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미사일 위기 해소 이후의 위기가 한반도에 주는 교훈



슬프고도 빛났던 나날들(sad and luminous days)이란 전 세계를 3차대전 직전의 절대 절명의 위험에 빠뜨린 1962년 소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를 말한다. 아마 독자들은 ‘슬프고도’ 라는 표현을 어림잡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의 끔찍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시절이 슬프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났던 나날들’이란 표현은 수수께끼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쟁에서 인류를 구한 당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나 후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의 영웅적 리더십을 두고 ‘빛났던’ 나날로 추론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말은 두 국가의 정상이 아니라 당시 쿠바의 고위 지도자이자 대한민국에 엄청난 팬클럽을 가지고 있는 ‘영원한 혁명가’의 상징인 체 게바라가 한 말이다. 그는 왜 그런 기이한 말을 했을까? 그의 말 속에는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매우 중요한 본질이 숨겨져 있었다.

체 게바라가 슬프다고 표현한 것은 쿠바의 입장에서는 미소간의 야합으로 쿠바가 이제 미국의 침공이나 저강도 전략에 의한 정권교체전략에 매우 취약하게 노출되었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말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빛났던 날들이라고 표현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살인기계(killing machine)’를 추구한다고 섬뜩하게 밝힌 그의 시각에서 소위 죽음을 각오한 ‘선군정치’로 ‘미 제국주의’와 ‘맞장을 뜨며’ 지켜낸 쿠바의 위대한 주체사회주의 이념, 자주적 위엄이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xxvi).

쿠바미사일 위기와 관련한 책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책에 관심이 옮아간 내가 서평에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 ‘슬프고도 빛났던 나날들’ 을 쿠바의 앵글로 소개하고 분석하고 있는 독특한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이 ‘쿠바 미사일 위기’라는 제목 대신 체 게바라의 표현을 제목으로 한 것은 독자의 흥미를 끄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오히려 저자들은 우리가 상식처럼 사용해온 ‘쿠바미사일 위기’라는 표현에 딴죽을 건다. 마치 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반입했다는 사실만으로 카리브해에서의 모든 위기를 설명해버리는 가설 속으로 비밀스러운 초대를 하는 듯하다. 일부 독자들 중에는 한국에 소개됐던 이라는 영화 때문에 ‘쿠바미사일 위기’의 맥락을 폭력적으로 단절당한 채,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하는 미국 중산층의 안경으로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서는 아직도 미국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쿠바의 관타나모 기지가 야만적 생채기로서 증언하고 있는 미국의 야만적 역사를 단 한 번도 암시하지 않는다. 또한 미국이 소련의 앞마당에 미사일을 설치해 후르시초프의 히스테리를 불러오고 이것이 소련이 미국의 앞마당, 쿠바에 미사일 설치라는 맞불로써 고려한 맥락을 아예 제거해버린다. 영화 속에서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쿠바인들이란 겨우 상공의 U-2 정찰기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본 우왕좌왕하는 오합지졸의 난장이들일 뿐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너무도 편리하게 감춰진 일말의 진실을 알려주는 자료의 발굴이자 균형 잡힌 관점에서 고민하려는 노력이라는 소중한 의의를 지닌다. 브라운대학과 아메리칸대학의 교수이자 이 책의 저자인 블라이트와 브레너 교수는 이미 탁월한 연구를 통해 이념적 렌즈보다는 사건의 관계당국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확보하고 새로운 통찰력을 불어넣어준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다. 특히 이 책은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카스트로의 내부 비밀 연설문(33-72)과 그 의미를 소개하고 있어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저자들이 미소 간의 게임으로 묻혀버렸던 쿠바의 시각을 다시 발굴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진다. 당시 미국은 물론이고 카스트로가 혈맹으로 ‘착각한’ 소련조차 쿠바의 안보위협을 공감하기는커녕 강대국의 시각과 지독한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대처한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후 쿠바, 쿠바사태를 지켜보면서 북한이 동일하게 선택한 주체노선은 바로 사회주의 우방에 대한 절망감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물론 후루시초프의 시각에 서서 보면 카스트로는 현재의 김정일 위원장이 요덕수용소 관리 등에서 그렇듯이 휴머니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포기한 인물이다. 3차 대전 직전의 위기에서 자신에게 카스트로가 보낸 선제 핵공격에 관한 편지가 그에게 준 가공할 만한 충격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편지를 본 후루시초프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류의 생명에 있으나 카스트로에게는 인류가 어떻게 되든 미국의 절멸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79).

이 책은 이러한 충격스러운 경험을 반복하면서 이후 소련이 쿠바에 대한 강압적 외교를 본격화하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다. 예를 들어 67년 소련은 98%의 석유를 의존하던 쿠바의 파이프라인을 잠그고 정권 교체 전략에 가까운 조치를 추진한다(132). 현재 미국이나 한국의 강경파들이 선호하는 중국의 석유 파이프라인 통제와 미국과 중국 간 빅딜 이론과 유사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쿠바는 어쨌든 ‘고난의 행군’을 통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이 책을 읽으면 쿠바와 비교할 수 없이 대내외적으로 열악하고 더 폭압적인 북한체제이기는 하지만 중국을 통한 북한 붕괴 시나리오가 너무 나이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쿠바는 소련에게 있어 언제든지 철수할 수 있는 미국의 앞마당이지만, 중국에게 북한은 자신의 앞마당이고 남한에게 북한은 이미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건달과도 같다. 이는 북한의 급격한 붕괴가 쿠바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거나 혹은 상상할 수 없는 부작용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책은 소련의 정권교체 전략에 대응하여 쿠바가 어떻게 ‘고난의 행군’을 버틸 수 있었는가 뿐 아니라 미국의 갖가지 창조적인 맞춤형 봉쇄정책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쿠바가 생존했는가의 문제도 다루고 있다. 62년 ‘쿠바미사일’ 사건이 터졌을 때 미국 정부 일각에서 유행한 이론은 ‘조기붕괴론’이다(xix). 그리고 그 후 위기가 신경 발작적으로 터질 때마다 이는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심지어 카스트로가 유연한 태도로 나오면 백악관 일부 강경파들은 이를 쿠바의 약화 증거로 보면서 더욱 밀어붙일 것을 강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체니 부통령이나 맞춤형 봉쇄를 주도하는 조지프 차관 등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비록 카스트로체제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급작스러운 파국적 균열 가능성이 높은 북한이지만 조기붕괴론의 신화를 조심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우리는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우리가 불량국가에 대해 유화파라고만 쉽게 오해하는 미국 민주당이 어떻게 강압적 외교신화에 기초하여 획기적 수교의 기회를 놓쳐왔는지도 생생히 보여준다. 카스트로 암살을 추진하고, 외과 수술식 공습을 심각히 고려했던 케네디는 물론이고 심지어 인권 대통령인 카터조차 79년 10월 쿠바 고립화 노선을 승인한 바 있다. 더구나 쿠바의 유화적 제스처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을 주장한 국무부의 절박한 건의는 당시 국가안보회의가 “소련과 쿠바는 호전주의자이다”는 점만 강조하는 정보에 관심을 보이며 무시당했다(181). 2008년 집권 가능성이 커진 현 민주당의 뿌리인 클린턴 행정부는 과거 트랙II(민간외교)라는 미명 하에 트로이 목마에 비견하는 암묵적 목적으로 아예 민주주의 확산과 맞춤형 봉쇄정책을 다양하게 구사하기도 하였다(170).

물론 미국의 초당적인 강압적 외교노선에 대해, 과거 핵 선제공격론까지 주창한 카스트로가 리비아 가다피처럼 먼저 핵을 포기하며 국제여론을 바꾼 ‘광폭정치’를 펼칠 리는 없다. 그는 현재의 북한이 그러하듯이 미국 정치인들이 국내정치적 요소때문에 때로 강경한 레토릭을 구사하면 이를 핑계 삼아 관계를 냉각시키곤 했다. 또한 미국이 조금이라도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면 이를 이용하여 상호 신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제3세계 혁명수출이나 미국의 ‘기획 탈(脫)쿠바’(오늘날 기획 탈북과 유사한 움직임) 운동을 하는 비행기를 격추하는 등의 악순환의 구조를 오히려 강화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악의 국가’로 불리던 중국과의 획기적 수교의 일등공신인 키신저는 또 하나의 야심에 찬 작품을 75년 쿠바에서 만들려고 하다고 두 손을 들어버렸다(159). 블라이트 교수의 다른 책에 따르면 “오죽하면 일각에서는 카스트로는 기회를 상실할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never misses an opportunity to miss an opportunity).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가 정권을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Blight et all, Cuba on the Brink: Castro, the Missile Crisis, and Soviet Collapse, New York: Rowman and Littlefiled, 2002, 159.

저자는 이러한 악순환의 구조를 선순환의 구조로 바꾸기 위해 국가들 간의 ‘현실주의적 공감(realistic empathy)’의 관점을 제안한다(178). 이는 상대의 입장을 동정(sympathy)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맥락과 내면세계를 고려할 때 비로소 현실적인 문제해결의 여지가 열린다는 상식에 대한 지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주의적 공감의 전제조건으로서 상대의 의도를 최악의 가정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버리라고 주장한다(180). 어떤 면에서 저자들은 이미 9.11 테러 이후 21세기가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도 같다. 미국의 체니와 강경보수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21세기 안보관의 핵심이 바로 이 최악의 가능성이다. 이를 두고 과거 냉전시대와 달리 21세기는 심지어 한 개인이 뉴욕 등의 대도시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호소력이 크다. 이를 그들은 단 1%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심각하게 대처하자는 “1% 독트린”(One Percent Doctrine)으로 설명한다. Suskind, Ron, The One Percent Doctrine, New York: Simon & Schuster, 2006. 책을 통해서 저자들이 강조한 ‘현실주의적 공감’이라는 관점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또 이것이 저자들의 생각과 달리 21세기에 훨씬 어려워진 현실의 난점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이 책으로 한반도 문제의 해법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쿠바 렌즈를 통해 비교정치학적으로 북한 내부와 한반도 문제를 깊이 연구할 필요성을 절실히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단지 학자들의 흥밋거리가 아니라 한반도의 생존과 미래가 걸린 너무도 절실한 문제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앞으로 한층 심화된 연구를 촉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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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진/창원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2007/01/20 00:02 2007/01/2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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