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3_자유주의를 넘어선 자유주의적 시티즌십
시민과세계/5주년 기념호 :
2007/01/20 00:00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무조건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역시 통치를 위한 하나의 정치체제인 이상, 탁월한 정치·경제적 성과와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역습에 직면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더’ 민주적인 대통령을 연이어 선택했던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이러한 역습과 냉소에 직면해 있다.
폭발적으로 증대된 정치·사회적 갈등과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원칙과 기준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듯하다. 양극화 심화와 중산층의 몰락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경제적 위기는 민주주의의 실천적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지역간 이념간 계급간의 제 갈등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운동도 본격화되고 있다. 4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도 민족적 단일성에 안주했던 한국 사회에 인종갈등과 다문화주의라는 생소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2005년 5월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력은 37만 8천명에 이르며 이 중 52.6%인 19만 9천명이 불법체류자이다. http://ijunodong.prok.org(검색일 2006년 10월 22일) 나아가 환경문제, 자연재해, 테러리즘의 확산 등은 국민국가 안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문제해결 장치로써는 해결하기 힘든 과제로 다가왔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국민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에 대한 고민과 시티즌십(citizenship)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citizenship’은 보통 ‘시민권’, ‘시민성’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citizenship에 있어 권리(right) 뿐 아니라 책임(responsibility)을 강조하고 있기에 시민권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시민성이라고 번역할 경우 지나치게 개념이 모호해지거나 확장될 수 있기에 여기에서는 ‘시티즌십’으로 그대로 음역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시티즌십의 개념 자체가 매우 다양한 이념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시티즌십 논의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이슬람계 여학생의 ‘히잡(hijab)’ 착용을 둘러싸고 프랑스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좌파이론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은 2004년 3월 프랑스에서는 공화주의적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공립 중 · 고등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었고, 이슬람계는 이 법안이 그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시티즌십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킬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결국 어떠한 원칙과 기준을 가진 시티즌십인가에 대하여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영국 정치학자인 케이스 폭스(Keith Faulks)가 2000년에 펴낸《Citizenship》(Routledge, 2000)에서 저자는 평등, 개인의 권리, 보편성이라는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의 목표에 동의하면서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자신이 제시한 방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즉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약속한 것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시티즌십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170). 나아가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전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를 ‘자유주의를 넘어선 자유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시티즌십에 대한 개념적, 역사적 개괄과 함께 앞으로 진행될 논의를 조망한다. 2장부터 4장까지는 각각 공화주의, 자유주의,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에서 논의되는 시티즌십의 개념과 그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5장과 6장에서는 저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탈 주권국가, 탈 시장주의적인 시티즌십의 내용과 그것을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모색된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고 시티즌십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를 통치체제를 창조하고 개선하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며(13) 개인의 보편적인 평등과 권리를 핵심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둔다(21, 61). 이것이 배제적, 계층적 성격을 지닌 고대 폴리스의 시티즌십과 다른 점이다. 문제는 개인의 평등과 권리 보장이라는 자유주의 목표가 자유주의적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 권리의 신성불가침과 시장가치의 지배는 개인을 원자화, 파편화시켰으며 그에 따라 정치공동체의 붕괴와 시티즌십의 약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시티즌십의 개념이 함께 다루어야 하는 권리와 책임 중 권리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권리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을 공급하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의 권리만을 강조했을 때, 시민권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적절하게 명명한대로 시장에서의 권리(market right)로 축소되게 된다(64-68). 그러나 저자는 권리와 책임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지지(mutual supportive)되는 것이라 본다. 저자는 책임(responsibility)을 임무(duty)와 의무(obligation)로 나누고, 건강한 사회일수록 공동체의 조건을 유지하는 데 임무가 아닌 의무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임무란 법에 의해 부과된 책임으로서 어겼을 경우 처벌이 부과되는 강제적인 것이며, 의무는 자발적인 것으로서 타인과의 공감이자 연대성의 표현이다(82). 비록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공동의 이익(common good)은 없을 지라도, 시민들 각자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료 시민들의 도움과 정치공동체가 필요하며, 따라서 정치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시민의 책임은 당연히 요구되기 때문이다(71). 저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의 개념이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된 탈 자유주의적 대안을 크게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 마르크시즘 이론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 모든 대안들은 각각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공화주의적 전통은 모두 주권국가의 틀 내에서 시티즌십을 파악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저자는 전 정치적(pre-political)·문화적 개념으로서의 민족(nation)과 법적,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국가(state)를 구분하며,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두 개념이 혼합되면서부터 국가간 경계를 기준으로 한 배타적인 시티즌십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34). 저자가 공화주의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는 밀러(David Miller)나 옴멘(T. Oommen)은 각기 민족성과 국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으나, 양자 모두 주권국가의 틀에서 시티즌십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 한계가 분명하며, 특히 세계화시대에 두드러지고 있는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무능력하다(36-44). 공동체주의자들이나 사회적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들 역시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했으나, 그 처방으로 공통 이익의 우월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71-73).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적 시티즌십의 대안으로 최근 부각되고 있는 것이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이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영(Iris M. Young)과 킴리카(Will Kymlicka)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란 모두 집단적 권리(group rights)를 주장하는 이론들로,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으며 개별적인 행위자들이나 안정적인 거버넌스를 위해서는 오히려 부정적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보편적 권리개념이 실제로는 강력한 배제담론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지적은 의미가 있지만(8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제시한 방법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차이의 정치든 다문화주의든 특정한 집단의 ‘미리 결정된’ 문화적 정체성을 시티즌십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본질주의(essentialism)-물론 영이나 킴리카 자신은 부정하고 있지만-라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본질주의는 그 집단 내부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또 다른 억압을 은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저자가 차이의 정치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억압받는 다른 집단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가정이 지닌 위험성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차이의 정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며, 정치공동체의 합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희생자라고 하여 올바른 행위(good behavior)를 독점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집단에 근거한 시티즌십은 개인에 근거한 시티즌십보다 더욱 억압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93-96).
놀랍게도 저자의 마르크시즘 비판은 차이의 정치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시티즌십 개념의 장점은 계급이나 종교, 혹은 인종과 같은 개념에서 결여된 포괄성 때문이다. 마르크시스트들이 보는 사회적 대립이란 가장 근본적인 갈등인 계급갈등의 부산물일 뿐, 공산주의 달성을 위해서는 계급성 외의 정체성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할 때 개인의 권리는 혁명의 희생물로 전락할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계급에 근거했건 인종에 근거했건 이러한 집단적 배제는 위험하다고 비판한다(107, 111).
그렇다면 저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평등·개인의 권리·보편성과 같은 자유주의의 전통에 기초한 자신의 논리 전개를 분명히 하면서, 시티즌십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61, 106-107, 168-170). 그러나 동시에 시민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정치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은 시민 개인의 권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권리와 책임을 통합하는 새로운 개념의 시티즌십을 ‘전체론적 관점의(holistic view) 시티즌십’으로 표현하며, 이러한 관점의 시티즌십이 갖는 특징을 ‘밀접한 시티즌십(intimate citizenship)’으로 설명한다(124-129). 이를 위해 저자는 강제투표제(compulsory voting)와 사회봉사(community service)를 제안한다. 이 두 제도는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정치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됐음을 알게 하며, 정치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동료 시민들과의 연대성을 보장한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으로 시민소득(citizen's income)제도가 있다. 모든 성인에게(아동에게는 조금 낮은 수준의) 일정한 소득을 지급하는 이 정책은, 시민들을 시장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시티즌십을 고양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기존의 주권국가가 갖고 있는 폭력(force)을 통해 추진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민주적인 심의를 통해 정치공동체-국가가 아닌!-가 스스로 규범을 결정하고, 그것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강제(coercion)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128).
저자는 나아가 세계화시대의 시티즌십 문제로 전환한다. 세계화시대는 시장과 시티즌십이 갈등을 일으키고,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했던 주권국가의 역할이 감소하며, 국가간 불평등과 환경문제 등 주권국가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시기이다. 몇몇 학자들은 시티즌십이 아니라 인권의 개념을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권의 개념은 시티즌십을 대체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142). 인권은 사회적, 시민적 권리를 보장할지라도 정치적 참여의 권리는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시민개개인이 정치 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이 지닌 상호적 책임을 간과하기 때문이다(142-143). 그렇다고 저자가 인권보다 주권이 우월하다고 보거나 주권국가 내에서의 시티즌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아직은 개별 시민들에게 국가가 주된 배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국가중심적인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단위로서의 정치공동체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헬드(David Held)의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나 생태민주주의의 의미를 언급하기도 한다(149-152). 동시에 저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치 단위인 주권국가의 의무(obligation)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특히 서구 국가들의 경우 개발도상국의 부채를 탕감해주거나, 더욱 공정하고 엄격하게 통제되는 무역체제를 만들거나, 가난한 국가들의 숙련된 노동자들을 빼내오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154-156).
이 책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티즌십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을 명쾌하게 정리하면서 각 주장이 갖는 문제점을 적절히 지적해, 독자에게 충분히 매력적이다. 물론 저자의 비판이 가진 설득력은 독자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현실과 이론을 평가하는 분명한 ‘하나의’ 기준을 집요하게 고수한다는 점, 나아가 그 기준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 사회가 처한 큰 문제는 사회적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분명한 정치철학적 원칙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원칙을 상실한 실용주의적 타협은 현실을 미봉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정치적 비전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이 추구하는 목표에 동의하면서도, 그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과감하게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마르크시즘이나 차이의 정치, 다문화주의의 비판적 입장은 일면 보수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준다. 또한 원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섣부른 실용주의보다 앞서는 실천적 지혜를 던져준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밀접한 시티즌십’으로 제시하는 여러 제도들은 사실 상당한 수준으로 현실화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다. 저자는 제도적 현실화 방안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매우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만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먼저 프랑스혁명에 대한 평가나 밀러, 옴멘의 비판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스키너(Quentin Skinner)나 비롤리(Maurizio Viroli) 등의 고전적 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 이론가들은 공화주의가 공동체주의로 오인되는 것을 분명히 거부하고, 특수한 정치적, 역사적 경험과 보편적 시민권,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이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의 주된 비판 대상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이다. Maurizio Viroli(2002) Republicanism. NY: Hill & Wang, pp. 16-17.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가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기대하면서 세계화시대의 주권국가(특히 서구 국가들)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일면 논리적인 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저자는 유럽연합의 한계를 예로 들며, 주권국가를 개선하는 것(reforming)으로는 부족하고 개인을 국가로부터 떼어내는(detach)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국가를 더욱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모색하는 것보다 더 유용하지는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주권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공동체에서의 시민 개개인의 책임과 애정을, 문화적 동질감이 아닌 정치체제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하버마스의 헌정적 애국심(constitutional patriotism)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52, 168). 그러나 현실적으로 헌정적 애국심이 가능한지를 떠나더라도 주권국가 내의 애국심이 과연 그토록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치는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공간인 동시에,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선함과 악함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열정어린 공간이다. 헌정적 애국심 혹은 주권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를 열망하는 것이 국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나 비합리적인 배타성을 부분적으로 억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주권국가를 향한 애국심까지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오랜 기간 단일한 지역에서 공통의 정치문화적 경험을 형성하고 공유해온 한국의 경우, 개별 국가의 문화역사적 맥락을 떠난 헌정적 애국심보다는 오히려 그 맥락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방향으로 재창조하는 것을 통해 더 많은 가능성과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비단 한국의 현실을 떠나더라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어려움들은 사실상 국가의 존재로 야기된 것이라기보다 ‘국가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비판들이 이 책이 지닌 신선하고도 창조적인 논의라는 가치를 결코 퇴색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자유주의의 미덕들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독자라면, 부분적인 이의와는 상관없이 치밀하고 신념에 찬 저자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하리라 믿는다. 현실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과 처방, 그리고 긍정적인 비전 제시가 정치학의 임무 중 하나라면, 이 책은 그 임무에 충실한 값진 저작이라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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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으로 증대된 정치·사회적 갈등과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원칙과 기준을 상실하고 표류하는 듯하다. 양극화 심화와 중산층의 몰락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경제적 위기는 민주주의의 실천적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지역간 이념간 계급간의 제 갈등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운동도 본격화되고 있다. 4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도 민족적 단일성에 안주했던 한국 사회에 인종갈등과 다문화주의라는 생소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2005년 5월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력은 37만 8천명에 이르며 이 중 52.6%인 19만 9천명이 불법체류자이다. http://ijunodong.prok.org(검색일 2006년 10월 22일) 나아가 환경문제, 자연재해, 테러리즘의 확산 등은 국민국가 안에서의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문제해결 장치로써는 해결하기 힘든 과제로 다가왔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국민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에 대한 고민과 시티즌십(citizenship)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citizenship’은 보통 ‘시민권’, ‘시민성’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citizenship에 있어 권리(right) 뿐 아니라 책임(responsibility)을 강조하고 있기에 시민권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시민성이라고 번역할 경우 지나치게 개념이 모호해지거나 확장될 수 있기에 여기에서는 ‘시티즌십’으로 그대로 음역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시티즌십의 개념 자체가 매우 다양한 이념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시티즌십 논의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이슬람계 여학생의 ‘히잡(hijab)’ 착용을 둘러싸고 프랑스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좌파이론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치열한 논쟁은 2004년 3월 프랑스에서는 공화주의적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공립 중 · 고등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었고, 이슬람계는 이 법안이 그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시티즌십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킬 수도 있음을 증명한다. 결국 어떠한 원칙과 기준을 가진 시티즌십인가에 대하여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때인 것이다.
영국 정치학자인 케이스 폭스(Keith Faulks)가 2000년에 펴낸《Citizenship》(Routledge, 2000)에서 저자는 평등, 개인의 권리, 보편성이라는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의 목표에 동의하면서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자신이 제시한 방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즉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주의가 약속한 것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시티즌십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170). 나아가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전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를 ‘자유주의를 넘어선 자유주의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시티즌십에 대한 개념적, 역사적 개괄과 함께 앞으로 진행될 논의를 조망한다. 2장부터 4장까지는 각각 공화주의, 자유주의,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에서 논의되는 시티즌십의 개념과 그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5장과 6장에서는 저자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탈 주권국가, 탈 시장주의적인 시티즌십의 내용과 그것을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모색된다. 마지막으로 7장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고 시티즌십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를 통치체제를 창조하고 개선하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며(13) 개인의 보편적인 평등과 권리를 핵심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둔다(21, 61). 이것이 배제적, 계층적 성격을 지닌 고대 폴리스의 시티즌십과 다른 점이다. 문제는 개인의 평등과 권리 보장이라는 자유주의 목표가 자유주의적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 권리의 신성불가침과 시장가치의 지배는 개인을 원자화, 파편화시켰으며 그에 따라 정치공동체의 붕괴와 시티즌십의 약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시티즌십의 개념이 함께 다루어야 하는 권리와 책임 중 권리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권리를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을 공급하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의 권리만을 강조했을 때, 시민권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적절하게 명명한대로 시장에서의 권리(market right)로 축소되게 된다(64-68). 그러나 저자는 권리와 책임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지지(mutual supportive)되는 것이라 본다. 저자는 책임(responsibility)을 임무(duty)와 의무(obligation)로 나누고, 건강한 사회일수록 공동체의 조건을 유지하는 데 임무가 아닌 의무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임무란 법에 의해 부과된 책임으로서 어겼을 경우 처벌이 부과되는 강제적인 것이며, 의무는 자발적인 것으로서 타인과의 공감이자 연대성의 표현이다(82). 비록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보다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공동의 이익(common good)은 없을 지라도, 시민들 각자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료 시민들의 도움과 정치공동체가 필요하며, 따라서 정치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시민의 책임은 당연히 요구되기 때문이다(71). 저자는 이러한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의 개념이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제시된 탈 자유주의적 대안을 크게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 마르크시즘 이론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이 모든 대안들은 각각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공화주의적 전통은 모두 주권국가의 틀 내에서 시티즌십을 파악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저자는 전 정치적(pre-political)·문화적 개념으로서의 민족(nation)과 법적,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국가(state)를 구분하며,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두 개념이 혼합되면서부터 국가간 경계를 기준으로 한 배타적인 시티즌십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34). 저자가 공화주의적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는 밀러(David Miller)나 옴멘(T. Oommen)은 각기 민족성과 국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으나, 양자 모두 주권국가의 틀에서 시티즌십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 한계가 분명하며, 특히 세계화시대에 두드러지고 있는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무능력하다(36-44). 공동체주의자들이나 사회적 보수주의자(social conservative)들 역시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적절하게 지적했으나, 그 처방으로 공통 이익의 우월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71-73).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적 시티즌십의 대안으로 최근 부각되고 있는 것이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이다. 저자는 대표적으로 영(Iris M. Young)과 킴리카(Will Kymlicka)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차이의 정치와 다문화주의란 모두 집단적 권리(group rights)를 주장하는 이론들로,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으며 개별적인 행위자들이나 안정적인 거버넌스를 위해서는 오히려 부정적이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보편적 권리개념이 실제로는 강력한 배제담론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지적은 의미가 있지만(8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제시한 방법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차이의 정치든 다문화주의든 특정한 집단의 ‘미리 결정된’ 문화적 정체성을 시티즌십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본질주의(essentialism)-물론 영이나 킴리카 자신은 부정하고 있지만-라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본질주의는 그 집단 내부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또 다른 억압을 은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저자가 차이의 정치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억압받는 다른 집단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가정이 지닌 위험성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차이의 정치는 민주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며, 정치공동체의 합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희생자라고 하여 올바른 행위(good behavior)를 독점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집단에 근거한 시티즌십은 개인에 근거한 시티즌십보다 더욱 억압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93-96).
놀랍게도 저자의 마르크시즘 비판은 차이의 정치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시티즌십 개념의 장점은 계급이나 종교, 혹은 인종과 같은 개념에서 결여된 포괄성 때문이다. 마르크시스트들이 보는 사회적 대립이란 가장 근본적인 갈등인 계급갈등의 부산물일 뿐, 공산주의 달성을 위해서는 계급성 외의 정체성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할 때 개인의 권리는 혁명의 희생물로 전락할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계급에 근거했건 인종에 근거했건 이러한 집단적 배제는 위험하다고 비판한다(107, 111).
그렇다면 저자의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평등·개인의 권리·보편성과 같은 자유주의의 전통에 기초한 자신의 논리 전개를 분명히 하면서, 시티즌십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61, 106-107, 168-170). 그러나 동시에 시민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정치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에 대한 책임은 시민 개인의 권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권리와 책임을 통합하는 새로운 개념의 시티즌십을 ‘전체론적 관점의(holistic view) 시티즌십’으로 표현하며, 이러한 관점의 시티즌십이 갖는 특징을 ‘밀접한 시티즌십(intimate citizenship)’으로 설명한다(124-129). 이를 위해 저자는 강제투표제(compulsory voting)와 사회봉사(community service)를 제안한다. 이 두 제도는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정치공동체와 긴밀히 연결됐음을 알게 하며, 정치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동료 시민들과의 연대성을 보장한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으로 시민소득(citizen's income)제도가 있다. 모든 성인에게(아동에게는 조금 낮은 수준의) 일정한 소득을 지급하는 이 정책은, 시민들을 시장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시티즌십을 고양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기존의 주권국가가 갖고 있는 폭력(force)을 통해 추진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민주적인 심의를 통해 정치공동체-국가가 아닌!-가 스스로 규범을 결정하고, 그것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강제(coercion)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128).
저자는 나아가 세계화시대의 시티즌십 문제로 전환한다. 세계화시대는 시장과 시티즌십이 갈등을 일으키고, 시민들에게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했던 주권국가의 역할이 감소하며, 국가간 불평등과 환경문제 등 주권국가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시기이다. 몇몇 학자들은 시티즌십이 아니라 인권의 개념을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인권의 개념은 시티즌십을 대체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142). 인권은 사회적, 시민적 권리를 보장할지라도 정치적 참여의 권리는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시민개개인이 정치 공동체와 동료 시민들이 지닌 상호적 책임을 간과하기 때문이다(142-143). 그렇다고 저자가 인권보다 주권이 우월하다고 보거나 주권국가 내에서의 시티즌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아직은 개별 시민들에게 국가가 주된 배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국가중심적인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단위로서의 정치공동체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헬드(David Held)의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나 생태민주주의의 의미를 언급하기도 한다(149-152). 동시에 저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정치 단위인 주권국가의 의무(obligation)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특히 서구 국가들의 경우 개발도상국의 부채를 탕감해주거나, 더욱 공정하고 엄격하게 통제되는 무역체제를 만들거나, 가난한 국가들의 숙련된 노동자들을 빼내오지 않는 것 등이 그것이다(154-156).
이 책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티즌십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을 명쾌하게 정리하면서 각 주장이 갖는 문제점을 적절히 지적해, 독자에게 충분히 매력적이다. 물론 저자의 비판이 가진 설득력은 독자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현실과 이론을 평가하는 분명한 ‘하나의’ 기준을 집요하게 고수한다는 점, 나아가 그 기준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국 사회가 처한 큰 문제는 사회적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분명한 정치철학적 원칙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원칙을 상실한 실용주의적 타협은 현실을 미봉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정치적 비전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적 시티즌십이 추구하는 목표에 동의하면서도, 그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과감하게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마르크시즘이나 차이의 정치, 다문화주의의 비판적 입장은 일면 보수적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단순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준다. 또한 원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섣부른 실용주의보다 앞서는 실천적 지혜를 던져준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밀접한 시티즌십’으로 제시하는 여러 제도들은 사실 상당한 수준으로 현실화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다. 저자는 제도적 현실화 방안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매우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만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먼저 프랑스혁명에 대한 평가나 밀러, 옴멘의 비판에서 드러나듯, 저자는 공동체주의와 공화주의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스키너(Quentin Skinner)나 비롤리(Maurizio Viroli) 등의 고전적 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 이론가들은 공화주의가 공동체주의로 오인되는 것을 분명히 거부하고, 특수한 정치적, 역사적 경험과 보편적 시민권, 그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이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의 주된 비판 대상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주의이다. Maurizio Viroli(2002) Republicanism. NY: Hill & Wang, pp. 16-17.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저자가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기대하면서 세계화시대의 주권국가(특히 서구 국가들)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일면 논리적인 모순으로 보일 수 있다. 저자는 유럽연합의 한계를 예로 들며, 주권국가를 개선하는 것(reforming)으로는 부족하고 개인을 국가로부터 떼어내는(detach)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국가를 더욱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모색하는 것보다 더 유용하지는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주권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공동체에서의 시민 개개인의 책임과 애정을, 문화적 동질감이 아닌 정치체제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하버마스의 헌정적 애국심(constitutional patriotism)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52, 168). 그러나 현실적으로 헌정적 애국심이 가능한지를 떠나더라도 주권국가 내의 애국심이 과연 그토록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치는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공간인 동시에,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선함과 악함이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열정어린 공간이다. 헌정적 애국심 혹은 주권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를 열망하는 것이 국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나 비합리적인 배타성을 부분적으로 억제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주권국가를 향한 애국심까지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오랜 기간 단일한 지역에서 공통의 정치문화적 경험을 형성하고 공유해온 한국의 경우, 개별 국가의 문화역사적 맥락을 떠난 헌정적 애국심보다는 오히려 그 맥락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방향으로 재창조하는 것을 통해 더 많은 가능성과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비단 한국의 현실을 떠나더라도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어려움들은 사실상 국가의 존재로 야기된 것이라기보다 ‘국가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비판들이 이 책이 지닌 신선하고도 창조적인 논의라는 가치를 결코 퇴색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적어도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자유주의의 미덕들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독자라면, 부분적인 이의와는 상관없이 치밀하고 신념에 찬 저자의 주장에 상당 부분 동의하리라 믿는다. 현실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과 처방, 그리고 긍정적인 비전 제시가 정치학의 임무 중 하나라면, 이 책은 그 임무에 충실한 값진 저작이라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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