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_우리가 진 빚에 대한 회상과 감사
서정혁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철학자가 그 시대의 아들이듯 철학도 그 시대의 산물인 이상, 철학에게는 항상 문제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새로움’이란 없었던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을 이르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자면, 정말 이 세상에는 창조 이후에 새로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철학에서 새로움은 숨겨져 드러나지 않던 어둠을 밝혀 그 정체를 드러내는 데 있다. 문제의 새로움은 철학적 사유가 어둠에 가려져 모호하던 부분을 얼마나 용기 있게 밝혀내는가에 달려 있다. 더구나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치부를 밝히려는 결단만이 모든 문제를 새롭게 보게 하고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문제가 식상한 바로 그 순간 철학적 사유는 중단되고 만다. 문제가 식상하다는 인식은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비롯되고, 이러한 판단은 문제를 더 이상 문제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결코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문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둠을 밝히려는 열정과 근면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한줌의 어둠을 빛으로 바꾸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타성에 젖은 습관만이 철학을 지배할 뿐이다.
그러나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인 철학이 존재하는 내가 빚지고 있는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가 될 때, 무엇이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이 순간 여기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도 내가 풀어야할 문제이자 과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나를 있게 한 모든 것에 내가 빚지고 있음을 절감할 때, 나에게는 문제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익숙하게 느꼈던 모든 것들이 피와 땀의 투쟁 없이 내게 그냥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새롭게 철학의 문제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로소 나는 나를 ‘나’라고 불러 주는 ‘너’를 만나며, 나는 모든 너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너와의 만남과 인연의 은혜를 회상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이러한 부름에 대한 성실한 응답이며, 조그마한 감사의 표시다. 모든 존재자의 진리가 ‘나’에 있지도 ‘그것’에 있지도 않고, 오직 ‘나와 너의 만남’에 있다고 주장하는 ‘서로주체성의 존재론’은 온전한 만남의 실현을 위한 ‘서론’이다. 그러나 서론은 다만 본론에 들어가기 위한 입구만이 아니다. 철학에 서론이 불필요하다는 말은 서론의 중요성을 뒤집어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올바른 입구로 들어가지 못하면 끝없는 어둠의 동굴에서 의미 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된 철학하기는 항상 지금부터 시작이며, 그런 의미에서 매번 서론이다. 이 점에서 시작은 다만 시작이 아니고 곧 끝이자 목적지이며, 더 나아가 그 모든 길을 아우르는 전체이기도 하니, 왜냐하면 시작은 그 다음에 이어져 시작으로 되돌아 올 모든 길을 규정하는 빛이요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서로주체성의 이념》이 지닌 미덕은, 작지만 분명하게 그리고 힘들지만 성실하게 어두운 길을 비춰주는 빛의 역할을 자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작의 한 걸음마저도 단 한 사람의 발자취가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이 책의 자기 지시적 미덕이 있다. 《서로주체성의 이념》 자체가 나르시스의 절규가 아니라 이미 ‘서로주체성’의 작은 결과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주체성을 흔히 ‘우리’라는 모호한 기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서로주체성이 무반성적인 집단적 자기의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명심하지 않으면, 《서로주체성의 이념》에 잘못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이 점을 알기에,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우리’라는 모호하고 기만적인 기표가 벌여놓은 온갖 지배와 굴욕의 역사를 철저히 해부해야 할 책임을 스스로 진다. 타자배제와 부정에 의한 자기정립으로서 ‘홀로주체성’을 절대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서양적 자유의 이념 아래 숨겨진 은밀한 욕망이라면, 그에 비해 단 한 번도 자기 집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남에게 붙음살이 해야 하는 ‘자기상실’의 역사가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저곳의 홀로주체성과 이곳의 자기상실은 다만 공간적 차이에서 비롯된 상이한 두 사유방식의 결과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부정되어야 하는 사유의 모호함과 불성실을 대표하는 기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보다는 ‘우리’에 익숙하다. 이 ‘우리’라는 말은 때로는 붙음살이를 위한 노예의 ‘아부’로, 때로는 타자를 지배하기 위한 주인의 ‘미끼’로 쓰인다. ‘우리’라는 기표를 사용하면서도 사실상 우리는 ‘우리’ 속에서 더 이상 ‘하나임’을 느끼지는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노예도 주인도 아니지만, 여전히 예속의 상태에 만족하고 지배의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우리’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적 자기의식이 빚어낸 이러한 이율배반적 상황은 어떻게 해소가능한가? 사실상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 서로 주체가 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노예와 주인, 예속과 지배는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에 기초한 서로주체성의 표현도 실현도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를 부릴 뿐이고, 노예는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이 물음에 성실히 답한다. ‘너’와의 인격적 만남을 바라는 책임 있는 ‘나’만이 이 ‘우리’의 허상을 깰 수 있다고. 자아동일성이 ‘너’와의 만남의 흔적이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나’만이 책임 있는 ‘참된 우리’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예속과 지배의 관계를 규정하는 온갖 인식과 기술, 법, 그리고 자본이라는 홀로주체성의 현실태는 다만 서양적 사유만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나만의 집을 짓고 소통의 공간을 가로 막는 또 다른 담과 벽을 쌓는 것이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아니다. 나의 집은 너와 함께 짓는 집이어야 하고, 그것은 나의 집이자 곧 너의 집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 집은 모든 존재가 거할 수 있는 생명 충만한 만남의 장소여야 한다. 거기엔 죽음을 부르는 홀로주체성의 거울이 아니라 나와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서로 만나고 악수할 수 있는 탁 트인 창문이 있어야 한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소통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살지 못한다. 거울 속에서 나만을 따라하여 도리어 나와 반갑게 악수를 못하는 왼손잡이의 환영이 아니라, 나를 ‘나’라고 먼저 불러주고 나의 손에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해 줄 ‘너’와의 만남이 없다면 어떤 생명의 잉태도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서로주체성의 이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 대한 일면적 반성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철학적 사유의 현실적 형태이기도 하다. 서로 주체로 만나면서 모든 너에게 진 빚을 회상하고 감사할 때마다 철학이 허영과 가식의 껍질을 벗고 매번 새로운 탄생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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