
제2차 민주화투쟁을 넘어서, 지난 5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한 ‘대한민국 구체제(앙시앵 레짐)’에 대항하여 ‘대한민국 2002년 체제’를 전망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포럼에서, 공통된 의견으로 확인된 것은 우리 국민이 더 이상 ‘박정희신드롬’의 포로가 된 냉전시대의 수동적 국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노무현을 선택한 국민은 짓밟힌 상식과 원칙, 신념과 윤리를 바로 세우기를 원하고, 좌절하지 않고, 정치적 패배자와 기꺼이 더불어 갈 줄 아는 탈냉전시대의 전혀 새로운 능동적 국민이다. 새로운 ‘정치적 상식’ 또는 양식을 지닌 정치인과 이와 더불어 한 능동적 국민의 동시적 출현, 이들의 협력에 의한 새 민주정부의 출범, 여기에 우리는 어떤 시대전환의 새 기운을 느껴도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시대패러다임의 전환 또는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흐름은 우리가 오랫동안 염원해 온 민주, 자주 그리고 평화의 세 물줄기가 모처럼 합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사실 이와 같은 개혁의 흐름은 15년 전 1987년 6월민주항쟁을 통해 확보했어야 마땅하다. 12ㆍ19선거혁명은 우리 국민이 15년 전 중도반절로 끝난 6월민주항쟁에서 이미 획득해야 했던 것, 즉 ‘지체된 전환’을 이제야 비로소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만회(挽回)혁명’ (nachholende Revolution)이다. 노무현정부에 대해 거는 국민의 기대가 큰 것은 당연하고, 새 정부는 그만큼 무거운 역사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만 집권 자체보다 그 이후가 더 험난할지 모른다. 노무현은 여전히 민주당의 둥지 속에 들어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여소야대의 소수파정권이며 재계와 보수언론에 둘러싸여 있다.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비롯한 대외적 난관 또한 매우 험난하다. 이미 김대중정부의 굴절경험을 학습한 바 있는 우리로서는 새 정부가 여러 난관들과 마주하여 과연 어떤 방책으로, 어떤 새로운 개혁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만약 이 정부가 ‘참여정부’임을 자임한다면, 그 참여의 정도와 질(質)이, 정치도 정치지만, 시민들의 삶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경제에서부터 체감되어야 할 것이다. 참여정치가 사회 귀족들 및 돈과 교양과 시간이 있는 사회 상층집단의 것으로 갇혀 있지 않고 명실상부한 시민적, 평민적 참여정치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참여경제, 경제적 삶에서의 시민적 능력부여(empowerment)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난 IMF사태를 통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것이 ‘삶의 현장’에서 ‘나의 삶’을 보다 안정되고 풍족하게 해주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부담스러운 껍질에 지나지 않음을 체득하였다.
지구화 또는 세계화의 광풍과 힘있게 맞서는 투지(홍기빈)는 그 안에 휩쓸린 세계 각국의 내부역량에 따라 좌절과 희망의 다양한 파장을 낳았다. 경제강국이자 복지대국인 독일은 고용과 성장의 딜레마 속에서 시장과 국가의 새로운 접점을 찾아 어려운 항해를 진행하고 있다(박근갑). 대화와 타협정치의 전통을 총동원하여 사회세력들간의 합의를 얻어 이 딜레마를 나름대로 해결했다는 네덜란드는 저임금과 불안정고용을 일상적으로 강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경제활동의 동력이 가라앉을 수도 있는 침체요인을 안고 있다(송원근/전창환). 이제야 국부에 대해 민중이 참여하고 분배받을 권리를 확보할 기회를 갖게 된 브라질은 누적되어 온 외채의 압박 속에서 급속히 상승하는 기대수준의 적절한 조정점을 마련해야 하는 고민을 안고 있다(장석준).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비전은 우리에게는 기분 좋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파트너가 될 국가들이나 북한에게는 아직 그 내용조차 전달되지 않은 미개봉의 설계도이다(김영호). 그러나 이 모든 시도들이 생태적 환경요인을 부차적으로만 취급하는 발전국가모델의 사정권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 삶의 영구적인 기반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구도완). 지구화의 이런 압박과 함께 김대중정부에서 수행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성과와 폐해를 모두 안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선택항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발전국가의 기본 전제인 끝없는 따라잡기 경쟁, 국익확장경쟁, GNP증가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 또는 자치와 소통능력의 증진으로 개혁경제의 가능성을 개척하자는 새로운 상상력은 국민통합과 국민참여를 내건 ‘참여정부’가 ‘참여경제’를 구상할 중요한 단초가 아닐까?(이병천)
노무현정권이 역대 어떤 선거 때보다 지역, 세대, 계층 모든 면에서 고른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그만큼 새 정부가 국민통합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16대 대선에서 한국정치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손혁재) 그를 지지한 대표집단은 지역적으로 호남, 민주당이 대변하는 전통적인 보수기반, 386세대, 월드컵세대, 반이회창 연대의 관점에 선 급진민주주의 집단 등으로 구성된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임이 드러난다. 이 이질적 집단을 묶어내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흐름을 확연히 만들어낸 것이 바로 386세대와 월드컵세대라고 한다면 이들이 대거 참여하여 극우수구세력의 역풍을 차단하는 데 기여한 촛불시위의 새로운 면모와 그 한계점(권혁범),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이 새로운 시대에 합류할 청소년들의 아비투스와 에토스를 적시하는 일(전효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2030 탈냉전개혁 세대의 결합에서 30대가 15년 전 6월항쟁의 만회에 대한 꿈으로 훨씬 더 치열했다면 20세대는 자율성, 다양성, 적극적인 삶의 향유에 대해 더 높은 감수성을 보였다. 그리고 20대가 주류를 이룬 붉은악마와 촛불시위는 민족적 자긍심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동질성을 보였지만 전자는 놀이 또는 축제이고 후자는 정치적 저항운동으로서 성격은 아주 달랐다.
이는 그만큼 20대의 성향이 유동적임을 말해 준다.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이전만 해도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욕구는 상당 부분 정몽준에 대한 지지로도 나타났었다. 이는 그만큼 월드컵세대의 정치적 상식 또는 판단력의 취약성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노 당선자는 이회창 후보에게 2.3%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 후보를 선택한 국민들 중에는 보수층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희생대중―정치적으로는 자각하지 못하고 즉자적으로 판단한―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시민사회가 아니라 유동성, 이질성, 그리고 긴장과 갈등이 가로지르고 있는 시민사회, 심지어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북핵위기와 미국의 비타협적 압박 등으로 표출된 외부요인도 새 정부의 개혁행보를 더디게 할 수 있는 중대한 장애물이 될 수 있는데, 노무현정부의 평화능력이 이제 국제적 실험대에 올라섰음은 명백하다. 우리가 이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새 정부의 난관이 단지 수구보수세력에게 포위된 정부라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지기반의 이질성과 유동성 그리고 두 갈래 민주주의로 빠져들 수 있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 노선간의 비대칭성, 나아가 국내적 개혁의지와 국제적 압박요인의 상충성에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20세기 초두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포위된 상태에 있으며 갈 길이 멀고 깨지기 쉬운, 아직 어리고 약한 민주주의다. 이 단계에서 시민사회는 서두르지 않는 우회로를 통해(장은주) 차분히 서둘러 가는 상황의 속도를 뒤에서 낚아채는 반성적 안목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등장, 시민사회의 발전 그리고 공과 사의 분리라는 근대민주주의의 귀중한 그리고 불가피한 구성요소를 확인하고,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 사이에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긴장을 인지함으로써 시민됨의 정체성을 다시 자각하고,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다원적인 참여민주주의의 상상력을 가꾸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샹탈 무페).
바로 이런 조건들 안에서 우리는 한국민주주의와 좋은 정부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정부는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 실제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개혁을 입안하고 수행할 수 있는, ‘민주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정부’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최장집). 이런 점에서 노 당선자가 언젠가 했던 “노무현이 당선된다는 사실 하나가 이미 당선되고 나서 할 많은 일보다 더 크다”라는 말은 이제 집권자의 책임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다른 말, 즉 “노무현의 당선은 당선되고 나서 할 많은 일의 시작이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대중정부를 포함하여 민주정부로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정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민주정부의 정통을 수립하지 못했다 함은 곧 우리가 늘 그곳으로 돌아가 우리의 공적 삶을 비추어볼 수 있는 정당한 공적 권위(authority)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땅에서 민주공화국의 자율적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노무현정부가 민주정부의 새로운 공적 권위를 굳건히 정초한 정부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민주정부의 공적 권위의 정통을 세우는 일, 민주ㆍ자주ㆍ평화의 새로운 국민적 에토스와 이에 상응하는 새 질서를 수립하는 일, 이보다 더 중요한 노무현정부의 과제는 없어 보인다.
참여정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참여정부는 무늬만의 참여뿐인, 또 하나의 실패한 민주정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정통을 수립한, 최초로 성공한 민주정부가 될 것인가. 우리는 개혁정부가 권력에 안주하고 국민의 광범한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할 때, 어떻게 초라한 꼴로 퇴행하는가를 거듭거듭 보아왔다. 그리고 그 실패는 단지 해당 정권만이 아니라 국민과 대한민국의 불행으로 전가되었다. 출범을 앞두고 일어난 두 사건은 새 정부에 대한 큰 도전이다. 두산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씨의 분신과 불행한 죽음은 이후에 또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무수한,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역 화재사건과 같은 대참사는 앞으로도 반복될지 모른다. 수많은 배달호씨들이 분신보다 참여를 택하고, “무서워서 살 수 없어요” 하고 울부짖는 수많은 보통시민들이 “이제 안심하고 살 수 있어요” 하고 웃음지을 때, 비록 새 민주정부, ‘참여정부’는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부의 성공보다 더욱 귀중한 국민의 성공과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성공을 위한 초석을 깔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2월
공동편집인 이병천ㆍ홍윤기
어떤 비난을 받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었던 집권 민주당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서 태어났었다. 그러나 집권당은 후보든 이념이든, 아니면 민주화운동의 적자라는 자존심이든, 어느 것도 더 이상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그 짧은 5년집권 동안 맛본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이 뽑아놓은 후보조차 서슴없이 팽개치려고 했다. 권토중래를 노려온 수구세력의 꿈이 지방선거에 이어 대통령선거에서도 이루어질 판이었다. 지난 세월 수많은 희생을 치러 얻어냈던 약간의 민주적 삶도 과연 지켜질지 의문스러웠다. 오랜 세월 한국정치를 겪으며 관찰해 온 한 원로학자는 비통한 기분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토로했고, 한국민주주의는 ‘보수적 민주화’의 저주를 벗어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22년 전 5월 전남도청에서 애타게 그랬듯이,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려고 달려올 원군은 이번에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6월 월드컵 때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 역동적 에너지는 문화전선에서 진군을 멈춘 듯했으며, 시민운동은 포스트김대중 시대의 제2차 민주화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패배주의의 유혹을 견뎌낸 것은, 진보든 개혁이든 수구든, 정치권에 떠오른 어떤 가시적 세력도 역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태의 추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판단 덕분이었다. 끝까지 가본다는 것은 가진 게 많은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길지 않은 인생역전에서 체득했듯이, 어떤 판정이 나도 최선을 다한 자에게 후일의 기회라도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2002년 강력한 보수회귀 역풍을 목도하고 있던 시점에서 시민운동의 몫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했다. 특집 <한국 시민운동의 진단과 세 도그마>는 그동안 한국민주주의의 전진을 위해 다대한 기여를 했으면서도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부당하게 폄하당한 한국 시민운동의 내적 동력과 발전 전망을 철저하게 점검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구상되었다.
이 특집에 착수하면서 우리는 한국 시민운동의 역동성을 안에서부터 제약한 도그마적 굴레들이 더 이상 묵수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압박 속에서 시민의 이해와 삶의 욕구가 거의 도외시됨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만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야 하고, 부패정치인과 사회권력들이 온갖 특혜를 누리고 불법을 자행함에도 불구하고 시민운동만은 법을 지켜야 하며, 관변단체들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온갖 지원을 누리는데도 시민운동만은 꼬박꼬박 세금을 바친 시민들의 푼돈으로 자립하라고 강요받아 왔다.
정치적 중립성, 법치주의적 합법성, 그리고 재정자립성은 분명히 시민들의 민주적 덕성에 해당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런 덕성들이 민주주의를 통해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실현하려는 시민들의 참여의지를 봉쇄하고 시민운동의 발전에 족쇄를 채우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시민운동은 단순 소박한 정치적 중립성을 넘어 정의와 자유 그리고 진리의 편에 서는 강한 당파성을 가지고 사회적 억압을 돌파해야 할 것이다(홍일표). ‘나쁜 법’이 억압의 또 다른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시민운동은 참여자가 처벌을 감수하는 위법을 감행하고서라도 그로 인해 얻게 될 ‘더 좋은 법’을 통해 우리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민주적 법치주의 정신, 시민불복종 운동의 정신으로 시민들의 희망을 걸고 분투할 것이다(이대훈). 그리고 국가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도 자발적으로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에, 우리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사회권력들 앞으로 당당하고도 투명하게 재정적 분배를 요청할 수 있다(하승수). 오늘날 나라의 안팎을 막론하고 공공성은 결코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민적, 성찰적 공공성의 차원과 그 광범한 발전 가능성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법적 신임보다도 상위에 위치하면서 국민적 신뢰를 창출하는 시민사회의 소통적 정당성, 자율적 소통관계와 소통능력, 정치적 투지를 확보하는 것이고, 바로 이 점이 한국시민사회가 정치사회에 대해 갖는 강점이다(조효제). 이런 메시지들을 전달하기 위해 ꡔ시민과세계ꡕ 편집진은 약간은 비장한 분위기에 잠기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히, 뒷걸음질치던 한국민주주의 이행의 시계가 12ㆍ19대선을 통해 정상궤도를 되찾았다. 멈추는가 했던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시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 시민운동의 세 도그마에 대한 반성은, 한층 발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국민적 역량을 ‘새로운 사회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차원에서 훨씬 전향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승리를 가져온 이 새로운 사회동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선거가 종료된 다음날 이미 우리의 의식은, 바라긴 했지만 예상은 할 수 없었던 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쪽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승리한 것은 노무현인가? 노무현이 마냥 ‘바보’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민주당에서 국민경선제가 제기되었을 때 호남향우회의 위력에 자신이 선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려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받아들인 게임의 규칙에 깨끗이 승복한 것말고도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벌써 나왔어야 할 직업정치가로서의 헌법적ㆍ정치적 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헌법 제8조)하여 국민이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국민이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입에 올리는 수사이다. 그러나 주인이 주인으로서 제구실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 즉 주인으로서 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는 일은 한국정치사에서 아직 어떤 정치인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판단을 강압하거나, 돈으로 사려고 하거나, 아니면 혹세무민의 지역감정으로 눈을 가리고 어둡게 만들었다. 바로 이렇게 주권자인 국민이 주인으로서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그르치게 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한국정치인들은 주인의 자리와 업무를 가로챈 민주주의의 찬탈자들인지 모른다. 그런데 노무현은 국민 위에서 마치 한국민주주의의 구원자처럼 떠오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민주주의 정치의 겸허한 전문가로서 국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인은 오직 주인 자신만이 구할 수 있었다.
제2차 민주화투쟁을 넘어서, 지난 50년간 이 사회를 지배한 ‘대한민국 구체제(앙시앵 레짐)’에 대항하여 ‘대한민국 2002년 체제’를 전망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포럼에서, 공통된 의견으로 확인된 것은 우리 국민이 더 이상 ‘박정희신드롬’의 포로가 된 냉전시대의 수동적 국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노무현을 선택한 국민은 짓밟힌 상식과 원칙, 신념과 윤리를 바로 세우기를 원하고, 좌절하지 않고, 정치적 패배자와 기꺼이 더불어 갈 줄 아는 탈냉전시대의 전혀 새로운 능동적 국민이다. 새로운 ‘정치적 상식’ 또는 양식을 지닌 정치인과 이와 더불어 한 능동적 국민의 동시적 출현, 이들의 협력에 의한 새 민주정부의 출범, 여기에 우리는 어떤 시대전환의 새 기운을 느껴도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시대패러다임의 전환 또는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흐름은 우리가 오랫동안 염원해 온 민주, 자주 그리고 평화의 세 물줄기가 모처럼 합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사실 이와 같은 개혁의 흐름은 15년 전 1987년 6월민주항쟁을 통해 확보했어야 마땅하다. 12ㆍ19선거혁명은 우리 국민이 15년 전 중도반절로 끝난 6월민주항쟁에서 이미 획득해야 했던 것, 즉 ‘지체된 전환’을 이제야 비로소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만회(挽回)혁명’ (nachholende Revolution)이다. 노무현정부에 대해 거는 국민의 기대가 큰 것은 당연하고, 새 정부는 그만큼 무거운 역사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만 집권 자체보다 그 이후가 더 험난할지 모른다. 노무현은 여전히 민주당의 둥지 속에 들어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여소야대의 소수파정권이며 재계와 보수언론에 둘러싸여 있다.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비롯한 대외적 난관 또한 매우 험난하다. 이미 김대중정부의 굴절경험을 학습한 바 있는 우리로서는 새 정부가 여러 난관들과 마주하여 과연 어떤 방책으로, 어떤 새로운 개혁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만약 이 정부가 ‘참여정부’임을 자임한다면, 그 참여의 정도와 질(質)이, 정치도 정치지만, 시민들의 삶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경제에서부터 체감되어야 할 것이다. 참여정치가 사회 귀족들 및 돈과 교양과 시간이 있는 사회 상층집단의 것으로 갇혀 있지 않고 명실상부한 시민적, 평민적 참여정치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참여경제, 경제적 삶에서의 시민적 능력부여(empowerment)를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난 IMF사태를 통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것이 ‘삶의 현장’에서 ‘나의 삶’을 보다 안정되고 풍족하게 해주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부담스러운 껍질에 지나지 않음을 체득하였다.
지구화 또는 세계화의 광풍과 힘있게 맞서는 투지(홍기빈)는 그 안에 휩쓸린 세계 각국의 내부역량에 따라 좌절과 희망의 다양한 파장을 낳았다. 경제강국이자 복지대국인 독일은 고용과 성장의 딜레마 속에서 시장과 국가의 새로운 접점을 찾아 어려운 항해를 진행하고 있다(박근갑). 대화와 타협정치의 전통을 총동원하여 사회세력들간의 합의를 얻어 이 딜레마를 나름대로 해결했다는 네덜란드는 저임금과 불안정고용을 일상적으로 강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경제활동의 동력이 가라앉을 수도 있는 침체요인을 안고 있다(송원근/전창환). 이제야 국부에 대해 민중이 참여하고 분배받을 권리를 확보할 기회를 갖게 된 브라질은 누적되어 온 외채의 압박 속에서 급속히 상승하는 기대수준의 적절한 조정점을 마련해야 하는 고민을 안고 있다(장석준).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비전은 우리에게는 기분 좋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파트너가 될 국가들이나 북한에게는 아직 그 내용조차 전달되지 않은 미개봉의 설계도이다(김영호). 그러나 이 모든 시도들이 생태적 환경요인을 부차적으로만 취급하는 발전국가모델의 사정권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 삶의 영구적인 기반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된다(구도완). 지구화의 이런 압박과 함께 김대중정부에서 수행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성과와 폐해를 모두 안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선택항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발전국가의 기본 전제인 끝없는 따라잡기 경쟁, 국익확장경쟁, GNP증가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 또는 자치와 소통능력의 증진으로 개혁경제의 가능성을 개척하자는 새로운 상상력은 국민통합과 국민참여를 내건 ‘참여정부’가 ‘참여경제’를 구상할 중요한 단초가 아닐까?(이병천)
노무현정권이 역대 어떤 선거 때보다 지역, 세대, 계층 모든 면에서 고른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그만큼 새 정부가 국민통합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리한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16대 대선에서 한국정치에 새로운 양상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손혁재) 그를 지지한 대표집단은 지역적으로 호남, 민주당이 대변하는 전통적인 보수기반, 386세대, 월드컵세대, 반이회창 연대의 관점에 선 급진민주주의 집단 등으로 구성된 상당히 이질적인 세력임이 드러난다. 이 이질적 집단을 묶어내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고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흐름을 확연히 만들어낸 것이 바로 386세대와 월드컵세대라고 한다면 이들이 대거 참여하여 극우수구세력의 역풍을 차단하는 데 기여한 촛불시위의 새로운 면모와 그 한계점(권혁범),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이 새로운 시대에 합류할 청소년들의 아비투스와 에토스를 적시하는 일(전효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2030 탈냉전개혁 세대의 결합에서 30대가 15년 전 6월항쟁의 만회에 대한 꿈으로 훨씬 더 치열했다면 20세대는 자율성, 다양성, 적극적인 삶의 향유에 대해 더 높은 감수성을 보였다. 그리고 20대가 주류를 이룬 붉은악마와 촛불시위는 민족적 자긍심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동질성을 보였지만 전자는 놀이 또는 축제이고 후자는 정치적 저항운동으로서 성격은 아주 달랐다.
이는 그만큼 20대의 성향이 유동적임을 말해 준다.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이전만 해도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욕구는 상당 부분 정몽준에 대한 지지로도 나타났었다. 이는 그만큼 월드컵세대의 정치적 상식 또는 판단력의 취약성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노 당선자는 이회창 후보에게 2.3% 차이로 승리했는데, 이 후보를 선택한 국민들 중에는 보수층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희생대중―정치적으로는 자각하지 못하고 즉자적으로 판단한―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시민사회가 아니라 유동성, 이질성, 그리고 긴장과 갈등이 가로지르고 있는 시민사회, 심지어 ‘시민사회 대 시민사회’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북핵위기와 미국의 비타협적 압박 등으로 표출된 외부요인도 새 정부의 개혁행보를 더디게 할 수 있는 중대한 장애물이 될 수 있는데, 노무현정부의 평화능력이 이제 국제적 실험대에 올라섰음은 명백하다. 우리가 이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새 정부의 난관이 단지 수구보수세력에게 포위된 정부라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지지기반의 이질성과 유동성 그리고 두 갈래 민주주의로 빠져들 수 있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 노선간의 비대칭성, 나아가 국내적 개혁의지와 국제적 압박요인의 상충성에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20세기 초두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포위된 상태에 있으며 갈 길이 멀고 깨지기 쉬운, 아직 어리고 약한 민주주의다. 이 단계에서 시민사회는 서두르지 않는 우회로를 통해(장은주) 차분히 서둘러 가는 상황의 속도를 뒤에서 낚아채는 반성적 안목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등장, 시민사회의 발전 그리고 공과 사의 분리라는 근대민주주의의 귀중한 그리고 불가피한 구성요소를 확인하고, 시민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과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 사이에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긴장을 인지함으로써 시민됨의 정체성을 다시 자각하고,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다원적인 참여민주주의의 상상력을 가꾸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샹탈 무페).
바로 이런 조건들 안에서 우리는 한국민주주의와 좋은 정부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정부는 선거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 실제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개혁을 입안하고 수행할 수 있는, ‘민주적이면서도 능력 있는 정부’를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최장집). 이런 점에서 노 당선자가 언젠가 했던 “노무현이 당선된다는 사실 하나가 이미 당선되고 나서 할 많은 일보다 더 크다”라는 말은 이제 집권자의 책임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다른 말, 즉 “노무현의 당선은 당선되고 나서 할 많은 일의 시작이다”라는 말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대중정부를 포함하여 민주정부로서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정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민주정부의 정통을 수립하지 못했다 함은 곧 우리가 늘 그곳으로 돌아가 우리의 공적 삶을 비추어볼 수 있는 정당한 공적 권위(authority)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 땅에서 민주공화국의 자율적 시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들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노무현정부가 민주정부의 새로운 공적 권위를 굳건히 정초한 정부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민주정부의 공적 권위의 정통을 세우는 일, 민주ㆍ자주ㆍ평화의 새로운 국민적 에토스와 이에 상응하는 새 질서를 수립하는 일, 이보다 더 중요한 노무현정부의 과제는 없어 보인다.
참여정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참여정부는 무늬만의 참여뿐인, 또 하나의 실패한 민주정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정통을 수립한, 최초로 성공한 민주정부가 될 것인가. 우리는 개혁정부가 권력에 안주하고 국민의 광범한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할 때, 어떻게 초라한 꼴로 퇴행하는가를 거듭거듭 보아왔다. 그리고 그 실패는 단지 해당 정권만이 아니라 국민과 대한민국의 불행으로 전가되었다. 출범을 앞두고 일어난 두 사건은 새 정부에 대한 큰 도전이다. 두산중공업 노조원 배달호씨의 분신과 불행한 죽음은 이후에 또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무수한,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역 화재사건과 같은 대참사는 앞으로도 반복될지 모른다. 수많은 배달호씨들이 분신보다 참여를 택하고, “무서워서 살 수 없어요” 하고 울부짖는 수많은 보통시민들이 “이제 안심하고 살 수 있어요” 하고 웃음지을 때, 비록 새 민주정부, ‘참여정부’는 성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부의 성공보다 더욱 귀중한 국민의 성공과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성공을 위한 초석을 깔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2003년 2월
공동편집인 이병천ㆍ홍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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