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사회복지 이미지 되돌아보기 -산타클로스 사회복지-
월간 복지동향/2005 :
2005/05/10 00:00
21세기의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속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복지는 어떤 이미지로 상상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필자는 교양으로 “사회와 복지”라는 과목을 수강하는 학부 학생들에게 사회복지라는 단어에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는가를 질문해 본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회복지의 이미지를 “헐벗고 굶주리며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 고아원이나 양로원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아동이나 노인들,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종교인들의 인자한 얼굴, 엄마 손을 잡고 나온 귀여운 어린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선냄비에 헌금하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학생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갖는 사회복지 이미지도 이와 유사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회복지로 연상되는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대중매체를 통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눈물샘을 자극하고 마음을 찡하게 하는 사회복지 관련 TV 프로그램들의 내용은 한결같이 어렵게 사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돌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불운에 처한 우리들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도 매우 전형적이다.
지병으로 앓아누운 할아버지를 돌보면서 어른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어리광이나 피울 어린 나이의 소년과 소녀 가장들, 돌보아줄 사람이 없이 버려진 장애인들, 중풍으로 20년을 넘게 누어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70세가 넘은 며느리의 모습 등이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ARS 모금전화를 열어 놓는다. 한 통화에 1,000원씩이지만 금방 수 천 만원까지 늘어나는 돈의 액수를 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이웃을 돕는 따뜻한 정이 살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이 순간 깊은 동포애를 느낍니다.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아름다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동참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보십시오! 저기 쌓여져가는 우리들의 온정을!” 라고 외치는 진행자의 감동스러운 표정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격정에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이 잘못 되었다고 감히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에 고착된 이미지로서 “산타클로스 사회복지”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전설 속의 이야기이지만 산타클로스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성자 니콜라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필자의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셨지만 가정에서 기독교의 의례 같은 것은 없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모셨지만 식사 전 기도를 드린 기억도 없다. 아마도 유교적인 전통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묵인했지만 집안에까지 기독교의 의식을 확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래도 어린 시절엔 양말을 걸어 놓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로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유교적 전통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산타클로스가 되어서 원하는 선물을 잊지 않고 주었다. 산타할아버지는 마음씨 착하고 말 잘 듣는 어린이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고, 특히 가난하지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안겨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원래 모범생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직전의 내 생활은 모범생 그 이상의 것이었다. 장성해가면서 부모님이 마련한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는 사회적 학습을 통해서 불운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을 돕는 일은 사회 구성원이 지녀야할 덕목이자 의무로 나의 의식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산타클로스 사회복지”는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첫째, 사회복지의 대상자들은 불운한 사람들이다. 둘째, 불운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사회적 선의 실천이다. 셋째, 불운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고, 특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산타클로스 사회복지”가 가진 이미지는 산업화 초기 단계인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복지를 보는 관점과 유사하다. “산타클로스 사회복지”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회복지는 전체 국민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불우한 국민의 문제이며, 그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사회적 의무이기는 하지만 법률에 의하여 강제되는 법적인 의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돕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선의에서 비롯되는 도덕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더구나 불운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도 무차별적으로 주어져야하는 것이 아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굉장히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언어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사실상 기존의 사회경제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주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지 말거나 주더라도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는 이념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
산타클로스는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에게 따뜻한 사랑과 자선을 상징하는 신화로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종교들이 각각 이름은 다르지만 “산타클로스 사회복지”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는 많은 사적, 종교적 자선을 실천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자선을 성심 성의껏 실천하면서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의 온화한 이미지는 사회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을 보지 못하며, 그동안 사랑과 자선을 베풀어 왔지만 아직도 많은 불우한 이웃들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져가고 대규모로 발생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중세에 면죄부를 돈으로 산 어리석고 타락한 인간들이 교회가 그 돈으로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만족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불우한 이웃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도와주는 소년소녀가장, 오갈 곳 없는 노인들, 길거리나 전철에서 구걸하는 장애인들의 곤경이나 불행 중의 얼마만큼이 우연하게 그들에게 발생한 개인적 불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불행들에 -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으로 패러디되는 실업자 문제, 빈곤으로 인한 가족 동반 자살 사건, 부모 가출, 노숙인 문제, 죽은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노인들, 6개월간 죽은 엄마 곁에서 지낸 중학교 학생의 이야기 -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큼 그들이나 그들 가족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많은 선량한 시민들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일부 선택된(?) 사람들의 불행에 가슴아파하면서 각종 모금 운동에 참여한다.
그래서 이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전국에서 많은 후원 금품이 답지한다. 선량한 시민들은 그 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 대중매체들도 이웃사랑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찬양하며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을 칭송한다. 그래서 선량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선행과 선의에 만족하며, 곧 이어 방영될 화려한 쇼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킨다. 우리의 선량한 시민들이 무엇을 잘하고 잘못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눈물샘을 자극하고 마음을 찡하게 하는 사회복지 관련 TV 프로그램들의 내용은 한결같이 어렵게 사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돌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불운에 처한 우리들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도 매우 전형적이다.
지병으로 앓아누운 할아버지를 돌보면서 어른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어리광이나 피울 어린 나이의 소년과 소녀 가장들, 돌보아줄 사람이 없이 버려진 장애인들, 중풍으로 20년을 넘게 누어있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70세가 넘은 며느리의 모습 등이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ARS 모금전화를 열어 놓는다. 한 통화에 1,000원씩이지만 금방 수 천 만원까지 늘어나는 돈의 액수를 본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도 이웃을 돕는 따뜻한 정이 살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이 순간 깊은 동포애를 느낍니다. 이웃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아름다운 사회에 살고 있음을 느낍니다. 동참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보십시오! 저기 쌓여져가는 우리들의 온정을!” 라고 외치는 진행자의 감동스러운 표정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격정에 전화기의 다이얼을 돌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런 아름답고 감동적인 모습이 잘못 되었다고 감히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에 고착된 이미지로서 “산타클로스 사회복지”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전설 속의 이야기이지만 산타클로스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성자 니콜라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필자의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셨지만 가정에서 기독교의 의례 같은 것은 없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모셨지만 식사 전 기도를 드린 기억도 없다. 아마도 유교적인 전통에 집착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는 것은 묵인했지만 집안에까지 기독교의 의식을 확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래도 어린 시절엔 양말을 걸어 놓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물로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유교적 전통에 사로잡힌 아버지는 산타클로스가 되어서 원하는 선물을 잊지 않고 주었다. 산타할아버지는 마음씨 착하고 말 잘 듣는 어린이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고, 특히 가난하지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을 안겨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원래 모범생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직전의 내 생활은 모범생 그 이상의 것이었다. 장성해가면서 부모님이 마련한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는 사회적 학습을 통해서 불운하지만 착하게 사는 사람을 돕는 일은 사회 구성원이 지녀야할 덕목이자 의무로 나의 의식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산타클로스 사회복지”는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첫째, 사회복지의 대상자들은 불운한 사람들이다. 둘째, 불운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사회적 선의 실천이다. 셋째, 불운한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고, 특히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산타클로스 사회복지”가 가진 이미지는 산업화 초기 단계인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복지를 보는 관점과 유사하다. “산타클로스 사회복지”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회복지는 전체 국민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불우한 국민의 문제이며, 그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사회적 의무이기는 하지만 법률에 의하여 강제되는 법적인 의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돕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선의에서 비롯되는 도덕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더구나 불운한 사람들에 대한 도움도 무차별적으로 주어져야하는 것이 아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굉장히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 언어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는 사실상 기존의 사회경제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주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지 말거나 주더라도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는 이념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
산타클로스는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에게 따뜻한 사랑과 자선을 상징하는 신화로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과 종교들이 각각 이름은 다르지만 “산타클로스 사회복지”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는 많은 사적, 종교적 자선을 실천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자선을 성심 성의껏 실천하면서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의 온화한 이미지는 사회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을 보지 못하며, 그동안 사랑과 자선을 베풀어 왔지만 아직도 많은 불우한 이웃들의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져가고 대규모로 발생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중세에 면죄부를 돈으로 산 어리석고 타락한 인간들이 교회가 그 돈으로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만족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불우한 이웃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도와주는 소년소녀가장, 오갈 곳 없는 노인들, 길거리나 전철에서 구걸하는 장애인들의 곤경이나 불행 중의 얼마만큼이 우연하게 그들에게 발생한 개인적 불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불행들에 - 오륙도, 사오정, 삼팔선으로 패러디되는 실업자 문제, 빈곤으로 인한 가족 동반 자살 사건, 부모 가출, 노숙인 문제, 죽은 지 한 달 만에 발견된 노인들, 6개월간 죽은 엄마 곁에서 지낸 중학교 학생의 이야기 -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큼 그들이나 그들 가족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많은 선량한 시민들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일부 선택된(?) 사람들의 불행에 가슴아파하면서 각종 모금 운동에 참여한다.
그래서 이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전국에서 많은 후원 금품이 답지한다. 선량한 시민들은 그 것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 대중매체들도 이웃사랑의 정신이 살아 있음을 찬양하며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을 칭송한다. 그래서 선량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선행과 선의에 만족하며, 곧 이어 방영될 화려한 쇼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시킨다. 우리의 선량한 시민들이 무엇을 잘하고 잘못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