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 빈곤아동의 인권, 누가 지켜야 하는가?
월간 복지동향/2003 :
2003/10/10 00:00
“국가는 모든 아동에게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 발달을 위해 필요한 생활수준을 보장받을 권리를 인정한다.”
우리나라가 1990년 가입한 UN 아동권리협약에 나오는 문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아동들에게 이러한 문구는 공허하기만 하다.
아직도 19만명의 아동이 결식아동으로 분류되어 학교나 종합사회복지관으로부터 매일 식권 한장만을 받고 있고, 연간 30만명으로 추산되는 학대아동을 위해서는 겨우 17개의 학대예방센터만이 존재한다. 부모를 잃은 아동 중 7천명은 ‘소년소녀가정’이라는 그럴듯한 호칭에 따라 19세도 안된 미성년의 처지에 가장의 멍에를 지고 자신과 자신의 동생들을 홀로이 꿋꿋하게(!) 돌보도록 사회가 강제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 고아원이 전국적으로 270여개나 되고 그곳의 2만명 아동들은 지역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가정’을 모르고 커가고 있다. 그리고 2003년 중앙정부 예산 111조 7천억원 중 아동복지를 위해 쓰이는 예산은 0.075%에 해당하는 840억원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대한민국의 아동의 권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케이(Ellen Key)여사는 20세기를 ‘아동의 세기’라 정의내린바 있다. 그러나 21세기가 된 한국은 적어도 아동의 인권 확보와 아동복지의 발달이란 측면에서는 현재 동토(凍土)의 찬바람만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아동만큼 그 부모를 누구로 만났느냐에 따라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나라도 그리 흔치않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해진 ‘일생일대 최대의 제비뽑기’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아이러니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심각한 이의제기 없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선진국가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혹은 근자에 현정부가 앞서 내세웠던 2만불시대에 걸맞는 사회가 되려면 아동에 대한 ‘사회적 양육’ 개념이 국민의 인식속에서 그리고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확고히 자리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식안에 그리고 우리사회체계 안에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는 서구 선진국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 사회에 전통적인 유습으로 강고하게 남아있는 가부장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동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여기기보다는 어른들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인식이 문제이다. 이는 장유유서(長幼有序)로 대변되는 유교적인 전통과 결부되어 자신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인 동시에 그들의 부모 아닌 그 누구로부터의 간섭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바로 “내새끼”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 우리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로부터 형성된 무한개인책임주의가 결합되면 아동의 운명은 그저 그 부모의 문제로만 남게 된다. 따라서 사회제도가 이들 부모-자식의 관계에 끼어들 여지는 지극히 좁다. 오로지 그 아이를 책임지는 보호자이자 부양의무자인 부모가 없을 경우에만 최소한의 정부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인권, 그중에서도 사회권에 대한 후진적 인식도 한몫한다. 독재에 항거하여 정치적 자유를 향유코자하는 열망은 우리사회에 비교적 시민권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지만, 그 이후 자본주의와 시장의 폐해로부터 그 구성원의 삶을 지켜 나가는 데 필수적인 사회권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행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나마도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주창하고 이를 쟁취해 나갈 수 있는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성인과는 달리 아동은 자신들의 권리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아동권은 성인들의 성숙한 사회권에 대한 인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아동권의 저수준은 우리사회 사회권의 현주소와 등치된다. 정녕 열악한 가정과 빈곤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시민사회단체를 볼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은 그러한 이유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분명 이런 후진적인 아동권 아래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이는 단순히 하기좋은 말로 ‘아동은 우리사회의 미래’라는 구두선정도에 근거한 말은 아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그가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안심프로젝트인 ‘슈어 스타트(Sure Start)’라는 빈곤아동퇴치정책을 선언하였다. 집권 후 10년내에 아동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고 20년내에는 이를 완전퇴치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아동을 정책대상의 제일 우선순위로 올려 놓은 의욕적인 정책이다. 이를 위해 아동수당의 급여수준을 높이고, 아동이 있는 가정의 생활지원수준을 증대시킴은 물론, 아동이 있는 가정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WFTC(Working Families Tax Cedit), CTC(Children's Tax Credit), ICC(Integrated Child Credit) 등 적극적인 정책 도입을 추진해 왔다. 심지어 결혼수당 대신 아동세제혜택인 CTC를 도입함으로써 아동이 있는 가정의 소득보전을 정책집행 일순위로 끌어올리고 중도좌파라 하더라도 매우 강력하다 할 수 있는 소득재분배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를 위해 부유계층의 호주머니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겠다고 하여 우파의 정치적 공세를 자초하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소득지원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거리 내의 지원(help within pram-pushing distance of the home)”이라는 구호하에 아동이 있는 가정에 적극적인 사회복지서비스를 결합시킨다. 이 모든 것이 영국 아동의 빈곤 퇴치를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사회는 여성의 평균출산율 1.17명이라는 눈부신(!) 가족계획의 성과 덕에, 지금의 추세를 단순하게 연장하면 2050년대부터 인구가 절대추치에 있어서 줄어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2150년 경에는 한반도 인구 ‘제로(zero)’ 상태에 놓인다. 매우 기이한 예측이 아닐 수 없으나 적어도 통계기법에 의하면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동의 출산과 출산된 아동의 건강한 보호는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선진 영국만큼의 빈곤아동을 위한 정책프로젝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이에 대한 필요성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심각한 ‘집단 불감증’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사회적인 소속감을 맛보지 못한 아동의 미래는 또한 어떻겠는가?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맛볼 때에 인간은 인생의 의미가 부여된다. 이는 건강을 지켜주는 정서적 수단이 되기도 하다.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지켜야할 행동수칙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관계 속에서이다. 어릴 때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고립감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로부터 이러한 정상적인 행동수칙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아동기의 빈곤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정상적 사회관계를 맺는 방식을 모른다는 점에서 그 아동 자신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이 아동전문가의 한결같은 결론이므로, 이러한 아동의 양산은 한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현재 적어도 교육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는 아동 40만명, 기초생활보장수급권 가구의 아동 16만명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빈곤아동의 최소치이다. 그러나 이들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차라리 미취학아동이라면 그나마 낫다. 알량하지만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보육료가 면제되거나 부담이 절반으로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식적인 지원체계는 거의 전무하다. 전국적으로 300개 남짓의 민간공부방에서 월 50만원의 박봉 속에 ‘희생’과 ‘봉사’로 중무장된 공부방교사들이 열악한 공간이나마 빈곤아동의 극히 일부를 붙들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국회는 공부방의 법제화를 통한 양성화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정부는 공식적인 시설이 아니므로 예산이나 지원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수십만명의 빈곤아동들이 지금 몸서리치게 새기고 있을 사회적인 고립감이 미래 우리에게 어떤 형태의 보복으로 되돌아올지 몸서리쳐지 않는가? 그러나 당장의 예산부족 타령 속에 주판알만 튕기고 있는 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관료들의 실상이다. ‘집단적인 백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아동의 빈곤. 이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 지수인 동시에, 뒤집어 보면 미래의 희망지수이기도 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 있어 후진성 지수는 크기만하고 미래의 희망지수는 초라하다. 그러나 수십만명의 빈곤아동이 방치되는 현실 속에서 우린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조차 보려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욱 암울한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1990년 가입한 UN 아동권리협약에 나오는 문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아동들에게 이러한 문구는 공허하기만 하다.
아직도 19만명의 아동이 결식아동으로 분류되어 학교나 종합사회복지관으로부터 매일 식권 한장만을 받고 있고, 연간 30만명으로 추산되는 학대아동을 위해서는 겨우 17개의 학대예방센터만이 존재한다. 부모를 잃은 아동 중 7천명은 ‘소년소녀가정’이라는 그럴듯한 호칭에 따라 19세도 안된 미성년의 처지에 가장의 멍에를 지고 자신과 자신의 동생들을 홀로이 꿋꿋하게(!) 돌보도록 사회가 강제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 고아원이 전국적으로 270여개나 되고 그곳의 2만명 아동들은 지역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가정’을 모르고 커가고 있다. 그리고 2003년 중앙정부 예산 111조 7천억원 중 아동복지를 위해 쓰이는 예산은 0.075%에 해당하는 840억원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 사회가 대한민국의 아동의 권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케이(Ellen Key)여사는 20세기를 ‘아동의 세기’라 정의내린바 있다. 그러나 21세기가 된 한국은 적어도 아동의 인권 확보와 아동복지의 발달이란 측면에서는 현재 동토(凍土)의 찬바람만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아동만큼 그 부모를 누구로 만났느냐에 따라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나라도 그리 흔치않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해진 ‘일생일대 최대의 제비뽑기’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아이러니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심각한 이의제기 없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선진국가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혹은 근자에 현정부가 앞서 내세웠던 2만불시대에 걸맞는 사회가 되려면 아동에 대한 ‘사회적 양육’ 개념이 국민의 인식속에서 그리고 사회보장제도 속에서 확고히 자리잡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식안에 그리고 우리사회체계 안에 무엇이 문제이기에 우리는 서구 선진국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우리 사회에 전통적인 유습으로 강고하게 남아있는 가부장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동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여기기보다는 어른들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인식이 문제이다. 이는 장유유서(長幼有序)로 대변되는 유교적인 전통과 결부되어 자신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인 동시에 그들의 부모 아닌 그 누구로부터의 간섭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바로 “내새끼”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 우리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로부터 형성된 무한개인책임주의가 결합되면 아동의 운명은 그저 그 부모의 문제로만 남게 된다. 따라서 사회제도가 이들 부모-자식의 관계에 끼어들 여지는 지극히 좁다. 오로지 그 아이를 책임지는 보호자이자 부양의무자인 부모가 없을 경우에만 최소한의 정부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인권, 그중에서도 사회권에 대한 후진적 인식도 한몫한다. 독재에 항거하여 정치적 자유를 향유코자하는 열망은 우리사회에 비교적 시민권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지만, 그 이후 자본주의와 시장의 폐해로부터 그 구성원의 삶을 지켜 나가는 데 필수적인 사회권에 대한 관심으로의 이행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나마도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주창하고 이를 쟁취해 나갈 수 있는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성인과는 달리 아동은 자신들의 권리를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아동권은 성인들의 성숙한 사회권에 대한 인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아동권의 저수준은 우리사회 사회권의 현주소와 등치된다. 정녕 열악한 가정과 빈곤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시민사회단체를 볼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은 그러한 이유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분명 이런 후진적인 아동권 아래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이는 단순히 하기좋은 말로 ‘아동은 우리사회의 미래’라는 구두선정도에 근거한 말은 아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그가 집권하기 시작하면서 일종의 안심프로젝트인 ‘슈어 스타트(Sure Start)’라는 빈곤아동퇴치정책을 선언하였다. 집권 후 10년내에 아동빈곤을 절반으로 줄이고 20년내에는 이를 완전퇴치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아동을 정책대상의 제일 우선순위로 올려 놓은 의욕적인 정책이다. 이를 위해 아동수당의 급여수준을 높이고, 아동이 있는 가정의 생활지원수준을 증대시킴은 물론, 아동이 있는 가정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WFTC(Working Families Tax Cedit), CTC(Children's Tax Credit), ICC(Integrated Child Credit) 등 적극적인 정책 도입을 추진해 왔다. 심지어 결혼수당 대신 아동세제혜택인 CTC를 도입함으로써 아동이 있는 가정의 소득보전을 정책집행 일순위로 끌어올리고 중도좌파라 하더라도 매우 강력하다 할 수 있는 소득재분배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를 위해 부유계층의 호주머니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겠다고 하여 우파의 정치적 공세를 자초하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소득지원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거리 내의 지원(help within pram-pushing distance of the home)”이라는 구호하에 아동이 있는 가정에 적극적인 사회복지서비스를 결합시킨다. 이 모든 것이 영국 아동의 빈곤 퇴치를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사회는 여성의 평균출산율 1.17명이라는 눈부신(!) 가족계획의 성과 덕에, 지금의 추세를 단순하게 연장하면 2050년대부터 인구가 절대추치에 있어서 줄어들기 시작하고 마침내 2150년 경에는 한반도 인구 ‘제로(zero)’ 상태에 놓인다. 매우 기이한 예측이 아닐 수 없으나 적어도 통계기법에 의하면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동의 출산과 출산된 아동의 건강한 보호는 국가의 존립과 직결된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선진 영국만큼의 빈곤아동을 위한 정책프로젝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이에 대한 필요성조차 실감하지 못한다. 심각한 ‘집단 불감증’이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사회적인 소속감을 맛보지 못한 아동의 미래는 또한 어떻겠는가?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맛볼 때에 인간은 인생의 의미가 부여된다. 이는 건강을 지켜주는 정서적 수단이 되기도 하다.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지켜야할 행동수칙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관계 속에서이다. 어릴 때 느끼는 사회적 고립감은 고립감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로부터 이러한 정상적인 행동수칙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아동기의 빈곤은 이렇게 사회적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며 정상적 사회관계를 맺는 방식을 모른다는 점에서 그 아동 자신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이 아동전문가의 한결같은 결론이므로, 이러한 아동의 양산은 한 사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현재 적어도 교육부로부터 학비를 지원받는 아동 40만명, 기초생활보장수급권 가구의 아동 16만명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빈곤아동의 최소치이다. 그러나 이들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차라리 미취학아동이라면 그나마 낫다. 알량하지만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보육료가 면제되거나 부담이 절반으로 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공식적인 지원체계는 거의 전무하다. 전국적으로 300개 남짓의 민간공부방에서 월 50만원의 박봉 속에 ‘희생’과 ‘봉사’로 중무장된 공부방교사들이 열악한 공간이나마 빈곤아동의 극히 일부를 붙들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국회는 공부방의 법제화를 통한 양성화에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정부는 공식적인 시설이 아니므로 예산이나 지원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 수십만명의 빈곤아동들이 지금 몸서리치게 새기고 있을 사회적인 고립감이 미래 우리에게 어떤 형태의 보복으로 되돌아올지 몸서리쳐지 않는가? 그러나 당장의 예산부족 타령 속에 주판알만 튕기고 있는 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관료들의 실상이다. ‘집단적인 백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아동의 빈곤. 이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 지수인 동시에, 뒤집어 보면 미래의 희망지수이기도 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 있어 후진성 지수는 크기만하고 미래의 희망지수는 초라하다. 그러나 수십만명의 빈곤아동이 방치되는 현실 속에서 우린 일그러진 우리의 자화상조차 보려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욱 암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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