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3_현대의 역설과 다중의 자율적 삶
시민과세계/2003년 상반기 :
2003/03/01 00:02
조정환, 『지구제국』, 『21세기 스파르타쿠스』
현대사회의 역설과 대안모색 인류 전체의 집요하고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대의 과중한 짐들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은 채 우리의 어깨를 더욱 힘겹게 짓누르고 있다. 21세기로 갓 진입한 현재에도,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통한 첨단화와 더불어 빈곤과 궁핍함은 가일층 확산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부시행정부를 포함한) 모두가 평화를 최종목표로 삼는 그 한가운데서 전쟁의 위기감은 더욱 빠르게 고조되고 있으며, 그 어떤 국가권력도 부정하지 않는 자유와 인권에의 약속 이면에서 감시와 억압은 교묘하게 확장되고 있다. 풍요 속의 빈곤, 평화를 위한 전쟁, 감시받는 자유인들이라는 이 총체적 역설들이 획기적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 현재의 우리들 삶이 살맛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역설들에 진지하게 응답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삶을 냉철하게 모색하려는 노력을 조정환의 기획 ‘걸어가며 묻기’ 시리즈(총 5권 발간예정)에서 만날 수 있다.
이 기획의 1, 2부에 해당하는 『지구제국』과 『21세기 스파르타쿠스』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회의 상태를 깊이 있게 진단하고, 그것에 맞서는 지구 곳곳의 저항적 움직임들을 탐색하는 데 주된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그의 기획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속적으로 붕괴된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 어떤 대안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현재의 상황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다양한 반세계화 운동들과의 접속지점을 의미 있게 부각시키고 그것을 통해 대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전의 그 어떤 분석서보다도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적합하다.
‘정의’의 옷을 입은 제국적 내전
그는 자신의 저술에 핵심 기반을 제공했던 『제국』(Empire,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을 인용하면서, 현대의 자본주의가 “생산방식과 주권형태 모두에서 제국주의 시대와는 다른 커다란 변형을 겪고” 있으며, 그것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총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제국은 “영토적 권력중심이나 고정된 국경에 좌우되지 않으면서, 지구 전체를 자신의 확장하는 경계 속으로 통합”하며, 또한 확장에 필요한 외부를 가상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의 착취적 면모를 유지하는 ‘새로운 지배질서’를 개념화한 것이다. ‘가상적 외부의 창출’은 적을 설정하고 그것과의 적대를 확산시킴으로써 권력기반을 마련하는 전쟁으로 가시화되는데, 그런 점에서 냉전 이후의 “전쟁은 ‘이미 있는’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새로운 적을 만들어내는 전쟁”이며 “새로운 ‘정의’를 통해 특정 개인들이나 집단들 혹은 계급들에게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파편화시키며 외부화”하는 전쟁이다. 따라서 “자본이 전지구적 규모에서 현대적 형태의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수행하는 지구적 계급전쟁, 즉 지구적 내전”이라는 점에서, 1991년의 걸프전, 2001년 탈레반과의 전쟁, 최근 이라크에 대한 전쟁선포(그리고 북한에 대한 전쟁위협) 등은 “금융폭탄을 앞장세운 경제적 지구화의 군사적 뒷모습”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에게 금융폭탄과 집속탄은 양상을 달리하는 동질의 무기”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대의 조작된 폭력이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전쟁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다가와 우리 인간 삶의 무대를 “지옥으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다중에 기생하는 새로운 착취형태로서의 제국
그렇다면, 지배적 면모를 이제는 거의 완전하게 갖추게 된 이 ‘제국’적 질서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됐으며, 또 그것의 핵심적 특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문제를 풀어나갈 가장 직접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에 대한 조정환씨의 설명은 상당히 파격적이고 치밀한데, 이는 그동안 그가 지속적으로 작업해왔던 ‘이탈리아 아우또노미아 운동’과의 지적 결합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제국은 68혁명으로 표출된 위기를 자본이 대응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되었다. 달리 말해 “전후(戰後) 케인즈주의하에서 배제당하던 실업자, 학생, 여성, 빈민, 이민, 난민, 흑인 등 노동계급의 비보장층을 중심으로 자주관리와 노동거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가 제기되면서 케인즈주의 및 사민주의적 국가통치는 결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자본 재구조화정책(통화주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기초한 자본의 반혁명적 모색의 산물”이 바로 이 제국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동질적이었던 노동계급을 “축적에 연결되는 존재로, 혼성적이고 복수적인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 다중(Multitude)으로 전환”시켜 그들의 “유연성을 증폭시킨 상태에서 그 힘을 흡혈하는 기계장치”로 작동한다. 인간들의 상호 협동적 관계를 자본관계로 환원하는 이러한 제국적 질서는 “다중의 삶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통해, 그리고 그들간의 소통행위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자본중심적 변형”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의 소통이 자본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 다중의 삶이 자율적으로 구축되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이 착취의 존재조건”인 것이다.
자본에 포섭된 전통적 좌파와 그것을 넘어서기
이러한 착취상황이 인간의 삶을 점점 더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간다면, 새로운 대안은 그만큼 더 절박해진다. 그러나 조정환이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배에 대한 저항과 대안창출을 표상으로 갖는 오늘날의 좌파들이 자본에 포섭되었으며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한층 더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자본이 국가권력과 완전하게 연동되는 상황 속에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적 좌파는 “신자유주의에 영합하면서 그 속에서 복지구조를 유지하려는 타협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른바 제3의 길은 이러한 자본에 포섭된 좌파를 정확히 반영한다. 그렇다면 그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가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국가를 매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적 주체성을 현실화시키는 ‘다중들의 코뮨주의적 운동’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연합의 노선’이다. 즉 제국적 질서에 편입되기를 부단히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가치를 자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역설을 그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치유하는 방식이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복수적이고 구성적인 삶’이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그가 가장 인상 깊게 지켜봤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사건은, 1994년 벽두에 피어오른 “멕시코 치아빠스 원주민들의 봉기”였다.
스스로를 사빠띠스따들이라고 부르는 멕시코의 이 원주민들은 “전통적 좌파와는 달리 국가권력 장악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치를 주장했고 그것을 달성할 정치적 조건으로 민주주의, 정의, 자유를 제기”했는데, 그는 이들이 제기하는 새로움들, 즉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를 의미하는 민족(Nation), ‘분리주의를 거부하는 자치’에 대한 생각을 비롯하여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거부를 함축하는 네트워크적 조직론, 총보다 말을 더 중시하는 전술관, 국가권력 장악을 거부하면서 삶의 운영을 자율적으로 행사하는 공동체적 활력에 맡기려는 정치관, 리얼리즘과 버츄얼리즘이 혼재된 언어구사” 등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촉발될 상상력의 구심점을 마련해 준다.
한국에서의 새로운 권력배치와 끊임없는 되물음
그렇다면 전지구적 망을 연결하는 하나의 국가인 한국사회에 대해 그는 어떻게 보는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부 지식인들과 언론은 2003년이 국민들의 폭발적 지지를 바탕으로 한 새 대통령 노무현의 당선으로 희망에 차 있으며, 이제 6월항쟁의 주역들이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노무현의 당선으로 이제 ‘국민’은 ‘통치의 대상’에서 점차 ‘권력 구성의 주체’로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며, 군부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항거였던 6월항쟁의 파급력이 청와대를 접수해서 새로운 권력기반으로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노사정을 통한 국민적 합의”로 “보장노동자들과 점차 이들로부터 독립적으로 되고 있는 비보장노동자들의 분열을 지배의 핵심적 무기로 활용”했듯, ‘참여민주주의’로서의 ‘개혁의 정치’가 항상 희망만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항하던 민주주의적 투쟁의 힘들”은 이제 “신자유주의적 재편프로그램 내에 재배치ㆍ재활용”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글이 2002년 초에 출판되어서 새 정부를 직접 겨냥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은 ‘권위주의의 척결’ 속에서 정당화되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이 “지금 분열되어 있는 다중”들(즉 보장노동자와 비보장노동자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기반에 놓여 있는 것으로 오해되는 다중들)의 연합 속에서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진정 새로운 사회를 가능케 할 ‘다중의 새로운 연합’은 “다중의 보장층이 사용자 혹은 정부와의 합의를 추구하는 대신 다중의 비보장층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 전체에 대한 독립적 운영능력을 구축하는 방향”에서 달성될 것이며, “다중이 조직화와 투쟁에서뿐만 아니라 이성과 덕성에서 자신들의 자율적 활력을 얼마나 분명하고 강력하게 드러내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나는 ‘노무현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제시되는 그의 이러한 희망이 올 한해 그리고 21세기 전체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하며, 또 평화와 자유ㆍ민주주의를 보다 근본적으로 열망하는 다중의 함성 속에서 함께 울려퍼짐(즉 공명함)으로써 끊임없이 연대의 활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각주: 복잡함과 낯설음
이러한 그의 글을 읽게 될 독자가 가장 먼저 접하는 문제는 그가 구사하는 개념이 너무 난해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의 글을 읽기가 너무 어려워서 접근하기조차 힘들어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들이 마주하는 난해함은 아마도 ‘조정환씨와 그의 지적 작업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는 이들(예컨대 마르크스, 네그리와 하트, 들뢰즈와 가따리, 본펠드와 홀로웨이 등)’이 구사한 개념의 복잡함으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복잡하게 의도된 것인 ‘제국’ ‘다중’ ‘형식적 포섭’ ‘실질적 포섭’ ‘자본주의적 주권’ ‘계급재구성’ ‘코뮨주의’ 등 각 개념들이 거대한 기획 속에서 구성된 만큼 이해가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손쉬운 개념의 사용이, 그렇지 않았다면 통달하기 힘들고 의미조차 정확하지 못한 상투적인 언어로 연결되는 반면, 그가 구사하는 개념의 복잡함은 대상 자체가 갖는 복잡성에 기인하며 그만큼 집중력과 냉철함을 필요로 한 것으로 보인다.
난해함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문제는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낯설음이다. 일반적으로 낯선 것은 익숙한 것에 비해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다. 예컨대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이 모국어보다 훨씬 힘든 것처럼 말이다. 이는 경험의 반복, 관계의 반복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외국인에게 우리말로 쓰라고 타박하기보다 그들이 쓴 글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들고 오랜 시간을 바쳐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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