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문제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해방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정권을 만들어 냈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힘을 지니게 되었다. 아직까지 분단이라는 역사적 한계가 있지만 그간 추진된 햇볕정책을 비롯한 대북 화해정책으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나름대로 즐겁고, 괜찮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 그리고 긴장감을 일상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는 항상 우리 사회의 위기와 붕괴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좀더 귀를 기울이면 내일이라도 당장 사회가 멸망할 것처럼 난리를 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그간의 시대보다는 그래도 좀더 나아졌다는 오늘에 와서 이러한 위기와 긴장이 팽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첫째, 한국사회는 세계 유래 없는 고도성장의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쉼 없이 달려 따뜻하게 피를 돌게 해야 할 심장이 터지려고 하고, 왕성한 호흡으로 몸을 세워야할 폐가 그 한계치에 이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마라토너가 뒤에 있는 선수가 10미터를 붙었는지 100미터를 붙었는지 알아야 페이스를 조절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둘째, 공동체를 기반한 농촌의 급속한 붕괴와 지독한 개인주의를 기반한 도시화로 인해 오랜 세월 우리를 지탱해준 연대와 겸손의 문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농촌의 건강한 연대와 협력의 정신으로 삶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복지’는 열심히 달리는 마라토너가 중간 중간 마시는 작은 물병이다. 선두에 선 사람은 짧게나마 호흡을 고르고, 뒤에 오는 선수는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게 하는 작은 물병이다. 그 물은 선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뒤에 오는 선수에게도 주어진다. 선두보다 여러 가지로 기량이 부족한 선수에겐 더 많은 물과 심호흡이 필요하다. 물을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은 맨 뒤에 오는 선수가 물병을 잡는 순간 비로소 그곳을 정리하고 떠난다. 만약 맨 뒤의 선수가 지나기 전에 그곳에서 그들이 떠난다면 뒤에 쳐진 선수는 그 경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무리해서 달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 작은 물병이 하나의 마라톤 경기를 완성하듯 복지도 한 사회와 시대를 완성하는 도구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휴식과 심호흡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앞서 가는 사람이나 뒤에 서있는 사람이나 체력의 한계에 봉착해 있다. 앞에 있는 사람이건 뒤에 있는 사람이건 작은 물병을 집어야 하는 상황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따뜻한 연대와 나눔이 있다면, 쉬다 늦어진들 마구잡이로 앞서 가다 겪을 고통과 외로움보다는 나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기다려 주고, 나누며, 뒤돌아보아 준다면 분명 국민소득 2만불 사회로 가는 길은 조금 먼 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가 된다면 우리 시대는 국민소득 4만불 사회가 결코 부럽지 않을 것이다.

이번 총선에선 해방이후 때로는 전장의 군사들처럼, 때로는 열사의 낙타처럼 쉼 없이 달려온 우리 국민들, 특히 어렵고 외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낮은 사람들에게 휴식과 다시 달릴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국회의원이 선출되어야 한다. 이제 유권자의 선택이 남아 있다. 국민들은 현명한 판단을 내려 힘든 경쟁의 순간마다 작은 물병을 들고 끝까지 기다려 주는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온 국회의원을 뽑아 내야 한다. 선두에게만 시원한 물 몽땅 챙겨주고 중간이후는 오던 말던 물병 가지고 도망가는 국회의원은 이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김준엽 / 봉천동 나눔의 집 사무국장
2004/03/10 00:00 200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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