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님, 가리려하셔도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탈세감시/변칙 상속/증여 과세 :
2000/11/28 00:00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이 국세청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6)
그러나 청장님, 국민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사실을 알고 있고
국세청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장님
학창시절, 대학선배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어떤 사람이 자기집 다락방에서 이불 열채를 뒤집어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질식사 했다. 이 사람을 독립운동가라고 볼 수 있겠는가?"
당시 저는 그냥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했지만, 적어도 바깥세상에서 일제에 협력했거나 협력하지 않았더라도 침묵과 무관심으로 사실상 일제에 동조한 사람들보다는 순수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 11월 23일, 참여연대는 이재용씨등의 탈세의혹사건과 관련하여 종로2가 YMCA 앞에서 시위를 했습니다. 우리가 국세청앞에서 시위를 하지 못한 이유는, 현재 국세청이 입주해있는 삼성 소유의 건물에 '온두라스'라는 나라의 대사관이 들어가 있어 집회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상 보다 많은 기자들과 방송국 카메라가 이날 우리의 시위를 취재하여, 저는 우리의 주장을 많은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기자가 저에게 "취재는 하고 있지만, 이 기사가 보도될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여, 묘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 순간, 몇 년전의 악몽같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으로 활동하기 전, 회계사로서 잘먹고 잘살기 위해 전전긍긍할때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어느 라디어 방송프로그램에서 주1회 세금상식을 전하는 코너를 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프로를 진행하던 도중 저는 우발적으로 국세청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사실, 비판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곡한 표현이었습니다. 방송이 끝난 후 거래처에 방문하여 일을 하고 있던 중, 제 사무실 직원으로부터 황급히 전화가 왔습니다. "회계사님, 방금 국세청 공보관이라는 분한테 전화가 왔는데요, 우리 사무실 주소와 사업자등록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어떡하죠? 연락처를 남겼는데, 연락 한번 해보시겠어요?" 직원은 잔뜩 겁을 먹었는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저는 긴장된 마음으로 공보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신, 무슨 근거로 국세청을 비판하는거요? 사업자등록번호와 사무실 주소 가르쳐 주고, 다음에 사과방송 하쇼. 다음 방송 때 국세청 간부들이 다 듣고 있을 거요." 전화를 끊고 나서 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국세청에 찍히면 회계사로서 먹고 사는데 애로사항이 많을텐데, 어떡하지?' 그런데, 잠시 후 방송국 담당PD로부터도 연락이 왔습니다. PD 역시 국세청으로부터 항의전화를 받았다며, 아무래도 다음에 사과방송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도 걱정되어 한주 동안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후, 방송에서 저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지난 방송의 제 발언으로 대다수의 성실한 세무공무원의 명예에 누를 끼쳤다면, 사과드립니다.'는 내용으로 사과방송을 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저는 그 후로 한동안 방송기피증까지 생겼습니다.
이 기억만 떠오르면 저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국세청의 전화 한통에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벌벌 떨었던 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경험 때문에 저는 그 기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제도권내의 주요 언론에서는 우리의 시위에 대하여 단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사가 제일 두려워하는 국세청과 최대 광고주인 삼성을 동시에 비난하는 시위를 하였으니, 보도되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재벌변칙증여심판 시민행동'이 다락방에서 이불 열채를 뒤집어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어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가슴속의 진실을 외치려는 그 순수성과 정의감이 차츰 하나로 모여 3.1 운동과 같은 전국민적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언로가 막혀 이번 시민행동은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입니다. 비록 외롭고 어려운 싸움이 되더라도 중도에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많은 국민이 우리의 뜻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저희집 앞에 제가 가족과 함께 가끔 들르는 치킨집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집에 갔더니 주인아저씨가 대뜸 "삼성 탈세건 어떻게 되었어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청장님, 이재용씨의 변칙증여사건은 의외로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사건을 유야무야 넘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재벌이 수조원씩 변칙증여한 것에 대하여는 세금 한푼 못 걷는 국세청이 서민들만 쥐잡듯이 잡고 있네.' 라는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요? 국민들의 이러한 불만은 조세저항으로 이어질 것이고, 조세저항은 국가의 기강을 뒤흔들게 됩니다. 흔히, 조선말의 사회적 특징을 삼정문란으로 표현합니다. 삼정문란은 백성들의 조세저항으로 인한 세제세정의 문란을 뜻하는게 아닌가요?
'어리석은 사람은 일이 다 되어도 모르고 지혜로운 사람은 징조 전에 벌써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적 조세저항이 일어난 후에는 후회해도 이미 늦습니다.
청장님, 부디 조세저항 직전까지 간 민심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일 또 뵙겠습니다.
2000년 11월 29일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장 윤 종 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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