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동향이 마련한 역사기행

이번 호부터 “복지동향이 마련한 역사기행(歷史紀行)”이라는 꼭지를 마련하였습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다루는 지나간 일들은 분명히 하나의 사실로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일들은 사람들마다 그 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는 역사적 사실이 됩니다. 사회복지의 역사 역시 이에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사회복지제도,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 시민들의 태도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에 역사적 과정이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뜻있는 몇몇 연구자들이 우리의 사회복지역사에 관해 연구를 수행해 왔고 또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거나 배우고 있는 사람들도 사회복지역사에 대단히 관심이 많지만 사회복지역사는 아직도 연구해야 할 것이 많고 시각정립을 위해 규명되어야 할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심지어는 사회복지역사를 다루는 과목의 명칭이 아예 사회복지발달사로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어 사회복지의 역사를 특정의 한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가 과목이름에 “노골적으로” 반영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는 우리나라 사회복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가진 사회복지제도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며 그로부터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케 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위원회에 참여하는 여러 연구자들의 기고문을 연속으로 실어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사회복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색다른 여행을 하고자 합니다.

“역사기행”을 처음 시작하는 이번 호에 그 첫 글을 미군정기의 사회복지에 관한 글로 잡았습니다. 혹자는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혹은 그보다 더 이전 시대의 복지역사부터 다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생각도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복지를 자본주의 사회의 한 산물이라고 볼 때 사회복지 역사에 관한 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변용과정에 연관지어 해석을 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사 이래 인간은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서로 돕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사회구조가 어떠하든지 인간은 서로를 도우며 살았습니다. 인간이 가진 이러한 자연스러운 상호부조가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상호부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왜곡되며 누가 어떻게 언제 그러한 왜곡을 고발하고 그것의 개혁을 시도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상호부조 정신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의미 있게 개혁되었는지를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 이전 사회, 우리의 경우로 보자면 미군정기 이전 시기의 사회복지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글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라도 우리 코너에서 환영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일제식민지 시기 사회복지역사에 관한 글도 이 꼭지의 진행경과를 보아 실을 계획이라는 점을 알려드리면서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아울러 질정(叱正)을 기다리겠습니다.

복지동향이 마련한 역사기행 ---- ①

미군정기의 사회복지 - 민간구호단체의 활동과 주택정책

대개 한국의 사회복지는 1960년대 초반 이후부터 그나마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이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그 시기 이후부터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정한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1960년대 이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사회복지의 전형적인 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 나름의 복지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였고 그런 제도들의 출발은 미군정 시기에 이루어졌다.

미군정 시기 그러한 제도들은 대개 구호정책 혹은 구호대책이라고 불렸고 그 구호정책의 대상자는 주로 전재민들이었다. 전재민들을 대상으로 한 미군정당국의 구호대책은 전재민원호단체를 통한 구호와 수용소 중심의 응급구호, 주택대책, 실업대책, 농촌이주사업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외에 노동자보호정책도 이 시기에 시행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이들 구호대책 가운데 민간구호단체와 그에 관련된 미군정당국의 정책, 그리고 주택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전재민(戰災民)

우선 미군정기 구호대책의 주요 대상이었던 전재민이란 어떤 존재인가? 일반적인 용법으로 전재민(戰災民)이란 전쟁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 즉 난민, 피난민(refugees)을 뜻하는 것으로 풍수해 등의 피해를 입은 사람을 가리키는 이재민(罹災民) 보다 정치경제적 함의를 많이 갖는 용어이다.

미군정기간에 사용된 전재민이라는 용어는 일제 하에서 징병‧징용‧이민 등으로 인해 해외에 거주하였다가 해방 이후 귀환한 동포들을 총칭하는 용어였는데 이에는 제2차대전의 피해자라는 의미가 포괄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었고, 또한 당시 전재민이라 할 때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월남민도 포함되었다. 월남민이 포함되었던 것은 일제 하에서 징용 당한 사람들 중에는 남한이 고향이면서 북한지역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 역시 제2차 대전의 직‧간접적 피해자였고 또 만주지역 등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지리적 경로상 북한지역을 거쳐서 귀환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전재민들을 출발지별로 보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전재민이 가장 많아서 대략 55% 정도가 해당하였고 만주에서 돌아온 전재민이 15% 가량 되었으며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전재민이 18% 가량이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재민들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돌아온 전재민들이었다. 그러면 이런 전재민은 미군정기에 얼마나 되었을까? 아쉽게도 전재민들의 정확한 수자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는 통계자료가 불충분하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군정기간 당시에도 빈곤자와 실업자, 전재민 등을 정확히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2차 대전이 끝나면서 해방된 남한 사회는 전쟁과 식민지배의 직‧간접적인 피해로 인해 공업, 농업 등 산업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었으며 이에 따라 실업이 급증함으로써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또한, 해방과 함께 전재민들이 대거 귀환함으로써 실업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당시 통계에는 실업자나 전재민의 수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은행이 발행한 ꡔ조선경제연보ꡕ나 보건후생부가 발행한 ꡔ후생ꡕ 등의 자료에 나온 수치 등으로 볼 때 실업자의 수는 미군정기간 내내 200만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공식 통계치를 통해 가늠한 수치이며 실제로는 실업자의 수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빈곤이 만연한 상황이어서 빈민과 전재민, 실업자, 이재민을 정확히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전재민이라는 용어도 원래는 이것이 전쟁피해자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군정기간의 실업자, 가난한 자 등 욕구가 있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의미로 전환되어 사용되었다(그리하여 전재민이라는 용어 외에 재민(災民), 재난민(災難民)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으며 특별히 전재민인 실업자를 가리켜서는 전재실업자(戰災失業者)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신문자료 등을 보면 전재민들은 “대개 한강다리 밑에 움을 파서 살았으며”, “미군이 버리는 쓰레기를 뒤지거나 혹은 빌어서 연명하는” 실정이었고(조선일보 46.12.11), “전재민들의 태반은 집과 양식없이 영양부족에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었다(조선일보 46.11.19). 가난과 실업, 전쟁피해, 귀환 등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할 때 미군정기 구호대책의 주요 대상이었던 전재민은 단순히 전쟁의 피해자라기보다는 식민지배의 희생자이며 따라서 단순한 구호대책이 아니라 해방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민족적 과제의 해결과 함께 하는 구호대책을 통해 접근해야 할 민중들이었다. 전재민으로 대표되는 해방공간의 가난한 사람과 실업한 사람들은 부당한 식민지배의 피해를 입은 우리 민족, 우리 민중 그 자체였다.

미군정과 구호대책

미군정은 미군 군사정부(the U. 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의 줄임말인데 미군이 인천을 통해 남한 땅에 상륙한 1945년 9월부터 정부수립이 이루어진 1948년 8월까지 거의 3년 동안 지속되었다. 미군정의 최고통치권자는 미육군의 삼성장군이었던 존 하지(John R. Hodge)였고 정책적 실무는 군정장관을 책임자로 하여 미국인 군정관리들을 통해 집행했으며 군정장관은 한국인 행정고문과 통역자들의 도움을 받았다.1) -[주1):미군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9일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고 당일 오후 4시에 총독부 건물의 일장기를 성조기로 바꿔달았다. 그리고 같은 날 군정포고 제1호, 제2호, 제3호를 잇달아 발표하여 미군이 입법‧사법‧행정권을 행사하며 경제도 군정관리 하에 둔다는 것을 천명함으로써 자신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미군정장관은 9월 11일 한민당 대표인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을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주로 친일우파인사들을 접촉하여 이들로부터 군정에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미군정당국은 1945년 10월 15일 한국인 11인을 군정장관의 행정고문으로 위촉했는데, 여기에는 김성수, 이용설, 송진우 등 친일우파인사가 거의 대부분이었다(행정고문으로 위촉되었던 여운형은 첫 회의 참석자리에서 사퇴하였다)]

미군정기 구호대책의 주무부서는 보건후생부였는데, 그 출발은 1945년 9월 24일에 미군정당국이 발표한 군정법령 제1호 ‘위생국설치에 관한 건’였다. 즉, 당시 미군정당국은 군정법령 제1호를 통해 일제시기 경무국 위생과를 폐지하고 위생국을 설치했으며, 그 후 1945년 10월 27일 군정법령 제18호를 공포하여 위생국을 보건후생국으로 개칭하였고, 1945년 11월 7일에는 군정법령 제25호를 공포하여 각 도에 보건후생부를 설치하였다(1946년 3월 29일 군정법령 제64호로 도의 보건후생부는 보건후생국으로, 중앙의 보건후생국은 보건후생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미군정 보건후생부가 담당했던 구호대책의 주 대상이 앞서 말한 것처럼 전재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미군정기간은 해방을 맞아 그 해결을 기다리던 민족적 과제의 해결이 부정되고 일제식민지 지배에 협력하였던 친일파가 미군정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사회적 권력을 장악해나간 기간이었다. 이러한 상황전개에는 제2차 대전 후 격화하기 시작한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논리가 놓여 있었다. 보건후생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군정기 구호대책에서도 이러한 냉전적 논리가 드러난다. 뒤에서 보겠지만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미군정기 구호대책은 민족적 과제의 해결과 함께 한 구호대책이 아니라 민족적 과제를 부정하며 전개된 구호대책이었다. 따라서 그 효과는 미진한 것이었다.

구호대책과 관련하여 미군정당국이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부정한 대표적인 예로는 쌀과 생활문자의 자유화 조치를 들 수 있다. 해방 직후 여운형과 안재홍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2) -[주2) 건준은 1945년 8월 16일에 결성되었는데 그 모체는 1944년 8월 10일에 여운형이 비밀결사체로 조직한 건국동맹이었다. 건준은 좌우연합에 의한 초당파적 민주통일국가의 건설을 모토로 하였는데 초기에 송진우 등 우파인사들은 참여를 거부하여 중도파부터 좌파까지의 연합체로 출범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민당 중심의 우파인사들이 정국주도권 상실을 우려하여 건준에 참여하여 조직장악을 시도하고 이에 대해 박헌영 등 극좌모험주의자들의 견제시도가 진행되는 가운데 9월 초에 우파의 참여를 유도했던 안재홍은 건준을 탈퇴하였다. 그 후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은 건준 지방조직을 인민위원회로 개편하고(여운형이 조직한 것으로서의 건준은 이 때 사실상 해체되었다) 미군 진주 이틀 전인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의 무리한 시도였다(사실상 건준의 활동기에 여운형은 두 차례나 테러를 당하여 해방 직후부터 9월말까지 상당한 시간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첫 테러는 건준결성 직후인 8월 18일에 일어났고 둘째 테러는 9월 7일에 일어났는데 이 두 차례의 테러는 건준조직의 장악을 노린 다른 세력의 소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결정적인 시기에 여운형은 모두 병상에서 요양을 하는 바람에 조직운영에 큰 손실을 보았다). 미군정은 10월 10일 인공을 정면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그 해체를 사실상 ‘명령’하였다. 건준을 인공으로 조직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던 박헌영은 미군정과 대립하다가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을 조직하였다. 여운형은 1945년 10월부터 건준의 모체였던 건국동맹을 재조직하여 조선인민당을 창당하였다. 이로써 건준은 건국동맹 - 건준 - 조선인민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는 독립국가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을 서두르는 한편 쌀의 분배에 있어서는 식민지 시대의 배급제를 일단 그대로 유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건준이 식민지시기에 강제공출과 그에 따른 배급제로 유지되어온 쌀의 분배경로를 일시에 자유화할 경우 이것이 초래할 쌀값의 폭등과 매점매석 등 부작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건준은 식량대책위원회를 정점으로 하고 식량의 확보임무를 맡은 식량영단본부를 두어 쌀의 배급제를 실시하여 해방 직후 우려했던 쌀값의 폭등을 상당정도로 억제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건준은 민중들의 상당한 동의를 기초로 하여 쌀의 공출과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준의 이러한 배급제는 미군이 9월에 진주하고 이들이 군사정권을 수립하여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행사하면서 부정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당국은 농민들이 생산한 쌀을 공출하여 배급하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규정하고 1945년 10월 5일 일반공고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공포하여 쌀 유통의 자유화를 선포하였다. 이어서 미군정당국은 전매사업 등을 제외한 나머지 일반생활물자에 대해서도 자유시장원칙을 천명하였다. 결국 미군정당국은 식민지 시기 극단적인 통제 상황에 있던 쌀과 기타 생활물자를 아무런 대안도 없이 급작스럽게 자유시장으로 내몬 것인데 이런 조치가 취해진 데에는 당시 미국이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될 남한이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을 보이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점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미군정당국의 자유화조치는 쌀과 생활물자의 매점매석과 밀수출로 부당한 이득을 취한 모리배(謀利輩)들의 행동을 완전히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해방 직후 건준의 노력에 의해 안정세를 보이던 쌀과 생활물자의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겨울이 되면 일반유통체계를 통해서는 쌀을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는데 이는 해방 당시 쌀의 생산량 자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리배들의 매점매석과 밀수출로 그나마 있던 쌀마저 정상적인 거래경로로 나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정당국의 자유화조치는 완전 실패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미군정당국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치 않고 오히려 식량부족은 조선인들의 과소비 탓이라고 규정하고 따라서 식량문제의 책임은 군정당국이 아니라 조선사람 자신들에게 있다고 하면서 미군정당국 스스로가 폐지했던 쌀의 공출제를 1946년 1월에 다시 실시하기 시작하였는데 미군정에 의한 강제공출은 군정기간 내내 계속 되었다. 당시 농민들은 미군정당국이 다시 도입한 쌀 공출에 상당히 저항하였는데 이에 대해 미군정당국은 폭력적 진압으로 맞섰다.

대책 없는 자유화조치로 고삐가 풀린 모리배들은 적산처리과정도 크게 왜곡시켰다(적산은 적성재산(敵性財産)으로 결국 적의 재산을 말하는데 처음에는 이렇게 불리다가 후에 귀속재산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냥 적산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당시 장부가격으로 100만원 이하의 적산은 소규모 적산으로 분류되었는데 이에는 주거용 주택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미군정당국은 1945년 11월 12일 신한공사를 설립하여(시실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이름만 바꾼 것임) 조선내 일본인 재산을 모두 신한공사 소속으로 하였는데 이는 해방 직후 민중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일본인 재산접수를 미군정당국이 합법조치를 명분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런 조치는 맥아더 사령부가 1945년 9월 9일 포고 제1호를 발포하여 일본인과 한국인을 구분치 않고 막연히 주민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 재산권을 보호한다고 천명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미군정당국이 볼 때 남한 땅의 재산과 토지는 그냥 그 자체일 뿐 그것이 일본인 소유였는지 혹은 친일파나 모리배의 소유였는지의 여부는 하등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민족적 과제의 자연스러운 해결과정의 하나로 나타난 일본인 재산접수가 부정되면서 특히 일반민중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소규모 적산, 즉 적산가옥의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친일파나 모리배들은 친척 등을 동원하여 적산가옥을 여러 채씩 자신들의 소유로 빼돌렸으며, 1947년 소규모 적산의 불하가 시작되었을 때 전재민들은 모리배들의 협잡에 의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는 등 엄청난 고통을 당하였다. 모리배들의 이런 행태와 이를 사실상 조장한 미군정당국의 정책적 실패는 해방 후 주택문제 해결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주택문제와 그 해결의 왜곡

지금까지 본 것처럼 미군정은 해방된 민중들의 열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부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로 인해 식민지배의 피해를 입은 민중들은 위로받기는 커녕 빈곤과 실업에 내몰리게 되었으며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친일파와 모리배들이 오히려 이득을 취하는 기형적인 해방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기형적인 왜곡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주택문제이다.

주택은 계절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인데 해방 첫 해인 1945년 겨울은 별다른 주택대책이 없는 채로 그냥 지나갔으며, 1946년이 되어서야 주택대책을 수립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1946년 2월 미군정당국은 주택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동년 4월에는 보건후생부의 1946년도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주택분야와 관련하여 2천만원의 예산으로 주택 3만호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하는 등 주택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1946년 8월에는 경기도가 5,500만원의 예산으로 서울시에 750호의 주택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미군정당국이 4월에 발표한 3만호 건설계획의 경우 예산상으로만 보면 호당건축비가 667원이지만 경기도의 750호 건설계획의 경우는 호당건축비가 73,000원으로 무려 100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만일 이런 차이가 물가폭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당초 3만호 건설계획은 계획 발표 후 불과 몇 개월만에 사실상 추진이 불가능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유야 무엇이건 미군정당국의 주택건설계획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는데 이는 1946년 8월에 이르러 당시의 일간신문에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임시주택이라도 건축해야 한다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소앙이 위원장으로 있었던 민간구호단체에서는 1946년 10월 기자회견을 열어 전재민의 당면문제는 주택문제라는 점을 주장하고 대책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마련의 요구가 점차 커지는 가운데 당시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미군장교 한 사람이 1946년 10월 경에 간이주택을 고안했는데 이것은 밑면은 사각형이며 이 사각형의 대각선을 기준으로 한 세대씩 입주하고 지붕으로 올라가면서 삼각형이 되는 형태를 띠었다고 하며, 대개 가주택 또는 움집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1946년 11월 중순 미군정당국은 전재민가주택건설조성회를 결성하고 11월 말에는 전재민들에게 필요한 주택량 73,311호를 간이주택으로 건축하여 이를 전재민들에게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조소앙은 이 가주택에 대해 차마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며 격렬히 비난했는데, 미군정당국의 가주택건축 추진도 한심한 것이어서 군정당국은 가주택 1동의 건축비를 2,750원으로 잡아 건축자를 모집했으나 최저입찰단가가 1동당 5천원을 초과하여 입찰을 다시 연기하는 등 계획의 추진 자체가 지지부진하였다. 그리하여 1947년 1월 11일까지 완공된 가주택은 4,224호로 계획 대비 5.8%에 불과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이처럼 주택대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1946년 12월 9일에는 드디어 집 없는 전재민이 용산에서 얼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동아일보 46.12.12).

이처럼 차마 사람이 살 수 없는 간이주택마저 건축이 지지부진하고 전재민이 얼어 죽는 일까지 발생하자 겨울 동안만이라도 적산요정을 전재민들에게 분배하여 주택문제에 대처하자는 여론이 등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미군정당국은 전재민들을 적산요정에 입주케 하면 나중에 요정을 못 쓰게 된다며 반대하였다. 적산요정은 식민지 시기에 일본인 경찰이나 관료, 친일관료 등이 출입하였던 곳으로 일반민중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곳이었는데도 미군정당국은 초기에 적산요정의 개방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미군정당국에 대해 비난여론이 들끓자 1946년 12월에 2,460명 수용 예정으로 남산동 일대의 적산요정 13개의 개방이 결정되어 12월 23일 전재민들이 입주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개방이 결정된 13개 요정에서 전재민 수용을 거부하였다. 1946년 12월 23일은 해방된 남한 땅에서 일어난 비극 중 가장 큰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들은 거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난 날이다. 개방이 결정된 요정은 요정종업원들을 동원하여 전재민들의 입주를 막았는데, 수용이 예정된 전재민들과 요정종업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각처에서 혼잡이 발생하였다. 입주예정 전재민 중에는 사회사업시설에 있던 고아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요정의 입주거부로 입주가 지연되면서 동일 자혜원의 두 살 된 고아는 추운 날씨에 바깥에 너무 오래 있었던 관계로 급성폐렴이 돌발하여 사망하였다.

요정종업원들은 “요정개방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방법이 틀렸다”고 하면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의 생활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주장하였다. 주택문제로 전재민이 얼어 죽고 두 살배기 고아가 급성폐렴으로 죽고 요정종업원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자 했으니 해방된 지 1년 반도 채 되지 않은 해방조선에서 주택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갈등은 실로 “목숨을 건 투쟁”이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바로 다음 날 군정당국은 요정개방을 일방적으로 한달간 연기해버렸다. 적산요정의 개방이 연기되자 요정에서는 영업을 재개한다는 광고를 써 붙이는 등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반면에 다시 희망이 꺾여버린 전재민들은 거리를 방황하며 방성통곡하였다.

이런 사태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기현상”이라고 전하고 있다(경향신문 46.12.25, 서울신문 46.12. 25). 적산요정개방 연기 후 다시 여론이 비등하였고 우역곡절 끝에 1947년 1월 7일 요정개방이 결정되었으나 이 때 개방대상요정은 7개 요정으로 줄었고 입주예정인원도 778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 후 2차 요정개방이 시도되었는데 이 때에는 중국인 요정업자들은 찬성하였으나 조선인 요정업자들은 모두 반대하였다(경향신문 47.2.13). 그러다가 3월에 4개 요정과 이견여관, 서룡사 등에 전재민을 입주시켰으나 그 후 중국인이 운영하는 요정의 개방이 중지됨으로써 적산요정개방을 둘러싼 공방은 일단락되었다.

적산요정개방 사태가 요동치며 지나간 후에도 미군정당국은 몇 차례 주택건설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지만 그 실적은 언제나 계획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그에 따라 전재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주택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47년에는 소규모 적산의 불하가 시작되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적산가옥의 불하로 전재민들의 주택문제 해결이 크게 도움을 얻었으리라는 것이지만 실제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다. 1947년 7월 기준으로 서울시의 적산가옥은 26,000호였고 시에 등록된 전재민세대는 20,824세대여서 산술적으로만 보면 불하대상 적산가옥을 모두 전재민에게 배분해도 5천호 이상이 남는다.

그러나 적산쟁탈전이 치열하였던 관계로 전재민들은 적산가옥에 들 수가 없었으며 설사 들었다 해도 모리배들의 협잡으로 곧 쫓겨나곤 했다. 게다가 전재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적산가옥을 불하받아 배급품을 착취하는 일도 많아 당시 신문에서는 이러한 일을 두고 “일제분열책의 잔재로서 해방조선의 기현상”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이제 동포애니 민족애니 하는 말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한탄하고 있다(동아일보 46.9.11).

무릇 주택은 인간의 기본욕구라고 하는 의식주의 한 가지에 포함될 정도로 삶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해방 당시를 매우 혼란스럽고 가난했던 시기로 인식하면서 그 시기에 있었던 빈곤과 고통에 대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적산가옥의 불하과정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주택문제는 거의 대부분 해결이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식민지배를 수단삼아 남의 나라 땅에서 이룩한 재산을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민중들이 해방공간에서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것은 공산주의니 뭐니를 떠나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당연한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음으로 해서 친척 등의 명의를 동원하여 적산가옥을 여러 채씩 등기하여 빼돌리고, 전재민 구호를 명분삼아 적산가옥을 차지한 후 배급품을 착복하고, 적산가옥에 든 전재민을 내쫓는 등 해방된 나라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해방과 더불어 그러던 고국 땅에 돌아온 전재민들은 다리 밑에서 움을 파 살거나 쓰레기를 뒤져 음식을 구해야 했고 심지어는 겨울에 집이 없어 얼어죽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임시방편책으로 제시된 적산요정개방도 요정종업원들이 민중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지지부진하였으며 급기야는 어린아이가 목숨을 잃는 일마저 발생하였다. 민족적 과제의 해결이 왜곡된 해방은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민중들에게 “허울좋은 해방”(동아일보 46. 11.19)에 불과하였다.

민간구호단체

전재민과 실업자, 가난한 자 등의 구호를 위해 해방 후에는 민간구호단체가 상당히 많이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들 민간구호단체는 해방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여 좌파계열의 인사들이 결성한 단체도 있었고 우파계열인사들이 결성한 단체도 있었다. 좌파계열에 속하는 구호단체로는 ‘조선인민원호회’, ‘적색구제회’, ‘조선혁명자구원회’가 있었는데, 이들 세 단체는 1945년 10월에 조직을 통합하여 ‘조선혁명자구제회’라는 통합조직을 결성한 바도 있다(이 통합단체의 위원장은 서중석이었고, 고문은 정운영과 허헌이었다).

그리고 건준의 후생부도 비록 초기 의도는 국가조직을 의도한 것이었지만 국가조직으로서의 건준(즉 조선인민공화국)의 위상이 미군정당국에 의해 부정되었으므로 역시 민간구호단체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파계열의 구호단체로는 1945년 8월 31일에 결성된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가 최초의 단체인 것으로 보이며, 이 외에도 여러 단체가 있었는데 대체로 보아 좌파계열보다는 우파계열의 구호단체가 수적으로는 더 많았다. 하지만 우파계열 구호단체의 지도급 인사들 가운데에는 친일행적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만 해도 위원장 유억겸과 구휼부장 이용설은 다소 소극적이기는 했지만 식민지 시대에 임전보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전쟁참여를 독려했던 인물들이다.

좌파건 우파건 이러한 구호단체의 결성은 해방과 함께 맞은 ‘시민사회의 폭발’이라는 상황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구호단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앞서 말한 좌파계열 구호단체의 통합시도도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이며 좌파계열과 우파계열의 구호단체가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즉, 1945년 9월에 조선인민원호회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는 서울시에 있는 13개 구호단체를 통합하여 ‘조선원호회단체대회’라는 통합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1945년 10월에는 ‘경성구휼동맹’이라는 단체가 서울 소재 구호단체는 서울시에 등록하도록 하고 무면허 구휼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는데(매일신보 45.10.12) 이는 아마도 구호단체의 정리를 민간단체에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원호회단체대회가 만들어진 지 한달도 채 못 되어 조선인민원호회와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는 다시 한 번 구호단체 통합을 추진하는데 이번에는 13개가 아니라 16개 구호단체를 통합하여 ‘조선원호단체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리시도에도 불구하고 민간구호단체의 난립과 불법행위는 상당히 심했던 모양으로 서울시는 1945년 12월 불법행위를 하는 구호단체에 경고를 하고 조선원호단체연합중앙위원회에 가입한 13개 구호단체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6년 3월에는 군정장관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전재민구호단체가 구호물자를 착복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에까지 이른다(군정장관이 기자회견을 하기 며칠 전 구호물자의 착복으로 구호단체위원 3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바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1946년 4월 민간구호단체에 대한 정리작업이 미군정당국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 정리시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민간구호단체가 구호물자를 사사로이 착복하고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라면 그러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구호단체가 해체되어야 했겠지만 실제로 해체된 구호단체는 좌파계열의 조선인민원호회였다. 군정당국은 1946년 4월 서울시 피난민수용소를 장충단공원에 정식으로 설치하게 되었으므로 정부보조금으로 운영하던 민간단체는 폐쇄키로 했다고 발표했는데 자료의 불충분으로 조선인민원호회 외에 우파계열의 구호단체는 어떤 단체가 폐쇄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정리시도의 정치적 색채가 의심스럽다는 감은 지우기 어렵다.

실제로 조선인민원호회를 폐쇄하던 날 원호회에는 환자들이 있어 진료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정경찰들이 들이닥쳐 집기와 장비 등을 마구잡이로 반출하여 매우 폭력적으로 단체를 폐쇄하였다. 더욱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은 조선인민원호회가 해체되던 그 시기에 ‘38선이북 출신 학생원호회’와 ‘서북학생원호회’ 등의 우익단체는 새롭게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단체는 김성수, 유억겸, 엄환섭 등 한민당계열 인사들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 외에 1946년 7월과 9월에는 각각 ‘귀국전재동포구제회’와 ‘전재동포구호회 중앙본부’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우익계 단체였다. 물론 후자의 두 단체는 모두 임시정부 요인 출신인 조소앙(趙素昻)이 위원장이었으므로 구호의 진실성과 민족주의적 정신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전재동포구호회는 관민합동으로 조직되어 지도고문에 군정장관이 추대되었고 회의도 군정청 회의실에서 개최하고 전재민실태조사와 전재민대책건의를 하는 등 상당히 주도적으로 그리고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실제 자료상으로 보면 1946년 중반 이후의 많은 구호대책에는 조소앙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재동포구호회의 참여와 비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앞서 주택대책을 다룰 때 미군정당국이 계획한 움집건설계획에 대해 차마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며 비판했던 단체가 바로 전재동포구호회였다). 반면에 좌파계열의 구호단체는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예를 들면 1945년 10월 3개 좌파계열 구호단체를 통합하여 만들어졌던 조선혁명자구제회는 1946년 8‧15 행사를 앞두고 당시 위원장이었던 이영(李英)이 미군정당국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민간구호단체의 불법행위와 미군정당국의 정치적 색채를 의심받을 수도 있는 민간구호단체 정리시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구호사업에 만족치 못하던 전재민들이 자체적인 구호단체를 구성하는 시도도 나타났다. 즉, 전재민들은 기존의 구호단체들은 모두 정치적 모략과 경제모리단체에 불과하여 그러한 단체에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달아 스스로의 힘으로 자력갱생할 것임을 강령으로 내걸고 1946년 9월 13일 13개 구호단체를 통합하여 순전히 전재민들만을 회원으로 한 ‘전재동포총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의 그 후의 활동상은 자료상으로 찾아볼 수 없는데 중요한 것은 이들의 조직결성이 이루어진 사회적 맥락이 이들의 말대로 만족스러운 구호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맥락이었다는 점과 또 이들은 오늘날 사회복지운동에서 말하는 이른 바 ‘당사자 운동’의 고전적 실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군정기의 민간구호단체의 활동은 자료의 불충분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 없는 점이 아쉬운데 지금까지 논의한 것으로 보더라도 민간구호단체의 부침에는 이데올로기적 색채가 배제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민간구호단체들은 해방 당시 유력정치인을 고문으로 추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장기적으로 보면 정치적 역관계의 변화에 따라 구호단체들의 전반적 분포가 영향을 받았다. 1946년 중반을 넘어서면 좌파계열의 구호단체는 거의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은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외면한 미군정당국과 그에 편승한 친일파들의 득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정책을 배경으로 한 미군정의 구호대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식민지배의 피해자였던 민중(전재민)들에게 해방은 참된 해방이 아니었다.

(다음 호에 이어짐)

남찬섭 /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2005/04/10 00:00 2005/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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