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의 사회복지대책으로는 응급구호대책, 주택대책, 실업대책, 노동자보호대책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 민간구호단체의 활동 및 그 단체들에 관련된 당국의 대책도 중요하다. 지난 번 제78호 복지동향에서 민간구호단체와 주택대책에 대해 살펴보았고, 이번 호에서는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응급구호대책(應急救護對策)

미군정기 사회복지대책 중 여기서 말하는 응급구호대책은 오늘날 우리가 공공부조라고 부르는 제도와 사회복지서비스라고 부르는 제도의 성격을 함께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수준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이런 식으로 공공부조적 제도와 사회복지서비스적 제도의 속성을 함께 가진 구호대책 한국전쟁 후에도 지속되었고 본격적인 산업화 이후에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미군정기 응급구호대책은 대체로 전재민에 대한 구호대책, 노인‧고아‧여성에 대한 대책으로 구분되어 시행되었는데 전자는 전재민구호이며, 후자는 공공구호이다. 당시 자료를 보면 응급구호대책의 대상인원은 24만 8천명 정도 되었는데 이 중 전재민이 18만 9천명 가량이었고(약 76%), 공공구호 대상자는 5만 9천명 가량이었다(24%) 주1)여기에 나온 구호대상자 수치는 1947년 4월부터 1948년 3월까지의 통계치이지만 아마도 이 수치가 그 앞의 시기, 즉 1946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응급구호대책은 주로 전재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당시의 전재민을 200만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응급구호대책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혜택을 받은 전재민은 전체 전재민의 9.5% 정도 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전재민과 비전재민으로 정확히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또 전재민 역시 가족이 있었거나 어떤 가족의 일원이었을 것이므로 공공구호 대상자가 1/4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만큼 욕구가 적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자료상 정확히 확인키는 어렵지만 공공구호를 필요로 했던 노인‧아동‧여성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공공구호대상자들에 대한 대책은 주로 시설수용을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이는 전재민구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전재민의 경우에는 시설수용 외에 농촌이주사업이나 실업대책, 직업알선 등의 대책이 병행 추진되었다.

어쨋든 전재민구호와 공공구호로 크게 대별되는 미군정당국의 응급구호대책은 해방 직후 급격하게 유입하기 시작한 귀환동포(즉, 전재민)에 대한 구호로부터 출발하여 1947년 이후 월남민의 급증에 대한 대응책 마련 등으로 이어진다. 즉, 미군정당국의 응급후로대책은 남한 사회로 공간을 한정하여 볼 때 외부로부터의 빈곤인구의 급격한 유입에 대한 수용보호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민간구호단체의 활동이 미군정당국의 응급구호대책과 함께 존재했다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응급구호대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시설수용구호로 초기에 중요했던 것으로는 장충단 공원 자리에 건립된 서울시 피난민수용소 건립을 들 수 있다. 이 서울시피난민수용소는 1946년 초 미군정당국이 민간구호단체를 정리하면서 이들이 개별적으로 운영하던 수용소를 통합하여 1946년 3월 26일에 세운 것이다.

이 장충단 수용소는 1946년 4월 1일부터 정식으로 수용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하루 약 2천명을 수용하다가 동년 6월에 시설을 하루 수용규모 6천명으로 확장하였다. 장충단 수용소의 수용기간은 5일이었는데, 장충단 수용소의 수용기간 중의 구호수준은 자료상으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1946년 1월 보건후생부장의 기자회견 내용 중에 공공구호대상자 중 시설수용자에 대한 일인당 하루 부조금이 75전인데 이를 5원으로 인상할 계획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그 정도 수준이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물가가 폭등하기 전인 1945년 8월에 쌀 한말이 9원 40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물가폭등이 이미 일어난 후 구호수준이 일인당 하루 75전이고 이를 5원으로 인상하겠다고 했으니 그 구호수준의 열악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구호수준의 열악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자료는 1947년 4월부터 1948년 3월까지의 구호비용 자료를 볼 수 있는데 이 자료에 나온 수치를 토대로 일인당 하루 구호비를 계산해 보면 전재민구호의 경우 그 액수는 대략 2.95원, 공공구호의 경우는 2.51원 정도가 나온다. 이런 점에서 미군정기 응급구호대책의 구호수준은 더 이상 거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충단 수용소 건립 이후 1947년 봄부터 월남동포가 급증하면서 -주2)조선은행 조사부의 자료에 따르면 월남동포의 월남원인 중 가장 많은 것은 생활난(식량난)으로 65%를 차지하였고, 그 다음으로 귀향이 29.5%, 구직 2.8%, 사상적 이유 1.6% 순이었다.- 수용시설이 한계에 다다르자 38선 접경지역에 국영수용소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 국영수용소는 동두천, 청단, 토성, 의정부, 춘천, 주문진, 개성의 7개 지역에 건립되어 1947년 4월 17일부터 5월 7일에 걸쳐 차례로 개소하였다(위 지역의 나열순서가 곧 개소순서임).

당시 미군정당국의 군정장관은 이들 7개 국영수용소 중 개성수용소를 1947년 6월에 시찰한 후 개성수용소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어떤 전재민수용소보다 깨끗하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신문에 의하면 이들 국영수용소는 창고바닥에 거적을 깐 것이 고작이었고 먹을 것도 수용된 사람들 모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비참한 사람에게만 그것도 주먹밥 정도 주는 것이 다였다고 하여 대조된 평가를 보이고 있다.

정부 자료에 의하면 1947년 4월부터 8월까지 7개 국영수용소에 수용된 연(延)인원은 41만 3천여명이었고 이 수용소를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전재민이 하루에 150명에서 2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재민들의 도시집중, 특히 서울집중이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미군정당국은 접경지역의 국영수용소만으로는 전재민 및 월남동포의 서울집중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1947년 5월부터 각 도에 도립수용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당시 정부 자료에 의하면 도립수용소가 설치된 이후 1948년 2월 동안 도립수용소에 수용된 연(延)인원은 115만 6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영수용소 설치에 이은 도립수용소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서울로의 전재민 유입을 막을 수 없자 급기야 서울시는 1947년 7월 1일을 기해 남하 전재민의 서울 진입을 일체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국영수용소를 거쳐 가는 전재민을 각 도에 일정한 비율로 할당하는 조치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만일 서울로 가려면 전재민은 서울에 친척이 거주함과 동시에 그 친척이 부양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조치들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졌는지를 판단키는 어렵지만 당시의 응급구호대책도 지난 호에서 살펴본 주택대책과 유사하게 식민지 시기의 피해를 완화하거나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피해의 결과에 휩쓸리면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전재민 유입의 급증으로 민간구호시설도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에 대해 미군정당국은 1947년 9월 10일 ‘후생시설 운영 강화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을 발표하여 “국가재정상 … 국비보조가 어려우므로 관민유지의 긴밀한 협력 하에 … 각 시설이 자급자족토록 추진”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이 통첩에서 말하는 관민유지의 긴밀한 협력이란 곧 지역사회의 민간자원 동원을 의미하는 것인데, 당시의 국가재정사정이 어려웠던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지역사회의 자원동원 역시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각 지역에서 친일행각을 벌였던 수많은 지역유지급 인사들과 모리배들의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역사회 자원 동원이란 애당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정당국은 관민유지의 긴밀한 협력을 외쳤지만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지역사회의 자원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토대 자체를 차단시켜 놓은 상태에서 그렇게 외쳤던 것이다. 국가재정사정이 어려운 당시 이처럼 당국이 스스로 나서서 지역사회의 민간자원 동원의 가능성을 차단시켰으니 구호의 모든 부담은 국고로 전가되고 이는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재정사정을 더욱 압박하여 지극히 열악한 구호수준을 결과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응급구호대책과 민간의 구호활동이 모두 욕구충족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해방 직후 사라졌던 전당포가 1947년이 되면서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말하자면 서민금융의 초보적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인데 당시 전당포는 고리대금업자의 2할 내지 3할보다 훨씬 낮은 4부 이자로 운용했다고 한다. 전당포의 확대로 1947년 12월 서울시는 소시민의 생활자금 융통을 위해 4개소의 공설 전당포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는 토대를 왜곡시키고 진행되던 정부의 응급구호대책이 비효과성을 드러내면서 민중들의 자생적 대응기제(여기서는 전당포)에 정부가 스스로 적응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정부 응급구호대책의 비효과성은 전당포와 같이 정부도 받아들인 자생적 대응기제 외에 노점상과 같은 정부와 대립한 자생적 대응기제도 결과하였다. 농촌으로 이주할 수 없었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던 전재민들은 노점에 의존하여 생계를 이어갔는데 정부는 이들 노점상에 대해 위생을 이유로 때때로 철저한 단속을 강행했다.

또한 노점이 늘면서 노점상들을 착취하는 중간단체들도 상당히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노점상들로부터 돈을 빼앗고 이의 일부를 경찰에 상납하는 식으로 하여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단체들에 대해서도 이따끔씩 단속을 하기도 했는데 예컨대 북부후생회나 노점상관리처 등의 단체들이 단속에 적발되어 해산명령을 받은 예가 있다. 노점상에 대한 단속과 그들을 착취하는 중간조직의 존재는 최근까지도 보아왔던 것들로 그 뿌리는 해방 직후로까지 거슬로올라 가는 것이다.

실업대책과 농촌이주사업

미군정기의 실업자는 적어도 100만명 이상이었는데 미군정당국의 실업대책은 각 시의 직업소개소에 등록하도록 하여 이들에게 직업알선 등 대책을 실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실업자 취업등록제), 이 실업자 취업등록제는 농촌이주사업과 병행하여 실시되었다.

취업등록제를 통한 직업알선은 주로 일시적인 토목공사에 전재민을 동원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는데, 대개 전쟁으로 파괴된 도로의 보수를 위한 국토복구사업이나 교량보수, 몽리공사, 사방공사 등에 전재민을 동원하였으며 청계천 제방공사에도 전재민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토목공사는 국가로서는 필요한 사업이지만 전재민의 입장에서는 겨울이면 할 수 없는 일시적인 취로였기 때문에 정규적인 직업알선이라 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공사에 취로한 경우 취로증을 발급했는데 이 취로증을 받을 수 있는 전재민은 18세 이상 50세 미만으로서 부양가족이 둘 이상 있는 전재민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부자료에 의하면 직업알선실적은 대규모 토목공사 등에도 불구하고 그리 높지 않아서 구직자에 대한 취직자의 비율이 농어촌의 경우는 3.2% 가량에 불과한 수준이었고, 도시지역은 1947년에 11.8%, 1948년에는 30.5% 가량 되었다.

농촌이주사업으로는 영등포에 농장을 개간하여 50세대를 이주시킨 것과 부평 시유지에 300세대, 노량진과 이태원 등지의 농장 개간하여 400세대를 이주시킨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여의도에도 농장을 개간하였다. 1947년에는 보다 대규모의 이주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농촌이주를 희망하는 세대에 대해서는 귀향편 철도 무임승차권을 발급하여 1947년에 약 3만 세대가 농촌으로 이주하였다. 물론 이 수치는 매우 방대한 것이지만 문제는 귀환전재민 중 농촌이주를 희망했던 세대는 약 30만 세대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1947년의 3만 세대 농촌이주는 결코 적지 않은 실적이지만 희망세대가 30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 남하 전재민들이 서울로 집중됨에 따른 어려움을 언급했는데 전재민들 중 농촌이주 희망세대가 30만 세대(각 세대원을 4명으로 봐도 이들은 120만명에 달한다)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전재민의 상당수는 농촌이주를 바라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당수는 무슨 이유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농촌으로 이주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상당수 전재민은 비자발적인 원인으로 서울 등의 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적산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로 인한 토지개혁이 진행되지 못했다는 상황이 농촌이주사업의 한계로 작용했고 이것이 농촌으로의 이주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의 실현에 장애요인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노동자보호입법

미군정당국은 1945년 10월 10일 군정법령 제14호 ‘일반노동임금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여 군정청 관할 범위 내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사무직이나 기술직 노동자는 비해당)에 대해 일종의 최저임금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법령에 따르면 노동종류별로 기본급이 차등적으로 정해지고 이 기본급에 물가를 고려한 차별액이 더해져 기본일급이 정해지도록 되어 있었는데, 견습생의 경우 기본일급은 8∼9원, 숙련공은 14∼17원이었다.

이를 월단위로 환산하면 견습생은 270원, 숙련공은 510원 가량이 되었는데, 당시의 물가고에 비추어 충분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종전의 것보다는 훨씬 강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일반노동임금법령은 미군정당국의 노동정책이 노동시장에 대한 불개입정책으로 전환하면서 공포된 지 두 달도 채 못 된 1945년 12월 1일에 폐기되었다. 이로써 해방 후 최초로 도입된 일종의 최저임금제도는 시행 2개월도 되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미군정당국이 일반노동임금법령을 폐기한 것은 그들 스스로가 ‘미곡의 자유시장’(일반공고 제1호)을 공포하여 쌀의 유통자유화 조치를 취함으로써 물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최저임금제를 유지해야 할 하등의 필요성을 제거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 이후 1946년 9월 18일 미군정당국은 군정법령 제112호 ‘아동노동법규’와 동년 9월 18일 군정법령 제121호 ‘최고노동시간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아동노동법규는 14세 미만 아동의 취업을 금지하였고 16세 미만과 18세 미만 아동에 대해서도 고용에 일정한 제약을 두었으며, 21세 미만 여성의 고용에도 일정한 제한을 두었다. 그 외에 상병(傷病)휴일과 임신 및 수유에 관련된 규정도 마련하였다. 최고노동시간에 관한 법령에서는 하루 8시간 주당 48시간의 노동시간을 규정하고 이 시간을 초과하여 노동할 경우에는 기본급료의 15% 이상의 금액을 보상할 것을 규정하였다.

아동노동법규와 최고노동시간법령은 오늘날의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것들인데, 그러나 특히 아동노동법규의 경우에는 그 실시와 관련하여 저항이 심하였다. 당시 아동노동금지에 영향을 받을 21세 미만의 아동노동자는 80만명 가량으로 추정되었는데 아동노동법규로 인해 실직한 21세 미만 노동자들에 대한 생활보장책이나 직업알선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법 시행은 남한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는 것이 저항의 주된 논거였다. 그리하여 미군정당국은 1947년 2월에 아동노동법규의 실시를 동년 6월 1일까지 일시 정지하기도 하였다.

최고노동시간법규와 관련해서는 큰 저항은 없었으나 일반적으로 위배되었고 이해되지도 않았다. 아동노동법규와 최고노동시간법령은 그 자체로는 취지에 공감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남한의 현실에 맞지 않았는데 이처럼 현실에 맞지 않는 법령을 실시하려 한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북한이었다.

북한은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가 20개조 정강을 발표하면서 그 속에 이미 최저임금, 사회보험 및 의무교육의 실시, 공공의료자원 확충, 무료치료 등을 포함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1946년 6월에는 ‘민주주의 노동법’을 제정하여 생산직 및 사무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사회보험의 실시에 들어갔는데 그 급여내용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상병급여, 출산급여, 노동재해급여, 유족급여, 장제급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북한의 노동입법은 그들이 단행한 토지개혁과 함께 남한 사회의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군정청의 정치고문은 미국무성에 보낸 한 전문에서 ‘북한의 개혁조치에 근거한 공산당의 선전이 군정행정에 대한 불만을 배태시키는 일에 얼마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당시 국내언론들도 ‘노동입법의 제정을 보지 못하여 각종의 노자충돌을 보아 오던 중 남조선철도종업원들의 총파업을 보게 된 것을 기회로 노력대중들의 커다란 기대와 요망을 받아오던 노동법령 -주3) 여기서 말하는 노동법령은 최고노동시간에 관한 법령을 말함.- 이 제정되어’라고 보도하여(동아일보, 1946.11.12) 당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 사이에 북한의 개혁조치에 고무된 분위기가 제법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이유로 미군정당국은 체제경쟁의 차원에서라도 비록 남한의 현실에는 맞지 않지만 일련의 노동입법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두 번에 걸친 연재로 미군정기의 사회복지대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한 사회가 요구하는 사회전반적인 문제해결노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추진되는 사회복지대책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해방 당시 전민중적으로 요구하였던 친일파 청산과 적산의 공정한 처리, 토지개혁, 좌우합작 등의 사회‧경제‧정치적 과제가 냉전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올바로 해결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생겨난 왜곡된 사회의 기본구조는 복지나 구호대책을 왜곡시키는 데에 크게 작용하였다.

적산처리와 토지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졌더라면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었을 전재민들의 주택문제와 실업문제가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호에서 보았지만 주택문제 해결의 왜곡은 건전한 대안의 제시 자체도 봉쇄하여 결국 최종적으로 제기된 대안이 적산요정 개방이었고 이마저도 요정종업원들을 앞세운 요정주인들의 반대공작으로 지지부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정 개방과정에서 어린아이가 사망하는 비참한 일까지 발생하였다.

만일 우리들이 해방 당시에 살고 있었고 적산요정 개방에 관해 의견을 밝혀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면 우리는 어떤 의견을 표명하였을 것인가? 요정개방을 찬성했을 것인가, 반대했을 것인가? 아니면 당장의 주택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무언가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적산요정 개방은 도무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할 것인가? 적산요정 개방이 문제의 근본적인 접근책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만 그런 해결책이 나오게 된 것 자체가 한국적 특수성이라 보고 어떻게든 거기서 좀 더 나아간 대안을 만들기 위해 고민할 것인가? 또 만일 적산요정 개방에 예산관련부처가 예산의 제약을 이유로 반대하고 나선다면 그 때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아니면 적산요정 개방은 어차피 가난하게 살아갈 전재민들에게 주택을 주자고 현재 취업하여 잘 살아가는 요정종업원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처사이고 또 그 추진과정에서 온갖 혼란을 일으키니 혼란을 초래하지 말고 전재민 시설을 확충하여 주택문제를 해결하자고 할 것인가?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적산요정 개방이라는 ‘특수하고도 기발한(?)’ 주택대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거의 없지만 그와 유사한 일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입장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적산요정 개방과 같이 참으로 입장의 정리를 곤란하게 하는 미군정기 사회복지대책의 또 하나의 예로는 이번 호에서 살펴본 응급구호대책 중 민간구호단체로 하여금 지역사회의 민간자원을 동원하여 자립적으로 운용케 한 것을 들 수 있다. 우리들이 해방 당시에 살고 있었다면 미군정당국의 이런 방침에 대해 해방된 나라에 돌아온 전재민들은 당연히 국가가 돌보아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간자원 동원 운운하는 것은 부당하니 당장 국가책임으로 시설운용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인가? 아니면 국가경제가 어려우니 비생산적인 구호사업에 예산을 배정하는 것보다는 경제 자체를 일으키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하므로 민간시설은 자력갱생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인가? 또 아니면 민간자원의 동원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친일파 청산 등 민간자원의 동원이 가능할 수 있는 여건부터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인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 한 국회의원이 성폭력범죄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는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밝혀 논란이 일고 있으며, 그보다 전에는 보건복지부가 긴급지원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을 발표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두 가지 사안은 적산요정 개방이나 민간구호시설에 대한 자력갱생 방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피해자의 관점에 서지 않은 경찰의 수사와 역시 피해자의 입장보다는 가해자의 입장을 더 고려하는 듯한 재판, 수사선상에 아예 오르지도 않는 수많은 성폭력 피해사건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사후에 돌보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런 체계도 갖추지 않고 있는 국가, 가해자의 재활을 위한 체계 역시 거의 갖추지 않고 있는 국가, 성교육을 거의 완전히 방치하고 있는 교육체계와 그것을 방조하는 국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서 나타나는 도무지 국민들을 돌볼 줄 모르는 듯한 국가 등 이러한 것들을 모두 방치한 채 전자팔찌라는 대안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전자팔찌라는 대책은 성폭력예방에 필요한 사전대책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너무나 생뚱맞은 대안이라는 비판에 대해 그 국회의원은 전자팔찌를 도입한다고 해서 사전대책을 무시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라며 양자를 병행할 것이라고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전자팔찌라는 기상천외한 대안을 내놓을 필요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사전대책은 지금까지 왜 안 했던가?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고 싸울 때에는 무엇을 하고 있다가 사전대책의 정비에 관련된 입장은 단순히 병행 추진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 밖에는 없으면서 그런 대안을 내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사전대책은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 병행 추진할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금방 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국회의원이 성폭력예방에 반대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 말을 믿어야 하겠지만 그러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긴급지원특별법도 마찬가지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의 개선 등 공공부조 자체의 혁신에 대해서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전달체계의 정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급하다면서 긴급지원특별법을 만드는 것인가? 긴급지원특별법의 필요성 자체를 줄이는 방안의 추진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누차 요구된 바이며 빈곤심화로 예견된 바이기도 했다. 물론 보건복지부는 긴급지원특별법이 도입된다고 해서 기존 공공부조의 개혁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또 긴급지원특별법에 비판적이라 해서 긴급지원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잔여적인 성격이 강한 우리의 복지국가체제가 또 다시 긴급지원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 대처에 자꾸 흘러야 하는가를 비판하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가지만 그 역사가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해방공간에 우리들에게 던져진 과제가 해결되었는가? 미해결된 그 과제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인가? 해방공간의 질곡은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1주년을 맞은 1946년 8월 15일에 당시 언론들은 “우리는 이 날을 기쁨으로 축하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눈물로써 축하해야 할 것인가”라고 썼다. 해방된 지 60년이 되어가고 1987년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지 20여년이 다 되어가며 한 양식 있는 연구자가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태동이 있었다고 선언한 지 15년이 지나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복지국가는 어떠한가? 또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다음 호에는 1950년대가 이어집니다)

남찬섭 /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2005/05/10 00:00 2005/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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