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_두 개의 대한민국을 넘어서 : 세계화시대 시장화 대 공공화의 투쟁, 모두의 민주공화국를 위하여
이병천·홍윤기 _ 공동편집인
6월 항쟁, 그리고 민주화 20년의 종말의 비극과 희극,
자기 안에 갇힌 “당신들의 참여정부”
무슨 일 때문인지는 잘 알 수가 없고 사연도 갖가지 다르겠으나 ‘빨리 빨리’ 분주하기만 한 것이 너나 할 것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이다. 닥치는 대로 많은 일을 해 낸다는 것이 꼭 좋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거칠게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꼭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는 것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보다 성사선사(省事善事)가 훨씬 낫다. 오래 길게 사는 것도 좋지만 짧은 인생이라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골골백년보다 구구팔팔(!)이 훨씬 더 낫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잘 사는 것인가? 지금은 질주하는 속도의 시대, 글로벌 시장과 자본의 논리, 국가입지경쟁력 논리에 따라 덩달아 춤추고 있는 우리 삶과 사고의 속도를 늦추고 다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역사와의 만남은 성찰 없이 허겁지겁 바쁘게만 돌아가는 무반성적 삶에 성찰의 힘을 복원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동의 힘, 긍정의 힘을 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소중하다. 전환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역사의 창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선취한다.
얼마 안 있으면 6월항쟁 스무 돌이 돌아온다. 민주항쟁 스무 돌이 돌아옴과 더불어 논쟁도 돌아오고 있다. 보수, 중도, 진보 사이에, 그리고 진보 대 진보 사이에 논쟁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돌아볼 때 6월항쟁과 6월항쟁 이후 민주화 20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그 이룬 것과 실패한 것은 무엇인지, 이 시기를 주도한 ‘민주 정부’의 공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현 단계 우리 사회가 갇혀 있는 가장 중요한 한계 지점은 어떤 것인지,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대안적 진보, 대중적 진보의 길은 무엇인지 등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선점하려 하고 기어이 한 다리를 걸쳐 놓으려 하는 이른바 ‘중도’의 실체는 무엇인지, 오늘 대한민국 여기서 ‘진보’란 어떤 실체와 전망을 가지는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지배적 구조가 부과하는 제약과 그것의 개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특유한 대중의 주체성의 한계와 그 재구성의 문제를 반드시 시야에 끌어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민주화이후 민주주의의 성격 논쟁이든, 중도 논쟁이든, 진보 논쟁이든, 아무튼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이미 몇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20년 전 6월 한국의 민주화 이행의 바탕에는 수많은 희생과 헌신을 동반한 엄청난 대중 참여와 동원이 아래로부터 있었다. 그 같은 희생과 헌신, 참여와 동원의 저수지는 역사적으로 적어도 1970년대 반유신체제 운동, 신군부독재에 맞선 5월항쟁으로까지는 소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의 민주주의의 현 주소는 어떤가. 20년 전 그 높았던 열망이 실망, 심지어 절망으로 변화되었다. 민주주의적 정당성은 땅에 떨어졌다.
97년의 위기와 구조조정 이후 대한민국인은 이미 한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남북분단, 동서 지역분단만이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가진 자의 민주주의에 갇혔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뒷받침해야할 경제성장의 동력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국민 다수가 민주주의는 먹고사는 문제에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며 냉소한다. 먹고 사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한민국은 다시 ‘두 국민’으로 분열되었고,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20년을 제1막으로 매듭짓게 하는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왜 먹고 사는 문제에 무능한가. 이 문제에 유능한 민주주의의 길은 없는가. 과연 민주주의의 과잉이 문제인가, 부족이 문제인가. 어떤 민주주의인가, 어떤 시장인가가 문제다.
비극 중의 최대 비극은 오래 더불어 잘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것이다. 한미FTA라는 대재앙이 노도 같이 밀려오는 것을 온 몸으로 막다가 허세욱 씨가 저 세상으로 갔다. 한미FTA를 돌진적으로, 헌정을 유린하면서 밀어붙인 이 정부의 과오가 정말 크다. 그러나 서로 격려하고, 가다 못가면 쉬어서 가며 더불어 잘 살아야 할 사람을 살리지 못한 진보세력의 잘못 또한 크다. 그런데 우리는 비극만 보는 것이 아니라 '희극'도 같이 보고 있다. 한쪽에는 그 때문에 사람이 분신했는데, 다른 쪽은 축배를 든다. 김종훈 대표는 한미FTA 협상성적으로 '수'를 받고 싶단다. 뿐만 아니라, 노대통령 재임 중 성과를 기념하는 ‘노무현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든가, 참여정부평가포럼을 만들어 자체 평가를 하겠다든가 하는 일들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하고 누명이 있다면 벗어야 하겠으나, 자기 성적을 자기가 매기면서 자화자찬한다면 어찌 낯 뜨거운 일이 아닌지. 그 와중에 이 정부는 또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이라면서 기자실 통폐합 안을 내놓고 다시 자기를 가둔다.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시작한 ‘참여정부’의 최후가 자기 안에 갇혀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당신들의 참여정부’로 끝난다면 이는 매우 슬픈 일이다.
87년 체제의 모순적 동학과 그 결말로서 한미FTA
민주화 20년 끝에 왜 이런 ‘비극’을 보게 되었는가. 이 비극은 반드시 해명되어야 하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최대의 수수께끼다. 더 진전된 연구는 차후의 과제로 미루고 여기서는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해보자.
그간의 연구에서는 한국의 민주화체제 또는 87년체제를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으로 교직된 체제“라고 보는 견해가 있었다. 이는 87년체제가 갖고 있는 하나의 모순과 그것이 야기하는 동학을 이끌어내기 위한 시각으로서 분명히 의미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관련하여 우리는 20년 전 6월과 12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6월에 넥타이 부대의 지향과 7~8월 노동자 운동의 지향이 엇갈렸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은 다음에 대선을 앞두고 민주화 세력을 대표한 양 김이 분열했던 사실이다. 이후 자신들의 소원대로 차례로 대권을 쥐었던 양 김의 배반은 단지 두 사람 모두의 패배만이 아니라 민주화운동 모두의 패배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왔다. 그것은 한국의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래로부터 운동으로서 민주주의가 투입하는 실질적 내용을 거세당한 채, 구체제의 연속으로서 태생적으로 허약한 체질을 갖게 된 실로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민주화 역사 어디에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참여와 헌신과 희생으로 높은 봉우리 위로 올라갔다. 분단체제의 중압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속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높이 올라간 운동으로서 민주주의 용광로에서 갑자기 풍선에 바람 빠지듯 김빠진 제도로서 민주주의가 생겨난 것은 양 김의 분열의 죄, 한국 ‘중도’ 자유주의의 일종의 원죄다. 그리고 어떤 이유든 그 분열을 막지 못하고 거기에 끌려들어간, 모자란 운동 민주주의 탓도 크다. 이런 일들은 분단체제 탓으로 돌릴 것은 못 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뭘 했나. 여기서야말로 분단체제의 중압이 문제가 된다. 대중적 진보정당의 성장을 가로막아 온 냉전반공주의의 두터운 장벽이 문제가 된다. 민주화 이행의 과정에서 진보세력은 정당으로서 자기를 세우면서 역할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진보세력이 정당을 세운다고 할 때, 6.25의 경험, 분단체제적 조건, 지난날 명멸한 여러 실험들을 깊이 검토함을 통해서 어떤 대안 이념, 정책 그리고 실천으로 한국의 진보정당을 세울 것인지에 대해 깊은 검토가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요컨대 정당이라는 조직형태를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가 결코 아니라, 냉전반공주의 구체제의 장벽이 두터웠다는 것, 그리고 한국적 특수조건과 경험을 잘 여과한 대안이념과 정당노선에 대한 점검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한국의 민주화는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것은 통상적으로 이야기 되는, 이른바 산업화 성공에 이은 새로운 정치적 성공임은 분명하지만, 그 속에는 짙은 보수성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보수적 민주화 이행의 성격이 그 이후 민주주의의 성격을 강력히 규정했다. 그러면 87년체제의 동학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87년체제를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으로 교직된 체제”라고 봄으로써 그 동학을 풀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좀 다른 수준에서, 즉 민주화시기를 주도한 중도 자유주의 정권의 개혁이념과 노선의 수준에서 우리는 87년체제가 근본적으로 ‘두 갈래 민주주의’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기회에 수차 말한 바지만, 87년체제는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중첩된, 모순적인 체제이다. 매우 도식적이나 알기 쉽게 말해서 정치적 민주화는 1인 1표의 원리를 갖고 있는 반면, 경제적 자유화는 1원 1표의 원리를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모순물인 것처럼, 이 두 원리도 모순되며, 이 모순은 하나의 원리의 우위 속에 타협되고, 조절되고, 봉합된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의 전체 묶음이 민주정부의 하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였다는 것, 그것은 모순적 분열증을 안고 있다는 것, 그 모순적 동학이 한계 지점에 도달한 것이 오늘의 민주주의 위기와 신보수화 역전 상황을 낳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87년 체제의 모순적 동학에서 경제적 자유화가 정치적 민주화를 압도하고 그것의 우위에 서게 된 근본적 전환점은 두말할 것도 없이 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 또는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다. 이는 거기에 앞서 김영삼 정부에 의한 ‘세계화’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연장된 것만은 아니다. 미국식 시장모델과 그 삶의 양식을 추종하는 길, 이를 통해 미국 패권에 편승하고 한미 경제동맹을 재구축하는 길이 대한민국의 살 길이고 ‘선진화’의 길이라는 노선이 세워진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일견 화려한 담론,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허상, 6.15 남북정상회담의 축포 때문에 좀 가려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늘날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추진과 그 바탕에 있는 선진통상국가 노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김대중 정부가 새로 닦아 놓은 길을 다시 딴 길로 갈 수 없는 탄탄대로로 만들고, 그것을 새 차원으로 업그레이드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족히 ‘제2차 신자유주의 시장 혁명’이라 할만하다. 전 김대통령이 노대통령에 대해 한미FTA를 차질 없이 잘 마무미하라고 충고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진 자의 밀실에 갇힌 시장민주주의인가,
모두를 위한 광장의 민주공화국인가
: 시장화 대 공공화,
저항적 진보에서 구성적 진보로 나아가는 공공성
한미FTA는 단순한 부분적인 정책 사안이 아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의 현 단계를 어떻게 판단하고, 미래 방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총 노선의 문제가 놓여 있다. 한쪽은 97년 위기이후 IMF - 미국 - 국제 금융자본 복합체의 요구를 수용하고 이에 편승하면서 만들어낸, 이미 ‘두 국민’ 분열로 갈라진 대한민국조차 만족하지 못해 다시 칼을 빼들고 전면적 시장화-개방화로 가는 제2차 시장 보수 혁명을 단행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다른 한 쪽은 두 개의 대한민국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공공성의 연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모두를 위한 민주공화국이라는 새 길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양자 간에 문제를 보는 관점과 해법은 거의 완전히 대척에 서 있다. 이 대척의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공공성의 문제다. 지배 세력은 한국이 처한 현재의 곤경을 타개하려면 이른바 ‘쇼크 요법’ 외에 달리 처방이 없다면서 국가주권을 기꺼이 양도하고, 먹거리, 환경, 교육, 의료, 문화, 금융 등, 그리하여 국민 대중의 삶 전반을 통째로 벌거벗겨 내외 자본의 이윤쟁탈전과 투기적 축적논리에 내맡기는 길, 숨막히는 전면 시장화-개방화의 길을 선택했다. 반면 ‘사회 공공성’의 옹호와 확장, 그 꼭짓점에 자리한 인민주권의 확보, 다시 말해 사자본의 특권적 이윤추구와 시장경쟁논리를 더불어 사는 공공성의 연대 규범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것, 그리하여 나라경제와 사회를 가진 자, 강한 자의 밀실에서 해방시켜 민족적․민중적인 삶의 터전이자 광장이 되도록 하는 것은 두개의 대한민국에 대항하는 한미FTA 반대세력의 핵심적 요구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또 다른 NAFTA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문화적 다양성을 원한다. 우리는 식품안전 및 건강할 권리를 원한다. 우리는 보건의료, 교육,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원한다. 우리는 식량, 환경 및 천연자원에 대한 주권적 통제를 원한다. 우리는 불안정한 비정규직 파트타임 일자리가 아닌 양질의 일자리를 원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둘러싼 두 개의 노선, 두 개의 나침반이 충돌하고 있다.
이번 <시민과 세계>에서는 공공성 문제를 주제기획으로 잡았다. 작년 10월 참여사회연구소는 ‘공공성과 한국사회’를 주제로 창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는데 이번 주제기획은 당시 발표한 논문들을 수정, 보완하여 수록한 것이다. 우리가 공공성 주제를 시민사회 공론장에 올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이는 앞서 말한 대로 당면 한미FTA의 핵심 쟁점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 소급해서 공공성은 한미FTA 이전에 이미 97년 구조조정이 몰고 온 급진적 시장화-개방화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핵심 키워드 내지 화두로 제출된 바 있다. 우리의 시도는 이 같은 흐름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그 몸집을 더 키워 보려는 생각이다. 종래의 시민담론, 민중담론들이 부딪힌 여러 한계지점을 넘어서 새로운 진보담론을 발전시킨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는 우선적으로 아래 몇 가지 점만 제기하려고 한다.
첫째, 우리는 공공성이라는 화두를 끄집어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규정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실종된 국체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표류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그래서 이제 60년 회갑을 맞은 이 나라는 여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우리를 이 땅에서 더불어 살게 하는 자로 묶어주는 공유가치는 무엇인가, 왜 단지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가 아니라 대한민국은 두 이념의 기둥 위에서, 더 나아가 생태-평화주의가 결합된 세 기둥위에 선 ‘생태-평화 민주공화국’으로 다시 세워져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자들이 이번호 공공성 기획을 지난 8호 기획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이는 곧 단행본으로 새 단장을 해서 출간될 예정이다- 의 이어달리기로 함께 봐주기 바라고 있다.
둘째, 공공성 담론은 저항적 진보담론에서 구성적 진보담론으로 새롭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무책임한 외부 쇼크요법 발상을 극복 -단지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 한미 FTA 반대운동에서도 공공성 담론은 저항적, 방어적 성격이 강하고 대안적, 대항 헤게모니 담론으로서 성격은 미약하다. 사실 공공(公共)이라는 말은 복지(福祉)라는 말보다 더 국민 대중에 낯설뿐더러, 호소력과 공감대가 약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여러 이유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적 권력의 타락 때문이다. 공권력, 공기관들이 저지른 비리, 불의와 폭력의 역사, 따라서 그에 대한 아주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갈아엎고 신뢰 기반을 발본적으로 재구성함이 없이 어찌 공공성이 설 수 있겠는가. 공적인 것은 곧 국가독점적인 것, 관(官)주도적인 것이라는 생각 또한 아주 뿌리 깊다. 한국의 민중은 예속되지 않은, 동등한 상호 주체적 존재자로서 자유, 평등, 연대를 같이 일구어 본 경험과 기억을 갖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8.15이후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그런 기회와 경험을 갖지 못했다. 이것이 한국 대중들의 정체성이 부동(浮動)하고, 연고주의, 권위주의적 개발-동원주의, 성장제일주의에 쉽게 포박되는 근본적 이유다. 이런 장벽을 넘어야 공화국의 새 길이 열린다.
더불어 사는 서로 주체성, 공적 연대성은 한국 나아가 아시아에 뿌리 깊은 관념, 즉 나라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국=가(國=家)주의나 연고와 인습에 억매인 ‘탈주술화’ 이전의 공동체주의와 같은, 무반성적 집단주의와는 전혀 다른 관계성이다. 公共이라는 한자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같은 지붕 아래 있으면서 공적인 일, 공익, 공적가치를 공유하되(公), 동등한 서로 주체로서 참여, 소통, 숙의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共). 여기서는 공이 개(個)를 먹어치우거나 개가 공을 먹어치우거나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공공성은 정치(the political)의 가능성을 사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의 실존, 그러나 열린 주체성 속에서 상호소통하고 탁월을 지향함으로써 더 높은 보편성의 가치와 세계를 창출하고, 그럼으로써 보편성과 개별성이 포지티브 피드백 작용을 하는 관계적 주체성의 관념이다. 공공성은 개와 공이 미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홀론(holon)-whole과 alone의 결합물-적 주체성과 홀라르키(holarchy)의 세계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다.
여기서 자유, 평등, 연대 그리고 탁월의 규범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등가성의 가치인 정의의 바탕 위에 서되 정의를 넘어서, 초월성의 가치인 사랑의 구원력을 가진 함정 -세계를 구성하는 너와 나의 거리를 제거함에 따른 함정- 을 벗어나 개와 공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로 상장(相長)하는 그 어떤 제3의 규범, 나에게로 복귀하면서도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내 속에 너를 받아들임으로써 더불어 공동의 세계의 가치를 가꾸는 관계적(relational) 주체성의 개념으로서, 정의와 사랑 사이에 위치하는 ‘상호성’(reciprocity)의 개념이 공공성의 이념에서는 근본적이다. 공동의 가치는 경제적 이익과 ‘공적 효율성’ 또는 ‘사회적 효율성’으로부터 공동의 선(善)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공공성의 철학과 공공성의 정치경제학(또는 시민경제론)의 길이 열릴 것이다.
그렇지만 지배, 적대와 투쟁이 없는 정치는 없다. 정치는 아방과 타방을 나누고 ‘민중’을 구성하는 것이다. 공공성의 정치는 배제의 경계와 장벽을 부수는 투쟁의 정치이며, 거리에 나서는 광장의 자유의 정치, ‘불복종’의 정치이다. 그런데 이 투쟁의 정치는 투쟁이 공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공생과 공화국의 재생을 위한 힘찬 활력과 생기가 되게 하는 조건과 관계를 찾는 건설의 정치, ‘구성의 정치’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사민주의의 역사에서도 노동과 자본이 다투고 타협할 뿐 아니라 어떻게 오랜 기간 동반자로서 공동의 협력가치를 창출하는 관계를 구성할 수 있었는지 그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바탕 또는 ‘사회적 공통자본’ -이는 보통 심심하게 ‘사회자본’이라 부른다 -이 무엇이었는지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공화국은 평민과 아웃사이드들에게 특권 귀족과 싸우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있게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도 싸움의 ‘무기’를 쥐어주어야 한다. 공화국이 말하는 자유는 가진 자, 강자의 자유가 결코 아니다. 지배로부터의 자유 속에서만, 평등한 자유 속에서만, 이를 위한 투쟁의 과정 속에서만 참여, 소통, 토의, ‘상호성’의 공화국은 세워질 수 있다. 개와 공, 개인과 공공이 상생하는 ‘활사개공’(活私開公), ‘활공개사’(活公開私)의 민주적, 사회생태적 공공성은 저항을 넘어 새롭게 구성되고 세워져야 하는 과제다. 이것이 공공성의 연대정치가 가야 할 새 길이다.
두 개의 대한민국과 그 너머 : 공공성의 담론, 시민사회운동
그리고 공간, 도시, 농촌, 생태적=시민적 진보
왜 공공성인가, 무엇이 공공성인가, 대안적 공공성 담론은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신진욱 교수가 쉽지 않은 총론격 이야기를 열어 주었다. 그는 우선 전지구적 맥락과 한국적 맥락 양쪽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시장화에 대항하여 공공성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이런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정당화하는 시장담론에 대항하는 대안적 진보담론이라는 데서 공공성 담론은 뛰어나게 시대적 의미를 갖는다. 신진욱의 글이 중요한 것은 그가 단지 지배담론의 비판에 머물지 않고 그간의 한국 시민담론과 민중담론의 한계를 짚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그간 시민담론에서는 ‘공론장’ 담론은 범람했지만 ‘공공성’ 담론은 퍽 빈곤했다. 한편 민중운동에서 공공성 담론은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전략적 핵심은 공공부문의 조직보존과 고용보장에 집중되어 있거나,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공공성을 보편이익으로 끌어올리는 ‘확장적 헤게모니’ 담론으로서 새 공공성 담론을 구성해야 한다. 신진욱의 글의 핵심은 이를 위해 공공성의 분석적 정의와 규범적 원칙을 제시한 데 있다. 그는 분석적 지표로서 다수 사회구성원에 대한 영향, 만인의 필수생활조건, 공동의 관심사, 만인에게 드러남, 세대를 넘어서는 영속성 등 다섯 가지 지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지표에 각기 상응하는 규범적 원칙으로서 책임성과 민주적 통제, 연대와 정의, 공동체 의식과 참여, 개방과 공개성, 세대 간 연대와 책임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신진욱이 모처럼 제시한 이 공공성 지표와 원칙은 앞으로 토론하여 발전시킬 가치가 충분히 있다.
조희연과 신정완은 사회운동의 대안화두로 더 다가선 공공성 담론을 다룬다. 조희연이 볼 때 6월항쟁 20년의 오늘은 신계급사회적 성격이 전면화 된 포스트-민주화의 단계이다. 그리고 이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조건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기본 대립구도는 종래의 ‘독재 대 반독재’, ‘개혁 대 반개혁’ 등의 이슈를 뒤로 돌리는 ‘시장화 대 공공화’다. 그가 보기에 공공성은 민중, 사회운동에 의해 국가에 ’강제된 비계급성‘이고 자본의 비식민화 영역이다. 그는 공공성을 방어하고 확장하는 투쟁을 ’신자유주의 시대 일반민주주의 운동‘으로 성격지우면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을 가로지르는 연대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정완은 공공성의 의미를 공중(公衆)의 시선에 대한 개방성, 의사결정과정의 민주성, 기본적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모든 사회구성원의 평등한 접근성, 비시장적 원리에 따른 자원배분의 강화, 국민적 자산과 사회경제적 의제들에 대한 국민적 통제 등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신진욱의 정의와 비교해봄직하다. 그런데 신정완의 기본 관심은 담론전략이다. 그는 사회운동에서 공공성 의제가 저발전 되었던 원인을 지배의 측면과 운동의 측면에서 검토한다. 노동운동은 재벌기업 위주의 경제성장 노선의 성과틀 안에서 운신했다. 이는 ’박정희 모델의 사후의 복수‘라 부를 만한 것이다. 한편 시민운동은 주로 ’공개성으로서 공공성‘에 집중했다. 그가 말하는 성공적 담론 전략의 요건은 이런 것이다 : 잠재적 수혜자와 공공성 담론주도 집단 간의 괴리를 줄일 것, 공공성 의제와 담론을 한국인의 평균 심성에 부합되게 개발할 것, 관치중심의 공공성 사고를 탈피할 것, 대중적 용어 또는 인식 프레임을 개발할 것, 담론의 내실을 확보할 것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건호와 최현은 각기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자리하면서 공공성 화두를 자기 방식으로 가져가고 있다. 오건호는 사회공공성 활동의 성격을 소유의 사회화를 포함하는 탈시장화, 탈이윤화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개량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자본주의 ‘비판’ 운동의 지평을 갖는다. 그러나 기존의 운동은 주체의 미형성 등 한계가 많았다. 그가 보기에 앞으로 노동운동은 “타자에 대한 요구에서 자신의 참여로” 나아가야 한다. 최현이 집중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시민운동의 새로운 진로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개혁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신자유주의 양극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역사적 과정이나 현재 상황을 볼 때 손쉽게 대안은 노동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또는 공공성을 실현할 주체라고 선험적으로 선언할 일은 아니고 거듭나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ㆍ외국인 노동자ㆍ장애인ㆍ여성ㆍ성적 소수자ㆍ생태주의자들의 운동, 이를 지원하는 NGO운동이 매우 중요하다. 그는 시민운동이 한국사회의 발전 대안을 마련하는 데 있어 신공화주의 모델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노동운동의 위상과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듯이 들릴 수도 있는 최현의 논지는 참여사회연구소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김유선(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이재영(레디앙 편집위원)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이 점은 앞으로 더 토론되어야 할 것이다.
‘두 국민’ 분열은 계급, 계층만의 문제는 아니다. 삶의 양극화는 대한민국 공간의 일극화라는 또 다른 축을 통해 조장된다. 공간과 지역의 일은 <시민과 세계>의 고유한 ‘공적 관심사’이다. 지역 경제의 근간인 농업이 사양산업이 된 지 오래다. 지역에 위치한 공단들 사정도 마찬가지다. 골프장 건설이나 대형 국책건설사업과 같은 개발주의 처방만 난무하고 있다. 균형발전정책을 국가적 의제로 내세웠던 참여정부에서 이러한 현상이 오히려 더 가속화되고 있다. 반면 서울이나 수도권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금융허브'가 한국의 새로운 청사진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일부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동아시아 다른 도시와의 입지경쟁과 경제적 효율성을 근거로 서울을 넘어서는 '대수도론' 전략을 주장하고 있다. 한 나라를 도시=국가로 만들자는 발상이다. <시민과 세계> 11호 특집에서는 공간과 경제를 연결지우면서 ‘공간의 일극화’ 전략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다각도로 짚어보고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사는 길’을 찾아보려고 했다.
정준호는 지식ㆍ서비스산업 중심의 선진통상국가전략과 국가균형발전전략이 모순된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선진통상국가에 기초해 수도권을 비즈니스 허브화하려는 전략은 기존의 수도권 위주의 공간구조를 확대ㆍ재생산하는 전략으로 산업 및 지역 간의 균형발전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며, 이는 적극적 개방에 의거한 새로운 불균형 성장담론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또 그는 한국경제의 공간구조 분석을 통해 ITㆍ서비스산업 등 지식기반산업이 오히려 수도권 집중과 지역 간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보기에 한국경제의 불균형적인 발전패턴을 더욱더 고착화시킬 이러한 경로에서 탈피하려면 개방의 관리가 필요하고 산업부문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광역권에 기초한 경제적 연방의 물적 토대로 기능할 수 있다. 변창흠은 균형발전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참여정부에서 역설적으로 어느 정부보다 더 수도권 규제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또 수도권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해서 일방적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대수도권론을 비판하고 수도권의 위상과 경쟁력에 대해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수도권의 국제경쟁력이 낮은 것은 수도권 규제 때문이라기보다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취약한 삶의 질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대안이 필요한데, 수도권과 대응할 수 있는 광역대도시권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일, 토지공공성을 제고하는 일 등이 대안의 중요한 요소다. 강현수의 글은 직접 참여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의 공과를 평가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정책은 지역의 자립적ㆍ내생적 발전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보다 지역에서 대규모 토건사업에 대한 유치 기대나 중앙정부의 재정지원을 얻는 데만 주력하게 만들었다. 또 오랫동안 낙후되었던 지역 주민들의 개발 욕구와 개발이익 기대심리에 편승하여, 지역의 혁신이나 내생적 발전과 무관한 경부운하와 같은 초대형 개발공약들이 오히려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강현수는 참여정부의 정책 성과에서 앞으로 더 지켜볼 부분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심포지엄에서 김용웅(충남발전연구원장)의 반박이 있었고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런데 도대체 농업을 살리지 않는 지역 살리기가 가능한가.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회는 공간 경제특집을 구상하면서 처음부터 이에 대해 아주 강력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공간의 일극화 문제는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 문제를 넘어선다. 그 바탕에는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이라는 오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 ‘문명으로서의 도시’의 그늘을 짚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미 FTA 통상쿠데타를 밀어붙이면서 “농업도 시장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변한 국정 최고책임자의 발언도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어렵사리 받은 이성재의 글은 고대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로서의 도시 문명이 어떻게 농촌의 착취와 피폐 위에 그 불빛을 밝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도시에 어떤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잘 보여 준다. 역사와 함께 오랜 도시와 농촌의 대립,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나 우리 안에서나 양자 공동의 위기를 몰아오고 있는 이 불행한 상황을 극복하는 ‘농도불이’(農都不二)의 상생의 길은 없는가. 북유럽은 노동 있는 복지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이 점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다시 우리에게 농촌은 무엇인가. 엄청난 양의 집중적 글쓰기로 몸이 많이 상해 있는 우석훈이 시장경제학과 정치경제학 할 것 없이 농업을 죽이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비판하면서, 농업 붕괴를 막아 내고 ‘농업을 살리는 한국적 신진보‘의 사유와 발전의 길에 대해 아주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분량이 길지는 않다 해도 이성재와 우석훈의 글은 여러 모로 함축하는 바가 깊고 넓다. 농도불이의 사고는 한 걸음만 나가면 사람(人)과 땅(地)․하늘(天)이 둘이 아니라는 천지인삼재의 사고로 통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시민적 진보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핵심적 사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시민적 진보와 녹색 진보는 둘이 아니다.
굵직한 주제기획, 특집 외에도 이번 호에서 읽을 글은 많다. <대안 모델 논쟁>에서는 최근 수개월동안 특히 관심을 많이 끌고 있는 사회투자국가론과 베네수엘라 차베스 신사회주의 노선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거리의 정치학>에서는 시민사회운동이 거리로 나서 움직일 때 어떤 속박과 어려움을 안게 되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쓰고 있다. 주제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내용 자체가 매우 논쟁적이며,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
양재진의 글은 유럽의 우수한 성과나 복지확대에 장벽이 높고 성장지향성이 강한 한국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때, 사회투자국가가 세계화시대 성장과 복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합리적인 정책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토론회에서는 특히 정이환(서울산업대)과 큰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간 차베스 노선에 대한 평가는 논자에 따라 사회투자국가 이상으로 진폭이 컸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김달관의 글은 비교적 균형 잡힌 글로 읽힐 것이다. 그는 차베스 정권이 복지확대 노력과 토지개혁, 높은 지지율과 적극적인 국민참여,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 등 대외 정책에서 신사회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보기보다 실용주의적 성격도 많이 있고, 개인에 지나치게 하는 의존하는 네오포퓰리즘의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고 본다.
한상희와 안진걸의 <거리의 정치학>은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한상희의 경우는 집시법은 그 자체가 아예 폭력이다. 따라서 집시법의 재개정도, ‘바람직한 집회·시위문화’라는 담론도 우리가 주장할 것이 못 된다. “오로지 단 하나, 집시법의 폐지만이 우리에게 삶의 광장을 되돌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주장은 너무 과격한가? 우리는 독자들이 꼭 직접 이 사람의 글을 읽어 보고 판단해 주길 바라고 있다. 안진걸 역시 “집회시위에 절대 자유를 허하라”고 외친다. 그렇지만 한상희와 달리 시선을 우리 안으로 옮겨, 우리 사회운동도 더 많은 시민들이 더 다가올 수 있게 철저한 성찰이 필요하고 변화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밖에 남희섭이 한미 FTA에서 투자자국가소송제 못지않게 지독한 독소조항인데도 불구하고 덜 알려져 있는 ‘비위반 제소’에 대한 글을, ‘생태복지사회’ 주창자 홍성태가 박정희시대 이래 핵국가로서 한국의 높은 위험을 경고하면서 원자력문화재단의 폐지를 주장하는 글을 써주었다. 독자들과 함께 많이 반가워해야 할 글이 있다. 저 멀리 태평양 바다 건너 ‘싱크탱크의 나라’ 미국, 그 중에서도 싱크탱크의 도시 워싱턴DC에서 홍일표가 미국 보수적 싱크탱크가 어떻게 이념․사람․조직을 강화해 왔는지, 또 이에 대해 진보적 싱크탱크는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다룬 글을 보내 주었다. 직접 탐방하고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 있는 이 글은 참여사회연구소를 비롯하여 한국의 시민사회 싱크탱크들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
지금부터 진짜 꼭 써야 할 말이 있는데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독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리면서 이 글을 맺으려고 한다. 6월 2일은 한미 FTA를 반대하여 분신한 참여연대 회원 고 허세욱 씨의 49재 날이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였고 현재 민주노총 부산 지역본부 지도위원인 김진숙 씨가 <소금꽃나무>라는 책을 펴냈다. 그녀는 말한다. 대한민국은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다. 분명히 세상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또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세상은 변해야 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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