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1_과거의 생환, 자학과 자만 사이
시민과세계/5주년 기념호 :
2007/01/20 00:03
권태준의 뛰어넘기가 뛰어넘지 못한 것
근래 우리 근현대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자는 논의들이 활발하다. 여러 요인들이 겹쳐 이런 현상을 낳았다. 무엇보다 지난 2005 년 해방 60 주년, 을사조약 100주년, 한일 조약 40주년, 그리고 5월 민중 항쟁 25주년 등, 가히 역사의 해라 할 만큼 시대의 마디를 구획한 굵직한 사건들이 중첩되면서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그 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8월 15일 경축사에서 “포괄적 과거 청산”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정부가 본격적 청산 작업에 착수한 것이 우리 근현대사를 둘러싼 ‘기억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또 참여 정부의 무능과 실정(失政), 특히 사회경제 정책에서의 실패가, 불행히도 현정부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약속과 전망에 대한 대중의 회의와 실망으로까지 번지면서, 이런 정치적 상황이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나아가 이런 ‘민주 개혁의 전환적 위기’ 라는 틈을 비집고 근현대사에 대한 보수적 시각의 새로운 연구가 공세를 펴고 있다. 이른바 ‘좌편향’ 근현대사 인식을 비판하면서 ‘뉴라이트=신우익’판 근현대사 인식을 제시했다고 하는《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이 책에서는 이른 바 자학사관과의 대척점에서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무반성적 성공사관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포럼에서 내어 놓은 ‘대안교과서’ 시안은 일제 식민지시대를 ‘근대로의 주체적 이행과정’이라고 보고, 5·16 쿠데타-유신 독재-전두환 신군부독재를 미화하고 있는 반면에,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악평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최근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 전환을 뉴라이트적 현상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보수(保守)도 보수(補修)해야 하지만, 진보도 새롭게 진보해야 하는 시대, 그리하여 양자 모두 거듭나면서 상호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해 《해방 전후사의 인식》를 그대로 고수하는 식으로 대응한다면, 이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구진보를 대표했던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라는 이념적 깃발은 이제 빛이 바랬으며 원판 골격 그대로는 결코 생명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구진보의 많은 부분은 보수적 성격도 갖고 있어서 뉴라이트의 공세에 빌미를 제공한다. 시대가 변했고, 역사를 보는 눈도 변했으며, 새로운 사료들이 발굴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우리 학계가 이같은 새로운 전환시대의 요청에 얼마나 학문적으로 잘, 진지하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문한 탓이겠으나 논의는 여러 가지로 분분하고 정치적 선정성은 강한데, 학술적 성취는 아직 빈약한 것이 우리 실정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라는 묵직한 저작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분량이 방대할 뿐 아니라, 완성도가 매우 높은 체계적인 저서이다. 수년 동안 일념으로 매진해야 겨우 나올 수 있는 저서다. 필자는 물론 우리 학계는 이런 역작을 내어 놓은 저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저서가 ‘한국 근현대 발전사론’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이 주제에 대해 이 정도로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는 없었다고 본다. 이 점만으로도 권교수의 저서는 큰 성취이며, 연구사적으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함이 마땅할 것이다.
주연 배우는 국가, 주무대는 산업화 시기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듯이 민주정부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역사적 기반, 즉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성취한 바를 몰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강한 비판적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의 지난 날 거둔 성공을 보여 주고 그 요인을 밝히는 것을 중심 과제로 삼으며 민족해방, 민중민주로 대표되는 구진보 담론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것도 중요하게 다루는 과제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새로운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는 시민운동을 포함한, 민주화 시기에 성장한 이른바 ‘운동권 엘리트’의 논리와 행태 전반에 대해 시종일관, 쉼 없이 비판의 화살을 쏟아 붓고 있다. 말의 길이 막혀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 나갈 수밖에 없는 민중적, 시민적 행동과 그 비판 담론은 한국의 ‘세기 뛰어 넘기 작업’과 ‘세계화 시대 국력 증강’의 걸림돌로서, 거대담론이나 고담준론을 일삼는 부질없는 짓으로 가차 없이 비판된다.
이 저작의 전체 얼개에서 한국근현대 발전사론의 주연 배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단연 ‘국가’다. 개발독재 체제의 ‘강한 국가’, 즉 사회에 대한 국가 권위와 권력의 중심성이 산업화의 성공, 나아가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를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강한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 시기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는 중심 무대가 되고, 그 이전과 이후는 이 ‘빛나는’ 시기와의 연관성과 비교 속에서 그 특징, 더 정확히 말해서 그 약점과 과제가 제시되고 있다 하겠다. 정치적 근대화론의 대표적 학자인 새뮤얼 헌팅턴(S. Huntington)은 이 책이 가장 빈번하게 불러들이고 의존하는 인물이다.
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저자에 따르면 개발독재 이전의 문호개방 시기, 식민지 시기 그리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까지도 포함하여, 이들 시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제점은 ‘국가 만들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즉 이들 시기는 국가라는 중심적 권위와 권력을 형성하는데 실패한 시기로 집약된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처럼 강하고 유능한 국가라는 시각에서 ‘세기 뛰어 넘기 역사’를 살피고 있는 까닭에, 저자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나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 포럼의 대안 교과서 시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의한 일제 식민지 시대 다시 보기 작업’이나 ‘이승만 치켜세우기’ 같은 작업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문호 개방기에 대해서도 <고종 황제 역사 청문회>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종 재평가론 대(對)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분법에서 벗어 나고 있다. 식민지 지배시기는 물적, 인적 자원의 수탈이라든가 식민지 개발의 유산보다는, 매우 흥미롭게도, 대중의 저항적인 민족적 정체성과 정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시기로 파악된다.
또 저자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과거에 그대로 역투사하는, 근래 정치권이나 학계에서 널리 유포 선전된 ‘쇄국과 개방’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다.
강한 국가에 대한 도가 지나친 믿음
그렇지만 아무리 ‘죽은 개’가 되었다 하더라도, 민족해방과 민중민주 이념, 또는 ‘민중적 민족주의’ 이념이 밝히고 있는 바대로, 지배 세력이 외세를 불러 들이고 외세와 결탁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한편, 민중을 억압,수탈하고 나라를 죽였다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진실이 이 책에 빠져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우리 국가의 능력이 허약했던 것은, 내외의 연구들이 흔히 지적하듯이 단지 일국 수준에서 사회와의 관계 설정에서 능력이 허약했다는 문제일 뿐 아니라, 민중의 민족적 요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외압에 허약한 국가의 문제이자, 외세와 결탁하면서 ‘모두를 위한 나라’를 죽이는 길을 택한 무책임한 매국적 권력의 문제임을 우리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개발독재 시기는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기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종속론, 심지어 저자의 이론틀에 가장 가깝다고 할, 일본을 준거 모델로 하는 개발국가론까지 비판한다. 그러면서 ‘개발 독재는 자본주의적이었던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가혹함과 6·25 동족 상잔 등의 화(禍)를 극복하고 이를 복(福)으로 바꾸어 냄으로써, 즉 전화위복(轉禍爲福)을 잘 실현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한국 근대화의 독특한 개성이라고 보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의 근대화는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공동체적 발전, 즉 함께 잘 살기 과정이라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자본가는 자본 동원 능력, 투자 기획 능력, 시장 개척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의 협력자라기보다 ‘국가-정부가 기획 투자하는 사업의 관리자’였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그 시기에는 노동자들도 계급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저자의 시각으로는 산업화 시기의 개발 체제는 자본주의적 외모는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실질은 전(前)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의제자본주의 체제’였다는 것이다.
남의 이론을 모방하지 말고 우리 현실에 주목하고 그에 기반한 이론을 개발하자는 저자의 주장에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최근 제기된 “우리 안의 보편성을 찾자”는 캐치 프레이즈도 그런 취지를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의제 자본주의론은 국가 중심성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박정희 모델을 마치 전시 경제 모델처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 시기에 국가가 우위에 서면서 재벌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지만, 국가가 재벌에 의존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저자는 근대화 성공사를 그리고자 하는 일념에 사로 잡힌 나머지 냉전 반공주의 ‘강한 국가’가 지닌 고도의 억압성과 보수성을 일관되게 거세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와 재벌 간의 위계와 더불어, 이 지배권력체 구성부분 간의 보수적 공생과 결탁 관계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발 독재 체제는
‘강한 국가’와 ‘재벌’이라는 쌍두(雙頭)지배체제
이《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에서 ‘전화위복’론은 경청해야 할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이는 한국 근대화의 핵심적 특성으로 강조되어야 하며, 통상적 유교 자본주의론보다 훨씬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특히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지만 과연 종래의 개발국가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권태준 교수가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게다가 권 교수는 개발독재를 서구 중상주의 단계에 비견하는 언급도 하고 있어서 의제 자본주의론이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개발독재체제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요즘 말로 하면 ‘괴물’)에 비견하여 ‘강한 국가’와 ‘재벌’이라는 두 개의 머리가 달린 ‘홉스적 협력체제’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파악이 정치경제적 권위와 그안에 들어 있는 구조적 모순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는 이론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저자의 의제 자본주의론에서는 개발독재체제에 내포된 구조적 모순은 주변화 되어버린다. 그 뿐만 아니라 의제 자본주의론은 ‘개발독재=중상주의, 민주화 이후 경쟁 시장 자본주의’라는 통상적인, 단선적 진화론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혐의까지 갖게 된다.
함께 잘 살기 믿음이 해체되는 과정으로 넘어가면서 저자는 민주화 이행, 그리고 개발독재에 대한 본인의 시각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다. 저자가 보는 민주화 이행의 동력은 무엇인가. 또 그 동전의 뒷면인 시스템이 지닌 구조적 모순의 성격은 어떻게 보고 있는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풀뿌리 민중은 계급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역 차별에 항의했고, 운동권 엘리트들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요구했다. 간단히 말하면, 민주화운동 정치는 지역적 배제 세력과 계급적 배제 세력간의 결연(結緣)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가 단순한 진화론적 근대화론에 동의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발독재 대 민주화’로 대치했던 당대의 핵심 쟁점, 즉 유신 독재, 5.18 민중 항쟁, 그리고 6월민주 항쟁 등을 통해 줄기차게 이어진, ‘정치적 독재 대 민주 대 연합’의 대치 구도가 흐릿하게 주변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저자가 개발독재를 ‘개발=국익을 위한 독재’로서, ‘민족의 길잡이’로서, ‘대중이 지지한 독재’로만 보고 있는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런 시각은 개발독재를 가로지르는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모순과 그 정당성의 불안정하고 균열적인 성격, 즉 ‘쟁투적’ 성격이 빠져 버리게 된다.
노동자를 비롯하여 근로 대중들이 지역 모순에만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것도 지나치게 일면적이고 단순한 견해다. 이는 계급의식과 계급갈등의 내용을 지나치게 좁게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개발독재 폐쇄회로를 너무 좁게 보고 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에서는 경제적 소외와 정치적 소외가 함께 통합되어 있으면서 반독재 민주화 시기의 저항적 주체성을 집약하고 있는 당대 민중의 개념이라든지, 진보적 지식인과 연대한 민중의 노동, 생활, 투쟁, 의식의 경험 세계와 그 정당한 역사적 자리가 제거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에 따르면 우리의 민족주의는 민중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언제나 오로지 국가만이 전유할 뿐인 국가민족주의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저자가 식민지지배 시기가 대중의 집단적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일깨운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때도, 그 의식이란 결국 국가민족주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위로부터의 동원과 징발의 대상에 불과한 수동적 의식일 뿐이다.
‘삼성공화국’이 우리의 대안이란 말인가?
의외로 저자는 개발독재체제의 공과를 논할 때 박정희의 개인적 지도력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이 이 체제의 말단 현장에서 억압과 희생을 가장 심하게 당한 계층으로서, 다른 어떤 요인 못지않게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의 성공을 위해 기여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저자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가 대중의 민주적 평등주의 요구에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이런 요구를 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마땅히 관심을 가질 법하다. 또 권위주의적 권위를 대체하는 새롭고 강력한, 민주적 권위의 형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산업화 시기 강한 국가를 잇는 세계화 시대의 대안은 이제 ‘시장’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거의 넘어서지 못한다. 우리가 IMF위기를 극복하고 이만큼이나 버티고 있는 것도 몇몇 초국적 기업의 경쟁력 덕분이 아니냐고 재벌개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지 않느냐고 저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삼성공화국’이 우리의 대안이라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저자의 관심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강한 민주주의를 향하기는커녕 세계화시대에 다른 나라와 경쟁해서 실리를 챙길 수 있는 경쟁국가의 길을 향해 있다. 이를 위해 이른바 ‘협치’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라는 것이다.
저자의 민주주의론 또한 이런 시각에 맞추어져 있다. 저자에게 있어 자유민주주의적 정치란 공리적, 개인주의적 시민을 상대로 여러 정파와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여 국가 권력을 담당하는 정치체제다. 이런 시각은 엘리트주의적 최소민주주의, 집계(集計)민주주의를 얼마만큼 넘어서고 있는가.
지나친 과거긍정으로 비판정신 잃어 버려
권태준 교수의《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라는 책. 이 책은 우리 근현대 발전사에 대한 보수적 담론서라고 간단히 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공이 들어간 저작이다.
그렇지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를 역임했던 사람, 에코포럼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에는 너무 현실에 주저앉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겠다. 나이가 들수록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적이 되기 마련이라 하지만,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항하여 ‘삶의 세계’, ‘삶의 지연성 회복’을 주창하고 ‘분배의 의식화 시대’를 위해 발언해 왔던 지난날의 저자와 강한 국가와 시장의 능력을 그저 추종하고 칭송하는 오늘의 저자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어 보인다. 과거 부정담론, 민중민족담론을 비판하려는 문제의식이 지나친 나머지, 건강한 비판 정신과 성찰력을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저자의 한국근현대 발전사론의 가장 큰 결점이다.
진보와 보수가 어지럽게 넘나들고, 구 진보 중의 일부가 큰 소리로 뉴라이트의 최첨병 역할을 하고 있고, 386 민주화 세력이 ‘시장주의 보수’로 퇴행하는 이 혼돈의 시대에, 나는 먼 발치에서나마 고희를 맞은 이 노학자가 ‘자학과 자만 사이’에서 더 깊은 성찰적 발언의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었다. 그러기에 못내 서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저자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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