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反)시설과 장애인 자립생활의 조건
월간 복지동향/2006 :
2006/08/11 00:00
최근 김포 “사랑의 기도원” 사건은 우리들에게 경악과 분노와 함께 장애인수용생활시설에 대한 정책전반에 대하여 재고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구한다. 수용된 중증장애인들에게 향정신성의약품을 과다 복용시켜 사망케 하고 여성장애인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이 현실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이러한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보도를 통해 반인륜적인 사건이 알려질 때마다 장애인수용생활시설의 시설장과 그곳에 근무하는 시설종사자들에게 돌팔매를 던져 보지만 사실은 장애인을 시설에 수용하고 지역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정책을 용인해 온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가해자이다.
실상 장애인의 차별적 삶의 원인 해결을 뒤로 한 채 특별한 공간에 가둬 둔다는 정책의 연장선에서 비인간적인 그리고 말로 다 형용 못할 참혹한 현실이 펼쳐진다. 고프만(Goffman, Erving)이 밝히듯 군대, 감옥, 정신병원 같은 전체주의적 시설에서는 집단생활의 규칙이 발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의 탄생에서 규칙 수행자와 감시자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아무리 훌륭한 시설이라고 해도 이러한 강철 같은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화된 군 시설, 감옥 등에서 발생하는 총기난사, 성추행, 폭력, 자살 등의 원인에는 이 규율논리가 필연적 요소로 들어간다. 장애인수용생활시설의 경우 이 힘의 논리는 더욱 강하게 관철된다. 자위력 행사의 어려움, 가족의 부재나 방임, 후견인의 부재, 군대나 감옥과 달리 기한이 없는 수용생활은 수용장애인의 삶을 극단적이고 비인간의 상황으로 몰고 갈 여지를 강하게 내포한다.
반(反)시설과 활동보조서비스의 필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반(反)시설의 외침이 흘러나온다. 지금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 일군의 중증장애인들이 한 여름의 태양과 장맛비를 맞으며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탈(脫)시설화와 더 나아가 반(反)시설이다. 2006년 5월 26일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와 한국DPI,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반(反)시설기획단을 중심으로 ‘사랑의 기도원 사건과 향후 반(反)시설 투쟁에 관한 회의’를 가진다. 이후 5월 24일 [탈(脫)시설화 정책으로 장애인인권 보장하라!]는 공동성명서 발표한다. 이 시점에서의 참여단체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한국DPI,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한국장애인인권포럼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6월 9일 ‘반(反)시설 장애인자립생활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과천종합청사 앞에서 개최한다. 이 단계에서 참여단체는 더욱 늘어나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내일을여는멋진여성, 저신(低身)장애인모임,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한국사회복귀시설협회, 한국DPI, <4.20 반시설및 장애인 자립생활지원법 제정을 위한 결의대회>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반(反)시설기획단, 한국장애인인권포럼, 한국척수장애인협회 등 총 9개 단체가 결합한다. 이들 9개 단체들은 6월부터 반(反)시설과 자립생활을 기치로 매주 수요일 오후 거리집회를 가지고 있으며, 시설중심의 정부정책기조의 변화와 자립생활지원을 축으로 한 장애인복지법 개정 그리고 자립생활지원법 제정을 목표로 실천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탈(脫)시설화 더 나아가 반(反)시설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측만큼이나 탈(脫)시설화의 섣부른 적용에 비판적인 입장이 있다. 정재원(2003)은 한국 사회의 경우 탈(脫)시설화 논의의 즉자적 적용은 무리라는 입장을 전개한다. 그러한 입장의 요지는 시설수요 실재론과 준비 부족론이다. 40년을 갓 넘은 한국 사회 시설의 역사 속에서 충분한 시설의 발전은 어려웠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 우선주의에 밀려 국가의 개입이 최소한도로 이루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 시설의 공급은 그 수요를 따르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 성급한 탈(脫)시설화는 장애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강단사회복지주의적 발상이라고 정재원은 보는 것이다.
사실 시설수요는 엄존한다. 공공질서 유지라는 명분에서든 생존권 보호라는 차원에서든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와 버려지거나 방치되는 장애인들에 대한 대책을 기존의 방식, 즉 민간 수용 시설에 기대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관료사회, 중증의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것이 싫은 지역사회, 신자유주의 시대 구성원 모두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중증의 장애인 구성원을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가족사회에 의해서 시설수요는 꾸준히 발생한다. 더 나아가 가족의 학대 혹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 전화기를 붙잡고 자원봉사를 구걸해야 하는 비참함에 지쳐버린 중증장애인 당사자에 의해 시설은 희구된다. 결국 여러 수준의 사회와 당사자들에 의해 선택된 시설이라는 실체는 무시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그들의 선택을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사회의 절박한 요구 내지는 시장의 수요에 맞춰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해 나가는 시설장들의 실천을 우리는 쉽사리 비난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는 당사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과 더불어 차선의 선택, 수용시설이 아닌 다른 선택지(地)를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즉 시설을 때리는 네거티브 전략만이 아닌 시설수요 차단과 대안 제시형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림 <과천 정부종합청사앞 집회모습> - 생략
시설수요는 결국 중증의 장애인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지역사회 내 인적자원의 결핍에서 일차적으로 비롯된다. 유연노동구조 하에서 가족구성원도 그들과 함께 하기 힘들고, 미미한 수의 자원봉사자 인력으로도 그 일은 수행하기 어렵다. 결국 어느 정도 일자리 성격을 갖는 유급활동보조서비스제도만이 장애인의 일상생활보조 필요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활동보조서비스(Personal Assistance Service) 부분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어 돌아간다면 일단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시설수요는 상당정도 줄어들 것이다.
지역사회내 생활 공간의 필요
그런데 장애인 탈(脫)시설화의 조건이 활동보조서비스만은 아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주거이다. 지역사회 내에서 삶의 공간의 확보는 탈(脫)시설/반(反)시설/자립생활의 가장 중요한 선결 조건이다. 유동철(2003)의 지적처럼 지역사회 내 독립적 주거공간은 장애인의 삶의 기반으로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토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공간은 단순한 거주지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본적 토대이다. 만약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잔치’를 꿈꾼다면 이들은 항상 그들만의 의미에 친숙해 있을 것이며 다른 공간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의 현실적, 인지적 상호작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공간이란 주위와 관계 맺는 태도의 근간이 되며, 인지력과 인지방향을 구축하는 사고와 경험을 제공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시설에 대한 장애인의 욕구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지역사회 내에서 생활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에게 시설은 차선책으로서의 선택일 뿐이다. 주거공간이 확보된다면 장애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시설을 나와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만약 주거를 확보하여 시설을 나올 수 있다면 기초수급 지원액을 가지고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들을 위한 주거공간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장에 재고주택은 널려있으나 장애인이 구매와 소비가능한 주거형태가 없다.
장애인이 이동을 위한 지하철 무료승차권 확보는 비굴함의 극치이다. 당당한 소비자로서의 권리가 아닌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될 때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역사회가 그들과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값 떨어트리는 집단일 뿐이다. 자원의 전달 흐름을 바꿀 필요성이 여기서 나온다. 어차피 장애인을 대상으로 집행되는 사회적 자원이라면 그들이 직접 소비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현금형태로 지원되든, 아니면 특정 서비스나 재화에 대한 구매쿠폰 형태로 지원되든, 장애인이 서비스제공자로부터 해당 서비스를 선택적으로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체계-시설을 통하는 우회전달체계를 대체하는 자원의 직접 전달체계-가 만들어 져야 한다.
직접전달체계는 국가, 지역사회, 당사자 모두가 사는 길이다. 국가는 간접전달체계로 인한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고, 지역사회는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소비층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직접적 구매력 확보 속에 시설장애인은 시설에서 나와 보다 당당한 주체로 지역사회에 결합할 수 있으며, 재가장애인은 규율생활이 불을 보듯 뻔한 수용시설 쪽을 굳이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시설을 찾는다고 해도 구매자로서 시설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시설 측과 보다 균형 잡힌 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 주체형성과 자립생활운동에 주도적 참여
기존 시설장애인이 지역사회로 전이로서의 탈(脫)시설화 더 나아가 국가/지역사회/가족사회로부터 새로운 시설 창출 욕구를 잠재우는 반(反)시설화의 관건은 장애인 사회의 의식적 주체형성과 자립생활운동에 주도적 참여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 주체의 참여 속에서 행해지는, 변화의 필요에 대한 설득과 액션이 없는 한 사회는 능동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당사자 집단의 주체적 역사 참여와 목표지향을 강조하는, 즉 과정으로서의 탈(脫)시설화를 주장하는 유동철(2003)의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정상적인 삶은 역사적 움직임에 깊이 뛰어들 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좁은 공간에서 기본권이 주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스스로를 다수 집단의 종속물로 간주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기본권이 확대되어 온 것은 여성들이 권력집단이었던 남성들의 영역에 뛰어들어 정당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상화(또는 탈(脫)시설화)를 기본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기본권이 보장되게 만드는 현실적 역동성과 사회적 관계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서구의 경우도... 탈(脫)시설화를 위한 선결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상황에서 정상화가 시도된 것은 아니다. 가치론적. 정책적 지향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구해 나가면서 이를 위한 새로운 시각의 문제제기를 던지고 싸워 나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자립생활센터만이 장애인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결사형태는 아니지만, 현재로는 몇 가지 점에서 탈(脫)시설 더 나아가 반(反)시설의 측면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있다. 우선 탈(脫)시설과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이념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 지체장애를 위시하여 정신지체와 정신장애까지 전(全)장애영역을 포괄하는 조직적 전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시설수요와 현실적 관련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중증장애인층을 동료상담을 통해 조직화하면서 권리옹호라는 적극적 전략을 통해 자립생활을 위한 물리적 지역사회 환경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 제고와 정치적 파워 형성을 도모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시민장관은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약속하다
이전까지 시설적 전망만을 바라보던 중증장애인들이 2000년을 기점으로 반(反)시설적 전망 즉 지역사회 삶의 전망을 다지면서 자립생활운동을 강력하게 진행시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자립생활센터들이 그러한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수행센터들을 제외한 대다수 센터들이 지금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성찰적 탈(脫)시설화, 참여적 탈(脫)시설화 더 나아가 반(反)시설화 연대는 그래서,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의 삶을 선택한 중증장애인과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뭉쳐 움직이고 있는 자립생활센터의 보다 안정화된 활동을 위한 제도적 기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념적 주체형성과 그들이 지역에서 자립생활을 실천적으로 알려나갈 자립생활센터라는 진지구축이야 말로, 국가를 위시한 강고한 수용연대가 진행하는 시설화의 도도한 흐름을 탈(脫)시설/반(反)시설로 반전시킬 가장 강력한 전략이 될 것이다.
실상 장애인의 차별적 삶의 원인 해결을 뒤로 한 채 특별한 공간에 가둬 둔다는 정책의 연장선에서 비인간적인 그리고 말로 다 형용 못할 참혹한 현실이 펼쳐진다. 고프만(Goffman, Erving)이 밝히듯 군대, 감옥, 정신병원 같은 전체주의적 시설에서는 집단생활의 규칙이 발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의 탄생에서 규칙 수행자와 감시자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아무리 훌륭한 시설이라고 해도 이러한 강철 같은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대화된 군 시설, 감옥 등에서 발생하는 총기난사, 성추행, 폭력, 자살 등의 원인에는 이 규율논리가 필연적 요소로 들어간다. 장애인수용생활시설의 경우 이 힘의 논리는 더욱 강하게 관철된다. 자위력 행사의 어려움, 가족의 부재나 방임, 후견인의 부재, 군대나 감옥과 달리 기한이 없는 수용생활은 수용장애인의 삶을 극단적이고 비인간의 상황으로 몰고 갈 여지를 강하게 내포한다.
반(反)시설과 활동보조서비스의 필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반(反)시설의 외침이 흘러나온다. 지금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후 일군의 중증장애인들이 한 여름의 태양과 장맛비를 맞으며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탈(脫)시설화와 더 나아가 반(反)시설이다. 2006년 5월 26일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와 한국DPI,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반(反)시설기획단을 중심으로 ‘사랑의 기도원 사건과 향후 반(反)시설 투쟁에 관한 회의’를 가진다. 이후 5월 24일 [탈(脫)시설화 정책으로 장애인인권 보장하라!]는 공동성명서 발표한다. 이 시점에서의 참여단체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한국DPI,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한국장애인인권포럼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6월 9일 ‘반(反)시설 장애인자립생활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를 과천종합청사 앞에서 개최한다. 이 단계에서 참여단체는 더욱 늘어나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내일을여는멋진여성, 저신(低身)장애인모임,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한국사회복귀시설협회, 한국DPI, <4.20 반시설및 장애인 자립생활지원법 제정을 위한 결의대회>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반(反)시설기획단, 한국장애인인권포럼, 한국척수장애인협회 등 총 9개 단체가 결합한다. 이들 9개 단체들은 6월부터 반(反)시설과 자립생활을 기치로 매주 수요일 오후 거리집회를 가지고 있으며, 시설중심의 정부정책기조의 변화와 자립생활지원을 축으로 한 장애인복지법 개정 그리고 자립생활지원법 제정을 목표로 실천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탈(脫)시설화 더 나아가 반(反)시설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측만큼이나 탈(脫)시설화의 섣부른 적용에 비판적인 입장이 있다. 정재원(2003)은 한국 사회의 경우 탈(脫)시설화 논의의 즉자적 적용은 무리라는 입장을 전개한다. 그러한 입장의 요지는 시설수요 실재론과 준비 부족론이다. 40년을 갓 넘은 한국 사회 시설의 역사 속에서 충분한 시설의 발전은 어려웠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 우선주의에 밀려 국가의 개입이 최소한도로 이루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 시설의 공급은 그 수요를 따르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 성급한 탈(脫)시설화는 장애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강단사회복지주의적 발상이라고 정재원은 보는 것이다.
사실 시설수요는 엄존한다. 공공질서 유지라는 명분에서든 생존권 보호라는 차원에서든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와 버려지거나 방치되는 장애인들에 대한 대책을 기존의 방식, 즉 민간 수용 시설에 기대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관료사회, 중증의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것이 싫은 지역사회, 신자유주의 시대 구성원 모두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중증의 장애인 구성원을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가족사회에 의해서 시설수요는 꾸준히 발생한다. 더 나아가 가족의 학대 혹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 전화기를 붙잡고 자원봉사를 구걸해야 하는 비참함에 지쳐버린 중증장애인 당사자에 의해 시설은 희구된다. 결국 여러 수준의 사회와 당사자들에 의해 선택된 시설이라는 실체는 무시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그들의 선택을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사회의 절박한 요구 내지는 시장의 수요에 맞춰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해 나가는 시설장들의 실천을 우리는 쉽사리 비난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는 당사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들과 더불어 차선의 선택, 수용시설이 아닌 다른 선택지(地)를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즉 시설을 때리는 네거티브 전략만이 아닌 시설수요 차단과 대안 제시형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림 <과천 정부종합청사앞 집회모습> - 생략
시설수요는 결국 중증의 장애인과 더불어 움직일 수 있는 지역사회 내 인적자원의 결핍에서 일차적으로 비롯된다. 유연노동구조 하에서 가족구성원도 그들과 함께 하기 힘들고, 미미한 수의 자원봉사자 인력으로도 그 일은 수행하기 어렵다. 결국 어느 정도 일자리 성격을 갖는 유급활동보조서비스제도만이 장애인의 일상생활보조 필요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활동보조서비스(Personal Assistance Service) 부분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어 돌아간다면 일단 가정과 사회로부터의 시설수요는 상당정도 줄어들 것이다.
지역사회내 생활 공간의 필요
그런데 장애인 탈(脫)시설화의 조건이 활동보조서비스만은 아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주거이다. 지역사회 내에서 삶의 공간의 확보는 탈(脫)시설/반(反)시설/자립생활의 가장 중요한 선결 조건이다. 유동철(2003)의 지적처럼 지역사회 내 독립적 주거공간은 장애인의 삶의 기반으로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토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공간은 단순한 거주지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본적 토대이다. 만약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만의 잔치’를 꿈꾼다면 이들은 항상 그들만의 의미에 친숙해 있을 것이며 다른 공간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의 현실적, 인지적 상호작용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공간이란 주위와 관계 맺는 태도의 근간이 되며, 인지력과 인지방향을 구축하는 사고와 경험을 제공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시설에 대한 장애인의 욕구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지역사회 내에서 생활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에게 시설은 차선책으로서의 선택일 뿐이다. 주거공간이 확보된다면 장애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시설을 나와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만약 주거를 확보하여 시설을 나올 수 있다면 기초수급 지원액을 가지고도 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들을 위한 주거공간이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시장에 재고주택은 널려있으나 장애인이 구매와 소비가능한 주거형태가 없다.
장애인이 이동을 위한 지하철 무료승차권 확보는 비굴함의 극치이다. 당당한 소비자로서의 권리가 아닌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될 때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역사회가 그들과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값 떨어트리는 집단일 뿐이다. 자원의 전달 흐름을 바꿀 필요성이 여기서 나온다. 어차피 장애인을 대상으로 집행되는 사회적 자원이라면 그들이 직접 소비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현금형태로 지원되든, 아니면 특정 서비스나 재화에 대한 구매쿠폰 형태로 지원되든, 장애인이 서비스제공자로부터 해당 서비스를 선택적으로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체계-시설을 통하는 우회전달체계를 대체하는 자원의 직접 전달체계-가 만들어 져야 한다.
직접전달체계는 국가, 지역사회, 당사자 모두가 사는 길이다. 국가는 간접전달체계로 인한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고, 지역사회는 장애인이라는 새로운 소비층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직접적 구매력 확보 속에 시설장애인은 시설에서 나와 보다 당당한 주체로 지역사회에 결합할 수 있으며, 재가장애인은 규율생활이 불을 보듯 뻔한 수용시설 쪽을 굳이 바라볼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시설을 찾는다고 해도 구매자로서 시설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시설 측과 보다 균형 잡힌 힘 관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 주체형성과 자립생활운동에 주도적 참여
기존 시설장애인이 지역사회로 전이로서의 탈(脫)시설화 더 나아가 국가/지역사회/가족사회로부터 새로운 시설 창출 욕구를 잠재우는 반(反)시설화의 관건은 장애인 사회의 의식적 주체형성과 자립생활운동에 주도적 참여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 주체의 참여 속에서 행해지는, 변화의 필요에 대한 설득과 액션이 없는 한 사회는 능동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당사자 집단의 주체적 역사 참여와 목표지향을 강조하는, 즉 과정으로서의 탈(脫)시설화를 주장하는 유동철(2003)의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정상적인 삶은 역사적 움직임에 깊이 뛰어들 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좁은 공간에서 기본권이 주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스스로를 다수 집단의 종속물로 간주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기본권이 확대되어 온 것은 여성들이 권력집단이었던 남성들의 영역에 뛰어들어 정당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정상화(또는 탈(脫)시설화)를 기본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기본권이 보장되게 만드는 현실적 역동성과 사회적 관계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서구의 경우도... 탈(脫)시설화를 위한 선결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상황에서 정상화가 시도된 것은 아니다. 가치론적. 정책적 지향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구해 나가면서 이를 위한 새로운 시각의 문제제기를 던지고 싸워 나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자립생활센터만이 장애인당사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결사형태는 아니지만, 현재로는 몇 가지 점에서 탈(脫)시설 더 나아가 반(反)시설의 측면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있다. 우선 탈(脫)시설과 지역사회 자립생활을 이념적으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 지체장애를 위시하여 정신지체와 정신장애까지 전(全)장애영역을 포괄하는 조직적 전망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 시설수요와 현실적 관련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중증장애인층을 동료상담을 통해 조직화하면서 권리옹호라는 적극적 전략을 통해 자립생활을 위한 물리적 지역사회 환경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는 점,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 제고와 정치적 파워 형성을 도모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시민장관은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약속하다
이전까지 시설적 전망만을 바라보던 중증장애인들이 2000년을 기점으로 반(反)시설적 전망 즉 지역사회 삶의 전망을 다지면서 자립생활운동을 강력하게 진행시켜나가고 있다. 그리고 자립생활센터들이 그러한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수행센터들을 제외한 대다수 센터들이 지금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성찰적 탈(脫)시설화, 참여적 탈(脫)시설화 더 나아가 반(反)시설화 연대는 그래서,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의 삶을 선택한 중증장애인과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뭉쳐 움직이고 있는 자립생활센터의 보다 안정화된 활동을 위한 제도적 기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념적 주체형성과 그들이 지역에서 자립생활을 실천적으로 알려나갈 자립생활센터라는 진지구축이야 말로, 국가를 위시한 강고한 수용연대가 진행하는 시설화의 도도한 흐름을 탈(脫)시설/반(反)시설로 반전시킬 가장 강력한 전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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