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5·31 지방 선거가 한나라당 압승과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가진 것, 또 이것이 단지 지방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예고편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전격적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이를 둘러싸고 ‘자유-보수 컨센서스’ 대연합이 구축되고 이 지배 블록과 폭넓은 반신자유주의 연합이 대치하게 되었다는 것, 이런 상황을 보면서 나는 87년 6월 항쟁을 원동력으로 하여 개시된, 이제 20년을 내다봤던 한국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한 순환이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대안적 출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 문제와 연결하여, 우리는 ‘6월 민주 항쟁을 기념하자, 이를 계승 발전시키자’, 혹은 ‘제도적 실천으로서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민주’로 나아가자’는 등의 주장을 들을 수 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어떤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한국 민주주의와 제도적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최장집 교수의 글은 ‘제도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들 모든 문제를 같이 논의해 볼 수 있는 넓은 내용도 포괄하고 있다.

2.

2006년 6월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5·31 지방 선거 결과는 어느 정도로 의미심장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시간대를 넓혀 지방 선거가 6월 항쟁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의 현 단계와 향후 진로에 대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중요하다.

첫째, 민주화 운동 세력의 전반적 국정 운영 능력의 빈곤 문제다. 불안정하고 갈피를 잡기 어려운 통치 스타일의 문제도 매우 크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상이다. 여기에는 저항의 정치를 넘어서, 책임 있는 대안 정치를 꾸려갈 수 있는 실력의 부족 문제가 걸려 있다.

둘째, 양극화와 민생 파탄에 대한 심판이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 ― 남북 화해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반(反, against)하는 경제적 자유화 ― 양극화의 두 갈래로 갈라졌던 바, 자유주의 개혁 세력의 그간의 모순에 찬 개혁성, 즉 취약하고 불안정한, 균열적 헤게모니 능력의 역사적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셋째, 대북 관계에서 뉴라이트가 집중적으로 공세를 펼친 “친북 좌파” 또는 “북한 퍼주기”라는 선동이 먹혀들어 갔다. 이 문제는 자유주의 개혁 세력의 실패와 대중의 이반(離反)이 보수 수구 세력에 대한 대중의 지지로 귀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국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은 대중 정당으로서 존재 자체가 아직 미약하다. 민주노동당은 12.1%의 정당 득표율을 얻기는 하였으나 한 곳에서도 기초 단체장을 내지 못하였다. ‘제도적 실천’의 장에서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어디에도 정치적 주도권의 지금과 같은 보수 회귀 상황을 반전시킬 힘을 찾기는 어렵다.

넷째, 이 상황대로라면,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FTA를 이후 한나라 당이 계승, 발전시킬 판국이 되고 있다. 사회경제 개혁에서 자유와 보수 간의 구별은 희미해졌다.

다섯째, 보수 세력은 매우 능동적이고 비교적 높은 내부 통합성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자유주의 세력은 무책임하고 안이해졌고, 진보주의 세력은 문제를 파고들고는 있으나 갈래가 많고 설득력 있는 대안의 희망을 가지고 대중에 다가가는 능력은 취약하다.

3.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한나라당의 승리가 얼마나 포지티브한 대중 지지력에 기반을 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러 진단들은 한나라당의 승리가 반사적 성격이 강한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종래의 개발주의 이미지에 대한 호응의 성격이 강하다. 다시 말해 ‘제2차 박정희 신드롬’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가지고 한나라당이 과거에 기대어 승리했다고만 보는 것은 안이한 생각이 될 것이다. 진보가 새로워질 수 있다면, 보수도 새로워질 수 있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주의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시대에 맞게’ 새로운 한국판 신보수주의로 옷을 갈아입어 이른바 ‘선진화’를 밀고 갈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한국에서 ‘지속가능한 신보수주의 선진화’의 새로운 역사적 프로젝트는 어떤 식으로 나타 날 것인가. 이는 무분별한 개방주의를 고취하는 뉴라이트의 일부 분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한국에서 자유주의 세력은 너무 무분별하고 안이하게, 너무 ‘빨리 빨리’ 시장―개방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성장과 개방의 도전, 그리고 공적 서비스와 복지 등에서 ‘국가가 할 일’을 너무 빨리 방기해 버렸다. 새로운 과제인 공적 서비스와 사회 복지의 확충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 과거의 개발주의 강점도 파괴되어 버렸다. 고투자를 통한 고성장 체제 그리고 성장 ·고용을 통한 최소한의 국민 통합 시스템마저 파괴되고, 저성장과 높은 대외 불안정, 고용 파괴 ― 양극화 ― 낮은 복지의 악순환이 나타났다. 이는 규칙을 기반으로 한, 질서 있는 투명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진전이었다 할지 모르나, 경제 잉여의 국민적 확산 메커니즘과 국민 경제 분업 연관의 질(質)로 본다면, 개발주의체제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만약 한국의 신보수주의가 자유주의 세력의 이 실패 지점에 대해 착안하여 자신의 프로젝트를 재구성한다면 어찌 될까. 시장주의와 개발-성장주의(이명박의 서울 시정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부분적 복지주의가 적절히 혼합된 어떤 것, 성장 세력으로 재벌을 훨씬 더 적극적인 파트너로 끌어들이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은 한층 더 공격하면서도 일자리는 대량 창출하는 어떤 프로그램이 출현할지 모른다. 부동산 투기에 대해 어떤 대응책을 낼지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미국 패권 하 지구적 규모의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패러다임인 ‘워싱턴 컨센서스’조차 오래 전부터 ‘지속가능한 신자유주의’를 위해 ‘사회 안전망’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따라서 한국의 보수 세력도, 공상적인 시장 근본주의적 ‘바보’가 아니라면, 이 점을 알아챌지 모른다. 어떤 조합 방식이 만들어지든 간에, 성장, 안정, 복지를 위해. 무분별한 개방의 위험을 만회하는 시장 ― 제도 ― 국가간의 적절한 조합이 없이는 신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자본 세계화 시대에 지속가능한 프로젝트가 되기 어렵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시장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매우 먼 한국사회에서는 특별히 더 그러하다.

한국사회는 개발 독재에서 자유주의 시기의 소용돌이를 거친 후, 이제 한국판 신보수적 길로 나아갈 위험 앞에 직면해 있다. 물론 한미 FTA의 체결에 따라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모될지, 이 과정이 낳을 혼란과 갈등에 대해 보수 세력은 어떤 관리 능력을 보여주느냐가 큰 문제가 된다. 이런 상황들을 모두 염두에 두면서 나는 지금 6월 항쟁을 원동력으로 막을 열었던 한국 민주주의의 한 순환이 끝나고, 일대 ‘전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4.

그렇다면 지난날 6월 민주항쟁을 추동한 민주연합으로서, 그 주체구성, 종래의 시대를 읽는 방식, 그 민주적 상상력과 정책 구성력으로 현재의 위기와 위험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이다. 이 지점에서 87년 이후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와 한국사회의 전환에 대한 반성적 진단과 대안’ 제시가 중요하다. 그는《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의 결핍과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한다. 그는 또한 운동 정치를 넘어서는 제도적 실천으로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분단체제론- 통일 우선론 ― ‘중도적 변혁주의’와의 대항 속에서 평화 공존론과 ‘민주주의의 민주화’에 대해 말한다. 현재 시민사회 내에는 5·31 지방 선거의 충격을 겪고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변화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법치주의다’라는 포지션을 가지면서, 한편으로 한미 FTA를 통한 글로벌 스탠더드의 수용은 상당 부분 필요하고 불가피한 측면이 있으며 특히 우리 경제사회 질서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통제할 수 없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는 식의 양비론를 펴는 견해가 있다. 또 ‘통일이 선결되어야 할 우선 과제다’라는 포지션 위에서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이 명쾌하지 못하여, 3당 합당, DJP 연합, 노무현 정권의 ‘변형’ 등을 수반하며 구질구질하게 진행되어 온 현실은 분단 체제의 속성상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 굳이 변형주의(transformism)라는 외국 문자를 갖다댈 나위도 없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 진행형》, 창비사, 2006, p65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최장집 교수의 견해는 87년 이후 한국 사회 전환의 시대정신을 이와 같이 글로벌 스탠더드의 수용을 통한 절차적 정상화로 파악하거나,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흐름과 대치선을 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견해를 같이 한다. 그래서 최 교수는 아마도 6월 민주항쟁의 동력과 시대정신으로 현재의 위기를 돌파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갖고 있을 것으로 보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진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5.

그런데 최 교수는 특별히 ‘제도적 실천’으로서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 주장이 오늘의 상황에서 갖는 함축은 무엇일까. 누구 못지않게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강조해 온 그가 제도적 실천에 대해 힘주어 말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넓게 보면 저항의 정치를 넘어 대안의 정치로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는 더 구체적인 지점을 짚고 있다. 즉 민주주의가 운동적 국면에서 일상적 정치의 국면으로 가게 되면, 민주주의가 하나의 통치체제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여기서는 제도적 정당 질서를 정상적으로 발전시키는 일, 대표 체계를 민주화하여 국가와 사회의 괴리를 극복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최 교수는 그의 최근 저서《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현 단계에서 운동을 통한 민주주의 논리는 축구 경기에서 백패스만 하는 공격수일지 모른다고 비유하면서 “지금은 골을 넣어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장집,《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pp.41~42.

이 같은 최 교수의 주장은 어찌 보면 너무 지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의 민주주의자들이 최 교수가 지적한 좋은 정당정치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을까. 좋은 진보 정당을 건설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그간 혹독한 세월을 견뎌 내면서 민주노동당을 세운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의 지적은 중요한 포인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의 지적이 이상주의적 최대 강령주의가 갖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과거에 보였던 결함에 대한 비판으로서, 냉정한 정치적 현실주의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는 정말로 이제 백패스만 하지 말고 골을 넣어야 한다. 이는 한국판 신보수적 길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이에 맞설 수 있는, ‘제도적 실천’으로서 새로운 진보개혁 정당의 요청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아래에서는 최 교수의 지적이 적실하다는 것을 인정한 위에서 몇 가지 지적을 하고자 한다.

첫째, 구체적으로 현 단계 한국 사회에서 어떤 강령적 지향과 정책 대안을 가진 정당이 ‘좋은 정당’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알다시피 오랫동안 한국사회에는 중도에서 ‘좌’ 쪽의 정당을 대중정당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제도적 실천’의 지난한 과제가 아니었던가. 지금 이 문제는 더욱 절실하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실패와 신보수적 길의 위험 앞에서 ‘민주주의의 민주화’, 또는 민주주의에 ‘사회적인 것’의 재충전과 시장국가에서 ‘사회국가’ 박명림, <사회국가 그리고 민주 헌정주의 : 한국 민주화 20년의 성찰과 하나의 대안>, 6월 민주항쟁과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주최 심포지엄. 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고 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제도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보는지에 대해서 더 진전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조정된 최소강령적 목표’라 할 때 어느 수준으로 조정해야 할지에 대해 견해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또 정당이라고 하는 것이 최소강령적 목표만으로 먹고 살 수도 없다. 더 긴 전망과 삶의 희망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서 참여의 의지와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공공적인, 이성적 판단력과 행위 능력을 갖도록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구성원의 정치적 능력 문제임과 동시에 이 바탕 위에 서는 대한민국의 민주정치적 질과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는 ―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도 유난히 더 ― 비대한 국가 권력이 공적인 것을 독점해 왔고, 그래서 공사 구분이 미약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개인 사이의 공적 결사(public associations), 인민이 수평적으로 형성하는 공공(公共)의 경험이 매우 박약하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식민지 시대, 6·25, 냉전 반공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더욱 그렇게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공공 영역 속에 다시 시장-자본이 점령해 들어왔다. 우리 사회의 다수 대중은 압도적으로 시민이라기보다 국가의 신민, 시장의 신민의 처지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정당 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정치적 공공 영역과 지역의 삶의 터전에서 보통 사람들이 국가 권력 및 시장 권력과 쟁투를 벌이면서 참여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시민적 주체로서 성장해 나가는 ‘진지전’적 과정이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최근 조희연 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정치의 경계’를 부단히 재구성하면서 ‘정치의 국가화’를 막고 ‘정치를 사회화’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조희연,《장외정치, 운동정치와 정치의 경계 허물기, 우리안의 보편성》, 한울, 2006. 그렇지만 조 교수는 사회적 정치를 운동 정치, 장외 정치와 혼용하고 있어서 개념으로서는 혼선이 있다. 이는 비합법 전위조직 운동, 재야 운동, 낙선운동, 그리고 광주 항쟁을 한 데 묶어 ‘정치의 사회화를 시도한 네 가지 장외 정치’로 파악한 그의 한국현대 정치 분석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그의 사회적 정치론은 전통 좌파의 뿌리 깊은 사회화론과는 어떤 지점에서 달라지고, 단절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좌우익 독재와 시장 독재를 넘어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민적 이념을 구성하고자 할 때 통과해야 할 필수적 관문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참여연대의 권력감시 활동을 비롯하여 그간 시민사회운동이 펼쳐 온 비대한 제도권력 감시활동 또한 단지 대의정치의 정상화를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만 볼 것이 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사회가 창안해 낸 권력과 시민이 대항하는 쟁투적 정치(contentious politics)의 한 형태로서, 한국 민주주의에 있어 필수적인 역사적 진화과정이자 ‘영구 개혁’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한국 민주주의가 단지 제도 정당 정치만이 아니라 제도정치와 비제도정치를 양 날개로 하는 ‘이중 민주주의(dualist, or two -track democracy)’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에서 보자면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정당민주주의 이상으로 큰 진전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자본의 위협 아래 허물어지고 있는 정치적 공공 영역과 주민자치의 영역들을 어떻게 수호하고, 새롭게 발전시켜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시민사회운동에 닥쳐온 우회할 수 없는, 중대한 도전이다.

6.

긴 논의가 필요한 이론적 주제가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는 지면 부족으로 간단히 논의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읽기로는 최 교수는 민주주의를 정당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민주주의를, 더 나아가 정치 또한 너무 협소하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의 정당 정치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관은 단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경험과 한국 사회의 현 단계에 대한 반성적 고려 때문에만 나온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민주주의론에는 기본적으로 토의민주주의 또는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공공 영역, 풀뿌리 참여민주주의 같은 논의들이 별로 마땅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토의 민주주의에 대한 최 교수의 견해는 책《민주주의의 민주화》p.117 주19 참조. 또한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관계,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국제주의의 관계 등을 너무 간단히 처리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공화주의를 그 한 흐름인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로만 좁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최교수는《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개정판에서 공화주의-그리고 자유주의도-부분을 삭제하였다. 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안병진 교수가 지적한 바 있다 (안병진, <탈정치론의 시대 ― 참여정부와 뉴라이트의 탈정치론과 공화주의적 대안 모색>, 동향과전망, 67, 2006 여름, p.119;《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주성수 정상호 편,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아르케, 2006, pp. 96-97. ) 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기본 가치로 하는 자유주의와 인민 주권과 제 조건의 평등을 기본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가 별개의 이념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침투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확연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내가 보건대 오늘날 정치 철학은 공화주의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구성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한참 진행 중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민주주의 대 자유주의의 이념 경쟁은 공화주의를 어떤 식으로 자기편으로 끌어 들일 것인가를 놓고 큰 씨름을 벌리고 있는 중이다. 이같은 논의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민주주의를 시민적, 사회적, 생태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고 차이의 정치, 국민국가 경계를 넘는 세계 시민주의 등을 비롯하여 그 새로운 프론티어를 열어 감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7.

민주주의는 공적인 일(res publica, public affairs)과 공적 이익 ― 이는 기성의 것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늘 새롭게 제기된다 ― 의 실현을 자기 관심으로 갖는 구성원들, 또는 정치적 자유를 고유한 자기 목적적 가치로 여기는 정치적 주체들을 갖지 못할 때 엘리트 민주주의로 전락하고 위태롭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각한 구성원들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주체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그리고 대중의 주체성은 학습, 훈련, 투쟁이라는 역동적 과정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세계화, 맹목적 개방-경쟁 숭배주의가 공화국의 상품화를 강제하고 있는 오늘의 시대 상황에서, 공공적 관심과 정치적 자유를 고귀한 것으로 ― 그렇지만 고전 공화주의에서처럼 유일한 것은 아니다 ― 여기는 시민적 주체의 발전 없이 민주주의의 전망이 있을까. 사회 구성원들 간의 수평적인, 반성적 상호 소통과 인정, 연대의 능력을 키우는 일, 달리 말해 공공 영역을 자유의 실현과 권력 행사의, 정치적 의사 형성의 토대 현장으로 삼고 공사의 경계를 부단히 재구성해 가는 구성원들의 평등한 참여자치와 연대의 능력, 다시 말해 정치·사회경제·문화·교육·생태적 능력을 신장하고 증진하는 일을 정치 공동체의 기본 가치인 공동선(political common good)으로 삼는 신공화주의적 민주주의, 시민적, 사회생태적 민주주의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그럼으로써 너와 나를 더불어 사는 ‘우리’로 묶어 주는 새로운 정치적 아이덴터티를 재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 민주주의는 어떤 새로운 전망을 열 수 있을까.

민주 공화국이라는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적 정체성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기반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발굴됨을 넘어 새롭게 쇄신되어야 한다. 우리는 반공 자유민주주의와 소유제일주의적 시장경제라는 보수-수구적 정체성 이념과 대항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 1조의 정체성 규정을 죽은 문구로 묻어 둘 일이 아니라 그것에 새로운 이념적, 실천적 활력을 불어 넣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다. 공화국의 새로운 귀환이 요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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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천/강원대학교 경제무역학부 교수, 참여사회연구소장
2006/07/20 00:05 2006/07/2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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