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몰아닥친 경제위기는 우리 모두를 당황스럽게 했다. 압축적 성장가도를 달려온 우리 사회의 근간이 얼마나 허약했는지 확인되었고, 실업률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생계형 범죄와 노숙자의 급증, 생계곤란으로 인한 급격한 가족해체 등 사회 곳곳에서 심각한 경고등이 켜지고 있었다. 긴급처방이 필요했다. 더 이상 가족해체의 위기와 생존의 문제가 남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인식,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게 했던 급박한 상황 속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탄생하게 되었다.

모든 국민의 생존권 보장이 국가의 의무이며 나이나 근로능력 유무와 무관하게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모든 국민에게 수급권을 인정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은 사회복지 제도에 있어서 커다란 진전이며 획기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라는 사회적 성과의 일등공신은 경제위기였다. 경제위기는 사회적 안전망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과 1년여만에 법률의 제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주었고, 시민운동사에서 유례없는 그리고 사회복지의 역사에 있어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진전을 이루어내게 했다. 그러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의 가장 큰 원동력은 시민의 힘이었고, 그 가운데에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있었다.

94년 12월부터 시작된 국민복지기본선확보운동의 일환으로 참여연대는 생활보호법개정운동을 벌여왔었다. 최저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국민복지기본선확보운동은 참여연대 창립 초기 메인 사업이었다. 특히 국민복지기본선확보운동은 이제는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의 일반적 수단이 된 공익소송의 새 장을 여는 역할을 했다. 국민연금기금운용손실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를 통해 당시 부실한 국민연금기금운용 실태를 폭로하고 관련 법률개정을 이뤄냈고, 행정소송을 통해 당시 13만명에 달했던 65∼70세 노인들에게 노령수당을 지급하도록 하는 등 그 성과도 매우 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복지를 연구하는 젊은 학자들과 헌신적인 법률전문가의 절묘한 결합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결합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운동 과정에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고실업시대 사회안전망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국민복지기본선확보운동으로 참여연대는 6개 분야에 걸친 세부적 개혁과제를 제시하였는데, 최저선 확보의 근간이 되는 생활보호법의 개정은 유독 어려웠다. 수차례 개정청원안을 제출하고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너무나 낡은 틀, 복지에 대한 시혜적인 인식으로 인해 그러한 노력은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97년 말 경제위기가 닥쳐온 이후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높은 요구가 있었으나 안전망의 가장 기본이어야 할 생활보호법의 틀은 말 그대로 헌 부대였다.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필요했다. 참여연대는 고민했다.

무엇을 사회적 안전망의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가? 생활보호법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고, 고실업시대에 조응하는 실업정책의 틀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추상적 구호로는 부족했다. 결국 참여연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경제위기는 그 누구보다도 저소득층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었다. 외환위기에 따른 경제적 고통의 하중을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받은 것이 저소득층이었고 아마도 가장 오랜 동안 고통받는 것도 그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위기에 따른 사회적 처방은 이들을 가장 우선 고려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이었다.

98년 초부터 참여연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황은 급박했다. "고실업시대 사회적 안전망, 그것은 바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이라는 등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운동초기의 최고의 목표였다. 등식의 성립, 사회적 의제형성 여부가 운동의 성패를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생활보호법의 문제를 절감해 왔던만큼 대안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당시 법률 성안작업에 참여했던 학자와 법률전문가들이 사회복지제도의 일대 전환을 꾀하는 거대한 실험이 그들의 머리와 손 끝에 달려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수십년간 논쟁을 거듭하여 이뤄낼 정도의 진전이 단 1년 사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꿈이라도 꿀 수 있었을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

98년 7월 23일 참여연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청원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되고, 이후 제정된 법안에도 그 기본 골격은 거의 유지되었다. 98년 하반기 내내 참여연대는 이 청원안을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98년 9월 자식의 손가락을 잘라 보험금을 받으려 했던 비정한 아버지의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참여연대는 그 가족의 한계적 상황에 주목하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를 욕하기 전에 저소득 실직자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라고 요구했고, 제2의 강○○를 막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최초로 사회복지학계 교수 209명의 공동성명을 이끌어 내고, 만민공동회, 국민복지권리선언, 집회 등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이 과정은 민주노총과 한국여성단체연합, 일용직 저소득노동자 실업대책협의회 등 여러 단체와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고, 결국 98년 12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98년 정기국회에서의 법안 통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법률제정을 위한 광범위한 연대

99년 3월,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 64개 단체와 함께 법제정 운동을 보다 힘있게 추진하기 위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제정추진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결성하고, 노동계와 종교계, 빈민단체와 여성단체 등과 연대하게 되었다. 연대회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상반기 중 제정을 계기로 저소득 실직자 등 국민들의 생존권 보장과 고실업시대의 사회안전망 구축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99년 이후부터 법률제정을 위한 핵심 고리는 국회였지만, 기획예산처와 노동부를 비롯한 정부부처와의 법안 내용에 대한 세부적 쟁점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법률 제정에 따른 예산소요 문제로 기획예산처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자활인프라와 관련하여 노동부와 복지부와의 계속적인 대립이 있었다.

99년 초 운동의 무대는 지역으로 넓혀졌고, 단체들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운동의 전기는 김대중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 99년 6월 21일 김 대통령은 울산에서 "중산층과 서민들이 안심하게 살 수 있도록 국민생활보장기본법을 제정하겠다"고 입을 열었다. 연대회의를 중심으로 각 정당을 대상으로 한 설득과 압력을 보다 본격화하였고, 99년 6월 열린 제205회 임시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자는 1차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주된 이유는 법안을 다룰 주체인 국회의원들이 법안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부부처의 미온적 태도도 한 몫을 했다. 절박했던 연대회의는 한나라당과의 면담을 통해 법제정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결국 한나라당은 연대회의의 의견을 대폭 수용, 97년 7월 6일 한나라당의 '국민기본생활보장법'을 발의하게 된다. 드디어 법의 제정을 놓고 여야가 경쟁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한나라당의 김홍신 의원과 새천년민주당의 이성재 의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1999년 7월 12일 국회 보건복지상임위원회가 개최되어 법안심사소위로 송부하여 법안의 제정이 눈앞에 다가오는듯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부터 제205회 임시국회는 한나라당의 전임 재정국장이 구속됨으로써 공전을 거듭하여, 결국 법안을 심사하기로 한 법안심사소위가 무산되었고, 또 다시 법제정이 어려워지는 고비를 맞게 되었다. 공은 1999년 8월 열린 제206회 임시국회로 넘어갔다. 이미 여야 모두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을 당론으로 확정한 상태인데다가,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도 적극성을 보이면서 법제정은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협상은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다.

법안의 골격을 유지하는 선에서 행정부의 의견을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소득인정액의 적용을 2003년으로 연기하는 등이 이 협상과정에서 수용되었다. 1999년 8월 9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법안심사소위와 보건복지상임위원회를 통과했고, 법률의 시행시기가 일부 조정되었다. 당초 연대회의는 2000년 7월 시행을 주장하였고, 준비부족을 이유로 복지부는 2001년 1월을 주장하였으나 2000년 10월로 조정되게 된다. 1999년 8월 11일에는 법제사법위원회, 그리고 다음 날 1999년 8월 12일에는 제206회 임시국회 전체회의를 통과하게 되었고, 9월 7일자로 공포되었다. 1998년 7월 참여연대의 청원이 있은 지 13개월만에 그 골격이 유지된 채로 법률이 제정되는 가히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우리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구체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법률이라 할 수 있다. 최저생계비 이하의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은 이 법률을 통해 급여를 받을 자격, 즉 권리를 갖게 되었고, 용어도 '생활보호대상자'에서 '수급권자'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권리성 급여의 인정은 헌법적 권리의 실현이자 '사회 연대'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시혜로만 여겨졌던 복지문제를 권리의 문제로 전환시켜낸 것이다.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과거 생활보호법의 많은 한계를 뛰어넘었다. 과거 생활보호법은 18세 미만, 65세 이상의 거택보호대상자에게만 생계급여를 제공하였으나 나이나 근로능력에 무관하게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사람은 수급권을 갖게 되며,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차액만큼을 생계급여로 받게 된 것이다.

법률 제정으로 기초생활보장 소요예산은 1조8,479억원에서 3조5,069억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참여연대는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수급자가 되기 위한 수많은 관문이 존재했고 제도 시행과정에서 소득의 산정과 부양의무기준 적용 등에서 수급권을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결국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존재함이 확인되었다.

또한 수급자의 선정과 보장의 기준이 되는 최저생계비의 현실화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논쟁이 이루어질 영역이다. 20004년 1월에는 부양의무자 범위를 일부 축소하고, 최저생계비의 계측주기를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등의 법률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개선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경계에 선 차상위 빈곤계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만으로는 안된다는 인식이 점차 싹트고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과연 모든 국민의 기초생활이 보장되고 있는가? 현재 기초생활보장의 수준이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있는가? 가난을 만들고, 깊게 하는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 삶의 질을 높이고, 성장의 성과를 함께 나누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앞으로 참여연대가 품고가야 할 숙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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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위원회
2004/09/17 16:02 2004/09/1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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