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기 엮음, 『지방분권 정책대안』 · 성경륭 외 지음, 『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 · 이기우 지음, 『지방분권과 시민참여』
언제부턴가 ‘분권’이라는 화두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지금부터 얘기할 세 권의 책은 이 화두를 풀어가려는 노력들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각각의 책은 ‘지방분권’이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지만 ‘정책대안’ ‘국가만들기’ ‘시민참여’라는 서로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아울러 이 책들이 가진 한계는 뭘까? 그 속내를 꼼꼼히 살피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I. 속내 들여다보기

가장 먼저 나온 책은 김형기가 엮은 『지방분권 정책대안』(한울아카데미, 2002년 5월 발간)이다. 이 책은 대구사회연구소가 주관한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을 모은 것이다. 책의 화두는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집중된 권력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지방분권 없이 지역혁신이 있을 수 없고 지역혁신 없이 지방분권이 제대로 추진될 수 없다”(13쪽)는 큰 줄기에 ‘지역혁신시스템’(regional innovation system)의 구축과 ‘내발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론’이 결합해 있다.

그런데 토론회라는 역동적인 이야기의 장을 제대로 엮어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발표문과 토론문이 휑하니 던져져 있을 뿐 심포지엄의 뜨거운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심포지엄을 정리한 대부분의 책이 그렇지만). 아쉬움을 강조하는 이유는 발표자와 토론자만이 아니라 발표자와 발표자의 글도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육위원회를 지방자치단체에 흡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3쪽)는 주장과 “실제적인 대표성을 갖는 독립형 의결기구화가 최종적 대안”(306쪽)이라는 주장은 서로 대립한다. 생산적인 토론이 되려면 이런 주장들이 서로 충돌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정책대안은 한 개인의 머리가 아니라 집단토론의 과정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 다음 책은 성경륭ㆍ박양호 등이 지은 『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나남출판, 2003년 2월 발간)이다. 이 책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지방분권과 지방분산’을 실현하기 위해 5년 동안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지자제의 내실화와 함께 중추관리기능의 지방분산, 일자리 등 주요 기회의 지방분산이 선행되어야 효과적 국토균형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음”(23쪽)을 주장한다. 그 실현방안은 ‘분산적 분권화’ ‘특화적 분권화’ ‘자치적 분권화’ ‘협동적 분권화’ ‘공생적 분권화’이다. 이 책은 ‘분업화’와 ‘성장거점’ ‘지역발전협약제도’를 주장하고, 특성화된 지역거점을 만들겠다는 발전주의 논리를 ‘아직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런 얘기는 작년 연말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던 내용들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정부가 지원한 프로젝트라 일부러 헐뜯는 게 아니다. 제목부터가 거북하다. ‘지방분권형 국가’라는 어중간한 말도 그렇지만, 도대체 ‘만들기’라는 말의 주체는 누구인가? “정책기능은 중앙정부가 맡고 집행기능은 지방정부가 분담하는 방향으로 전면적인 정부개혁을 시도”(9쪽)한다는 말을 볼 때, 이 책에서 주체는 여전히 중앙정부다. 물론 중앙정부가 법률을 손봐야 하지만 분권의 주체는 중앙이 아니라 지역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단점은 앞의 『지방분권 정책대안』과 4명의 지은이가 겹칠 뿐 아니라 그 내용도 거의 똑같다. 그리고 지은이들의 이름을 앞으로 빼서 하나의 일관된 글처럼 보이려 했지만, 지은이들의 관점은 아주 다르다. 예를 들어 제2장 김병준의 『우리나라에서의 분권화 개혁의 현황과 과제』는 앞뒤의 글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은 이기우의 『지방분권과 시민참여』(역사넷, 2003년 4월 발간)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지방분권과 함께 ‘시민참여’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지방정부와 시민사회단체에서 주민자치위원회 같은 미시단위까지 꼼꼼하게 시민참여를 살핀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공동체와 개인간, 상하관계에 있는 공동체 상호간의 역할분담(분권화)에 적용되는 원칙으로 ‘보충성의 원칙’(Sub- sidiaritsprinzip)”(56쪽)을 중요한 잣대로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단점은 지은이 스스로 얘기하듯이 “단행본으로 기획되고 집필된 것이 아니라 학계나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계기에 대응하기 위한 글들을 엮어”(9쪽)놓은 것이기에 글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고 중복되는 느낌도 받는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은 “사회 역할분담의 원리로서 보충성의 원칙”(99쪽)이 갖는 규범성이다.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개인에게 우선적인 역할을 부여하며,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에 사회단체(가족, 기업, 노조, 각종 결사체 등)에서 해결하도록 하고, 이것으로 해결이 어려운 경우에 비로소 지방정부가 관여한다”(57쪽). 이 규범은 지켜야 할 원칙이지만 막상 적용하려면 복잡한 현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당위적인 논리에 그치기 쉽다. 그리고 보충성의 원칙은 잘못 이해될 경우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우파의 논리로 변질될 수 있다.

II. 정당한, 너무나 정당한 논의

이 세 권의 책을 가지고 하나의 스펙트럼을 만들 수 있다. 『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는 “자치적 분권화란…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여 지자체의 권능을 강화하는 형태의 지방분권화”(26쪽)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이양’ ‘분산’이라는 한쪽 끝에 자리잡는다. 반면에 『지방분권과 시민참여』는 “시민참여는 자율적인 통제메커니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 점에서 시민참여는 아래로부터 지방공동체와 국가공동체를 변혁시키고 지키는 원동력”(244쪽)이라며 ‘참여’라는 다른 쪽 끝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중간(참여 쪽으로 치우친)에는 “지방분권 추진의 핵심은 권한의 이양”(271쪽)이라는 『지방분권 정책대안』이 자리잡는다.

지방이양촉진법이나 지방이양추진위원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은 여전히 중앙정부를 중심에 두는 논리 때문이다. 도대체 그 권력이 누구의 것인데 이양한다, 못한다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걸까? 그 기원을 따지면 시민이 국가에 권력을 ‘이양’한 것이지, 국가가 시민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게 아니다. 따라서 지금 얘기되는 ‘이양’이라는 말 자체는 잘못된 인식을 담고 있다. 이양이 아니라 분권이 바른말이고 분권은 참여를 전제한다. 여하튼 세 권의 책은 하나의 스펙트럼에서 각기 다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권의 책은 제도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행정운영체계와 재정체계의 개혁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원론적인 얘기가 나열된다. 분권형 행정체제, 지방재정확충과 자율권, 교육자치와 경찰자치 등이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 또 제시하는 대안도 원론적이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라는 제도들간에 조화로운 협동체제”(『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 129쪽),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은 풀뿌리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참여,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형성되는 연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생태라는 보편적 가치에 따라 추진되어야 한다”(『지방분권 정책대안』, 18쪽), “주민통제제도를 정비함에는 여러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항만 법률로 정하고 세세한 사항은 당해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 위임함으로써 다양성과 통일성을 조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지방분권과 시민참여』, 226쪽).

이런 주장들이 정당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너무나 정당한 주장이기에 자칫 현실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 정당함을 튼튼하게 받치고 걱정을 없애려면 현실과 밀착된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국 차원의 분권‘담론’만 있지 자기 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없다. 세 권의 책 어디에도 특정 지역에 대한 섬세한 분석, 지은이가 살고 있는 자기 동네에 대한 분석이 없다. 하지만 분권을 외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기 지역을 실제로 변화시킬 힘을 찾는 것이다.

물론 그런 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방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행정에 대한 주민들의 감시와 참여가 확대되고, 투명화가 이루어져야 한다”(『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 123쪽). “민주적 지방분권,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참가, 주권자로서의 주민의 책임과 학습이라는 정치문화의 향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지방분권 정책대안』, 40쪽). “시민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하여 어떻게 지역의 문제를 발견하고 이슈화할 것인지, 어떻게 주민을 시민으로 조직화하여 동원하며, 어떻게 정치적인 능력과 의지, 기술을 갖추게 할 것인지, 이를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등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지방분권과 시민참여』, 36쪽).

문제는 구체적인 고민조차 추상적인 담론으로만 제시된다는 점이다.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담론은 힘을 가지지 못한다. 이제 이론은 추상화된 담론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에서 나와야 한다.

III. 지피지기(知彼知己)해야 백전백승(百戰百勝)

사실 지은이들이 주장하는 제도적인 대안은 서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누가 그 제도를 실현하고 운용하며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이 더 중요하다. 각각의 책은 새로운 구호들을 만들어낸다. “분권ㆍ분산을 위한 광범위한 개혁연합, 모든 민주개혁 진영의 대동단결”(『지방분권형 국가만들기』, 87쪽)과 “주민참여에 기초한 협력주의 발전모델”(같은 책, 281쪽), “지역교육의 혁신을, 지역문화의 혁신을, 지역정치의 혁신을”(『지방분권 정책대안』, 21쪽), “시민사회와 학계, 지방정치인은 물론 변화의 물결을 느끼고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중앙정치인과 중앙관료 및 중앙언론인의 동참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지방분권과 시민참여』, 291쪽).

하지만 대동단결, 혁신, 세몰이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주민들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과 정보를 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주민이 자치의 주체로 우뚝 서지 않는 한 변화는 먼 훗날의 일일 뿐이다. 그리고 지역과 더 밀착한 운동에 대한 고민은 이미 드러나 있는 자원만이 아니라 새로운 자원을 발굴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즉 시민단체라는 이름을 붙인 곳만이 아니라 생활협동조합이나 시민학교, 지역화폐, 각종 공동체운동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게다가 세력을 모은다고 해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싸워야 할 상대에 대한 파악도 필요하다. 중앙만이 아니라 지역에도 무수히 많은 기득권세력들이 있다. 단순히 ‘토호’라는 말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세력들, 혁신세력만큼이나 서로 끈끈하게 연결된 세력들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분권과 자치를 실현하려면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대처방법이 필요하다.

또 한 가지 드는 의문은 지방분권이 실현되면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좋고 편한 쪽으로 풀려갈 것인가이다. 내가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이 가까워진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 권력을 감시하고 때론 직접 그 권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불편함’을 전제한다. 게다가 지방분권은 단 한번의 짧은 실험으로 해결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긴 안목을 가지고 수많은 실험을 거치는 ‘시행착오’를 전제한다. 이런 ‘불편함’과 ‘시행착오’를 얘기하지 않고 모든 게 알아서 잘될 것이라 주장하는 ‘분권만능주의’는 단선적인 진보의 논리만큼 위험하다.

각각의 책이 함께 가지는 가장 치명적인 한계는 중앙집중화의 원인을 잘못된 국가정책에서만 찾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고 재원을 나누며 지역정치를 활성화시키면 분권과 자치가 완성되리라 본다. 하지만 분권은 국가에 대한 포위와 공격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국가관료만이 아니라 자본도 중앙집중화에서 많은 이득을 봤다.

국토의 불균등발전이나 내부식민지화는 국가권력만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관계에도 영향을 받는다(하비David Harvey나 소자Edward Soja의 논의를 보라). 사실 중앙집중화는 근대국가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강화되었고 대도시도 산업생산과 자본축적을 위한 핵심장소로 등장했다. 사실 자본주의는 집중과 확장이라는 두 가지 운동법칙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에 국가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지방 분권ㆍ자치를 위한 논의는 자본에 대한 분석을 담아야 한다. 재벌이 한국의 기형적인 발전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은 전국민이 아는 ‘상식’ 아닌가? 그런데 왜 지방분권을 외치는 목소리에선 그런 상식을 찾아볼 수 없을까? 국가와 자본의 카르텔을 깰 수 있을 때 분권과 자치는 가능하다.

지방분권론의 ‘탈계급성’은 이른바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2002년 스미스(S. S. Smith)와 쿨리니치(J. Kulynych)는 『사회적일 수 있지만 왜 자본인가』(It may be social, but Why is it capital?, Politics & Society, vol. 30/no. 1, pp. 149~86)에서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언어를 통한 정치적인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자본이 많은 지역을 황폐화하고 사회네트워크(바로 사회적 자본이 가리키는)를 붕괴시켰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게다가 자본이 가져온 사회적 불평등을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로 막겠다는 발상의 아이러니. 또 사회적 자본은 민주주의에서의 토론과 참여가 경쟁이라는 시장의 기능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감춘다.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을 쓸수록 우리의 인식과 분석은 제한된다. 그래서 지은이들은 사회적 자본 대신에 사회적 역량(social capacity)이라는 개념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고루하게 ‘계급’과 ‘자본’을 얘기하느냐며 타박할지 모르나 우리 현실은 아직 계급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계급간의 모순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갈등의 밑을 떠받치고 있다. 따라서 지방분권에 관한 논의도 공간지리학, 정치경제학으로부터 계급과 자본에 대한 분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 권의 책은 지방분권에 관한 논의가 현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담론의 수준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수준은 지방자치의 역사가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론은 더욱더 현실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론은 괜스레 바람에 떠다니게 된다.

하승우 / 경희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수료, 경희대학교 강사
2003/09/05 00:00 2003/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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