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1_제국논쟁과 우리 시대의 제국주의 : 관념적 급진주의에서 비판적 역사주의로
시민과세계/2004년 상반기 :
2004/03/01 00:01
M. Hardt and A. Negri, Empire, G. Balakrishnan, Debating Empire, L. Panitch and C. Leys eds., The New Imperial Challenge
냉전 이후 오늘의 세계는 혼돈에 휩싸여 있다. 현실뿐만 아니라 이론 또한 혼돈상태다. 사방에서 유행처럼 세상읽기 또는 세상보기 기획을 제공하고 있지만, 우리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미래의 희망의 창이 어디에서 열리고 있는지 방향타를 잡기가 실로 어렵다. 낡은 이론은 죽었지만 새로운 이론은 백가쟁명 상태에 있다. 그러다 보니 학계 일각에서 『스모그』(SMOG)라는 별난 이름의 잡지까지 창간한 것도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지금 미국은 노골적으로 힘이 곧 정의라고 설쳐대면서 그 야만적인 힘자랑과 독선, 오만함이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렇지만 이같은 최강 ‘불량제국’의 압제와 반동적 강력함은 의외로 그 내실의 허약함과 초라함의 표현일지 모른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아메리카제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메리카 일극 패권하의 신세계질서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체제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미국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곧 기울려고 하는 최후의 조짐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고 정반대로 미국은 새 피를 수혈받아 더욱 승승장구할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네그리ㆍ하트가 주장하는바, 탈제국주의ㆍ탈국민국가ㆍ탈중심적인 ‘제국’의 신세계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 화려한 거대담론들의 빈틈에 사태의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일까. 과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회세력, 국민국가, 그리고 세계체제간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또 그 속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입각점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네그리ㆍ하트의 『제국』은 우리 시대의 핵심 문제를 다루고 있고 제목도 매력적이다. 2000년에 책이 나오자마자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제국』은 9ㆍ11 이후 시기를 살고 있는 보통시민의 상식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서평자 개인의 경우를 말하면 프랑스의 조절이론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네그리에 대해 얼마간 사전지식을 갖게 되었고, 그의 주저 『맑스를 넘어선 맑스』도 접하게 되었다. 네그리는 분명 맑스주의의 역사에서 뚜렷한 한 모서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자율주의 정치철학,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하 『요강』)을 중심으로 주체성의 차원을 도입한 그의 새로운 맑스해석, 화석화된 정통파 국가독점 자본주의론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의 현대 자본주의론, 그리고 다중을 중심으로 하는 주체론 등은 분명 좌파의 쇄신을 위해 기여하는 바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맑스와 맑스주의, 그리고 그 너머를 보는 필자의 견해는 네그리와는 매우 다르다. 필자는 그의 맑스주의는 사상사의 큰 구도로 볼 때 반헤겔적 맑스주의의 계보에 속한다고 판단한다. 네그리의 자율주의 맑스주의는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ㆍ신레닌주의적 맑스주의와 대립적이면서도, 반헤겔의 측면에 관한 한 흐름을 같이한다. 따라서 네그리에게서는 맑스의 휴머니즘, 헤겔을 경유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맑스의 급진적 휴머니즘의 유산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요강』에서 『자본론』 이상을 발견한 그의 ꡔ맑스를 넘어선 맑스ꡕ는 분명 긍정적이고 참신한 데가 있지만, 맑스의 급진적 휴머니즘과 한 세트를 이루고 있는 사물화 또는 물상화 비판으로서의 정치경제(학) 비판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의 자율주의 맑스주의는 필자가 서구 맑스주의의 최량의 유산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는 루카치와 부다페스트학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과 하버마스, 그람시의 실천의 철학과 헤게모니론의 흐름들―물론 서로 중요한 차이가 있다―의 크기보다 작아 보인다. 그리고 또 자율주의 철학의 원조는 아마 네그리 이전에 카스토리아디스(C. Castoriadis)라고 해야 마땅할 것인데, 그의 철학은 유토피아적 급진민주주의론의 강점과 함께 다원성과 제도의 결핍이라는 약점을 지적받았다. 이 지점이 우리가 아렌트에게 주목하는 한 가지 이유가 되지만, 네그리의 자율주의 철학 또한 이 결핍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의문스럽다.
그렇지만 당면 문제는 『맑스를 넘어선 맑스』가 아니라 『제국』이다. 『제국』은 네그리의 이전 저작과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거대담론을 담고 있다. 솔직히 필자는 『제국』을 접하고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국주의와 국민국가의 시대가 끝났고 제국의 시대가 왔다는 기본 논지에 동의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경험적 근거가 빈약한 관념적 사고실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주목한다. 국내외에 열렬한 지지자가 존재하고 있고, 가까운 일본만 보아도 도쿄대의 강상중 같은 무게 있는 인물이 의외로 『제국』에 호의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帝國」について』, 『情况』 4/5; 『세계화의 원근법』, 이산). 강상중은 윤건차와 더불어 근래 한국지식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인데, 민족주의에 대한 견해는 크게 대조적이다. 강상중이 민족주의의 위험성과 ‘국체민족주의’의 비판에 모든 에너지를 쏟으면서 탈민족주의로 나아가는 데 반해, 윤건차는 천황제 국가민족주의와 네오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재일’이라는 마이너러티의 입지점 위에서 우리의 열린 아이덴티티를 구성케 하는 삶의 지평으로서 민족과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 여하튼 『제국』은 분명 문제의 저작이다.
혼란스러울 때, 이런저런 낡은 담론들의 반사적 대립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스모그를 걷는 데 도움을 준다. 최근 New Left Review에서 제공한 “제국논쟁”은 네그리ㆍ하트의 『제국』에 대해 범좌파진영 각계인사들의 견해를 묶어놓은 것이다. 이들이 한데 모여 공개토론회를 연 것은 아니고 여러 지면에서 발표되었던 것을 책으로 묶었다. 편집자는 물론이고 모두 11명의 논평자 중 『제국』에 호의적인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다. 통상의 논쟁서라면 있음직한, 이들 비판에 대한 네그리ㆍ하트의 답변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원제목은 “제국논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제국비판”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편자 자신이 New Left Review 지면에 『제국』에 비판적인 글을 쓴 바 있다(이 책 외에 제국논쟁에 대한 간략한 정리글로는 “Summary of the Empire Debate”[http://info.interactivist.net]가 도움이 된다).
『제국』은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가. 제국이라는 말, 다중이라는 말, 이 두 가지 개념이 『제국』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제국주의는 끝났고 국민국가시대도 끝났고 세계체제에는 권력중심도, 중심과 주변도 없다. 그래서 세계는 ‘매끄러운 공간’(smooth space)이 되었다. 제국주의와는 전혀 다른 제국의 신시대, 즉 단일한 지배논리하에 통합된 전지구적 주권형태가 형성되었다(기본 가설). 제국은 결코 퇴보가 아니다. 그 반대로 유례없는 해방의 가능성을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환영해야 마땅하다. 제국의 바깥은 없다. 비물질적 노동이 중심이 되고 생산과 재생산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포스트포드주의 정보자본주의 시대에 제국 안에서 제국에 대항하여 대안제국을 건설할 잠재적 능력을 가진 주체는 새로운, 다원적 구성을 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이자 아무런 정치적 제도와 조직의 매개를 갖지 않은 다중(多衆, multitude)이다.
과연 『제국』의 시대는 왔는가. 미국은 네그리ㆍ하트적 의미의 포스트제국주의적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제국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지 않는가. 여전히 국민국가도 최강권력도 엄존하고 있지 않는가. 네그리ㆍ하트는 미국이 최강권력임을, 국민국가가 실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은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한 제국주의적 권력중심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에게서 오늘의 미국은 오래 전 미국 건국헌법의 이념으로 제시된 공화국으로서의 미국이며, 고대 로마제국과 닮은꼴―비유가 아니라 개념으로서―의 미국이다. 그래서 이들은 미국이 전쟁을 감행해도 보편적 권리의 이름을 걸고 한다는 것을 아주 중시한다. 네그리ㆍ하트는 프랑스혁명-사회국가-유럽통합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계몽의 길과 새로운 가능성을 옹호하는 통상의 반미적 유럽 신좌파와는 달리, 오히려 미국이 새 문명의 프런티어에 서 있다고 보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고 국민국가는 실존하지만 세계화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쇠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우선적인 문제다. 견해에 따라서는 『제국』의 제국주권론은 머리 아픈 담론공간이 아니라 9ㆍ11과 미국의 야만적인 정책이 드러낸 냉정한 현실에 의해 쉽게 무효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국』은 9ㆍ11 이전 2000년에 미국에서 영문판이 출간되었고 2년 후에 나온 이탈리아판에도 9ㆍ11와 관련하여 새 장이 추가된 것이 없다. 그런데 네그리 자신은 9ㆍ11테러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제국의 경향에 반하는 퇴행적ㆍ제국주의적 반격”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제국주의적 부시를 제국으로 가는 미국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The Imperialist Backlash on Empire,” Antonio Negri interviewed by Ida Dominijanni, translated by Arianna Bove and Erik Empson, Interactivist Info Exchange, http://slash.autonomedia.org). 과연 그게 답변이 될까.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미국은 마치 악몽 속의 얼굴처럼 『제국』의 지면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위협하고 있어 부단히 억눌러야 한다”(Mertes, p. 147. 이하 전부 Debating Empire에서 인용한 페이지이므로 책명은 생략함).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평화에 집착하는 제국이 아니라 그 반테제인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가 아닌가(Wood). 또한 미국의 헌법적 기원―이것이 갖는 적극적 의미에 대해서는 일찍이 토크빌과 아렌트도 주목한 바 있지만―이 지금 미국패권의 성격이 이전의 제국들과 질적으로 다름을 입증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기원과 현실의 갭도 문제지만, 늘 지적되고 있는 것인데 미국헌법이 프랑스혁명에 비해 유산자의 특권을 훨씬 옹호하고 인민주권을 크게 제한하고 있는 측면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Balakrishnan, Rustin, Wood).
『제국』은 국민국가의 세계가 지양되고 있다고 보지만, 그 반대로 오늘의 세계는 국민국가의 세계다. 『제국』은 주권의 운동과 경제적 운동이 같이 나아간다고, 그래서 경제가 지구화되면 될수록 주권도 지구화된다는 전제에 서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경제와 주권 사이에는 명백한 괴리가 존재한다. 이 괴리가 자본이 국경을 넘어 운동하게 하는 것이지만, 또한 자본의 범세계적 운동은 국민국가의 소멸이 아니라 더욱더 주권국가(들)의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제국은 국민국가와 동맹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Wood, pp. 65~69). 중심과 주변, 남측과 북측의 분할이 소멸하고 있다는 『제국』의 주장 또한 명백한 오류이다(Arrighi).
그런데 왜 네그리ㆍ하트는 좌파가 제국을 환영해야 한다고 하는가. 성질이 다른, 꼭 같이 묶일 필요는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들은 근본적으로 국가든 민족이든 자본 또는 시장이든 경계가 무너지고 큰 단위로 통합되면 될수록 문명화되는 것으로, 모두 해방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한편 이와 달리 이들에게서는 다중이 제국을 낳았다는 생각, 제국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렇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문명화론(『공산당선언』이 대표적이다)이나 식민지근대화=제국주의문명화론(인도론이 대표적이다)의 사고를 답습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통합은 획일화, 그래서 차이의 소멸을 의미할 수 있고, 유럽중심주의의 퇴행적 복구를 가져올 수 있다(Seth, pp. 44~45). 브레난에 따르면 앞의 주장은 우파에서 흔히 보는 주장이기 때문에 후자야말로 『제국』에 고유한 주장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주장은 전혀 입증되고 있지 않다. 단지 국가를 억압과, 탈규제를 해방과, 국민국가의 몰락을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와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Brennan, pp. 106~107). 지구적 주권을 상대로 하는 지구적 투쟁만이 능사인가? 큰 것도 좋지만 작은 것이―삶의 규모뿐만 아니라 투쟁의 규모도―못지않게 아름다울 수 있다. 네그리ㆍ하트의 견해와는 달리 국지적ㆍ국민적 투쟁은 이전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이는 글로벌자본이 두루 편만한 권력이 아니라 국민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Wood). 세계시민연대도 이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나노(nano) 수준의 연대형성과정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Mertes).
그런데 네그리ㆍ하트는 제국에 대항하는, 가히 스파르타쿠스적인 새로운 구성권력을 말하고 있지만, 맥빠지게도 다중론에서 가장 중요할 수 있는, 이행을 위한 주체―정치적 주체―형성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논의가 박약하다. 이들은 이 문제를 제기하기는 한다.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다중이 어떻게 적극적인 정치적 권력으로 조직되고 재정의되는가 하는 것이다―다중운동들의 자생성 안에서 그리고 그 자생성을 넘어서 구성적인 정치경향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그리고 밝힐) 수 있는가―다중의 행동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될 수 있을까”(안토니오 네그리ㆍ마이클 하트,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503~505쪽). 그러나 즉자적 주체에서 대자적 주체로의 주체성의 재구성, 또는 반성적 존재전환의 의제는 철학과 비판사회 이론, 사회운동의 전 역사를 두루두루 괴롭혀온 정말 지난한 고민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착실한 논의 없이 어떻게 대항헤게모니적 주체론이 가능할까(PanitchㆍGindin, p. 57). 네그리ㆍ하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오해(Rustin), 전도된 목적론적 주체관(Brennan), 미국노동자의 실상에 대한 오해(PanitchㆍGindin), 대중을 원자화시키는 미국사회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몰이해(Bull), 그리고 정치적ㆍ전략적 사고의 부재(Callinicos) 등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덧붙인다면 서평자가 생각할 때, 이 문제 다시 말해 다중이 ‘다중-시민’(multitude-citizen)이라는 정치적 주체로 재구성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탈리아가 우리에게 물려준 훌륭한 유산은 네그리보다는, 그람시 그리고 하버마스 및 아렌트에게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정치학자 틸리는 가장 짧은 글을 썼는데, 그는 “이들이 동시대 변화의 구체적 리얼리티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구름과 안개 짙은 바다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p. 26)고 힐난한다. 경험적 근거박약과 관련해서는 아리기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하트와 네그리가 메타포에 크게 의존하고 경험적 증거를 체계적으로 회피하는 데 기인한다”(p. 32). 이론 이전의 초보적인 문제에 대한 이 비판은 네그리ㆍ하트의 이론주의의 맹점을 잘 짚은 비판일 수 있다. 무비판적 경험주의도 문제지만, 몰역사적인 관념적 급진주의도 못지않게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의 “제국논쟁”의 비판자들의 견해가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논자들의 입각점도 각기 다르다. 가끔 네그리-캘리니코스의 대립이 부각되기도 하지만, 결코 캘리니코스가 네그리를 추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 비판을 통해서 적어도 『제국』의 주요한 허점은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상이한 관점 속에서도 비판자들의 논평에 한 가지 공통된 요소를 끌어낸다면 『제국』의 거대이론이 너무 리얼리티가 약한 추상적 지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서평자로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네그리ㆍ하트가 제도―국가를 포함하여―를 일방적으로 억압적인 것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년 전 자율주의와 조절이론의 논쟁에서 주요 논점으로 부각되기도 했는데, 제도에 대한 자율주의의 관점은 아주 극단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제도적 매개와 그에 따른 불투명을 일방적으로 억압적이라 간주하며, 인간들간의 교류관계를 매개하고 자유를 보장하며 지속케 하는 제도와 질서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의 지상의 삶에 있어서 제도는 늘 억압과 해방의 양면성을 내포하고, 제도화는 불가피하다. 해방사회도 제도 없는 투명한 사회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망각할 때 자율주의는 의도와는 반대로 자율을 성취하기는커녕 자기파괴적인 설계주의적 합리주의와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통합과 규모의 확대는 그에 상응하는 문명적 제도의 발전과 같이 가지 않으면 ‘허울뿐인 세계화’가 될 수 있다. 차이를 보장할 수 없음은 물론, 폭력과 위험, 익명의 권력의 힘을 폭증시킬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지구주의, 세계시민주의조차도 소박하게 하나로 통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다중심적인 사고가 요구된다(아렌트). 하나로 뭉쳐진 지구사회, 이것은 해방이 아니라 미증유의 공포와 야만의 세상이 될 수 있다.
비판자들이 『제국』의 허점을 잘 지적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시대에 대한 대안적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둘은 다른 문제다. 네그리ㆍ하트는 제국주의는 끝났고 제국이 도래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극복을 하려면 결국 우리 시대 새로운 제국주의론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앞의 비판들에서는 제국주의라는 말은 드물게 나온다. 그중 우드가 이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적확한 이론적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제국주의론은 이론적 빈곤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야 한다. 혹시 사람들은 네그리ㆍ하트적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제국주의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늘의 제국주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고전적 제국주의론으로 충분한가. 패니치ㆍ레이스가 편집한 『새로운 제국의 도전』(Socialist Register 2004)은 바로 이 이론적 도전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패니치는 세계화에 의해 국민국가의 자취가 흐릿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위에 초국적 민주주의의 수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이들이 국가문제를 회피하고 국가를 건너뛰고(bypassing) 있으며 국내투쟁과 국제투쟁의 이항대립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국가의 전환과 민주적 재구성(transforming)론을 제시한 바 있다. 이론적 계보로는 풀란차스의 국가론과 현대자본주의론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이다. 콕스(R. W. Cox)가 제창한 비판적 역사주의와 네오그람시언 국제정치경제학파와도 밀접한 이론적 연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새로운 제국의 도전』 작업은 2001년 초부터 준비되었으며 후속작업으로 『새로운 제국의 질서』(Socialist Register 2005)가 예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권두논문 격인 패니치ㆍ긴딘의 글을 중심으로 이들의 기본시각에 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이들의 이론구성에서 핵심적인 사고는 자본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경향이지만 이 내재적 경향이 반드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확장적 경향을 현실역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흔히 범하는 오류이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를 추상적 경제법칙의 단순한 도출물인 것처럼, 역사를 이론화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이론에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오히려 이론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글로벌자본주의 질서는 항상 불확정적인(contingent) 사회적 구성물이며, 역사적으로 특정한 프로젝트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자본주의의 세계화경향의 현실화 또는 좌절은 결코 국가들의 역할과 분리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국가는 늘 역사적 자본주의의 확장과정의 기본적 구성요소였으며, 우리 시대에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은 『세계화와 국가』(Socialist Register 1994) 이래 패니치가 표명한 중요한 관점이다. 이러한 생각을 따른다면 월러스틴이 자본주의를 시초부터 세계체제로 보면서 ‘역사적 자본주의’를 말했지만, 이는 여전히 추상적인 ‘이론적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서서 고전적 제국주의론에 대한 비판이 시도된다. 이들은 고전제국주의론의 결함으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고전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적 단계와 위기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제국주의를 이른바 독점 또는 금융 자본주의 단계에 도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점령과 식민지병합의 역사 그리고 ‘비공식 제국’의 확대는 이 경제적 단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수출과 상품수출을 증대시킨 것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새 단계에 들어가서라기보다, 경쟁압력의 심화와 그에 따라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전략과 능력에 기인한다. 둘째, 고전론은 선진자본주의국에서 발전하고 있는 두 가지 주요한 새로운 경향, 즉 대중의 소비 가능성이 고갈되는 것이 아니라 증대하고 있는 것과 지속적 경쟁 및 기술발전으로 국내적 축적의 새로운 전망이 열리고 있는 것, 그리하여 단지 자본수출만이 아니라 국내시장에서 자본의 심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고전이론가들이 본 것은 소비패턴, 금융의 흐름, 경쟁, 해외직접투자 그리고 자본의 국제화와 연관된 모순의 조절능력 등 여러 면에서 자본주의의 최고―최후는 물론이고―단계가 아니라 비교적 초기의 단계였다. 셋째, 고전이론은 국가에 대해 환원주의적이고 도구주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론은 경제적 단계론이나 위기론에서 직접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자본주의국가론의 확장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은 제국주의간 경쟁(inter-imperial rivalry)만이 아니라 한 제국국가에 의한 경쟁국에 대한 구조적 침투를 포괄해야 한다. 그래서 헤게모니와 경쟁, 상호 의존과 침투 그리고 전체 체제의 내적 모순을 잘 분석해야 한다.
이들은 이러한 시각 위에서 미국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책에는 패니치ㆍ긴딘의 글 말고도 이와 긴밀한, 이론적 보완관계에 있는 아마드(A. Ahmad)와 앨보(G. Albo)의 글을 비롯하여 여러 각도에서 아메리카제국을 파헤치고 있는 이론적ㆍ경험적ㆍ정세적 글이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견해가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사울(J. S. Saul)은 패니치의 국가론에 대해 꽤 비판적인 편이다.
『새로운 제국의 도전』이 제시하고 있는 신제국주의론이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패니치의 국가론과 관련해서는 ‘안에서 밖으로’의 접근이 역사적 세계질서의 맥락과 이것이 국내 정치경제에 가하는 제약을 덜 고려하고 있다는 구갑우의 비판이 있다(『지구적 통치와 국가형태』, 『경제와사회』 45호, 2000년 봄). 그리고 이 결함은 풀란차스의 결함으로까지 소급된다. 구갑우가 제기한 쟁점은, 우리가 보기에 ‘국가의 국제화’ 테제를 둘러싼 패니치와 콕스 간의 쟁점이기도 하다. 양자는 국가를 건너뛰는 논의를 비판하는 국가전환론에서는 견해를 같이하지만, ‘국가의 국제화’를 둘러싸고 ‘안에서 밖으로’(outside-in) 대 ‘밖에서 안으로’(inside-out)의 시각차이를 보인다. 패니치의 국가론의 강점과 문제점이 신제국주의론의 구성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점이다.
제국주의는 끝났고 제국의 신시대가 도래했다는 네그리ㆍ하트의 화살은 빗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불투명성의 시대에 자욱한 안개를 걷어 내기보다는 더 짙게 한 것 같다. 그렇다고 고전마르크스주의 전통 또는 정통으로 돌아가서 우리 시대 제국주의의 도전에 대한 이론적 응답을 찾으려는 것도 아주 게으른 사고다. 우리 시대 역사적 제국주의론을 새로이 구성하는 수고로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 비켜갈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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