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계의 2003년

올해는 유난히도 우울하고 답답한 뉴스가 많았던 것 같다. 연초부터 충격적인 대구 지하철 참사로 시민들은 한동안 지하철 타는 것을 두려워해야 했고, 3월에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전쟁의 참상을 또 다시 확인해야 했으며, 7, 8월경에는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이 연이어 한숨을 쉬게 했다. 경제는 언제 바닥을 치는지 아무도 모를 지경이었고 실업률은 또 다시 증가하여 8%대로 접어들었다. 개혁에 대한 기대를 안고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국민을 위로해주기 보다는 개혁의 의지와 방향을 잃고 헤매어 실망을 안겨주었다. 올해 보건의료계 역시 전체 사회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대와 희망보다 답답함과 지루함이 전면에 흘렀던 것 같다.

사실 보건의료계에서 올해는 지난 시기 동안 추진되어 온 정책이 일단락 되고 새로운 보건의료 개혁과제가 사회적으로 제시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건강보험은 올해 7월 재정통합을 마지막으로 단계적 통합을 완수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며, 현행 행위별수가제의 문제점1)에 대한 대안으로 지난 7년여 동안 시범사업을 거쳐온 질병군 포괄수가제는 모든 의료기관에 대하여 적용을 앞두고 있었다. 한편 지난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공공보건의료 확대ㆍ강화”는 새로운 보건의료 개혁 과제의 화두가 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을 확충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의료공급체계에 공공적 성격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는 표준적 보건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한해를 되돌아보면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2003년이 갖고 있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건강보험 통합은 간신히 일단락 지었으나 오랜 기간동안 준비해온 포괄수가제를 모든 의료기관에 적용하는 것은 후퇴되었으며, 의료기관평가제는 평가의 대상이 주체가 되어버려 객관성에 의심을 받게 되었고 기대를 모았던 공공보건의료 확충 계획은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허공을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노무현 정부 출범이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급기야 ‘보건의료 개혁 정책 실종’이라고 상황을 진단하며 그 책임을 물어 보건복지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까지 치닫고 말았다.

건강세상네트워크의 출범과 2003년 활동

건강세상네트워크는 과거 국민 건강권 운동을 수행해 온 여러 노동ㆍ농민ㆍ시민ㆍ사회단체의 연대체였던 건강연대의 계승 단체로 2003년 4월 26일 출범하였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과거 건강연대가 ‘단체회원’ 구조에서 ‘개인회원’에 바탕을 둔 단체로 전환하면서 ‘환자ㆍ의료소비자 권리 보장’과 ‘건강권 보장을 위한 제도개선 활동’과 관련된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건강세상네트워크에게 2003년은 출범 이후 8개월의 활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수행한 활동의 양은 시간에 비해 적지 않았다. 올해 건강세상네트워크의 여러 활동 중에서 특히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수행한 ‘서울시립동부병원 민간위탁 반대활동’과 적십자사의 혈액관리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위한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시립동부병원은 결국 민간병원이 아닌 서울시가 운영하고 있는 지방공사강남병원에 위탁되어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이와 관련하여 향후 지방공사강남병원과 서울시립동부병원이 공공병원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가 공공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활동으로 시립동부병원 민간위탁 반대활동만 한 것은 아니다. 도시보건지소 설립을 위한 기초조사를 수행했으며, 원칙적 방향을 세우기 위한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이는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 지역 주민의 요구에 근거한 보건지소 유치 및 설립운동으로 발전할 바탕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적십자사 직원의 공익제보로 사회적 파급력이 더욱 확산된 ‘혈액관리의 안전성 문제’는 자칫 생명과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는 혈액관리에 대한 문제제기로 특히 적십자사의 안전 불감증과 관성적인 태도를 지적한 것이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지난 9월 적십자사 직원의 공익제보를 바탕으로 부패방지위원회에 접수하여 현재 감사원의 감사가 진행중이며, 향후 이와 같은 혈액관리의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관련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함께 건강세상네트워크는 무균실 입원 환자 물품구입 실태 조사 및 개선을 위한 활동, 의원을 대상으로 의료서비스 및 환자 알권리와 관련한 모니터링, 산부인과 진료실태 조사와 개선을 위한 활동, 시민을 대상으로 영수증ㆍ처방전 활용 캠페인 등을 통해 의료소비자 권리 보장과 의료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수행하였다. 또한 지난 10월부터는 건강보험과 관련하여 노동단체, 농민단체, 시민단체, 보건의료단체 등과 함께 의료소비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통해 건강권 운동을 위한 사회연대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의 뒷면에는 아쉬움 또한 많이 묻어있다. 우리 활동이 정책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의 접근에 치우친 반면, 빈민ㆍ장애인ㆍ노인ㆍ외국인 노동자 등 소수자들의 건강권 문제를 당사자들과 함께 정리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한 점이다. 이는 시민단체로서 건강권 운동의 대중화를 내걸었던 건강세상네트워크에게는 자신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여겨질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2004년 활동, 건강권 운동의 대중화를 향하여

유독 보건의료와 관련된 시민단체는 많지 않다. 환경관련 단체는 전국적으로 1백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어 지역사회의 환경에 맞게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는데 이에 비하자면 보건의료와 관련된 시민단체는 상당히 적다. 이는 환경운동의 대중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우리 입장에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들이 ‘건강’과 ‘의료’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의학’과 ‘질병’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행복의 제 1 조건’으로 건강을 꼽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건강권 운동’이 대중적인 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건강권 운동이 대중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점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선 내용적으로 어렵고 우리 나라 보건의료의 환경으로 볼 때 ‘건강’을 ‘권리’로 쉽게 인식되지 않으며, 더군다나 문제를 느끼고 있는 당사자들도 의료공급자로부터의 피해를 우려하여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점 등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점을 극복하고 나아가 2004년이 건강권 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해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과 환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의료소비자 권리 운동을 전개하고, 시민의 힘으로 건강보험 개혁을 이루며, 빈민ㆍ환자ㆍ노인ㆍ장애인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 자신의 건강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2004년에도 정책적으로 주목하고 대응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보건복지 예산 확보, 공공보건의료 확충, 노인요양보험제도 도입, 의료서비스의 질 개선 등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적 활동과 더불어 우리 국민과 함께 건강권 보장을 위한 운동을 펼쳐내기 위한 운동, 그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2004년을 만들어 보고자 할 것이다.

마치며

2003년에 있었던 수많은 일에 대응하며 지나왔던 과정은 재창립을 한지 1년도 안 되는 단체인 건강세상네트워크의 입장에서 매우 버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단체가 안정될 만큼 재정적 여건이나 회원이 확보되지 못했으면서 이러한 조직 내적 문제를 추스릴 짬도 갖지 못한 채 많은 일들에 대하여 대응해야만 했던 상황은 우리의 역량만으로는 힘겨웠다. 더욱이 나이 어린 단체가 보이는 미숙함과 시행착오 역시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하지만 지난 한해는 우리에겐 무척이나 소중한 경험을 했던 시기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과거 의료보험 통합운동과 보건의료 시민운동의 경험, 그리고 환자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출범한 건강세상네트워크가 앞으로 시민사회 내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떠한 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 우리는 2003년 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아직 어린 만큼 갈 길이 멀다. 그래서 아직 힘들다, 지쳤다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매야겠다.

-------------------------------------------------

1) 현행 행위별수가제는 의료공급자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하여 각 행위별로 가격(수가)을 두어 의료비를 산정해주는 방식으로 과잉진료와 의료비 증가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주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들은 행위별수가제 이외에 포괄수가제나 총액계약제 등을 다양한 지불제도를 개발하여 함께 사용하고 있다.
김창보 /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
2004/01/10 00:00 2004/01/10 00:00

트랙백 주소 :: http://blog.peoplepower21.org/Welfare/trackback/12639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