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비평] 언론사의 사회복지 쟁점형성에 대한 태도
월간 복지동향/2004 :
2004/05/10 00:00
이 나라의 언론은 소수자 문제에 관한 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Politically correct) 못해서 안달이다. 어느덧 장애자를 장애인으로, 동성연애자를 동성애자로 쓰는 것은 상식이 됐다. 가끔 동성연애자라는 ‘무식한’ 활자를 싣는 언론은 돌팔매를 맞기 십상이다.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중동’이든, ‘한경대’이든, 신문의 논조를 뛰어 넘어 ‘불쌍한 사람들’을 온정적으로 다루는 기사를 쏟아내기 여념이 없다.
올해도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신문마다 심금을 울리는 ‘미담’기사가 넘쳐났다. <조선일보>는 “이 세상에 못 이길 아픔은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해의 장애 극복상’ 수상자들의 눈물 겨운 이야기로 한 면을 가득 채웠다. <한국일보>는 “장애인 돕는 ‘장애인 수호천사’”라는 제목의 미담 기사를 실었다. 물론 이들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이런 기사들은 ‘수호천사’가 되지도, 장애를 극복하지도 못하는 장애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이 나라 언론은 장애인들이 2004년 4월20일을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이름 지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자 양반들에게 장애는 극복되는 것이지 철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왜 슈퍼장애인 신화를 비판하는지, 왜 비장애인중심 사회의 경쟁과 속도를 비판하는지를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적당한 눈물과 슬픔을 뒤섞어 면막음을 하면 그만이다. 장애인들이 버스와 지하철을 가로막는 순간, 이들의 온정도 멈춘다. 장애인들이 동등한 노동권을 요구하는 순간, 이들의 시혜도 끝난다.
장애인에 관한 한 눈물이 스미지 않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장애인 정책 관련 기사는 언제나 찬밥이다. 올해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장애인 운동이 중심 의제로 내세운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아예 기사에서 지워지거나 등장하더라도 제목만 남루하다. 유일하게 “‘장애인 차별철폐법’ 제정 서둘러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쓴 <한겨레>를 아무리 뒤적여도 그 법이 어떤 조항을 담은 어떤 법안인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제목만이 휘날릴 뿐이다. 이 나라의 ‘제도’ 언론만 보는 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어떤 내용인지를 알 길이 없다. 이 나라 언론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돈 안들이고 체면 세우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돈 안들이고 체면 세우기에는 동성애자 문제만큼 좋은 것도 없다. 얼마 전 ‘동성결혼’이 이슈가 됐을 때도, 언론들은 앞다투어 보도에 열을 올렸다. 민망하게도 ‘조중동’이나 ‘한경대’나 보도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 나라 ‘보수’에게 ‘동성연애’는 아직 우리편을 모으는 이데올로기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나라 ‘진보’ 혹은 ‘개혁’에게도 동성애는 심각한 고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금을 울리면 그만이다. 오직 <국민일보>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한다.
얼마나 눈물겨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동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혼을 못한다. 그런데 그들이 용감하게도 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역시 소개할만한 ‘미담’이다. 미안하게도 약간의 악담을 하자면, 만약 동성결혼이 허용돼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날 때도, 이들이 미담 기사만 쓸까? 동성결혼 혹은 파트너십이 인정돼서 동성커플에게 의료보장, 연금혜택 지원이 주어진데도 이들이 반기기만 할까? 역시 ‘비용’의 문제 앞에서면 이들의 온정은 멈추지 않을까. 그날 공개결혼의 현장에서 어느 기자도 이들이 겪고 있는 구체적 차별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그 뒤에도 이들을 ‘배우자’로 인정할 경우, 주어지는 혜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억울한 사람들’의 결혼에 ‘축하’만 하면 되니까.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니까.
언론이 축복하지 않는 동성애자들도 있다. 에이즈 감염인이다. 동성애자인권운동 진영은 여러차례 걸쳐 에이즈 감염인 통계 발표에서 ‘동성애자’를 따로 분류하는 일을 멈추라고 요구해왔다. 유독 ‘동성애자’만 따로 분류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머리 아프고, 조금은 급진적인 주장을 기사화하는 제도 언론은 없다. 동성애자의 기사에는 일종의 오리엔틀리즘이 바탕에 깔려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언제나 거리에서 자긍심 퍼레이드를 하는 요란한 모습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 흘리는 슬픈 모습으로 드러나야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와는 뭔가 ‘다르게’ 보여야 기사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소수자들은 눈물로 시혜와 온정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시대는 거했다. 장애인이든, 동성애자든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차이를 주장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 그러나 이 나라 언론은 여전히 시혜와 온정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성적소수자차별금지법 제정요구는 온정의 한계를 시험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돈’이 들고, ‘논리’가 복잡한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여전히 언론은 온정적일까? 글쎄. 마침내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면을 벗고, 불편한 속내를 커밍아웃 하지 않을까?
올해도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신문마다 심금을 울리는 ‘미담’기사가 넘쳐났다. <조선일보>는 “이 세상에 못 이길 아픔은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올해의 장애 극복상’ 수상자들의 눈물 겨운 이야기로 한 면을 가득 채웠다. <한국일보>는 “장애인 돕는 ‘장애인 수호천사’”라는 제목의 미담 기사를 실었다. 물론 이들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이런 기사들은 ‘수호천사’가 되지도, 장애를 극복하지도 못하는 장애인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이 나라 언론은 장애인들이 2004년 4월20일을 ‘장애인의 날’이 아니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이름 지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자 양반들에게 장애는 극복되는 것이지 철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왜 슈퍼장애인 신화를 비판하는지, 왜 비장애인중심 사회의 경쟁과 속도를 비판하는지를 섬세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적당한 눈물과 슬픔을 뒤섞어 면막음을 하면 그만이다. 장애인들이 버스와 지하철을 가로막는 순간, 이들의 온정도 멈춘다. 장애인들이 동등한 노동권을 요구하는 순간, 이들의 시혜도 끝난다.
장애인에 관한 한 눈물이 스미지 않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장애인 정책 관련 기사는 언제나 찬밥이다. 올해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장애인 운동이 중심 의제로 내세운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아예 기사에서 지워지거나 등장하더라도 제목만 남루하다. 유일하게 “‘장애인 차별철폐법’ 제정 서둘러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쓴 <한겨레>를 아무리 뒤적여도 그 법이 어떤 조항을 담은 어떤 법안인지를 알 수 없다. 그저 제목만이 휘날릴 뿐이다. 이 나라의 ‘제도’ 언론만 보는 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지, 어떤 내용인지를 알 길이 없다. 이 나라 언론의 ‘정치적 올바름’이란 돈 안들이고 체면 세우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돈 안들이고 체면 세우기에는 동성애자 문제만큼 좋은 것도 없다. 얼마 전 ‘동성결혼’이 이슈가 됐을 때도, 언론들은 앞다투어 보도에 열을 올렸다. 민망하게도 ‘조중동’이나 ‘한경대’나 보도 내용은 거기서 거기였다. 이 나라 ‘보수’에게 ‘동성연애’는 아직 우리편을 모으는 이데올로기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나라 ‘진보’ 혹은 ‘개혁’에게도 동성애는 심각한 고민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금을 울리면 그만이다. 오직 <국민일보>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한다.
얼마나 눈물겨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동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혼을 못한다. 그런데 그들이 용감하게도 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역시 소개할만한 ‘미담’이다. 미안하게도 약간의 악담을 하자면, 만약 동성결혼이 허용돼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날 때도, 이들이 미담 기사만 쓸까? 동성결혼 혹은 파트너십이 인정돼서 동성커플에게 의료보장, 연금혜택 지원이 주어진데도 이들이 반기기만 할까? 역시 ‘비용’의 문제 앞에서면 이들의 온정은 멈추지 않을까. 그날 공개결혼의 현장에서 어느 기자도 이들이 겪고 있는 구체적 차별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그 뒤에도 이들을 ‘배우자’로 인정할 경우, 주어지는 혜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억울한 사람들’의 결혼에 ‘축하’만 하면 되니까.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니까.
언론이 축복하지 않는 동성애자들도 있다. 에이즈 감염인이다. 동성애자인권운동 진영은 여러차례 걸쳐 에이즈 감염인 통계 발표에서 ‘동성애자’를 따로 분류하는 일을 멈추라고 요구해왔다. 유독 ‘동성애자’만 따로 분류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머리 아프고, 조금은 급진적인 주장을 기사화하는 제도 언론은 없다. 동성애자의 기사에는 일종의 오리엔틀리즘이 바탕에 깔려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언제나 거리에서 자긍심 퍼레이드를 하는 요란한 모습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눈물 흘리는 슬픈 모습으로 드러나야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와는 뭔가 ‘다르게’ 보여야 기사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소수자들은 눈물로 시혜와 온정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시대는 거했다. 장애인이든, 동성애자든 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이름으로 차이를 주장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 그러나 이 나라 언론은 여전히 시혜와 온정의 시대에 머물러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성적소수자차별금지법 제정요구는 온정의 한계를 시험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돈’이 들고, ‘논리’가 복잡한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여전히 언론은 온정적일까? 글쎄. 마침내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면을 벗고, 불편한 속내를 커밍아웃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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