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빈 켈리,도미니크 켈리,앤드루 갬블 외 지음, <참여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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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3월 영국 셰필드대학 정치경제연구소에서 “참여자본주의: 맹목적 주장인가, 최상의 희망인가”라는 의제를 놓고 국내외에서 학자 및 전문가 350여 명이 참가하여 국제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이 책은 당시 발표된 논문들에 새로운 기고문들을 추가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의 원제 Stakeholder Capitalism은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 ism)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통 ‘이해관계자ㆍ이해당사자 자본주의’로 번역되고 있다. 옮긴이는 Stakeholder Capitalism이 원래 온정주의적 기업의 지배구조를 분석대상으로 했던 데서 훨씬 범위가 넓어져 구성원의 수평적인 그리고 능동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새로운 경제운영의 기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수준으로 확대된 점을 고려하여 ‘참여자본주의’라고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참여자본주의 개념은 명백히 역사적 산물이다. 우선 일국적 차원에서 볼 때 1996년 블레어 노동당정부는 집권 당시 직면했던 높은 실업률과 반복되는 노사갈등, 엄청난 재정적자, 신규투자 격감, 자본의 해외이탈 등 이른바 고질적인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한 구조적 처방이 필요했다. 블레어의 이론적 참모 격인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 현실정책적 관점에서 좀더 구체화된 것이 참여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계사적 차원에서 보면,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주도한 주주이익중심의 주주자본주의가 20세기 말 소련 및 동유럽권의 붕괴로 그 우월성을 과시했지만 동시에 글로벌 스탠더드로 수립되는 과정에서 초래된 각종 폐단에 맞서려는 세계사적 움직임이 있었다. 참여자본주의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바로 이러한 특정 제도의 전일화 시도에 대한 각국들의 다양한 제도적 탐색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영국을 대상으로 논의하고 있지만 동시에 몇 가지 측면에서는 그를 넘어서는, 예컨대 ‘공동체’의 본질 등과 관련한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이 책의 원저서가 이미 1997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서 역시 2003년 7월에 출간되어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책을 다시금 만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평자는 마르크스의 공동체에 관한 관점에 기대어 참여자본주의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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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 외견상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대립구도를 드러낸다. 이는 현시대의 좌파는 정통적인 좌파가 지향해왔던 ‘평등’ 대신에 ‘참여’(inclusion)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는, 참여자본주의의 대표논객인 허튼의 주장(28쪽)에서 잘 드러난다. 자본시장의 높은 유동성, 분산화된 소유구조, 시장의 규제완화 등 자유방임주의 원리에 따른 과도한 이윤동기가 초래한 사회적 불안정성, 즉 ‘30 : 30 : 40의 사회’(실업상태의 30%, 주변적 상태 30%, 안정적 승자계층 40%)에서(31쪽) 배제된 60%를 어떻게 끌어안느냐의 문제는 공동체의 존립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른바 ‘20 : 80의 사회’ 그리고 한국에서 최근에 화두로 떠오른 ‘양극화’현상 등에 대한 우려는 결국 공동체의 다수가 배제된 채 존재하는 공동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다름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열쇠말 ‘참여’의 문제제기는 발본적인 데가 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비판요강>(Gruntrisse)에서 “두말할 나위 없이 공동체 자체가 그렇듯이 언어 역시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 규칙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반대로 언어의 부재는 사회적 혹은 공동체적 존재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흔히 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먼저냐 개인이 먼저냐 하는 우선성 논쟁은 본질적으로 범주오류이다. 개인은 공동체적 존재로 혹은 사회적 존재로 실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인간이라는 실존적 지위, 즉 유적 존재의의를 본원적으로 갖지 못한다. 개인주의의 우선성에 근거하여 흔히 제시되는 로빈슨 크루소는 따라서 공동체에 대립되는 존재로서의 개인이 아니다. 그에게는 공동체적 규칙체계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고 그 속에서만 그는 유적 존재로서 한 개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제 어떤 공동체냐 하는 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공동체와 성원 간의 관계에 대한 유형화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유형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소유(property)에서 찾는다. 이는 역사유물론적 방법론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경제결정론적 관념을 뛰어넘는 본질적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소유란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로서 맺는 관계와 같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는 어느 개인의 산물로서의 언어란 불가능한 것인데 이는 소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이 책, 특히 제12장에서 기업의 소유와 관련하여 근본적인 문제로서 ‘누구의 소유인가’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존 케이의 물음은 바로 소유의 공동체적 본성이라는 측면의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다. 존 케이는 회사란 본질적으로 “체제와 관행의 집합이고 유기체 구조”이며 “많은 개인과 집단, 즉 고객, 주주, 임대인, 종사자, 이사들이 회사와 관련된 권리와 의무를 갖”지만 “어떤 권리, 의무관계도 소유권이라고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도 영국통신이나 마크&스펜서를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또 소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225~26쪽).

그렇다고 이 책이 개인의 소유권적 가치를 공동체적 소유권으로 해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소유권과 관련된 권리들에 관한 <표 12-1>(224쪽)은 나의 내 우산에 대한 권리들과 회사와 관련된 여러 권리들이 어떻게 다른지 11가지의 준거를 통해 구체적으로 구분해주고 있다. 이런 구체성은 이 책의 장점이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경험하듯이 민주주의적 경험의 짧은 역사 속에서 급속한 자본주의화와 함께 진행된 개인주의적 가치의 문제는 참여의 문제만큼이나 무시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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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참여자본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체를 추구하는가. 영국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함께 앵글로 아메리칸 모형의 대표적인 나라로 인식되어 왔다. 예컨대 프랑스ㆍ독일 등 유럽국가들이 대체로 기업조직에 대해 세밀한 법적 규정을 하는 반면 “영국의 성문법은 회사의 조직에 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216쪽). 이는 “단순한 법적 문제는 아”닌데, “영국의 민법은 계약의 이행에 중심을 두고 있고, 대륙법에서는 계약행위가 공법적인 규제를 받는”(같은 곳) 점이 반영된 결과다. 즉 대륙 및 일본에서 “회사는 공적인 책임을 가진 사회적 기관으로 인식되며, 운영과 관리방법에 있어 적절한 공공의 이해를 반영해야 하”지만 “영미식에서 회사는 공적 기관이라기보다 사적 기관이며, 주인과 대리인간의 일련의 관계로 인식”되는 것이다(216~17쪽). 따라서 참여자본주의는 명백히 유럽대륙적 제도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적 이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제18장에서 소스키스는 “참여자본주의는 좋지만 독일식 모델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소스키스는 비록 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독일식 북유럽모델이 가지고 있는 “기업의 장기자금조달, 높은 종업원참여도, 고용안정, 효율적 훈련시스템 등”이 귀중한 정책의 보고로 비치고 영국의 오랜 실용적 정책차용전통에 비추어 매력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그러나 매우 큰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선진자본주의 시스템의 한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제도적 정책을 이식하여 성공한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360쪽). 소스키스는 대륙적 제도 이식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미덕에 대해서도 구체적 의문을 제기한다. 존 그레이가 1990년대 미국식 자본주의의 전세계적 이식에 대해 미국자본주의의 모델을 받아들이려는 나라는 어떤 유럽 혹은 아시아의 국가라도 참아내지 못할 사회적 분열―범죄, 인종 및 종족 갈등,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 등―이라는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할 때의 의미도 이와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소스키스 역시 경쟁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국적 제도를 협력을 중심으로 한 대륙적 제도로 바꾸려고 할 때 얻게 될 성공은 그 과정에서 영국이 겪어야 할 막대한 비용의 산물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차대조표는 예상만큼 간단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제도변화의 방향이 어떤 것이건 제도변화 자체가 초래하는 심각한 대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제도변화상의 어려움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가라타니 고진은 마르크스가 한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교환과는 구별되는, 한 무리의 공통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공동체들 사이의 교환이 지니는 고유한 특징을 기술하기 위해서 ‘사회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한 무리의 공통규칙이라는 기준에서 마을, 인종, 민족국가, 서방세계 그리고 심지어는 (독백적 공간에 담겨 있는) 자아조차도 공동체로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교환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공동체간 교환이 초래하는 규칙체계형성, 즉 사회화과정의 본질적인 어려움과 관련된다. 그 규칙체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처럼 놀이가 진행되면서 끊임없이 변경되는, 그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하나의 이질적인 체계를 형성한다. 자본의 전지구적 운동이 초래하는 교환의 확장은 따라서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을 증대시키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참여자본주의는 사회주의적 주장이 아니”며 참여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정부의 역할은 최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부의 창출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153쪽). 참여자본주의는 참여에 따르는 권리의무관계라는 참여사회 혹은 참여자본주의의 원리를 “시장경제메커니즘에 적용하고” “완전 자유방임경제에 일정부분 제한을 가하자는 경제원리”(28쪽)를 주장한다. 제3의 길의 모호한 실용주의적 입장에 대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비판이 아니라도 고진의 마르크스해석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적 규칙성을 전일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삶의 불안정성을 극대화시키는 자본운동을 용인하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참여자본주의는 과연 얼마만큼 성공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설수록 참여자본주의를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소스키스와 보수주의자인 데이비드 윌렛(3장)이 손을 맞잡고 영국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에 서로 공감하는 것은 이러한 우려 때문 아닐 것인가. 마르크스는 공동체적 소유의 본원적 역사적 ‘형태’를 검토하면서 아시아적ㆍ고전고대적 그리고 게르만적 소유형태로 유형화하였다. 그리스ㆍ로마의 고전고대적 소유형태가 공동체(국가)와 성원 간의 대립적 관계를 형성한 반면, 게르만적 소유형태는 보완적이다. 이를 다소 비약적으로 유추하면 개인간의 계약을 기반으로 한 영국의 오랜 제도적 규칙체계의 뿌리가 로마사회의 계약관계에 기초한 실용주의라면, 개인의 사적 소유에 기초하면서도 공동체가 보완적으로 기능하는 독일 등 유럽대륙적 모형의 뿌리는 게르만적 소유형태에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유럽의 절대주의가 극에 달하여 특히 프랑스의 루이14세처럼 ‘짐이 곧 국가’라며 권력의 일점집중으로 사적 권력과 공적 존재 간의 모순을 극대화하여 결국 혁명에 의해 왕정자체가 제거된 대륙의 절대왕정의 역사와 청교도혁명 당시 “국왕을 수호하기 위해 국왕과 싸운다”는 구호하에 오늘날까지 국왕제를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영국 정치권력의 역사 간의 차이는 또한 얼마나 심원한가. 참여가 권력의 분산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영국정부가 “성공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권력을 포기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이다”(172쪽)는 바넷의 주장은 청교도혁명 당시의 구호가 지금 대륙적 방식의 구조변화를 요구하는 시점에서조차 다시 울리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이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참여정부가 주장하는 ‘참여’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반추하게 된다. 참여정부가 혹은 한국사회가 지향하는 ‘참여’의 개념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그 성원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며 지향하고 있는가. 회고적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말한 아시아적 소유형태에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게르만적 전통의 대륙적 방식 혹은 로마적 전통의 앵글로 아메리칸 방식에 또한 연연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소유형태에 대한 논의가 역사적 발전단계의 필연성과 무관한 유형화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적 조건에 직면하여 그 역사적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해나가는가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다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홉스봄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쓰던 혁명적 청년 마르크스 시기에 전자본주의사회의 정체성에 주목하여 비인간성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자본주의사회의 진보성을 인정하였지만 만년으로 갈수록 비인간성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에 원시공동체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원시공동체가 아무리 뒤떨어진 상태일지라도 적극적인 사회적 가치를 그 속에 구현하고 있다고 언제나 칭찬했다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를 숙고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책 <참여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한 공동체에 관한 여러 논의를 당대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준거로서 읽게 해준 점에서 현실정책적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가치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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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재/고려대 연구전임강사
2005/05/23 00:00 2005/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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